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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손호철-임종인-김민웅의 '길'
[진보 논쟁] '같으면서 다른' 조희연-손호철-임종인-김민웅의 진보전략
 
김영국
지난 21일 민주노동당이 주최한  <민주진보진영의 2007년 대선전략- 위기의 진보진영, 대반전 가능한가>란 주제의 토론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토론회는 민주노동당이 마련했지만, 참석자들의 면면은 최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범진보진영 내 각 단체의 대표인사와 쟁쟁한 이론가들이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보.개혁세력의 위기 진단과 대응방안 및 2007년 대선 전략을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한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오늘날 한국사회 '진보의 기준'으로 '반(反)신자유주의'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반신자유주의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진보진영의 최대 현안인 '한미FTA 반대'가 으뜸이었고, 비정규직 문제, 공기업의 역할과 개혁의 문제 등이 거론됐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가했던 토론자들의 토론문은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고, 현장 토론 내용도 인터넷 생중계를 실시한 오마이뉴스 기사에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그러나 토론문 자료집에 빠져 있거나, 3시간 30분짜리 동영상을 보기에 버거운 분들을 감안해 이날 토론 참가자 중에서 진보진영의 나아갈 방향과 관련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4인의 발언 내용'을 특별히 '기고문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이들의 주장에는 각기 나름대로 특색이 있다.

가급적 토론자의 발언 내용을 충실하게 담았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대목은 의미전달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요약처리했다. 다른 토론자의 발언 내용은 민주노동당 토론회 자료집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필자 註>


헤게모니 정치와 진보적 민중주의-차베스에게 배우자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최근 일련의 진보진영 위기 논쟁을 통해서 민주진영, 진보진영이 깊은 패배주의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위기를 올바로 성찰하고, 자기혁신을 하는 게 중요하다. 단순히 '위기의 타자화' 즉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실패 문제, 열린우리당 속성의 문제로 환원해서만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 참여정부 5년의 거대한 실패(위기)는 민주정부 10년, 민주화 20년에 내재한 문제로 바라봐야 훨씬 더 폭넓은 교훈을 얻는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해도 참여정부가 직면하는 위기 요인의 50%는 똑같이 직면할 것이다.

참여정부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현존하는 개혁의 '제한 요인'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넘어설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커다란 체제적 제약 조건(왜곡 요인)이 있고, 우리 사회의 보수적 저항(보수언론, 사회적 저항 세력)도 굉장히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참여정부의 '통치조치'의 문제다. 즉 열린우리당 구성원의 이질성, 비개혁성, 계급적 한계 문제, 스타일상 문제(헤게모니 정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원숙하지 못한 행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정책적 응전이라는 문제의식 결여 등이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가 진보진영 내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반신자유주의'가 대단히 중요하고 그 중심성을 인정하지만, '반신자유주의를 가지고 모이자.'고 한다면 반신자유주의와 친신자유주의의 내용이 뭐냐가 문제다. 그 개념은 동의할 순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 수준으로 가져가보면, 즉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문제 등에서 반신자유주의적인 게 뭐냐를 따져보면 많은 지점에서 '진보의 공백'이 있다. 바로 그 지점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비판 받을 각오를 하고 제기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헤게모니 정치에 대한 고민을 해보자. 우리가 보기에 불철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예컨데 군사작전권 환수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가 설득하고 포용하면서 획득할려고 하는 '헤게모니 정치'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에 대립하는 헤게모니 정치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한다.

두번째는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차베스(베네수엘라 대통령)에서 한번 배워보자. 즉 '진보적 민중주의'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박정희도 사실은 '우익 민중주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한다. 새마을 운동이 그렇고 개발전략이 그랬다.

즉, 진보적 민중주의는 제도권의 저항을 뚫고 대중에게 호소해서 대중과 결합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구체적인 경제적 혜택도 주는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중들이 이반한 핵심은 대중들이 참여정부 하에서 하나도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 정말 대중적 호소를 할 수 있는 정책과 혜택을 과연 주었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위기는 민주정부 10년, 민주화 20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복합적인 '전환적 위기'다. 오랜 독재의 시대에서 20여 년간의 민주화의 시대로 경유하여 현재 '포스트 민주화' 시대로 이행하는 전환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전환적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정부 10년을 통해서 혹은 민주화 20년을 통해서 민주성과 투명성은 획기적으로 제고되었지만, 더욱 '험악한 계급사회'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즉 '민주적이고 투명한 신계급사회'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는 우리도 전혀 예상을 못했다. 누구는 다 예상했나. 나도 진보적 학자로서 이렇게 될거라고 예상을 못했다. 이게 이제 민주진보세력에게 새로운 도전인 것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은 대응전략에 공백이 있는 거고 그래서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

따라서 대안적 실천의 핵심적 과제는 한나라당이 대표하는 신보수주의적 비전에 대항하여 참여정부의 실패를 넘어서서 진보세력에 대한 신뢰를 재획득하는 새로운 비전을 안출하고 그것을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 핵심은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 수 있는 비전과 대안'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대중화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민주정부의 실패 위에서 구체화(창출)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과제를 최장집 교수 식으로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민주화'이고 나의 식으로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사회화'이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그것에 의한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왜곡에 대한 진보적 응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노당과 같은 진보정치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민노당은 적당하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민노당 등 진보정치세력들은 '급진적인 의제화 전략'을 써야 한다. 대선 국면에 대한 급진적 개입 전략, 급진적 의제화 전략, 정책의제 지평의 급진적 확장 전략이 필요하다.

민노당에는 이른바 쉐보르스키의 딜레마, '노동자계급과 민중세력을 획득할 것인가.'하는 선거전략적 과제와 '중간층을 획득할 것인가.'하는 선거전략적 과제가 언제나 충돌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나는 현 단계는 후자가 중심이 아니며, 전자가 중심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계를 넘어서는 '제2의 6월 항쟁'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6월 항쟁 속에서는 '개방과 세계화'라는 것에 대한 진보적 응답이 내재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민노당적 실천과 고민, 각 계의 풀뿌리 실천 과정에서 일정하게 나와 있는 상태이다. 정당은 그걸 국가운영의 프로젝트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은 섣부른 연합보다 각자 경쟁할 때

대선국면을 보는 시각에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큰틀에서 보면 반신자유주의가 갖는 중요성과 민노당의 강화를 기본으로 넣고, 세부적으로 일정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

진보-중도-보수의 정치지형에서 진보가 중도세력(중간세력·자유주의세력)을 획득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직운동과 대중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대중의 획득'이라는 것은 대단히 복합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단순히 '반신자유주의 깃발 들고 모여라.'고 해서 대중들이 모이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세력의 변화과정 및 자기혁신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대중화되려면 중도자유주의세력은 물론 사회 각 세력이 신보수주의적 방향으로 경도되지 않고 반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실제 87년 6월 항쟁도 반독재라는 의제에 다양한 세력들(심지어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사람들까지)이 합류하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이 반독재.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장했던 조직운동과 대중을 급격하게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과 대중의 결합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렇다.

대중의 눈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게 무슨 바이러스나 괴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갈려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 성장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등등 그렇게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

지금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대중을, 중도세력을 어떻게 획득해낼 것이냐- 중도세력을 좌경화할 것이냐 -하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면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 계급적 세력, 민중운동, 계급운동 등 진보세력이 민주개혁 시대의 시민사회세력보다 중도세력을 획득할 수 있는 좋은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못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개혁을 주도했던 '중도자유주의세력'이 몰락, 분열하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민노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이 자기 세상이 왔으니까 선도하고,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주도하면서 중도세력을 반신자유주의로 견인하고, 대중들에게 진보세력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설득하면서 정치적 각성을 촉발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중들이 나중에 자연스럽게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강남사람들은 계급의식이 많은데, 강북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는 게 문제다. 강북사람들이 계급의식을 갖도록 만들어가야 하고 대선이라는 공간은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다.

대선 국면에서 너무 섣부른 연합전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연합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지금은 범진보 진영의 각 세력이 각자 대안적 비전을 만들고 대중화하는 노력들을 경쟁적으로 해야 한다. 연합은 나중에 하면 된다.

현재 열린우리당, 미래구상을 포함해서 '중도세력들'(지금종 미래구상 사무총장은 중도세력 규정에 이의 제기)은 굉장히 어려운 조건에 있다. 이들이 대중의 신뢰를 재획득하는 상황이 안 올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한나라당이냐 민노당이냐 하는 선택을 진보적 대중에게 강요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본다.

그러나 중도세력이 성찰적 자기혁신을 통해서 신보수주의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국민들에게 다시 신뢰를 획득할 수 있다면,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하면서 민노당도 200만 표를 획득하는 최고의 결과를 한번 기대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안 올 가능성도 농후하다. 중도세력이 성찰적 자기혁신을 통해서 대중을 획득하기가 참여정부의 신뢰 상실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대선의 주된 전선과 진보진영 단결 기준은 '반신자유주의'

손호철(서강대 교수)

'87년 체제', '진보개혁세력'이란 말 쓰지 말아야

최소한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이제는 '87년 체제'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87년 체제란 말이 바로 민주-반민주 구도 속에서 한국정치를 보고자 하는 망상의 유죄다.

우리나라는 '61년 체제'인 박정희 정권에 의한 억압적 정치 체제와 국가주도형 산업화(개발주의) 체제란 두 축이 지배해왔다. '87년 체제'는 바로 61년 체제의 정치적 억압 체제를 해체한 것이다. 그런데 87년 체제는 '97년 체제'에 의해서 완전히 교체되었다. 지금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는 건 87년 때문이 아니라, 97년 체제 즉 IMF 신자유주의 체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87년 체제를 이야기하면서 왜 97년 체제 즉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자꾸 은폐시켜주나. 그건 87년 체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타협된 민주화에 따른 민주-반민주 구도 복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꾸 87년 체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헌정체제로서 87년 체제의 문제(대통령 단임제 등)가 일부 남아 있긴 하지만, 87년 체제는 이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된다. 최소한 담론에 있어서만이라도.

진보가 뭐냐.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4가지 방식이 있다고 본다.

1. 변화에 대한 찬성 여부- 이 기준만 적용하면 이념적 내용을 보여주지 못한다, 2. 정도의 차이- 이 기준만 적용하면 무솔리니가 히틀러보다 진보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내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3. '시장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지금 정세로 본다면 바로 신자유주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4. 해체주의 방식- 모든 어젠다를 해체해서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여성운동 쪽에서 여성후보 박근혜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이다.

3,4번이 결합된 형태가 진보를 이야기하는 데 가장 옳은 방식이다. 이처럼 진보, 보수는 이분법의 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중요한 것은 '보수(한나라당)-중도(자유주의세력 또는 개혁적 보수인 열린우리당)-진보(민주노동당)' 이 세 개의 정치세력 간에 '두 개의 전선'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정치면에서만 보면 민주-반민주 구도 속에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등에서 한나라당 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으로 분리되지만,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보면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노무현 정부, 조중동, 재벌'이 모두 한편에 서 있다.

그런데 주된 전선은 '신자유주의 전선'이다. 결국 '진보개혁세력'이란 말을 쓰면 안된다. 진보개혁세력이란 말 자체가 이미 반수구 전선 즉 민주-반민주 구도 속에서 보고 있는 말이다.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은 전혀 다른 세력이다. 물론 시민운동 수준에서는 진보개혁세력이란 표현이 가능하지만(예 : 한미FTA 반대 공대위), '정치 사회'에 관한 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세력과 반신자유주의인 진보세력이 하나로 갈 수 있는가. 그런데 자꾸 진보개혁세력이란 말로 진보세력과 개혁세력이 하나라고 보는 것 자체가 바로 민주-반민주 구도라는 '과거의 틀'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확히 이야기했듯이 대연정 제안하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차이가 뭐가 있느냐.'고 한 것처럼 이들이 '신자유주의 대연합 세력'인데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이 하나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반쪽에 불과하다. 반수구 전선의 측면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이란 표현을 쓰면 안된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개혁(4대 개혁입법 등)은 무능하고, 신자유주의 개혁(비정규직 법안, 한미FTA 추진 등)은 너무 유능'해서 탈이다. 국민이 국회 의석까지 과반수 이상을 주었는데 (사회경제적 개혁은 고사하고) 민주개혁조차 못했다는 건 무능이다. 반면 신자유주의 개혁인 비정규법안 통과와 한미FTA 추진은 너무 강력하고 유능하게 추진했다.

민주주의의 퇴보, 파시즘에 대한 우려 등은 단순히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양극화를 막지 못하는 데 있다. 이 문제를 풀어주지 않는 한, 대중들은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민주주의이고, 국보법 폐지고, 과거사 청산을 이야기하느냐고 할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비극은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연유하는데도 국민들은 민주노동당 같은 반신자유의 세력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또다른 신자유주의 세력인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민주노동당에도 책임이 있다. 그만큼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노동당의 비밀당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민주노동당이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줬다. 사회적 양극화 확대시켜 주었지, 부동산 가격 폭등시켜서 서민들 삶 어렵게 만들어 줬다. 자유주의 세력으로는 안 된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이 한 게 없다. 오히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반값 아파트란 의제 제기로 히트쳤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울산 동구와 북구를 보라. 민주노동당이 울산에서 집권 여당으로서 얼마나 다른 지역과 지방자치단체에 비해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별로 못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지는 거다.

진보진영 단결의 기준

이번 대선의 목표는 3가지다. 1. 진보진영의 도약, 2. 자유주의 세력(열린우리당)의 탈신자유의화(좌경화), 3. 한나라당 집권 저지다. 이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된다.

진보진영 단결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신자유주의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라고 본다. 임종인 의원 같은 반신자유의 세력은 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열린우리당, 통합신당은 더욱 우경화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우측으로 통합만이 아니라 '좌측으로 통합'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민노당은 진보진영의 '21세기 DJ'다. 작금 민노당을 놓고 진보진영에선 마치 87년 대선 때처럼 비판적 지지, 민노당은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 독자론, 범진보 후보 단일화의 대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이 기득권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된다는 입장 등으로 나뉘고 있다. 나의 입장은 후보단일화론에 가깝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노동당이 북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평화와 인권, 반핵이 보수냉전세력의 담론이 돼버렸다. 이게 바로 북한 문제 때문이다. 이걸 다시 선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민주노동당보다 더 좌측에 있는 많은 세력들도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대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진보진영이 대항해 싸울 주된 전선은 자유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세력과 냉전적인 신자유주의 세력, 즉 범여권(열린우리당.민주당)과 한나라당 세력이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자유주의 세력 중에서 탈신자유주의 세력이 있다면 함께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등 냉전의 문제는 현재 주된 전선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선 안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반신자유주의가 큰 키워드인데 그걸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으로 만들어서 대선에서 싸우겠는가가 중요하다.

범진보 진영이 경선을 하자는 건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범위가 문제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배제해야 되는 것이고, 반신자유주의 세력 내에서 후보 경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반신자유주의의 구체적인 기준은 뭔가. 당장 현안으로 나와 있는 구체적인 사안은 '한미FTA 반대'다.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이다. 또 비정규직 문제, 노동의 유연화에 대한 문제, 공기업의 역할과 개혁에 대한 문제 등 복합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진보진영 집권 후 대안적 고민들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브라질 '룰라'식으로 정책(IMF 고금리 수용)을 펼 바엔 차라리 집권 안하는 게 낫다.


 
지지할 정당이 없는 '75% 국민'에게 선택지를- 새로운 정당 건설 필요

임종인(국회의원·무소속)

내가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표는 중산층과 서민들로부터 받았는데, 정책은 특권층과 재벌을 위해서 해왔다. 그래서 현재 한나라당과 비슷한 정당이 돼버렸기 때문에 내가 그 정당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정당은 해체되어야 한다. 왜냐면 작게는 지지층을 배신했고, 크게는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에 이 정당은 없어져야 된다.

그래서 내가 주사바늘로 축구공의 바람을 빼는 심정으로 가장 먼저 탈당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는데 그 사람들과도 나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지금은 혼자 '순수 무소속'으로 다니고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이유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외교안보적으로 "반미면 어떠냐.", "미국에 안 가본 사람이라고 대통령 되지 말란 법 있느냐."라고 해서 자주적인 태도를 취한 것과 사회경제적으로는 "한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해주겠다."고 해서 당선되었다.

그랬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실용주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노선을 정한 이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추진한 정책은 지지층을 배신하고 보수층과 특권층을 대변하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한나라당과 대연정 제안이었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차이가 없다.'며 제안하고 열린우리당이 추인한, 대연정 제안으로 인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지층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지지했는데 '차이가 없다'고 자인하고 나선 순간 더이상 지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실질적으로 현재 노무현 정권과 한나라당은 정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대연정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처럼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하던 사람을 어떻게 '유연한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 정권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뚫고 1200만 명의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 지지자들을 조직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는 형식적 민주화 세력이다.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해서 철저하게 보수층의 이익을 대변한 세력이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 교수의 진단에 동의한다.

노 정권이 '포위된 개혁'이었다는 손혁재 성공회대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권(권력)을 잡았으면 주체적으로 해결해야지 외부 조건이 어려우니까 안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개헌 문제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5년 단임제도 괜찮은 제도다. 4년 연임제가 더 낫다는 증거가 없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잘 못 운영한 것을 탓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개방형 경선제 도입' 방침에 대해서 왜 그럴까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오픈프라이머리는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정당의 후보가 되어야만이 누가 뽑았는가를 알 수 있고 그 정당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인데, 왜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다른 보수정당과 똑같이 가려고 하는가. 일본이나 유럽에서 이념정당이나 진보정당에서 정체도 없는 사람들이 와서 투표하는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데가 있는가. 의아스럽다.

민노당은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 투쟁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과도기적 민주화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두 정권에서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실질적으로 좋아지지 않았다. 노 정권에서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잘못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엄중한 정도를 넘어서 매우 가혹할 것이라고 본다. 5.31 지방선거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노 정권에 대한 심판 기조가 대선과 내년 총선에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치판이 확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민주당의 정책과 실제 행동을 보면 '한나라당 호남지부'나 마찬가지다. 이런 정당과 한나라당과 비슷하게 간 열린우리당이 정개개편해서 통합해봤자 국민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통합신당이 나타나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은 계속해서 똑같은 형태로 있을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나뉘어서 다른 세력을 포괄할 용의는 없는가. 현재 지지할 정당이 없는 '75%의 국민'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투표를 하지 않는 50%의 국민들은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모두 자신들의 삶의 질 개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분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50% 즉 서민이라고 생각한다. 투표하고 있는 사람(50%) 중에서도 50%가 지지할 정당이 없다. 특히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비슷하게 됨으로써 더욱 그렇다.

결국 도합 '75%의 국민'들이 현재 지지할 정당이 없다. 이분들에게 선택지를 줘야 한다. 우리 정당을 선택하면 당신들의 삶을 우리와 함께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이 부분을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75%에 이르는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위력적인 한나라당과 싸움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반한나라당이니까 무조건 표 달라.'는 건 우리 국민들이 절대 허용치 않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손으로 정치세력을 확 바꿔줄 것이다. 진보진영 모두가 발상의 큰 전환이 필요하다.


 
진보진영 '담론의 방식'과 '정치지도자(인물)' 고민해야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진보진영이 정세 분석과 세력 결집에 대한 논의와 전략을 세운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에 두 가지 정도의 고민을 추가했으면 좋겠다. 바로 '담론의 방식'과 '정치지도자 또는 인물'. 이 두 가지 문제이다.

진보진영이 결국은 대중들과 얼만큼 깊게 결합해서 역사적 주도권을 계속 행사하고 실현해나갈 것인가가 중요한데, 여기서 가장 큰 관건은 정책, 전략 이 모든 게 대중들이 받아들여서 결합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관철되는 것이다.

여기엔 이런 문제가 있다. 혹시 진보진영이 대중들과 결합해나갈 때 우리들의 언어나 소통방식이 너무나 어려웠던 것은 아닌가. 정말 대중들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불철저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들끼리의 소통방식에만 주력했던 것은 아닌가.

따라서 인간의 본질, 문화의 문제 등 담론의 방식(어법)에 있어서 대중들의 가슴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들의 영혼을 얻지 못하면 끝나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이 과거에 익숙해왔던 방식에서 철저하게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롭게 뭔가를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청계천 하나라는 아주 쉬운 담론을 가지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그걸 대체할 만큼의 대중적 담론을 우리는 얼마나 갖고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상현 민주노동당 기관지위원장이 스스로 지적한, 민주노동당의 '7대 금기' 사항도 당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성취나 가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생각하는 일정한 배타성에 대한 고민을 철저하게 해내지 못하면 과연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대중들과 결합할 수 있을까. 한번쯤은 민노당의 금기 사항을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7대 금기'란 성장론 자체를 거부하는 '성장의 금기',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의 금기', 이북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북의 금기', 국회의원들에 대한 비판이 쉽지 않은 '국회의 금기', 지역 권력을 송두리째 내어주고도 평가 한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울산의 금기', 영원불멸의 위용을 자랑하는 '당명의 금기', 무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쉬쉬하고 있는 '정파의 금기' 등 많은 금기 사항들이 민주노동당에 아직도 온존하고 있으면서 이를 깨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을 말한다.

담론의 문제와 함께 '인물'의 문제가 있다.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놓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이 어떤 사람을 어떤 식으로 길러내고 내보내고 배출하고 육성시켜나갈 수 있는 전략을 정말 갖고 있는가. 지금 당장 선거를 치렀을 때 내놓을 수 있는 인적자원을 대중적으로 얼만큼 매력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사실 모든 논의를 다 끝내고 나서 '방울을 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인물을 도처에서 찾아내서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일들을 해내지 못하면 어떤 연합, 어떤 정파적 세력의 결집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또 중도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그 처분을 기다려야 되는 그런 꼴을 또 맞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건 과거에 노무현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파격적으로 우리에게 진보적 기대를 주었지만 결국 역사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채 오늘날과 같은 현실을 맞이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서 내보낼 수 있는, 정말 대중적으로 매력적인 인물들을 얼만큼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을 함께 해내지 못하면 진보진영이 대중들과 깊게 결합하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타파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 민주진보진영의 2007년 대선전략(민주노동당 주최) '토톤회 자료집(토론문)' 보기

☞ 토론회 생중계 '동영상' 보기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관련기사
진보논쟁 유감, 명품진보와 짝퉁진보 가려라
"위기의 진보진영, 진보대연합으로 결집해야"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2/24 [13:04]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2.24)


:
Posted by 엥란트


최악의 참패, '87년 체제'의 '비극적 종말'을 보며
[제언] '청와대 하숙생 정권'의 비애, '유능한 진보' 상과 주체형성 절실
 
김영국
아마도 2006년 5월 지방선거 대참패는 개혁.진보세력에겐 하나의 획을 긋는 상징적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반독재 민주화, 87년으로 상징되는 운동권 세력이란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집합체가 해체되고, 비극적 종말을 고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2006년 5월을 계기로 '87년 체제'가 명을 다하고, 개혁.진보진영에 새로운 기운이 싹틀 수 있는 새벽 어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에 몰려있던 민주화, 운동권 세력들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선거에서 참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누적돼온 반독재.민주화, 87년 체제의 종말이라는 보다 본질적 문제가 녹아있다.

단순히 보수.수구세력에게 참패한 정치세력으로서 개혁.진보진영이 아닌 중대한 '전환의 계곡'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이 사태를 몰고온 가장 큰 책임이 노무현과 친노세력, 열린우리당의 무능과 무소신이란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더이상 존재의 의미조차 없어진 이들에게 비난과 원망으로 소일하는 것 역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다. 더군다나 미친(美親)듯이 미국과 보수를 향해 무소의 뿔처럼 달려가고 있는 노 대통령과 이광재 라인(의정연구센터) 같은 친노핵심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 된 지 오래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시민단체, 대학 등에 몰려있는 민주화, 운동권 세력들은 정치적 인권 신장, 민주주의 절차 등 형식적 민주화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민중의 또 하나 간절한 염원인 '삶의 질의 평등한 향상'은 '사상 최대 양극화'라는 국가적 이슈가 말해주듯 철저히 반대 방향으로 몰아갔다. '양극화를 만드는 독약'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영문도 모른 채 맹신한 결과다. 그렇다고 정치적(절차적) 민주화도 만족할 만큼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마저 도로아미타불 돼가는 느낌이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일부 진보단체는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분명하고도 다른 목소리를 냈지만, 정책적으로 다이나믹하게 뒷받침할만한 역량과 호소력 있는 대국민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세련됨을 갖추지 못해 '반대를 위한 반대자'라는 누명만 덮어쓰고 있다.

거기에 당내 기풍 또한 운동권 동창회처럼 '끼리끼리 놀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칙칙함으로 보다 많은 잠재적 진보 대중을 끌어안지도 못했다. 어디 그 뿐인가. 시대에 뒤떨어진 친북주사파와 평등파의 대립은 보수.수구 집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계파성을 보여주며 민주노동당의 내실을 키우는데 큰 장애가 되고있다. 이 또한 운동권 동창회의 태생적 불치병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개혁적 시민단체들은 본분을 망각하고 정권의 서포터즈로 전락하거나, 개혁이라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책적 아둔함으로 외국투기자본의 서포터즈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던 대학은 또 어떤가. 비운동권을 표방하며 조중동의 영웅이 돼 우쭐해하던 서울대 총학생회의 도박업체 기부금 수수 논란 등 숱한 비리 관련 보도에서 보듯, 보수화돼가는 상아탑에서 너무도 일찍 '동네 유지'가 돼버린 젊은 지성인들의 기특함을 보라. 정말 변해도 더럽게 변해버렸다.

결국 반독재.민주화, 87년 운동권 세력은 민중의 염원을 담아 정권까지 담당했지만 자신들만의 경제정책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가꾸는 데는 너무도 무관심했고, 오늘날 '무능과 무지'라는 민중의 철퇴를 맞고 있다.

평등한 삶의 질 향상 요구를 무참히 짓밟아버린 개혁.진보세력이란 더이상 서민대중의 편이 아니었다. 쓸어버려야 할 무능한 세력이었을 뿐.

당장 한미FTA처럼 대한민국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정도로 거대한 경제정책적 이슈에 대한 개혁.진보진영의 무기력한 대응은 그 바닥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몇몇 관료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래를 세계 최강대국과 몰래 진행하고 있는데도 아예 무관심하거나, '잘 모르고 어려워서' 뭘 해야 될지 감도 못잡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개혁.진보적 정치인과 언론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 등 보수.수구세력이 유능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이미 IMF로 나라를 거덜 낸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묻지마 지지'로 사상 최대의 압승을 안겨 주었다.

좋게 말하면 개혁.진보 세력에 퍼준 믿음이 그만큼 컷고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기대가 크면 증오도 깊은 법. 2006년 5월은 그 믿음에 대한 배신감과 울분을 총체적으로 응징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투표를 했든, 거부했든, 무관심했든간에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응징하지 않고선 화병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그런 무능한 개혁.진보세력에게 본때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좋은 '망나니'였다.

사실 한나라당 욕할 것도 없다. 중대한 고비마다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걷어찬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비해 '발목잡기', '차떼기당'이란 소리 듣더라도 이 악물고 늘어져 자신들의 지지층에게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고 지켜온 '집념의 승리'일 뿐이다.

나를 배신한 자가 그들의 원수지간인 상대에게 처절하게 박살나는 모습을 보면서 개혁.진보세력 지지자들은 측은지심보다 차라리 후련함을 느꼈을 지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나이브함에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결국 배신자와 그들을 순진하게 믿은 자기 자신 모두를 응징한 셈이다.

그동안 반독재.민주화 투쟁, 운동권 경력을 발판으로 이를 정치적 보상삼아 입신양명할 수 있었던 개혁.진보세력의 정치꾼들에게 2006년은 '그야말로 종말'를 고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더이상 공부하지 않고 머리띠만 두른 '투사 민주주의 시대'는 끝났다. 목표가 정확하지 않는 돌맹이는 부메랑이 되어 결국 자기 발등 찍기 마련이다.

경제적 이슈가 어렵다고 내팽개친 결과 경제정책은 기존 관료에게 몽땅 맡겨놓고, 개혁.진보세력은 집권을 했음에도 자신들만의 경제상을 제대로 세우지도,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관료들의 관성대로 '대책없는 신자유주의 경제'로 쭉 흘러와버린 것이다. 결과는 엄청난 양극화로 이어졌고 서민대중은 분노와 함께 '바꿔봐야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지독한 냉소에 빠져들었다.

오로지 민주화 운동때 익힌 정치적 이슈들만 가지고 보수.수구세력과 입씨름하고 지지고 볶다, 안되면 머리띠 두르고 목청 높이면서 울궈먹던 시대가 이제야 말로 비참한 말로를 보고 있다.


공부하지 않는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이헌재, 한덕수에 대항할만한 '진보적 경제전문가'들을 개혁.진보진영의 새 인물로 적극 발굴하고 키워내야 할 때다. 단순한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대중적 힘이 뒷받침 되는 경제정치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김대중, 노무현 정권처럼 정권은 잡았으되 곳간 열쇠와 부엌살림은 계속 한나라당 집사에게 맡기는 '청와대 하숙생' 신세 못벗어난다. 당연히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은 백년 가는 국민사기극이 될 뿐이다.

정권교체 후 민주정부가 10년 가까이 국가를 담당했음에도 개혁.진보진영하면 떠오르는 남덕우, 신현확, 이헌재, 한덕수 같은 사람이 없다는 건 뭐라 변명해도 무능과 무관심의 산물이다.

이들에게 “불균형 성장전략에 입각한 경제개발 계획과 압축성장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낳고, 신자유주의 정책과 적극적 개방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양극화를 심화시킨 장본인들”이라는 비판은 백번 옳다. 문제는 “그럼 당신들에겐 (그들을 대신할만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의문에 전혀 답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개혁.진보진영의 경제 논박은 한때 잘나간 사람들에 대한 시기이고 대학생 수준의 불평불만분자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바꿔 말하면 더이상 정동영, 유시민, 김근태, 강금실, 한화갑 따위가 민주화 운동 경력 팔고, 이미지 덧칠해 개혁.진보세력의 기둥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2002년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은 두번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되는 악몽의 피날레여야 한다. 말아먹을 만큼 말아먹었고, 더이상 그런 식이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제 진보야말로 이미지가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할 때, 공부해야 할 때, 평생교육을 몸에 익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 식견과 안목을 높이는 노력없이 단순히 '참여해서 바꾸자'는 구호는 정치자영업자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기꺼이 먹잇감이 되어주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내용없는 구호뿐인 '민주개혁세력 대연합', '보수.수구 Vs 개혁.진보'란 틀로 ‘미워도 다시 한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떠나간 사람들이 귀라도 기울여 줄까. 또다시 자신들의 무능을 가리고 무책임하고도 뻔뻔스럽게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는 국민 기만극은 아닐까.

이번 지방선거는 그런 것들조차 '낡아빠진 유령'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 식상한 틀로 예전의 개혁진보세력을 재건하자는 구호는 더이상 쓸모 없을 뿐 더러, 설사 어느 정도 세력 규합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재판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말 미련하고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뼈저리게 경함한 과거를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개혁.진보진영에게 이번 선거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진정으로 유능한 진보', '비전있는 진보',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진보'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인 상과 흐름으로써 보여줘야 하며, 그걸 일관되게 수행할 '새로운 정치 주체'를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상황이 아닐까.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노당의 현 주도세력들이 더이상 설치지 않는 새로운 정치 주체 말이다.

지금은 '그게 가능할까'를 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는 상황 같고, 그걸 만들어 내는 것도 능력이요 그렇지 못한다해도 현 개혁.진보진영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이제는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깨끗하게 사라져 주는 게 최고의 개혁이자 진보다. ‘당신들 이름만 들어도 부화가 치민다’는 민중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할것 같다. 그것이 그나마 민주화 운동을 가슴 한켠에 담고 사는 민주화 세대들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는 길이다.

자신들마저 사라지면 누가 있어 개혁.진보의 불씨를 살려내겠느냐는 염치없는 걱정은 사기도박단이 붙잡혀 가면서 '하우스' 전기 끊길까 걱정하는 격이다.

'다음 대선은 어쩌나'는 질문이 급한 게 아니다. 그건 미련이 많은 개혁장사꾼들에게만 필요할 뿐. 어떻게 다시 서민대중에게 믿음과 희망이 되어줄수 있을까를 진실로 고민할 때다.

2006년 5월의 마지막 밤은 개혁.진보진영에게 패러다임의 전방위적이고 질적인 변화가 절실함을 가장 뜨겁게 암시해준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이게 새로운 시대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관련기사
노무현과 조선일보, 정태인의 '사랑과 전쟁'

2006/06/01 [19:47]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6.6.1)
:
Posted by 엥란트

<추천사>

아래는 지난 1월 12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한국사회 위기 진단과 희망 찾기'란 주제의 토론회에서 최장집 교수의 강연 전문이다.

많은 언론은 이날 최 교수 강연의 촛점을 황우석 사태에 맞춰 "유사파시즘",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적 사건"등으로만 보도했다. 그러나 최 교수 강연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날 최 교수는 한국사회 위기에 대한 여러 방면의 진단과 방향 설정에 관한 문제제기를 했다. (언론이야 장사속 때문에 그렇다 쳐도 참정연 회원들은 제대로된 내용을 가지고 사고를 할 필요가 있겠죠?)

최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민주화 세력의 집권이후 자기모순과 변형 그리고 패배의식과 분화,  민주주의에 있어 대표-책임간의 괴리, 정당에 대한 과소평가의 문제점,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중간(중도)의 의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적 위력, 정치 영역에서 도덕지상주의가 갖는 역설적 효과, 대중적 동원에 의한 운동의 부적절성 등을 고루 짚었다.

최 교수의 글은 가끔가다 논문 발표하듯 한꺼번에 쓰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길다. 그러나 최 교수의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은 '정치(精緻)'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줘도 될듯. 비록 해결책에 대한 공복감은 있지만...

☞ 최장집 교수 강연 전문 1(2006.1.21)

☞ 최장집 교수 강연 전문 2(2006.1.21)
:
Posted by 엥란트

아래 글 마지막에 바로가기 해놓은 두 개의 논문 ‘민주주의와 한국의 노동’(최장집 고려대 교수)과 ‘한국의 노동 : 진단과 과제’(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을 참정연 회원님들에게 추천합니다.

두 글은 지난 25일 발표된 논문인데 한국의 민주정부와 개혁.진보세력의 현주소 그리고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80년대부터 최근까지 20여년 동안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정부 통계자료 분석을 통해 정밀하게 진단한 역작이라 회원님들의 식견을 넓혀줄 좋은 글이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두 개 다 장문이긴 하나 시간날 때 차분하게 일독을 권합니다. 읽고난 후 비평까지 해주신다면 더 좋겠습니다.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왔군요. 모쪼록 다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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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교수의 고언, 해독능력없는 ‘4류언론’
[논단] 권력은 ‘시장’ 아닌 경제사회적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힘써야
 
김영국
최장집 교수가 던진 화두는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화로 인해 절차적, 형식적 수준에서는 세계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만큼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삶의 질 향상을 포괄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실질적, 내용적 수준에서는 매우 초라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퇴보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퇴보가 IMF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진 ‘민주정부’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 성장중심주의를 과격할 정도로 적극 수용하고 선택한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로 인해 한국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돼가고 있다.

그 결과 노 대통령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권력은 이미 시장을 장악한 재벌로 넘어갔으며 다른 경쟁적 가치들은 반기업 정서, 반시장주의 같은 담론에 의해 억압되고 불온시 되기에 이르면서 보수적 헤게모니 강화, 민중적 힘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서민대중의 삶이 황폐화된 만큼 민주정부의 주요 지지기반인 서민대중의 탈정치화와 다운사이징이 가속화됨으로써 민주정부가 자신들의 권력과 사회적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가는 기묘한 ‘자기파괴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으며, 정부 능력에 대한 여론과 평가의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재벌과 국가내 행정관료란 헤게모니에 의존하게 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부정적 효과만 더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민주정부와 재벌기업간의 동맹이 이루어지게 되고 정서적 급진주의와 실제 제도적, 정책적 실천에 있어서 극도의 보수적 내용이 기묘하게 결합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는 단지 노동운동의 위기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 민주정부의 위기로 연결될 것이며 노동 문제의 근원도 민주정부의 잘못된 노동정책, 사회정책, 경제정책과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노동계 또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낮은 조직률에 의지한 채 위기를 자초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노동의 위기와 책임을 말하는데 있어서 정부와 노동자의 순서를 뒤바꿔서는 안된다.

현재의 민주주의와 노동의 위기를 해쳐 나가기 위해선 국가 정책의 수준에서 노동계층을 포함하는 민중들에게 보편적인 경제적 시민권이 부여되는 것, 그리고 상당한 산업구조의 변화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 및 고용체계를 발전시키고 이를 성장동력으로 구축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또한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기 이를 주도했던 두 부류의 문제의식중 NL적 가치는 민주화 이후 합리적 민족공조로 정리 실현된 반면 권위주의 산업화에 의한 노동억압과 불평등에 천착했던 PD적 문제의식은 전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PD적 가치도 NL적 문제의식과 병행해 경제적 시민권 획득,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원리는 존중하되 다른 근원적인 인간적, 공동체적 가치에 의해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정하게 규제-제어되고, 재벌중심의 일방적 구조가 아닌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의 강화에 의해 보다 다원화되는 형태로 접점을 찾아 정리 실현되는 것이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된다.

이처럼 ‘실질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지금처럼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 맹신이 아닌 ‘공동체적 시장경제’를 지향해야 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세력의 중심이 시급히 탄생해야 하고, 시민 참여의 범위가 각 부문별로 보다 확대되야 한다.”

지난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창립 10주년.월간[노동사회] 100호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한 최장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시대정신을 그르치는 ‘4류 언론’

그런데 이런 최 교수의 기조 강연 내용을 보도한 언론의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또다시 커다란 실망감을 감출수 없다.

기사 제목부터 노동의 위기만을 집중 부각하거나 현 정부의 실정만을 꼬집는 것처럼 뽑아 대고, 기사 내용 또한 자사가 주장하고 싶은 부분만 추려내 보도하는 지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최 교수의 발언을 이용하고 있다.

최 교수의 냉철한 사회 분석적 비평을 보수언론과 친재벌적 경제지는 ‘반노(反勞)’로, 일부 친노매체는 ‘반노(反盧)’로만 활용 고무찬양하거나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바엔 차라리 최 교수의 논문을 그대로 전재하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게 더 낫다.

오늘날 언론은 주권자인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국가를 비판, 감시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으로서 '제4부'(the fourth estate)라고까지 불린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한국 언론의 역할이란 자신들의 정치적, 사적(社的)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만 혈안이 된 채 마키아벨리즘이 횡횡하는 ‘4류 집단’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번 최장집 교수의 논문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최근 도덕성과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는 노동조합보다 더 형편없는 ‘국민 신뢰도 19%, 정치적 편향도 70%’라는 오늘날 위상이 언론 스스로가 시대정신의 궤적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이탈해간 결과라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로서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선 작년에 발표한 최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이라는 논문보다 차라리 ‘한국 언론의 취약한 사회적 신뢰 기반’이란 논문이 우리 사회에 더 절실함을 느낀다.

이처럼 다소 진부한 듯한 언론의 보도태도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이번 최장집 교수의 사회 분석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 분석을 통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의 ‘한국의 노동 : 진단과 과제’라는 논문이 침체될 수 밖에 없는 한국 개혁.진보세력의 현주소와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가 지난 20여년 동안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진단한 역작이라는 점에서 이를 보도한 언론의 무성의가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치미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제대로 활용하자

그렇다고 최 교수와 김 소장의 논문을 액면 그대로 ‘9년 가뭄에 단비’라거나 황금송아지를 발견한 것처럼 흥분해서도 아니다. 최장집 교수의 분석을 활용하거나 비판하려거든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최 교수의 현실 사회분석은 100% 아니 더 줄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점수도 주고 싶을 만큼 동의한다. 그러나 최 교수의 주장에서 공허감이 따라붙는 아쉬움으로 늘상 ‘2%’가 부족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최 교수의 사회 분석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정치적 분석은 적확하고 옳은 것으로 그쳐서는 기본적으로 공허할 수밖에 없다.

최 교수의 사회 분석은 탁월하나 그것을 현실 정치속에서 구현하는 대안이나 방법론적 경로 등이 제시되어야 할 결론에 이르면 사실상 ‘비어 있다’는 표현이 맞다. 특히 쌍방향의 인터넷 소통구조가 만개한 상황에서 실질적, 경제사회적 민주주의를 뒷받침하고 실천할 '정치주체(세력)'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국민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 낼 것인가에 이르면 더 막막한게 현실이다.

어쩌면 학자로서 정치.사회적 분석까지만 그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 분석을 토대로 현실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건 정치인이나 언론 더 나아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통한 경제적 시민권의 수혜자인 서민대중 모두의 몫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최 교수의 혜안을 여하히 활용하고, 이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으로 연결시키는 노력은 나의 몫이며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의 고민이자 과제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 교수의 방대한 분석과 주장을 기존 보도 프레임속에 가두어 놓고 그것도 자사이기주의적 관점에서 아주 옹졸하게 취급하는 보수언론과 일부 친노(親盧) 매체의 보도 태도에 일단 반기를 들 수밖에 없다.

아래는 지난 25일 최장집 교수의 1시간여에 걸친 강연 내용을 미리 배포한 원문에 충실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다만 최 교수의 강연 원문을 그대로 전재하는 것은 장문인데다 각 단락마저도 워낙 조밀해서 읽는 독자들의 피로감을 유발할 수 있다. 이에 <대자보>는 각 단락마다 소주제를 달고 단락 띄어 쓰기를 동원 가급적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칼럼 형태’로 재구성 했다.

이날 함께 발표한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의 논문 ‘한국의 노동 : 진단과 과제’도 현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이트(www.klsi.org)에 한글 파일 형태로 올라와 있다.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을 바라는 모든 구성원들이 꼭 한번 일독하기를 권한다.

진보가 단순히 입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치열한 사회 분석과 연구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작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편집위원

☞ ‘민주주의와 한국의 노동’(최장집 고려대 교수) 전문 보기(2005.5.25)

☞ ‘한국의 노동 : 진단과 과제’(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논문 보기(2005.5.25)

* ‘한국의 노동 : 진단과 과제’는 한글 파일을 열어서 볼것

* 표지사진 : 프로메테우스(http://www.prometheus.co.kr/)
2005/05/27 [12:32]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5.5.28)
:
Posted by 엥란트



재보선 ‘원자폭탄’과 마주하기
[4.30 재보선 관전평]‘0’패가 무섭진 않다. 익숙함이 두려울뿐…
 
김영국
국민들의 선택은 늘 위대했다

지역 언론에 글을 기고해 보긴 처음이다. 이번 재보선에 대한 평가와 성남지역의 정치적 미래와 관련한 글을 부탁 받고 지역 시민사회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시민사회도 정치적 이슈와 서민대중의 삶의 문제에서 비껴나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0:23’ 선거사상 전무후무한 집권당 0패.
예고된 패배였지만 예상치 못한 ‘퍼펙트’였기에 정치권 전체가 당혹스러워하는 건 당연하다.

국민들은 이번에 화염병으론 부족했던지 열린우리당 전체에게 ‘0’패라는 씨를 말리는 ‘원자폭탄’을 투하해버렸다.

예고된 패배에 원인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뒷북일 수 밖에 없다. 패인은 예고란 단어 속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이다. 설사 패인을 말하려 해도 열린우리당의 경우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견적도 안 나온다.

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던 ‘열린지값당’이 하나뿐인 건교위원장을 여기저기서 포크레인으로 퍼다주겠다고 허풍 떨며 전국을 개그콘서트장으로 만들더니 급기야 돈봉투까지 살포하다 적발돼 원폭의 뇌관을 터뜨린 곳이 다름아닌 성남 중원이었다.

원래 선거가 끝나면 승자에겐 축하를 패자에겐 위로를 보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그마저도 위선으로 치부될까 생략하고 싶다.

우선 특별히 잘한 것도 없는데다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번번히 훼방만 놓다 자중지란 상태였던 한나라당의 압승이 썩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 자칭 개혁정당 열린우리당의 참패는 안쓰럽고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의 낙담은 애처로운가. 그런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가슴이 없다는 비판을 무릎쓰고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개혁.진보진영 전체에게 0패라는 충격을 안겨준 유권자들이 “차라리 위대했다”고 말하고 싶다.

먼저 포크레인으로 건교위원장을 퍼다 주고, 10조원의 기업도시를 물어다 주겠다는 등 열린지값당의 허풍과 유혹마저 뿌리치고 엄청난 세금 낭비를 막아준 유권자들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다.

또다시 충절의 고장에서 일어난 ‘반철새 의병 봉기’도 환영한다.

변절을 일삼으며 남의 화려한 둥지만 찾아다니는 얌체 철새들의 모가지를 무참하게 비틀어 버린 충청인의 절개를 칭송해 마지 않는다.

선명한 개혁파란 이미지를 독점하며 정치적 사술을 부리던 유시민계와 권력 386이 자신의 정치적 지분 확보를 위해선 전두환.노태우 꼬붕에게도 영혼을 팔고 몸빵도 할 수 있다는 실체를 발가벗기고 꿀밤까지 먹인 대목에선 후련하기까지 하다.

상대방의 닭짓과 ‘오버’의 반사이득으로 연명하는 ‘지값돌리기’판에서 이번엔 한나라당이 오만에 빠져 딴지나 걸고 국민들을 짜증스럽게 한다면 개혁.진보세력이 다음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한쪽이 자만에 빠질수 있을 만큼 압승을 안겨준 유권자들의 심모원려에도 경의를 표한다.

어쨌든 승리지상주의로 대체된 타락한 실용주의가 빚어낸 참담한 패배는 오히려 열린우리당이나 한국 정치발전에 쓰디쓴 보약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선전했다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여건에서도 예상외의 큰 표차이로 낙담한 민주노동당의 과오도 만만치 많아 보인다.

성남 중원은 지난 10여년 동안 지역에 공을 들여온 인간 정형주의 패배가 아닌 민주노동당의 패배다.

선거때마다 타당의 앵벌이식 표 훑어가기에 분노하던 진보정당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정치공학적 승리 유혹에 빠져 ‘한 푼도 못받고 말로 갚아야할’ 앵벌이로 돌변한 모습, 입만 열면 서민대중의 고통받는 삶을 돌아봐야 한다던 그들의 외침은 장사가 안돼 죽을 맛인 서민들이 지나다니는 시장통 앞에서 보수정당과 똑같이 신나게 ‘묻지마 관광 댄스’를 보여줌으로써 피날레를 장식했다.

진보가 단순히 이념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 그에 따른 문화적 선도를 동반하지 않는 진보는 시대를 주도할 수 없다는 평범한 공식을 망각한 채 진보를 살찌우겠다는 포부는 휴지통에 내다 버리는 게 낫다.

더군다나 참여정부 들어서도 갈수록 경제적 양극화의 고통속에 수천만의 서민들이 신음하고 있는 현실에서 뭐가 그리 즐거워 ‘막춤’식 선거문화가 2년이 넘게 정치판에서 유행으로 떠돌아 다녀야 하는가. 이건 시대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문화의 몰지각성과 아직도 대선의 추억속에 갇혀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레드카드(?) 받은 개혁.진보진영

선거란 지지자들의 외연을 확대하고 얼마나 투표장에 나오게 하느냐의 싸움이다. 한국 정치판에서 보수는 습관적으로 투표하지만 진보는 마음이 진동해야 투표장에 간다.

개혁.진보세력이 보수세력과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개혁.진보적 지지자들이 가슴 한켠에 늘 담아두고 있는 대의명분과 시대적 소명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긴장감이 발동할 때뿐이다.

과연 개혁.진보진영이 외연 확대는 고사하고 기존 지지자들이나 투표장에 나가고 싶도록 만들었는가.

답은 “과반수를 만들어 주었는데도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할 의사도 없는 것 같은데 열심히 찍어 줄 이유가 없었다”고 자평한 여당 초선의원의 고백으로 대신한다.

어차피 재보선은 야당에 유리할 수 밖에 없다며 야당의 승리를 ‘재보선당’이라고 깍아내리고, 전투에서 졌을 뿐이라고 자위하기에는 재보선 지역이 대부분 여당의 텃밭이었다는 점에서 구차한 변명에 가깝다.

이번 재보선의 퍼펙트 패배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내 실용주의자들의 타락, 자칭 개혁파들과 추종자들의 자기모순적 몸빵, 노빠식 조선일보나 다름없는 친노성향 언론의 비겁함과 혹세무민이 어우러진 열린우리당과 그 주변세력 모두의 책임이며 총체적 자기분열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당시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대한 기대로 초롱초롱하던 개혁파들은 지난 2년여 동안 무수히 노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떠나갔다. 이는 여론조사와 현실에서 이미 증명된 일이다.

그 빈자리를 ‘개혁 신분증’도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건적들이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반한나라당, 안티조선이란 그럴듯한 ‘알리바이성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그들의 사이비성과 기회주의를 면책받고 신주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민대중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실신분’(비정규직, 실직자, 신빈곤층, 신용불량자를 통칭)의 삶에 천착하지 않고, 4대 개혁입법이니 뭐니 해서 엄청난 선물꾸러미라도 되는양 포장해 그것만이 시대적 사명의 전부인 것처럼 호들갑 떨다가 그마저도 야합으로 걸레를 만드는 수준의 개혁.진보가 서민대중에게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한 집단인지 날이 갈수록 확인 도장 받는 느낌이다.

대일 자존심 발언 등 대통령이 ‘입으로 만든’ 50% 지지도가 여당의 전패로 귀결되는 해괴한 사태의 비밀은 국민의 66%가 노 정권은 ‘노동자보다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바닥 민심에 있다.

이번에 개혁.진보진영 전체에게 국민들은 옐로카드가 아닌 사실상 ‘레드카드’를 꺼내들었다. 재보궐선거인 것이 천만다행일 뿐이다.

버려야 산다

참담한 패배보다 안타운건 개혁.진보세력이 현재의 위기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만 하고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채 허우적대는 모습이다.

어디에선가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 다시 들판으로 내몰려간 생활 개미들이 돌아와 함께 정치를 이야기 하고 미래를 공유할 기회를 만들수 없을까.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는데 앞장서 줘야 한다.

보다 실증적인 연구와 대안들을 담아내고, 생활 개미들이 활력있게 참여할 수 있는 정당문화를 이식하여 개혁.진보세력의 새로운 아지트가 될 수 있는 정치주체가 탄생하거나 그런 모습의 정당으로 환골탈퇴하지 않는 한 ‘Again 2002’는 없다.

국민은 자기희생적 결단을 통해 거듭나는 정치세력에게 인색한 적이 없으며 자만과 방자함에 빠져든 정치세력에게 몰락을 경험하지 않도록 배려해준 일도 없다.

지역 시민사회단체, ‘서민대중의 삶’에 눈을 돌리자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방향과 정치적 지역이슈 제기의 영역도 단순한 개혁, 민주수호, 자주통일 같은 관습적 테제에 머물러선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

‘참여’를 줄기차게 외쳤으나 정작 우리의 삶은 황폐화되었고, 신권력층으로 진입한 개혁장사꾼들에게 개뼉따귀만 갖다 바친 참여는 아니었는지, ‘진보’를 강변했으나 관념적 희열을 위해 스스로의 삶은 내팽개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식을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참여, 그런 진보가 과연 행복했는가. 국민의 93%가 빈부격차가 심각하고 생활수준은 더 나빠졌다며 절규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말해주듯이 이제 우리는 참여속의 진보라는 슬로건 자체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참여이며 진보인가를 분명히 해야 될 때가 됐다.

시민사회단체가 국보법 폐지 같은 이념적 장벽을 걷어내고 정쟁과정에서 생산되는 민주화 등 ‘정치적’ 이슈에는 천명이 넘는 사람이 단식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비정규직 악법 철폐와 권리보장 입법 같은 정작 서민대중과 미래 자녀들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경제사회적’ 진보에는 그만큼 치열하게 싸워왔다고 말하기 어렵다.

작금의 최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economic polarization)’와 그로 인한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란 아젠다와 관련하여 대안적인 논쟁과 실천에 보다 많은 관심과 정열를 쏟아붓지 않고선 개혁.진보세력이 서민들의 편이란 전통적 믿음을 더이상 지켜가기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참여정부 들어 가까이는 이번 재보선의 전패에서 보듯이 이미 그 믿음조차 소멸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단순한 경제지표상으론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해 왔음이 언론보도 등을 통해서 심심치않게 확인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수치들에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경제규모의 급성장에 걸맞게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인가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노동시장의 먹이사슬 맨 밑바닥에 약탈적 저임금에 시달리며 ‘제3 신분’으로 굳어진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56%) 800만명이나 깔려 있으며, 넘쳐나는 실업자(80만)와 신용불량자들(380만), 국민기초생활보장 비수급 대상인 차상위 빈곤층(300만)이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면서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728만원 對 53만원'로 표현되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월평균 소득격차, 민망할 정도로 추락해버린 노동소득 분배율(59%), 전국 10가구중 3가구꼴로 적자, 가구당 빛 3,000만원꼴 사상최대,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는 세상이다”며 푸념하는 근로자들, 위기를 넘어 절망을 체감하고 있다는 국민이 압도적이라는 여론조사 수치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서민대중의 적나라한 ‘고통지수’이다.

‘21세기’라는 첨단 자본주의로 문명화된 사회속에서, 기이하게도 ‘빈곤’의 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사적 문제가 되고 있다.

개혁정권의 탄생이라며 환호했던 열린우리당류 개혁파들이 경제적 양극화를 양산하는 실질 주범인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세계화, 개방화 만능주의’에 빠져 어떤 고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시민사회가 얼마나 비판하고 대안이 되고자 했는가.

차제에 시민사회단체가 지역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런 고민들을 담아내고 그에 걸맞는 운동과 정치문화를 창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지방자치 진출, 자생력과 일관성으로 신망이 우선

마지막으로 이번 재보선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국회의원에 정신 팔려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지방자치선거 부문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지방자치의 풀뿌리라 할 수 있는 구.시.군의원에는 새마을운동 간부 출신, 상가번영회, 로타리클럽부회장, 건설회사 사장 등 60년대식 이권을 노린 인사들이나 국회의원 선거때 품앗이 해주고 명함 하나 꿰찬 떨거지 등 구태의연하고 얼굴에 기름기 좌르르한 동네 유지들이 주로 출마해 지역 살림을 감시.감독하는 자치일꾼으로 나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니 지방자치가 주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부터 괴리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고 갈수록 지방차지 본연의 목적을 상실해 가는건 불문가지다.

이렇게 된데는 각 정당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용이한 공간임에도 국회의원 같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만 집중하고 풀뿌리 지방자치에는 소홀히 하거나 방치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다가오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새롭고 신념있는 젊은 인재들이 대거 진출하도록 개혁.진보진영이 각별한 관심과 준비를 기울이지 않는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지방자치는 요원하고 여전히 지역 유지들의 잔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론 시민사회단체도 기성정당에 의지하거나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보단 스스로 인재를 발굴하고 자생력을 키워가는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서민대중의 삶에 천착하고 일관성 있는 목표와 실천으로 지역 시민사회의 신망을 얻어 지방자치 진출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어쨌든 이번 선거에서 개혁.진보진영 전체에 0패의 충격을 안겨준 것이 아프기 보단 차라리 다행스럽고 쓰디쓴 ‘보약’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성남 수정구에 거주하며 인터넷뉴스 대자보 편집위원이자 참정연(www.cjycjy.org)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사입력: 2005/05/03 [16:01]  최종편집: ⓒ 성남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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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5.5.3)
:
Posted by 엥란트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논단] 행복하지 않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우리 안의 위선에 관한 성찰
 
김영국
김대중의 정권교체와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으로 우리 사회에 ‘참여’와 ‘진보’란 테제만큼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며 환호했던 노무현 정부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개혁.진보진영은 두 테제에 얼마나 충실했고 얼마만큼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3쯤 채워진 물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기대수준의 차이만큼 다양할 것 같다. 현 정치판에서 그에 관한 논쟁도 곧바로 당돌벌이 소스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많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성과의 정도를 말하기 전에 참여와 진보는 ‘마냥 좋은 것’ 또는 ‘그것만이 살 길’라는 일념으로만 달려온 것은 아닌지 자문을 해본다.

개혁.진보진영이 두 테제를 위해 앞만 보고 줄달음쳐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겠지만 기실 우리가 선 자리는 여전히 출발선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말로 단순한 참여와 진보가 아닌 ‘어떤 참여’, ‘어떤 진보’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구체화해야 될 때가 아닐까.

‘참여’를 줄기차게 외쳤으나 정작 우리의 삶은 황폐화되었고, 신권력층으로 진입한 개혁장사꾼(개장사)들에게 개뼉따귀만 갖다 바친 참여는 아니었는지, ‘진보’를 강변했으나 관념적 희열을 위해 스스로의 삶은 내팽개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식을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참여, 그런 진보가 과연 행복했는가. 국민의 93%가 빈부격차가 심각하고 생활수준은 더 나빠졌다며 절규하고 있다는 오늘의 여론조사가 말해주듯이 많은 이들의 답변이 뻔히 예상되지만 ‘그래도 세상은 전진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습관적인 자위,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정권 또는 기득권 옹위에만 몰입하는 경향도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여해서 더 나은(진보적인) 세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은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 집단적 열정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까지 진출해서 쌍꺼풀(?) 수술하고, 재벌연구소 찾아가 경제 공부하며 폼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억압과 소외에 짓눌린 탓에 우린 참여와 진보의 참 의미를 돌아볼 새도 없이 남에게 돌던져 머리 터지게 해놓고 ‘그것도 내 자유다’라고 외치던, 해방공간에서 광분하던 민중들의 모습을 답습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머리를 위한’ 진보와 ‘생존을 위한’ 진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장을 해왔고, 문명화되었다는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인구의 절대다수가 비정규직과 실직자, 신용불량자, 신빈곤층이란 ‘제3 신분’으로 떨어져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극화, 초극화로 명명되는 ‘빈곤의 문제’를 가장 심각한 과제로 올려놓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주식시장의 활황이 덮어놓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란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의문을 갖게 되기까지 꼬박 50여년의 세월을 정권과 자본의 잘짜여진 프로파겐다에 현혹되어 충견역할에 머물러 왔던 것은 아닐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중들이 가슴속에 품어왔던 ‘참여’의 열기를 쏟아내자 이제는 개장사들이 개혁을 팔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고 곧바로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본색을 들어내며 개혁과 진보의 의미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걸 목도하고 있다.

개도 얻어맞을 골목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노 정권마저 임기 중반을 넘어서자 김영삼, 김대중 정권처럼 수구언론과 재벌가의 뒷골목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보다 선명하게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들도 권력의 중심에 서면’이라는 의문의 꼬리표를 달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진보를 꽃피우기 위해 국보법이라는 이념적 장벽을 걷어내는데 천명이 넘는 사람이 단식을 해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비정규직 악법 철폐와 권리보장 입법 같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진보에는 단식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회적 무관심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분신과 자살을 하거나, 찬바람 쌩쌩 부는 고공 타위크레인에 올라가 호소했을 뿐이다.

머리를 위한 진보는 ‘단식’을 하지만 생존을 위한 진보는 ‘단념’을 잘한다.
과연 그런 진보가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하지 않는 진보와 개혁은 짝퉁이요, 위선이며, 쓸모없는 짓이라고 까지 말한다면 오바인가.

와각지쟁(蝸角之爭)

고문을 자행했다는 한 의원은 특종에 굶주린 언론에 의해 전국적인 화제거리로 만들어지지만 800만 비정규직의 현존하는 ‘생존고문’에 우리 사회는 별 관심이 없다.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리고자 환장한 개장사들의 ‘참여놀이’에는 촌수도 없는 가계도까지 그려가며 분석해대지만 수백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의 탄생 뿌리와 해결책에는 ‘재미없다’는 것이다.

이기명과 전여옥의 논개잡설 중계와 조갑제의 홈페이지나 뒤지고, 김용갑 의원의 입만 쳐다보며 써갈겨 대는 기자정신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담항설(街談巷說)이나 즐길 요량이면 차라리 ‘정치 선데이서울’로 제호를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언론뿐만 아니라 서민대중은 물론 입만 열면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습성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서 예로 든, 잡설에 가까운 정치기사에는 댓글놀이까지 즐기며 왁자지껄한 소동을 빚으면서 방학중 1000만원 짜리 해외연수를 떠나는 부자동네 아이들의 사교육비와 5만원 짜리 교습소를 찾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무료급식과 교회 공부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로 뛰며 스케치한 기사는 진보적 인터넷신문에 댓글 한 줄 없이 방치돼 있다.

어른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즐거운 방학이 어느덧 우리 아이들에게는 빈곤의 대물림 기간이 되었다는 기자의 고발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분노하고 있는가. 틈만나면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우리는 진정 이 나라 교육을 말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하는 개혁장사꾼들 그리고 우리안의 위선

정치권 특히 열린우리당내에서 개혁파란 이미지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사람들이 자당이 얼마나 ‘친기업적이고 반서민적인’ 실용주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과 반발은 커녕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르는 듯 보인다. 이는 비정규직 정부법안을 대하는 그들의 무관심과 안이한 태도만 보더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부나 열린우리당의 경제관련 정책담당자들이 분배가 벗겨진 동반성장론의 가면을 쓰고 연일 수구 기득권에 가까운, 친기업 반노동자적 경향성을 노골화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개혁정당은 고사하고 중도정당에 몸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넌센스(nonsense)이다.

그들 또한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해대는 잘 짜여진 개혁 프로파겐다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개판이고, 노조는 썩었다며 욕하고 뒤돌아서기 좋아하는 서민대중들은 어떤가. ‘비정규직 법안’이 자신들은 물론 향후 자녀 둘 중 하나는, 아니 둘 모두 심한 차별을 강요당하는 제3 신분으로 고착화하는 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사회적 교섭 참여 여부를 놓고 시너를 뿌리며 저항하는 노조를 욕하는데만 몰두한 채 격렬한 대립의 원인이 정권과 자본, 언론의 일방적인 폭격에 맞서 비정규직 법안 개악을 저지하고 권리보장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전략, 전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건 아닌가.

노조를 관료화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의 먹고사는 미래가 걸린 비정규직 법안의 해악을 걷어내야 한다는 대명제의 당위성과 절박성마저 씹어 삼켜서는 안된다.

노 정권이 아무리 열녀전(개혁)을 끼고 서방질(보수화)해가며 국보법을 비롯한 4대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기만했다고 해서 그 법안 취지의 당위성마저 부정되는 것이 아닌것처럼.

노무현 정권이 재벌, 수구언론과 한통속이 되어 탄생시킨 각종 친재벌적 정책들과 노동 관련법들이 향후 우리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비판적 참여 없이 훗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만 늘어 놓는다면 과연 양심적인 일인가.

새 이정표 세우기

이제 우리는 참여속의 진보라는 슬로건 자체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참여이며 진보인가를 분명히 해야 될 때가 됐다.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를 의미하는 경제적 양극화라는 아젠다를 ‘우리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논쟁과 참여에 관심과 정열를 쏟아부을 때이다.

북핵위기가 고조될수록 한반도 평화와 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서도 개성공단 사업 같은 남북경협 활성화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 모두가 상생하는 길위에서 돌파구를 찾겠다는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견지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적 사회발전이란 정당한 ‘분노’들이 사회적 운동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결집, 조직되어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표출될 때 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건 수많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염원하는 경제적 아젠다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개혁.진보진영은 진가를 발휘할 호기를 맞고 있음에도 자기모순적 시행착오와 분열, 도덕적 헤게모니마저 날려버릴 자중지란을 노정하면서 이렇다할 대응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갈수록 보수화되는 정권과 자본의 의지대로 현 상황이 굴러가도록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듯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끝내 현재의 개혁, 진보정당이나 단체들이 성에 안차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이란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면 비정규직, 실직자 등과 같이 제3 신분으로 굳어지고 있으면서 법과 노조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지켜주는 등대이기를 고대한다.

개혁.진보적인 단체와 언론매체, 지식인, 네티즌들의 분발을 거듭 당부하고 싶다.

물 한방울 없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담벼락도 여럿이 손잡고 한뼘 한뼘 올라가 기어이 넘어서고 마는 진보 담쟁이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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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진보, 폐품좌파, 금간 불판을 넘어
2005/02/17 [16: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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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노동진보, 폐품좌파, 금간 불판을 넘어
[신년 제안] 행복을 두려워말자, ‘언저리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3)
 
김영국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 ‘완행열차에서 고속전철로 갈아탄’ 위기의 노동.진보진영, 진지한 자기반성과 새로운 상(象) 세워야 –


“시간 없는데 싸우기도 전에 그로기 상태라니…”

“헐벗고 소외된 서민대중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고,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게 해주자”

대한민국 노동운동계, 진보적 시민사회, 그리고 진보정당이 이룩해야 할 최대 목표이자 희망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생태주의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진보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란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의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서민대중이 겪고 있는 삶의 황폐화에 직접적 이해당사자나 다름없는 노동, 진보진영의 대응은 권력과 자본의 쌍포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안팎으로 시련과 난관에 봉착해 있다.

노동.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서 최근 들려오는 소식들은 자못 심각해 보이는 조짐들이 묵은 메주에 곰팡이 피듯 번져 나왔다. 노동.진보진영의 위기는 더 이상 외부탓(?)으로 항변하기 불가능한 지점까지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기아차 사태의 경우 민주노총이 수년 전부터 그토록 목청을 높여 왔던 비정규직 근로자 차별 철폐와는 정반대로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등친’ 매우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경우 지도부가 바랐던 노사정위 복귀를 포함한 ‘사회적 교섭’ 재개 안건이 두 번에 걸쳐 정족수 미달로 표결이 무산된 데다 급기야 시너와 소화기까지 동원한 난장판으로 얼룩지면서 민주노총에 회복하기 힘든 깊은 ‘내상(內傷)’을 입히고 말았다.

더욱이 사회적 교섭 참여를 정부와 사측에 대한 투항이며, 정부측 비정규직법안 반대를 위한 2 월 총파업투쟁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반대파의 반발도 기실 민주노총에 대한 비정규직 노조 등의 불신이 강하게 깔려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민주노총의 심각한 내부분열은 전체 조직력 약화는 물론 대기업 정규직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식 노동운동에 더 이상 전체 노동자의 대표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왔으며, 향후 노동운동의 재편을 예고하는 중대한 분기점을 맞고 있다.

이처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사태는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무력 시위를 벌인게 아니라 하청노동자 등 비정규직이 중심이 된 쪽에서 정부와 여당이 2월에 강행 통과시키려는 비정규직 법안이 자신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의 저지를 위해서는 대책없이 정부의 로드맵에 말려들게 아니라 강력한 투쟁전선 구축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절차적 민주주의 훼손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벌인 시위란 점이 핵심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도 당장 총파업에 대한 동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틀을 통해 노동계의 요구와 의제를 이슈화하면서 사회적 명분 획득과 준비기간을 갖고, 대화 거부시 예상되는 정부나 재계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일방적 강행기조를 일단 차단할 필요성에서 사회적 교섭 참여에 대한 결론을 내려 했던 것이며, 이런 양측간의 정세판단의 차이는 상호 절박한 사정만큼 협상의 여지도 협소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하청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함과 그간 참여정부의 반노동적 정책에 대한 이들의 뿌리 깊은 불신에서 촉발된 시위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노동계의 참여여부와 상관없이 뭐든 예정대로 밀어부치겠다는, 마치 군사정권시절 관료의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한 노동부 장관의 엄포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댔다.

그럼에도 이런 본질적 사안들은 깡그리 무시된 채 수구언론은 물론 진보적이라는 신문까지 종이언론과 방송의 보도행태는 천편일률적으로 '폭력을 일삼는 소수 강경파의 난동'라는 타켓을 미리 설정해 놓고 일시에 노조 전체를 폭격해대는 놀라운 동맹이 형성된 것을 보면서 종이언론과 방송의 표피적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번 사태는 기아차 인사비리를 계기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싸늘하고, 이를 빌미로 정부와 자본의 공세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국민앞에 파국적 내분 양상을 노정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최악의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 또한 지난 국보법폐지를 위한 당의 대응전략을 놓고 ‘열린우리당 2중대 문건’까지 등장하면서 벌어지기 시작한 당내 논쟁이 최근 당 기관지 편집장 교체, 여성당직자 폭행사건 징계완화, 부유세에 대한 당의 의지부족을 비판한 윤종훈 정책연구원의 사퇴 등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가 중첩되면서 전통적 최대 정파인 ‘민족자주파(혹은 주사파)’와 ‘민주생존파(혹은 평등파)’로 나뉘어 당원간 갈등 차원을 넘어 사실상 ‘내전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잇따른 불미스런 사태는 민주노동당에게 엎친데 덮친 격이다.

노동운동, 멸망으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급행열차’로 갈아탔나

최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노 대통령의 비판적 발언, 이에 ‘올커니’하며 고무된 수구언론과 정부 그리고 재계는 한 목소리로 노동운동진영을 거세게 몰아부쳤다. 그 근거는 노동쟁의의 확산이었고, 요지는 고임금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의 확산도 노동시장의 양극화도 모두 그들의 책임으로 몰았다.

이들은 기아차 채용비리 사건을 노조의 힘을 빼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마치 물만난 고기마냥 날뛰고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의 ‘생산.유통.확산’을 부추기며 자신들이 맞을 화살을 노동자들 끼리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의도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수구언론들은 한술 더 떠 우리사회의 재계에 대한 반기업 정서를 질타하며 애국자인 재계에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국민들을 훈계해왔다. 물론 대통령도 거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회만되면 노조를 매도하면서 반노조 정서를 부추겨왔다.

정작 서민대중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위대 옆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하는 말에서, 뉴스 사이트와 정치웹진에 실린 노동자의 파업 소식에 달리는 답글에서 ‘또 데모냐?’, ‘노동귀족’, ‘폭력노총’이란 비아냥은 익숙하게 접하는 용어들이다. 이처럼 서민대중이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에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비판은 노동운동 주변에서도 제기되었다. 광범위한 불안정 노동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전투적 조합주의를 고집하는 대기업 정규직중심의 노동운동을 향해 ‘왕자병’에 걸렸다며 힐난했고, ‘멸망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탄 채 졸고있다’고 쥐어박았다.

어쩌면 작금의 노동운동은 “멸망으로 가는 완행열차도 모자라 ‘고속전철’로 갈아타버린 상황”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팽배해 있다.

이런 모든 비판과 우려가 매우 정당함에도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조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한국 노동시장 구조에서 대기업 노조의 위축은 곧바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줄 한쪽 당사자의 궤멸로 이어진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린다.


또한 정부나 수구세력이 비난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기실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의 측면이 강하다. 참여정부라면 노조와 파트너십으로 해결하는 게 맞는데, 거꾸로 배제적으로 몰아붙이니 갈등이 되레 증폭되는 측면도 있었다.

노동계가 정규직 중심의 집단이기주의적 투쟁만 일관한 것도 온전한 사실은 아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산업별 통일투쟁에 의한 산별교섭의 기본틀을 마련하고 산별협약을 성사키키거나, 금호타이어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하여 불법파견 노동자 27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하는 전형을 창출해내기도 했다. 또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비정규연대회의를 출범시킴으로써 투쟁의 전선을 넓히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하반기엔 비정규직관련법 개악 반대, 공무원노조의 노동기본권 완전보장, 국가보안법 철폐, FTA반대, 경제자유구역내 외국병원 진출 반대 등 제도개선투쟁으로 이어졌다.

노동조합이 연대의 원칙을 요구에서 제시하고, 고용안정, 사회공헌기금 등 사회공공성 확대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사회개혁 요구는 투쟁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한국적 노동운동의 예견된 참사(?)

사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몇 가지 커다란 환경변화에 직면하였다.

첫째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와 개방화, 세계화의 흐름속에 중소기업 노조들은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 반면, 그나마 규모가 크고 조직과 동원능력이 있는 대기업 노조들만이 생존해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이 더욱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고착화 되면서 노동운동 자체도 양극화 됐다는 점이다.

특히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한 비정규직을 비롯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대거 등장으로 노동시장이 대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실업자, 여기에 외국인 노동자까지 가세 분화, 다극화되면서 내적인 이질성이 점증되었고 노동운동은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둘째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으로 ‘적어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는 다른’ 노동 정책에 대한 기대가 컸던 반면, 곧바로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운동 강압정책으로의 변신으로 인해 민주정부에 대한 기대가 무참히 무너지면서 정부와 노동계의 대립과 갈등이 재연되는 등 노동조합이 일관된 대정부 정책적 대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입으로 노동계의 정치적 선택이 한결 용이해지면서 정당과 노조와의 관계가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정치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 해소되어 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셋째는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급성장으로 시민운동은 공공성을 추구하는 운동, 노동운동은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운동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시민운동이 노조를 대체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커지면서 개혁담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이 하나의 사회변혁 내지 사회개혁 세력으로서 이미지 구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는 새로운 운동노선과 시민운동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넷째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통일문제를 둘러싼 해묵은 노선 대립과 갈등이 여전히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통일문제’를 우선시하며 전면으로 내세우는 노동운동 노선과 ‘계급문제’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노동운동의 노선 대립은 대선이나 총선 공간에서까지 ‘수구세력의 집권 저지’와 여야 모두 보수정당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중 어느 것을 우선적 과제로 삼느냐로 이어지면서 공유와 연대 형성이 시급한 노동계 내부에 깊은 갈등의 골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이처럼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 통일을 둘러싼 갈등은 보수.수구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세력 내부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더구나 분단의 극복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이러한 내부 갈등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은 채 곳곳에서 민족자주파(혹은 주사파)와 민주생존파(혹은 평등파)의 갈등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올해에도 노동운동의 환경이 더 나아지리라는 전망은 거의 없다.

내수는 물론 수출경기마저 어려워지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임금인상은 고사하고 기업들이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아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거세게 밀어부칠 위험성도 높다. 고용불안과 함께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도 우려스러울 뿐이다.

여기다 비정규직관련법, 노사관계 로드맵, 복수노조문제나 전임자임금지급문제, 한일자유무역협정을 비롯 각종 FTA 협상 등 제도와 정책과 관련된 미결의 과제들이 큰 충격과 파장이 예고된 채 시한폭탄처럼 가로놓여 있다. 모처럼 의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이 다수당의 담합과 횡포를 뛰어넘어 노동자 요구를 관철시킬 여지도 가까운 시일 안에 커질 것 같지는 않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전망은 노동운동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올 것은 자명하다. 그에 대한 대응 또한 노동의 몫일 수밖에 없다. 정부의 태도 역시 노동운동의 자체 역량과 노사간의 힘의 관계로 저울질될 수밖에 없다면 온전히 노동의 할 나름이다.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 출발을 위하여

지금 가장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현재의 파견법만으로도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했고, 비정규노동의 열악한 임금조건과 대기업과의 극심한 격차가 대기업 노동자들의 잇따른 파업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중요한 빌미가 되어 교섭력의 급격한 저하를 불러오면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자녀 둘 중 하나는, 어쩌면 둘 모두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심각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800만이라는 숫자가 무색할 정도로 현재 2% 수준밖에 안되며, 한 사업장에서의 단기고용으로 인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노사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으로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원칙을 확보하기는 지금으로선 너무나 요원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인식을 노동계 전체가 공유하고, 정책에 초점을 두면서 비정규노동 정책이 현장의 내부 조합원들의 이해와 결합될 수 있는 노동자계급 연대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명운을 걸고 투쟁을 전개해야 할 일이다.

이는 유인물 몇 장, 공문을 통한 항의와 시정요구, 그리고 성명서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사회적 노동 보호기준을 만들기 위한 법률 도입과 단체협약을 위해 민주노동당, 진보적 시민단체의 의제화 노력과 노동조합의 교섭구조를 초기업적(사회적) 단위로 개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이룬다. 그것만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조합의 직접적인 조직원이 되는 길이고, 노동조합 자신의 진정한 문제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기업 정규직은 자본에 의해 압박받는 측면과, 비정규직보다 우대받는 양면성이 있다. 그런데 정부와 재계는 후자만, 노동계는 전자만 강조한다. 두 당사자의 양보 필요성은 자명하다. 예컨대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대주주와 경영진은 배당금 일정액 기부와 연봉 삭감 등을 통해 그 돈으로 하청업체 비정규직을 위한 훈련기금이나 복지기금을 만들 수 있다. 동시에 정부는 공공 의료와 교육, 공공임대주택 등을 늘려 교육비, 주거비 등 비정규직의 간접임금을 증대시키면 격차는 크게 해소될 것이다.

로빈슨(Robinson, J.)의 지적처럼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은 '고용창출' 혹은 '일자리창출'도 단순히 사회보장적 성격 및 경기안정화 역할로서 취약 계층의 공적 부문으로 흡수뿐만 아니라 혁신형 중소기업, 고급지식부문 등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일자리 조정’까지 포함하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운동이 지금의 위기와 침체를 벗어나 안팎으로부터 지지와 신뢰 그리고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하고, 수세적 입장에서 적극적 공세의 위치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노조원의 이기적 관점을 탈피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통요구를 사회적 의제로 담아내는 대중적 관점을 확고히 정립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방안 등이 그 예이거니와, 자신의 적극적인 대안과 양보를 포함한 연대임금정책과 사회개혁 요구는 임단투의 중요한 전략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다양한 경로로 노동 의제들을 쟁점화하고 해결을 촉진할 수 있는 장과 기회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사회적 교섭’은 노동운동의 주요영역인 정책참가의 한 방편이며 노동의 피폐화를 막기 위한 제도.정책 개선투쟁이란 전술적 수단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면 무작정 포섭을 우려한 기피의 대상으로만 치부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더욱이 사회공동화 문제, 빈곤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같은 노사나 노정만으로 해소하기 힘든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는 노사정 대화를 포함 중층적으로 여러 분야와 대화를 활성화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도 유효한 방편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원칙과 전략을 가지고 사회적 교섭 반대파들의 우려와 불신을 극복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런 노력과 대책없이 사회적 요구에만 매몰되다가는 98년 외환위기 때 정리해고법, 파견법 도입과 같이 노동계가 경제 살리기 동참이란 명분하에 결단한 희생적 양보가 낳은 극심한 양극화 폐혜를 또다시 되풀이할 것이라는 반대파의 주장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부와 재계의 노동정책 기조가 한통속이 되어 유연화, 그것도 수량적 유연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설사 사회적 협약기구가 만들어지더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진보진영은 기능적 유연성을 높이고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아젠다가 분명히 설정되도록 사회적 연대의 틀을 통해 정부와 자본을 압박하면서 참여해야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현 노동의 위기 극복를 위해서는 중심세력인 ‘노동조합 자체의 혁신’을 적극적으로 추진해가야 한다. 그동안 제기만 되고 당면 투쟁에 매몰돼 지체되고 있는 전면적인 조직진단과 조직운영의 개혁, 산별노조의 건설, 이념 및 기조의 정립 등 많은 혁신과제들을 충실히 전개해야만 각급 조직에 나타나고 있는 동맥경화증, 피로증후군에 의한 현장조직력의 현저한 저하와 패퇴를 극복하고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거 어느 시기에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현실과 환경 속에서 기업의 울타리에 매몰되는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울타리 밖의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개혁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지, 21세기 새로운 노동운동의 전범을 보여주고 세계 노동운동의 방향 설정에도 공헌할 수 있을 지는 온전히 노동운동진영의 몫으로 남겨진 과제이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입성과 한계 그리고 자리매김

2004년 총선에서 10석의 원내진입을 통해 제 3당으로 각광받던 민주노동당은 7개월이 지난 지금 영광의 빛은 희매해지고, 한계와 과제가 뚜렷하게 노정되고 있다.

10석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자신들의 의제를 가지고 80명의 반대표를 조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상한선이자 과반수가 안되기 때문에 관철이 안된다는 점에서 절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소수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정치를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는 결국 국정감사 과정 등을 통해 정책을 가지고 다른 당보다 국민들에게 상당한 호평을 받아내는 것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독점하고 있는 협상 테이블과 원내에서의 각종 불이익 및 배제적 소외를 딛고 어떻게 운신의 폭을 넓히고 국회내 연단을 확보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것인가가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게 방법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국회 밖에서 노동자, 서민들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이 큰 목소리로 쟁점화한 사항을 원내에서 그들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입지를 넓히는 ‘거대한 소수’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보다 더 깊이 민중속으로 들어가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과 더 넓게 여성, 환경, 인권과 같은 시민사회적 가치를 진보적 가치로 통합해 내고, 시민사회단체와 네트워크 강화 및 원내외 조직 결합력을 높이면서 보다 실효성 있고 구체적인 서민 정책들을 생산해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명제를 분명히 해준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노 정권의 ‘한나라당 중시, 민주노동당 무력화’라는 기회주의적 노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박과 공조수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며, 어설픈 정세파악으로 민주노동당의 얼굴을 열-한 공조속에 파묻어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경종이기도 하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제 정당과 관계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과제란 열린우리당의 기만적인 태도와 반민생정책의 실체를 대대적으로 폭로해 내면서 경제사회적인 면에서 기득권 중심의 보수정당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민생법안과 대책들을 제대로 알려내는 것으로 제약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부유세 도입을 통한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의 확대, 복지 확대 문제를 더욱 구체화 하는데 주력해야 할것이다.

또한 기업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소유와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병원, 학교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서의 사회적 소유를 확대하기 위해서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고, 경제사회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대안적 사회 체제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노동당 정책의 도덕적 타당성을 넘어서 부유세와 같은 분배 강화 정책을 도입하더라도 우리 경제에 마이너스 효과가 아닌 플러스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심층적 연구와 정책의 과학성을 높이는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내면 열린우리당과 가깝냐, 한나라당과 가깝냐를 먼저 따지고, 둘다 안 가까우면 양비론으로 몰아가는 보수 양당 중심의 현 정치구도를 실제 국민중 누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냐는 정책과 노선의 관점으로 돌려 놓고, 민주노동당이 서민의 자리에서 일관된 목소리를 내면서 열린우리당+한나라당 대 민주노동당의 대립으로 규정되도록 힘을 쏟아야 할것이다.

이것이 성공적일 때 ‘여론에 민감한 기회주의 정당’ 열린우리당의 우경화에 제동을 걸고, 보다 개혁적 노선으로 견인하는 개혁.진보의 선순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근 당내에 고조되고 있는 NL, PD로 대표되는 뿌리깊은 논쟁과 인맥적 대립과 갈등을 여하이 발전적으로 재정립하느냐도 민주노동당의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이다.

비록 이 논쟁이 다른 당처럼 잡탕에 가까운 스펙트럼에서 동시다발로 발산하는 권력쟁투적인 성격보다 어떤 노선과 방향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서민대중의 요구에 부합하고, 본질적인 것이냐 하는 차원에서 진일보한 정책적 외양을 갖추고는 있으나 상호간에 노선과 연결된 특정인맥 배제적인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긍정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결국 차이가 적당히 봉합되기 보다는 문제의식의 차이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당원들의 치열하되 질서있는 토론과정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민주노동당의 실천적 노선으로 형성된 정파들로 재편되도록 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상호의 차이를 존중하고, 시대적 요구에 맞게 주도권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신사적으로 교환되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고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통합보다는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의 연장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된다면 차라리 신사적인 분화를 통해 각자 행복해지는 진로를 가면서 최종적으로 서민대중의 판단에 맡기는 게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서민대중과 당원들조차 꺼려하는 ‘민주노(No)동당’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민주노동당은 당연히 부자는 꺼려하되 서민에게는 환영받는 정당이어야 한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실상은 이와 다르다.

여론조사때마다 민주노동당에게는 뼈아픈 지지계층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민주노동당 지지층은 한결같이 20~30대와 고학력, 고소득층에게는 그런대로 지지가 높은데 반해, 나이가 많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낮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지지이유도 당의 정치노선이나 이념보다는 ‘다른 기성정당들이 싫어서’가 많고, 상황이 바뀌면 철회할 수도 있다는 사람들이 다수여서 지지층의 강도도 약하다. 이는 민주노동당에 샴페인과 축배는 곧바로 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주변에서는 ‘당장 힘 있는 세력이 아니이서’, ‘저소득층의 사회 안정 희구 성향 때문’ , ‘지역정서에 좌우되는 정치풍토’, ‘고학력 화이트칼라층과 조직노동자와 달리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의 정책과 지향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데서 오는 낯설음’ 등이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보다 본질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바로 정파연합당이라는 정체성에서 보듯이 당내 최대 계파를 형성하며 경쟁해온 민족자주계열과 민주생존계열(평등파)과의 노선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당의 대응전략과 방향의 차이가 늘상 갈등의 뿌리를 이루어 왔다는 사실이며, 진보정당의 원내진출로 높아진 위상만큼 갈등 수위도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정파연합당의 장점보단 비효율, 비생산적인 곳에 동력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 경향이 노출빈도가 높아지면서 당원들의 자심감 상실로 이어지고 또다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대기업 조직 노동자와 운동권 지식인이 선도적으로 만들어온 이력에서 비롯된 민주노동당의 경직된 사업 방식과 조직상태, 우월적 선민의식 등이 사회적 약자들과 만날 수 있는 채널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는 진단이다.

비정규직으로, 실직자로, 신용불량자로 내몰린 사람들의 생활은 너무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서 행동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따라서 불만은 높지만 참여수준은 낮다. 그들의 생계와 직업교육, 취업 알선 등에 책임 있는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 그들의 불안을 안정으로 바꿀 수 있는 다양한 사업과 채널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실직자, 신용불량자가 정부정책의 희생자들이 아닌 ‘열패자’, ‘게으른 자’ ‘배짱부리는 파렴치범’으로 몰리도록 방치하는 이상 민주노동당의 주장은 늘상 ‘말은 고맙지만’, ‘되면 좋겠지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반대, 데모만 하는 정당을 넘어서 서민대중의 희망, 대안정당으로

무언가에 반대하고 저항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반대라는 깃발 하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통일된 힘에 기초하여 무언가를 새로이 건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언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없이는 저항 자체도 갈수록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목소리를 한데 모아서 통일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구와 논쟁 무엇보다 서민대중의 삶에 대한 천착이 필요할 것이다. 때론 추상적이지만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정책과 사회 발전상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수단들은 창조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 많은 논자들이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 즉 ‘평등주의적 성장’의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대안 모색의 어려움은 예외가 아니다. 현재가 문제라면 단순한 반대를 넘어서 과연 어떤 다른 길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실행가능한가,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생산적인 토론이 진정으로 요구되는 시점이다.

“진보정당이 어떻게 서민대중과 함께 호흡해 갈 것인가?”
이 질문에 딱 부러지는 정답은 없으며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서민 생활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는 것에 민주노동당 지역조직의 활동 방식을 맞춰가야 할 것이다. 슬로건 중심의 운동보단 신용구제 상담, 임대차 문제 해결,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층 살피기 등 서민들의 피부에 와닿은 노력을 통해 신뢰를 쌓을 때 보다 많은 서민대중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서민대중의 ‘화풀이’를 민주노동당이 제도정치권 내에서 풀어낼 공간을 마련해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대변자를 자처할 때 그들의 속시원한 분출이 결국은 민주노동당의 지지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맨날 데모만 하는 정당을 넘어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며 싸우는 정당’이 되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진보적 담론을 서민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예컨데 양극화 해소의 구체적인 방법과 전망과 관련하여 ‘수치로’ 뒷받침되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 관료들의 보고에는 그것이 설령 성장 위주로 가는 패러다임이라 할지라도 그안에는 숫자가 있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주장은 흥분된 목소리만 있지 숫자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현실감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불문가지다.

또한 살벌한 용어와 골방에 숨겨진 이념서적에나 등장하는 생경한 단어들로 점철된, ‘칼로 긁어도 글자 하나 안 벗겨질 것 같은’ 그들만의 딱딱한 언어도 내용적 원칙과 주조는 그대로 가져가되 최대한 서민들의 귀에 쏙쏙 박히는 언어로 담금질해야 한다.

분배와 복지 통한 시민사회 연대의 제도화

오늘날 시민사회를 묶어내는 데 있어서 소득 불평등과 복지의 부재로 인한 서민대중의 삶의 질 악화가 역설적이게도 성장을 위한 개발 논리를 강화시켜 정권과 자본의 환경파괴적 개발에 동조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정부가 경기활성화를 위한 건설경기 부양을 이야기 할 때마다 주요한 이론적 배경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분배와 복지의 강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과 무분별한 개발 중단과 생태환경 보호를 요구하는 ‘환경운동’이 연대해야 할 중요한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양극화와 더불어 ‘희망없는 빈곤’이 만연되고, 극단적 선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민들의 연대의식도 점차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자리 이동을 돕는 재교육과 사회적 안전망 구축, 평등한 교육, 의료기회 보장 등과 같은 적극적인 재분배와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의 연대가 제도화되어야 모두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깨어있는 노동.진보진영의 의제설정력 강화

노동.진보진영의 최대 과제이자 난제는 다름이 아닌 의제설정력의 빈약과 차별이다.

대통령과 여당인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그리고 거대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의제설정력에 비해 초라하기까지 한 노동.진보진영의 의제설정력을 여하히 확보하고 현안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이슈화 해내느냐는 진보진영의 성패와 직결되는 핵심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엔 ‘거대한 소수’를 조직하는 방법외엔 달리 묘수가 없다. 진보적인 정당, 시민사회단체, 지식인 그룹, 언론매체 그리고 진보적 네티즌과 인터넷 정치사이트가 상호 유기적이고 신속하게 진보적 아젠다를 이슈화하는 대응능력을 꾸준히 향상시키고, 공유와 연대의 폭을 최대한 넓혀가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밖에 없다. 지금처럼 파편화돼서 ‘각자 최선의 길을 찾아서 가는’ 방식만 고집해선 희망이 없다.

특히 인터넷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진보적 네티즌과 정치사이트의 연대와 신속한 대응능력 제고는 진보적 이슈선점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다원적인 사회와 제대로 된 개혁을 위한 언론의 소임•구실 재정립도 시급한 과제다. 언론이 최근 들어 권력 감시견보다 기득권 수호견 노릇을 하는 것도 사회개혁 차원에서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이처럼 1994년 11월 세계화 선언 이후 겪어왔던 지난한 서민대중의 삶의 조건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은 노동, 진보진영의 힘이 하나의 강력한 정치권력으로서 얼마나 빠르게 제도화되느냐에 온전히 달려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시장일방향적인 흐름이 사회전체에 야기한 균열적 결과는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관심의 증대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 현실정치적 바탕은 결국 노동, 진보진영의 경제사회적 의제에 대한 총체적 대응능력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지지자와 네티즌 일각에서 비정규직 문제등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진보적 대중노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면서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의 진보적 사회발전에 소중한 자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당 지도부나 다른 의견그룹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비정규직,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 등 우리 사회 어려운, 그러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에 천착, 한 묶음으로 특화해서 이슈화와 대안제시를 위한 노력을 집중하고, 이를 통해 시민사회와 지식인 그룹을 엮어내는 ‘진보적 민생연대’를 구축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해서 제3의 독립적인 정치그룹으로 발전해 간다면 한국의 개혁.진보진영은 본격적으로 ‘서민대중과 함께 하방(下邦)에서 호흡해가는’ 진보세력이 전면에 나서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당장은 부족하고 여려운 점도 있겠지만 참을 수 있는 ‘희망있는 배고픔’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들에 대한 진보적 언론매체의 큰 관심과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진보가 서민대중에게 무능하다는 낙인을 피하고 보조를 맞춰갈 수 있는 길이며, 20대 청년세대와도 연결이 되어 이들의 ‘진보우파’라는 기형적 흐름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고, 작금의 노동.진보진영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활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물은 누가 대신 파주지 않는다. 목마르고 급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팔을 걷어 부칠 때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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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19: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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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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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김진표 교육, 타락해가는 ‘동반성장’의 속살

교육부총리 인선을 두고 이기준, 김효석, 그리고 김진표로 이어지는 잇따른 ‘장고끝 악수(惡手)’는 올해 벽두부터 꺼내든 노 정권의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이란 화두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퇴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다.

후임자로 지목된 이들이 각각 ‘부도덕 종합세트’, ‘치졸한 연정’, ‘투기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듯 노 정권의 동반성장의 논리가 얼마나 ‘친재벌, 퇴폐적 성장론’에 마취된 채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지를 보여주는 시그널이 아닐 수 없다.

재임기간 동안 100조원이 넘는 부동산값 폭등, 분양가 원가 공개 반대, 이라크 파병 적극 찬성, 강북 특목고와 판교 학원단지 설치 주장, 무소불위의 상징인 재경원 부활론, 삼성그룹 예찬론 등 교육수장으로서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절감’ 의지는 커녕 교육마저 사교육 투기장으로 전환해 ‘재계가 요구하는 자판기’로 만들겠다는 속셈이 아니라면 이런 인물을 편집증적으로 고집하는 인사권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런 사람을 경제부총리로 다시 경제를 맡기려 했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은 그의 동반성장론 속에 감추어진 ‘타살된’ 분배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교육계는 물론 시민사회가 총력으로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퇴진은 물론, 설사 불발되더라도 향후 철저히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오죽하면 한나라당이 겉으론 반대하면서 노 정권의 실패를 보장해줄 원군으로 여기고 차라리 그냥 놔두고 보겠다 했겠는가.
정권이 타락 조짐을 보이면 이를 견제해야 할 열린우리당의 잇따른 감싸기와 총력방어 추태는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부적격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나서면서 이참에 타락의 맨홀에 함께 빠져들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최근 노 대통령의 잇따른 인사가 인재풀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려 들지만 터무니 없는 변명이다.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로 이어지는 참여정부 핵심의 인사 패착은 인재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작심하고 부패한 ‘경륜’장에서만 사람을 고르는 ‘인식풀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폼나게 드리블 하다 비정규직, 신자유주의 골대앞에 연속 ‘똥볼’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선진경제 진입을 위한 성장-분배의 동반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올해 주요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 진단과 처방책 일부를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위기 해소를 위한 교본’ 첫 장에 나와있는 목차는 잘 외우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각론은 제대로 읽지 않은 듯 보였다. 어떤 부분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거나, 아예 읽지도 않은 모양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 위기극복의 핵심이 양극화 해소에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으나 그 처방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있거나 실행하고 있는 ‘수박 겉핥기식’ 정책의 나열에 그치고 말았으며,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처방의 유효 적절성은 차치하고라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양극화를 사실상 조장해온 정부정책의 과오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기업 노조의 양보는 얘기하면서도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노동자 서민을 위해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 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은 재벌 환심사기 퍼레이드였다.

특히 비정규직의 무차별적인 확대를 가져올 수 있어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비정규관련법의 조속한 국회처리를 언급하고 밀어붙이려는 안이한 태도, 사회적 대타협을 이야기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노동계를 매도하거나 공격하는 데 열을 올려온 이중성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 맹종적 도입의지만 강조함으로써 양극화의 심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나라가 고루 따뜻해지기 위해선 신자유주의란 ‘보일러’를 먼저 점검하는 게 순서라는 일각의 당연한 지적은 외면한듯 보였다.

분배개선과 관련 조세, 재정, 노동, 복지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분배-재분배 방안의 제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분배가 자칫 조금 나은 서민과 정규직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분배’를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그래서 나왔다.

결국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축구선수처럼 ‘선진경제’를 가슴에 달고 폼나게 드리블하다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 골대 앞에서 연속 ‘똥볼’을 차버린 셈이다. 한국 축구의 고질병인 문전처리 미숙이 여전함을 확인하면서 씁쓸함을 곱씹어야 했다.

노 대통령이 틈만 나면 외치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장미빛 전망도 좋고 나쁨을 떠나서 1인당 국민소득이란 것 자체가 국내총생산을 총인구로 나눈 것이기에 그안에는 기실 분배의 개념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연간소득이 1백만 달러인 사람이 1백만명(경제활동인구의 5% 미만)이고 나머지 경제활동인구는 소득이 전무하더라도 2만달러는 달성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직하지 못하는 밑바닥의 유권자들에게 2만달러라는 ‘약속’은 정부의 진정성 여부에 따라 언제든 고통 전가의 캠페인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2만달러 시대론은 애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파이를 빨리 키워한다며 강조한 지론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련화한 것이고,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 핵심들이 경제에 관한 재계의 고귀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 배려보다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깃든 것이다.

투명성 강화와 재벌총수의 전횡 방지를 위해 재벌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을 향해 ‘외세를 등에 업고 삼성의 지배구조에 흠집내려는 작자들’이라는 논리가 국민소득 2만달러 구호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소득 2만달러’의 구호는 서민가계 회복과는 사실상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용카드 남발, 건설경기 부양, 재벌 등 대기업의 경상이익에 의존해온 성장은 서민대중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유지하기 위해 ‘효자 노릇’을 하는 대기업를 더 키워주는 동시에 건설경기를 최대한 부양시킬 수도 있다. 실제 참여정부를 비롯 역대 정부의 정책기조가 대체로 그래왔다.

국민소득 2만달러는 ‘환상’은 아니다. 최근 십여년간의 GDP 추이를 보면 2010년 2만달러 달성은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환율이 하향 안정화가 지속된다면 국민소득의 증가가 예상에 못미쳐도 목표는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 지가 먼저다. 약자를 딛고 서는 방법으로는 설사 2만달러가 돼도 약자인 서민대중은 여전히 빈곤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외침은 재계와 여.야 보수정당, 수구언론의 환호속에 노동.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되레 ‘양극화’를 불러왔다.

심지어 한나라당 마저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선진한국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환영하고 나설 정도였다. 노 정권과 재벌, 수구언론, 한나라당의 ‘新 4자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위용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경제가 어렵다’며 아우성치는 수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의 목소리에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서민 후보’로 인식하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겼다며 호들갑 떠는 일각의 성급한 해석은 이처럼 초장부터 어긋나고 있다.

분배정책에 관심조차 없는,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들

앞서 지적한 대로 노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 나타난 현실인식에 대한 안이함과 공허함 그리고 대안의 구체성과 종합성, 균형감, 이를 가능케 할 사회적 합의 방식의 제시 없이 내용과 의제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지적은 전문가, 언론,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진보진영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충분히 나왔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 아래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대통령의 구상을 행정과 입법으로 실행에 옮기게 될 정부관료와 여당의 대응은 답답하다 못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노 대통령 구상의 실질적 주무부서인 경제총수와 노동부 장관은 과연 이들이 그나마 대통령의 의지조차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헌재 부총리는 오늘날 신용카드 대란의 주범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일까. 저소득층에 대한 일부 원금탕감을 시사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헌재 같은 사람에겐 씨도 안먹히는 모양이다. 그는 참여정부 내에서 시간벌기와 물타기로 분배적 관점의 정책들을 뒤엎는 데 ‘귀재’ 노릇을 해왔다. 실패자란 평가가 지배적인 이헌재 부총리가 돌아온 또다른 실패자 김진표의 교육부총리 입성을 지원사격하고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정도다. 노동계를 향해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적대감을 보여오다 자신의 제자들로부터도 부끄러운 장관이 돼버린 인사가 노사정 대타협을 위한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며 손을 내밀수 있을 지, 그 손을 노동계가 흔쾌히 잡아 줄 지는 예측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참여정부의 대통령과 군사정권시절 마인드에 가까운 관료들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연주하기에는 환상에 가까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99년 수준에도 못미치는 최저생계비 책정을 하면서 1인가구 40만원으로 한달동안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뻔뻔스러움은 수백만명의 서민들에게 일년내내 ‘만원의 행복’을 체험해 보라고 놀리는 듯하다. 정말 ‘장난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정부가 경제 양극화에 주목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나, 해법을 찾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양극화를 독립적인 고민거리로 삼기보다는 성장을 통해 파이(몫)를 키우면 양극화는 자연스레 시장 기능에 따라 해결되는 종속변수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권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친재벌적인 한나라당은 물론, 중도라는 열린우리당도 그런 인식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계의 성장 일변도 논리에 바탕을 둔 이런 논리가 허구적이었음은 무엇보다 지금의 경제 현실에서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청와대 인사마저 “혜택받은 몇몇 경제 주체를 제외한 상당수 ‘일하는 국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다.

청와대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직속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를 중심으로 별도의 연구팀(TFT)을 꾸린 것은 ‘정부 정책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자인한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어떤가. 150석에 가까운 거대정당임에도 분배정책에 대한 어떤 대안도 독창적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럴만한 역량과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경제정책이란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정책들을 다시 읊어대는 데 급급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벤트에만 열중하고 있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열린우리당내 경제정책을 주관하는 부서의 인물들을 보라. 하나같이 과거 성장위주의 관료, 재벌출신의 인사들로 가득하다. 개장사(개혁장사꾼)만 아니라면 한나라당에 있어도 무방한 인사들이 여당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으니 경제에 관한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궁합이 잘 맞을 수 밖에 없고, 실제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킨 법안들은 친재벌, 반노동, 성장우선이 주조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올 한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쟁없는 해’로 만들자며 민생외면에 대한 그간의 국민적 비난을 의식한듯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 거대정당이 민생과 경제살리기라는 아젠다에 있어서 만큼은 정쟁을 하고 싶어도 할 꺼리가 없을 것이다.

‘성장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친재계, 반노동’이라는 경제정책의 기본 뼈대가 같은데 싸움판을 벌여봐야 둘다 반서민적이라는 실체만 들통날 굿판을 굳이 펼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생우선이라는 대국민적 이미지만 채워넣기 위해 적당히 화합한 척 해주면 될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국보법 폐지를 야합으로 무산시켜 가며 이를 지렛대 삼아 기금관리법, 민간투자법, 조세특례법 등 재벌과 정치권에 특혜를 안겨줄 민생악법은 열-한 공조로 사이좋게 통과시키고, 오는 2월에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확산시킬 비정규직 관련법 통과를 예정해 놓으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경제정책의 동질성을 몸소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권력게임과 연관된 일에는 잡탕정당이란 닉네임이 말해주듯 다양해 보이지만 경제사회적 정책에 대한 열리우리당 구성원들의 인식은 일사천리, 천편일률에 가깝다.

당선되자 마자 재벌을 위해 무얼 도와줄 것인가를 찾다가 결국 통과된지 한달도 안된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를 이야기하는 열린우리당의 신임 원내대표를 보라. 불과 한달전 연말 국회에서 “삼성의 로비에 굴복할 수 없다”고 몸싸움 직전까지 가며 출총제 유지를 관철시킨 당의 원내대표가 보여준 ‘기만적인 기회주의’가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란 변명기제를 지렛대 삼아 국민을 하염없이 우롱하고 있다. 얼마나 한심했던지 대통령까지 나서 원내대표에게 신중론을 주문할 정도다.

노동운동 출신이라는 열린우리당 노동담당자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인식은 훼절한 노동운동가들의 인식이 어떻게 현실에 영합할 수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386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삼성그룹 연구소를 찾아가 경제를 배우며 재벌의 문하생을 자처하고 나선 자기모순적인 추태는 그들의 비전이 어디에 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중도’를 내세운 거대정당에 눈에 띄는 분배적 관점의 정책브레인이 한 명도 없는 정당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정이 어러함에도 당내에서 입만 열면 개혁을 주창하던 사람들에게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커녕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아마도 비판을 안하는 게 아니라 왜 비판해야 하는 지 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내에서 최근 교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실용주의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이라는 관점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허떠하리’만 난무하며 ‘멀건 개혁’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러니 ‘선진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 철폐나 부동산 문제와 같은 국민적 개혁과제를 유야무야시킬 조짐이 여권내에서 언죽번죽 고개를 쳐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층의 적반하장,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를 넘어서

우리는 아이엠에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려 164원이라는 국민혈세를 공적자금이라는 미명으로 기업과 은행에 투여한 바 있다. 그런데 일례로 제2의 위기로 불리며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렵다는 오늘의 경제적 위기와 양극화의 핵심 요인중에 하나인 신용불량자 문제를 위해서 7.5조원(=제일은행 살리는데 든 비용, 일부에서는 1조 6천억이면 된다는 주장도 있음) 정도면 획기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처방의 유효성과 적절성에 대한 검토는 차지하고라도 이에 대한 논쟁조차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고 있다. 왜일까.

다름아닌 재계와 수구언론, 관료, 보수.수구 정치권으로 이어지는 기득권층의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는 으름장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지상주의의 사고방식, 분배를 일종의 ‘시혜’ 또는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는, 밑도 끝도 없는 탐욕과 편향된 시각이 가장 큰 장애요소이기 때문이다.

정작 국가를 부도위기로 내몰았던 주범들이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금반지까지 내놓았던 서민대중을 위해서 조금 진전된 대책이라도 들고 나오면 이를 앞장서 반대하는 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다수의 서민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운다.

적어도 성장이 본격화한 60년대 이후 40년이 넘도록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담론이 바로 '성장지상주의'다. 그 결과 오늘날 국민들도 언론도 재계도 정치인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만큼 경제개발예산과 복지예산의 격차가 지독할 정도로 성장일변도의 예산을 편성해온 나라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거의 없을 정도이다. 늘상 복지정책은 언발에 오줌누기에 그쳐왔다.

IMF는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를 세계가 놀랄만큼 빨리 졸업했다며 여러 차례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이 성공한 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 시장을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약탈적인 수익을 합법적으로 걷어가는 데 대성공한 아이엠에프 자신의 자축이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엠에프는 첨병인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 복합체’라 불리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IMF란 고깔을 쓰고 와서 한바탕 걸판지게 놀아주고 걷어간 성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이엠에프의 구상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재계와 수구언론, 정치꾼들로 대변되는 소수의 기득권층이 국가가 아이엠에프의 충견 노릇을 해준 대가로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고 되레 어부지리로 승리를 독점했을 뿐, 절대다수 서민대중은 우리 사회 양극화 현실의 참혹함이 보여주듯 절망에 가까운 패배자가 되었다.

오늘날 개방화, 세계화는 이윤율 저하로 인해 위기를 맞은 자본의 해외투자와 국제적 자본이동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대응에 따라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처럼 미국경제에서 해외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증대하면서 세계경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일종의 신제국주의와 유사한 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여차하면 해외로 나가버리겠다는 위협’을 통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를 강화해 주었으며, 결국 거대 자본에 대해 최대의 자유를 제공하고 국가개입이나 노동자의 저항과 같은 일체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자본과 노동간의 양극화,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아이엠에프를 안 받아들였으면 우리는 이미 망했을 것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아이엠프 당시 이런 미신에 빠져있던 국내 주류언론의 호들갑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미국과 경제학자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 고정환율제, 자본유출 통제 실시 등 아이엠에프 구조조정 요구를 거부하고 철저히 ‘깽판’을 놓은 말레이시아는 지금쯤 부도가 나서 나라를 아이엠에프에 바쳤어야 옳다.

그러나 당시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비웃었던 한국의 관료, 정치꾼, 거대 언론들에게 미안스럽게도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경제를 부분적으로 안정화시켰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빠른 경제회복을 보였다.

이뿐이 아니다. 해외자본유입에 대응하여 자본유입의 일정부분을 1년 동안 중앙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하는 가변의무예치금제도(VDR: variable deposit requirement) 혹은 URR (unremunerated reserve requirement)이라 불리는 부분적인 통제정책을 실시, 단기자본의 비중을 줄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늘이는 효과를 낳았다고 평가되는 칠레의 경우도 있다.

비록 투자를 촉진하는 해외자본의 역할이나 경쟁 촉진을 통한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 등 세계화의 이득을 감안하더라도 개방화, 세계화만이 선(善)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주장을 펴는 성장위주의 경제관료, 경제학자, 주류 언론, 정치꾼들의 고정관념은 병적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성장우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만능주의로 점철되고 있는 지배적 담론을 바꾸기 위한 언론과 지식인, 정치권, 특히 진보진영의 노력이 얼마나 절실한 지는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며, 노 대통령의 주장처럼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논쟁을 하루속히 우리 사회 거대담론의 중심에 올려놔야 할 것이다. / 편집위원
 
(계속 이어집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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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저리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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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진보. 좌파가 너무도 절실한 사회

2005/01/28 [23: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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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언저리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1)
[신년 제안] 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김영국

대자보 창간 6주년을 맞았습니다. 대자보의 오늘을 있게 한 독자제현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두 개의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시대

대한민국 분단의 역사는 참 모질고도 길다.

동족상잔의 남북 분단, 남한내 지역갈등의 동서 분단, 그리고 2004년부터 선명하게 모습을드러낸 상류층과 서민대중사이의 극심한 빈부격차가 낳은 ‘양극화 분단(economic polarization)’

‘삼팔선’이 아직도 남북을 가르고 있는 채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는 어느덧 ‘오오선’, ‘이팔선’이 칼자국처럼 아로새겨지고 있다.

나라를 부도위기로 내몰고도 164조원이라는 엄청난 국민혈세를 머금고 부활한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과 은행 그리고 이들 주식을 헐값에 사모은 외국인투자가들은 오늘날 주체할 수 없는 수익과 현금, 상여금 등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 언저리에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이 날아드는 영수증과 고지서를 앞에 놓고 텅빈 지값을 매만지며 눈물과 함숨을 짓고 있다.

분단은 그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중대한 정치적 변혁을 수반해왔다. 2004년부터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 분단’은 또 어떤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앞선 두 번의 분단은 한국 정치를 기득권층과 수구언론의 잘 짜여진 프로파겐다로 ‘반공’과 ‘지역정서’라는 우산속에 온갖 부패와 정치적 퇴행을 양산했다.

쌍방향 소통구조가 한층 강화된 지금, 경제적 양극화 분단이 서민대중에게 굴절없이 전달되고, 각성을 가져온다면 그 처방과 극복과정에서 한국 정치는 분명 또다른 질적 변화를 초래게 될 것이다.

참혹한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현실

우리사회는 상위 20%의 국민이 부(富)의 80%를 누리고 있다. 이른바 ‘2대 8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이 같은 소득불평등의 갈등구조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중산층이 소멸해가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의 상위층과 하위층, 강남과 강북,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기업과 가계),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반목과 대립도 기본적으론 2대 8 법칙이 낳은 병폐다.

‘아랫목과 윗목’, ‘보일러 교체와 담요 몇 장’ 그리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오’ 등으로 언명되는 2005년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현실은 실로 참혹하다.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와 소득의 원천이 되는 ‘땅’은 상위 5%의 사람들이 절반 가량을 갖고 있고, 상위 20%까지 확대하면 이들이 우리나라 땅의 70%를 소유하고 있다. 땅에 비하면 주택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주택소유 총세대수는 832만 세대로 이중 2채 이상의 집을 가진 세대가 276만 세대에 이른다.

땅값은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95조원씩 불어났고, 땅값이 10%만 올라도 토지 소유 상위 5%의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105조원을 벌게 되면서 땅값, 집값이 들썩거릴 때마다 한국은 소수 지주들과 부자들에게 축복의 나라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희망없는 미래이다.     © 대자보


이처럼 땅과 집의 극심한 소유 편중은 가격 상승과 함께 빈부격차를 더욱 크게 벌려놓는 핵심 요인이며, 건축 인•허가, 불법적인 토지의 형질변경 관련 떡고물로 공무원 부패의 온상일 뿐 아니라 난개발의 요인이기도 했다.

‘불황땐 누구나 어렵다’는 상식도 한국에선 이제 사실이 아니다. 외환위기 때보다 힘들다던 지난해, 상장 대기업과 은행들은 유래없는 호시절을 누렸다.

12월 결산 상장기업(금융업 제외)의 당기 순이익은 지난해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런 수익의 대부분은 상위 5개 기업이 전체의 43%를 차지했고, 상위 10개 기업으로 보면 전체의 57%나 될 정도로 소수 대기업이 폭식함으로서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재계의 주장은 뭔가를 더 얻어내기 위한 엄살에 불과했다.

저금리 기조 속에 공격적으로 대출 규모를 늘린 은행들도 예대마진과 일반 수수료 수익을 통해 사상 최대의 순익을 냈다.

이들 상장 대기업과 은행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늘날 극심한 양극화 분단을 초래한 아이엠에프 사태의 주범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국민혈세를 수혈받아 부활한 최대의 수혜자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의 외국인 지분율이 높다는 점이다. 은행 주식의 65%, 상장사 전체 주식의 43%를 외국인들에게 내주었다.

나라 경제는 침체에 허덕이고 있지만, 몇몇 대기업과 은행의 주주들 그리고 외국인 투자가는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민대중의 어려움에 매우 인색하거나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주식시장의 전광판이 900포인트를 넘나들며 연일 ‘빨간 불쇼’를 펼쳐도 개미들의 환호는 온데간데 없고, 외국인투자가와 일부 발빠른 기관투자가들의 미소속에 먼나라의 축제가 돼버린 지 오래다. 주식시장을 통해 조달한 자금이 설비투자 재원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줄어들면서 더 이상 ‘자본주의의 꽃’이 아닌 소수 재력가와 외국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해 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에 대한 배당과 지급이자로 유출된 돈은 총 64조원 가량으로 '삼성전자' 하나를 날렸다. 이 돈은 또 ‘국민기업’ 포스코 네 개, 국민은행 다섯 개를 살 수 있는 액수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들이 올린 시세차익도 13조원에 이른다. KT 같은 우량 기업 하나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간 셈이다.

외국계 투자기관이 매입해 소유한 서울의 주요 업무용 빌딩만 총 4조2,294억 원에 이른다.

물론 이런 국부유출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불파기한 ‘외환위기 비용’이란 성격도 있지만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에 휘둘려 워낙 싼값에 매각함으로써 그 몇 배를 지불했음에도 외국인이 납세나 인건비 지출, 선진기술 도입을 통해 국민경제에 기여한 몫은 작다는 점이다.

정부가 5조원의 국민 세금을 날리면서 매각한 제일은행의 인수자 뉴브리지캐피탈과 한미은행의 칼라일펀드, 강남 스타타워의 론스타는 각각 1조 2천억, 6천억, 2천 6백억의 수익을 걷어갔지만 이들은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 컴퍼니 설립 등의 방법으로 돈은 우리나라에서 벌고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일본의 신세이 조항이나 영국과 미국의 횡재세 부과 등 외국에도 있는 투기자본의 조세회피방지 조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외국자본만능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대기업과 은행 그리고 외국인의 즐거운 비명 뒤엔 대다수 중소기업과 서민대중의 힘겨운 신음과 화병(火病)이 이어지며 깊어진 소득격차만큼 갈등은 커지고 희망은 엇갈리고 있다.

대기업들이 각종 원가부담을 약자인 중소 협력업체들에 떠넘기는 불공정거래가 횡횡하면서 중소기업들은 이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노동자의 임금 삭감으로 전가하기 때문에 기업 규모에 따른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 수준은 해가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의 65%가 대기업과 하도급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마피아보다 무섭다는 원청기업의 보복이 두려워 중소기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매년 ‘시아르(납품단가 인하)’를 감내하고 납품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재하청 업체를 쥐어짜고,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이는 또다시 중소기업의 투자 여력을 갉아먹고, 기술력을 쌓을 틈이 없어져 ‘협력 파트너’로서의 지위는 갈수록 열악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돼 온 것이다.

그런가하면 중소기업과 서민대중은 얌체 전당포가 돼버린 은행들로부터 각각 ‘요주의’, ‘담보대출비율’이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사채와 카드깡으로 내몰리면서 살인적인 ‘이자의 덫’에 걸려 헉헉대며, 그것도 모자라 각종 금융거래 수수료 인상과 확대로 곤궁한 주머니만 털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3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0위나 된다. 소득증가율, 경제성장율, 수출증가율도 각각 7위. 6위, 3위를 기록하며 상위에 속했다. 2004년 우리나라 수출은 2500억달러 규모로 연간 30%선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쾌속 질주를 이어갔다.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해 왔음이 다시한번 확인된다. 1인당 국민소득(명목 GNI) 1만2646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하위권이라고는 해도 일단 양적인 면에서 선진국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수치에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경제규모의 급성장에 걸맞게 국민 대대수의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인가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노동시장의 먹이사슬 맨 밑바닥에 약탈적 저임금에 시달리며 ‘제3 신분’으로 굳어진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56%) 800만명이나 깔려 있으며, 넘쳐나는 실업자(80만)와 신용불량자들(380만), 국민기초생활보장 비수급 대상인 차상위 빈곤층(300만)이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면서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728만원 對 53만원'로 표현되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월평균 소득격차, 민망할 정도로 추락해버린 노동소득 분배율(59%), 전국 10가구중 3가구꼴로 적자, 가구당 빛 3,000만원꼴 사상최대, 발표될때마다 ‘사상 최고치’라는 꼬리표가 붙어 나오는 부정적인 경제지표들,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는 세상이다”며 푸념하는 근로자들, 위기를 넘어 절망을 체감하고 있다는 국민이 압도적이라는 여론조사 수치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서민대중의 적나라한 ‘고통지수’이다.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엄청난 수의 서민대중이 빚에 쪼들리고, 갚지 못해 이혼과 자살 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는 가족과 사회 해체의 위기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연대가 깨지고 사회 구성원들 상당수가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는 10가구 중 1가구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으며, 절대빈곤층 중 노인.장애인.여성비율이 높아지고,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비율도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소득보다 높은 지출을 할 수밖에 없으며, 부채는 늘어나고 신용불량자로 내몰리기 쉬운 취약계층이 된다.

이들의 초과지출을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요인들이 주로 민간시장에 맡겨 운영되고 있는 주거, 교육, 의료다. 이미 평균소득층도 교육비와 주거비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식구 중 암 환자 한 명 생기면 가족전체가 길거리에 나앉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어 버렸다. 기초적인 생활 유지와 자녀 교육에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소득층과의 현격한 격차가 고착화 되면서 빈곤은 세습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게을러서 혹은 눈이 높아서 빈곤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운이 좋아서 가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빈민에게 찍었던 ‘주홍글씨’는 빈곤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에 찍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21세기’라는 첨단 자본주의로 문명화된 사회속에서, 기이하게도 ‘빈곤’의 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양극화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현실의 실상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빈곤의 한계선으로 하양이동을 하고 있는 ‘초극화’가 사태의 진실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점에서 앞서 말한 2대 8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도 이제는 고전이 되어가고 있고, 오늘의 현실은 차라리 ‘1대 9’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우리사회를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정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 ‘양극화 분단’은 이제 사회 갈등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 나아가 민주주의 기반을 위협하는 절박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건 내수다. 그중에 특히 소비의 침체는 2003년 OECD국가중 가장 낮은 민간소비 증가율이 보여주듯이 정도뿐 아니라 기간도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심각한 상태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처럼 소비가 안되는 이유도 2001년과 2003년 신용카드 남발과 부동산 군불 같은 ‘모르핀 주사’에 취해 일시적으로 반짝 호황을 누렸던 신용카드 거품과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엄청나게 불어난 가계부채가 소비여력을 잠식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여기에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정규직조차 미래가 불확실해져 장래를 걱정하게 되면서 더욱 소비를 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의 미비는 서민대중 스스로 식당과 택시기사 등으로 ‘개인 안정망’ 삼아 전업하면서 자영업자의 폭증을 방치했다. 선진국에 비해 세 배나 높은 자영업자 비중은 오늘날 공급과잉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구조적인 문제화 되어 사태해결을 더욱 어럽게 만들고 있다.

얼빠진 일부 언론에서는 소비 진작을 위해 지값을 열라고 다그치지만 서민들은 지값을 열어도 그 안에 돈이 없다. 정작 지값을 열어야 할 재계와 상류층은 사상 최대의 현금을 쌓아두고도 뒷짐지고 투자가 급한 정부를 압박하며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활용하려 들거나, 일부는 국내 소비보다 해외 소비를 늘리면서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고용불안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비정규직과 소외계층은 경제가 좋지 않으면 지갑을 빨리 닫고, 경기 회복기에도 지갑을 늦게 여는 경향성 때문에 이들 계층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소비 회복이 늦어지는 현상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

대안은 차고 넘쳐, 정치주체들과 국민의 관심과 의지가 문제

이쯤되면 체질적으로 혹은 조건반사적으로 “그럼 대안은 뭔데”라고 되묻거나, “그래밨자 당신도 찌질이(?)과 아니냐”며 힐끔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조금 솔직해 지자. 대안이 뭔데라고 묻기 전에 관심 좀 가져보자고…경제적 양극화의 부작용과 해법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진보적 정책 대안은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흘러 넘칠 만큼 나와 있었다. 다만 언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고, 국민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정치꾼과 관료들은 생각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진보적 대안은 늘상 시뮬레이션은 커녕 테이블에 조차 초대받지 못했고, 딱 그만큼 오늘의 서민대중들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거 아닌가.”

실제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불평등이 심한 나라의 성장률이 낮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쪽으로 잠정적 결론이 내려져 있다.

상식적으로도 혁신을 이루는 위쪽(대기업 등)을 아래쪽(중소기업 등)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위쪽도 차츰 힘을 잃게 마련이다. 또한 사회 안전망을 갖춰야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약해지고, 리스크(위험)를 안는 경제 행위를 하게 되기 때문에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도 보완 관계를 이룬다.

부유층의 저축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과잉자본으로 부동 자금화하는 경우라면 ‘부유층의 높은 저축과 고투자가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경제학 고전파의 설명은 정책적 유효성을 잃고 만다. 더욱이 부유층의 소비가 수입품으로 향한다면 부유층의 소득이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실태가 이를 증명해주 고 있다.

케인스주의에서는 ‘소비 성향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야 소비 증가 → 생산 증가 → 투자 증가 →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정반대 경로를 제시한 바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푸는 데서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해법의 부재보다는 덮어놓고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으로 여기는 ‘성장-분배 논란’의 저급성이다. 양극화를 풀려면 다양한 분배, 재분배 정책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는 곧바로 성장 잠재력을 해친다는 논란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좌파 정책이라는 ‘색깔 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이런 인식은 특정 정치 세력에 머물지 않고 양극화의 피해자인 중간선 아래층의 뇌리에도 광범위하게 각인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경제에 있어서 사람의 창조적 아이디어보다 설비투자나 노동 시간을 많이 투입하는 양적 성장일변도의 모습을 보이는 사회에서 분배 정책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소비’로 여겨져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이란 단순 논리만 득세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여유 시간 동안 학습을 하게 되고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따뜻하면서도 당연한 추론은 발을 붙이기 어렵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소득 및 부의 불평등도와 경제 성장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성장과 분배가 상충한다는 고정관념은 깨지기 시작했다.

또한 현대 경제학자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심한 경제일수록 성장률도 낮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데 폭넓은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복지 정책을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은 물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미국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1993년부터 미국에서는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재분배 정책 지표들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으며, 미국의 전체 계층에 대해 학자금 이용 가능성을 완전 평등하게 할 경우 장기 균형 국내총생산(GDP) 수준이 3.2% 증가한다고 분석됐다. 또한 GDP 6%를 재분배에 사용할 경우(상위 30% 소득 계층이 하위 70% 계층을 지원하는 방식) 하위 계층의 인적 자본 투자 증가로 미국의 장기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오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거대 언론에 뻔질나게 이름을 들이미는 성장위주의 경제학자나 관료, 정치인들의 주장중에 진보적인 대안적 경제정책에 대해 흔히 하는 ‘비아냥’이 있다.

그것은 분배중심 혹은 분배와 성장의 조화에 초점을 둔 진보적 정책으로 ‘한국경제를 실험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대한민국 50년간 우리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으며 이렇다할 분배정잭 한번 써본 적이 없다.

심지어 수구세력에 의해 좌파적이라는 터무니 없는 공격을 받았던 참여정부조차 대통령과 경제수장까지 나서 “참여정부는 분배정책은 커녕, 존 케리 미국 민주당 후보진영보다도 보수적이다”고 실토할 정도다.

그 결과는 어떠 했는가. 한국은 사상초유의 국가부도사태 직전으로 내몰렸으며, 오늘날 절대다수의 서민대중이 80%의 부를 움켜쥔 소수 기득권층의 담벼락 언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야만적인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실험이 지난 50년도 부족해서 얼마나 더 대한민국을 실험해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사회는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앞이 안보이는 빈곤’이 우리사회를 향후 어떻게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한 사회가 절망상태의 빈곤의 확산으로 히스테릭한 변화심리가 대중들의 허한 가슴을 채워갈 때 만나는 사회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는 교훈을 역사는 우리에게 수없이 가르쳐 주었다.

최근 결식아동의 부실 도시락 파문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결식아동들이 전국에 몇 십만명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이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후일 훌륭한 대한민국의 인재로 자라서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라면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이 성공했을 때 또 다른 소외계층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도움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구성원들이 나눔의 미학을 실천한만큼 더불어 성장할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재능이 있어도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일 경우 국가나 사회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때 공공의식을 갖춘 인적자본의 확충이라는 측면에서 그 효과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미국 피터 린더트 교수를 비롯한 현대 경제사학자들이 소득 재분배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며 제시한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free lunch puzzle)를 우리도 한번쯤 제대로 풀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복지확충과 분배개선은 더 강조돼야 한다.

양극화 해법, ‘힘있고, 가진 자’들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우선

양극화의 교과서적 해법은 빤하다. 양극화의 원인을 고스란히 뒤집어 산업 연관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혁신을 유도하며, 인적 자본을 육성함과 아울러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결국은 중산층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제조업은 물론이고 복지, 문화관광 등 서비스업, 특히 교육과 같이 인적자본이 필요한 분야 등 유망산업을 많이 발굴해 내야만 한다.

소득의 ‘재분배’ 정책과 함께 부동산, 금융자산, 교육인적 자본 투자방식의 개선을 통해 자산의 원천적 ‘분배’ 개선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영미형으로만 갔을 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있겠는가. 외환위기 이후 영미형이 최고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효율성과 일자리 창출에서 강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큰 단점이 있다. 따라서 영미형이나 유럽형이 아니라 제3의 한국형일 수 있는 그런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모든 문제를 시장으로만 해결하려는 시장 만능주의가 팽배해있다. 영.미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의료와 교육, 교통, 심지어 물까지도 사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런 지나친 불균형을 바로잡는 게 국가와 시민사회다. 아직까지 민주주의와 참여가 부족한 데 따른 일방통행이 잦고, 그 폐단을 뒤늦게 시정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첫 단계부터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당사자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치열한 세계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원은 우수한 인력이다. 때문에 기든스가 말하는 ‘사회투자형 국가’를 지향할 필요도 있다.

양극화 분단을 딛고 따뜻하고, 고루 잘사는 사회로 가는 길에는 무엇보다도 정치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힘있고, 가진 자’들의 서민대중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수혜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길이란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갖는 것이다.

‘힘없고, 덜가진 자’들의 역지사지는 늘상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결의 열쇠 ‘비정규직’, 일한만큼 받는 보상시스템 세워야

비정규직의 증가와 이에 대한 처방은 우리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는 첫걸음이자 열쇠이다.

엄청나게 불어난 비정규직의 숫자도 문제거니와 여기엔 고령자, 노동시장에 신규진입하는 청년 세대, 70%가 비정규직인 여성의 열악한 노동조건 등 우리 사회 소외계층의 제반 문제가 비정규직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천4백만 노동자중 비정규직이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자녀 둘 중 하나는, 어쩌면 둘 모두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심각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하는 일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극심한 차별이다. 비정규직은 최소한 10%포인트 가량 불합리한 임금차별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하는 일의 성격이 거의 같고 생산성에도 큰 차이가 없어서 차별의 정도는 훨씬 크다.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비정규직은 똑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고용불안에 대한 보상을 얹어 오히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란 주장도 있다.

지금의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차별만 따로 해소하는 묘수는 없다.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비정규직 고용을 금지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정부, 기술•숙련도 향샹체계 구축을

중소기업을 소홀히 해선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고용 창출 능력 때문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5년 동안 300명 이상 대기업 제조업체의 고용 인원은 20만7천명이나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에서는 20만3천명이 늘어났다.

또한 우리나라 노동자중 300명 이상 대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 126만여명(10%)를 빼면 나머지 90%는 중소기업에 근무한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조직률이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필요성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소기업은 이렇게 고용 인력이 증가한 반면 기술력 향상은 뒤처진 탓에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갈수록 둔화하고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기술투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숙련도 향상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직접 대규모 연구소를 만들어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새 기업을 만들어내며 지분 참여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생력 있는 혁신형 중소기업 시장을 공공서비스 영역 등에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핵심분야인 연구개발쪽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지원하고, 대학과의 결합, 지역과의 결합(클러스트) 등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 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새로운 ‘수평적 협력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수입의존도가 높은 핵심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를 위해 정부가 중소기업을 대폭 지원해서 대기업 납품은 물론 중국 등에 수출이 가능한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케인지언 복지국가(Keynesian Welfare State)와 더불어 슘페터리안 근로국가(Schumpeterian Workfare State)로서의 역할도 함께 고민할 때다.

문제는 혁신형 중소기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개발해서 제공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들의 육성과 함께 나머지 200만~300만 중소기업들도 먹고살 방안을 마련해가면서 서서히 구조조정하는 이원적 대책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대기업들도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기회를 준다면, 중소기업들도 경영의 예측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술 투자 등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중소기업 쪽도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토지 보유세 강화, ‘양조(良租)가 악조(惡租)를 구축(驅逐)하게 해야’

실제 부동산값의 지속적인 상승은 부동산이 별 세금부담 없이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준다는 인식하에 국민의 상당수가 ‘투자’ 대열에 가담하기 때문에 ‘부동산 불패신화’를 만든 것이다.
과세부담이 없는 만큼의 미래 기대수익이 현재가치로 할인돼 가격에 반영되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10분의 1에도 못미치는 ‘부동산 보유세’를 현실화 하는 것은 부동산값 안정뿐아니라 소득의 재분배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가격 급등기에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임시방편으로 투기심리를 위축시키는 데 그쳐왔고, 보유세는 오히려 줄어왔다.

또한 집값 문제는 정부가 경기부양 수단으로 건설 경기를 끌어올리려 늘 ‘오바’하면서 나타난다. 단순히 주택건설을 활성화하는 차원을 넘어 투기를 유도하는 쪽으로 나아가버린다.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집값 상승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1년부터 2004년 5월까지 전국 평균 집값은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12%)의 5배나 되는 60%가 올랐다. 정부가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를 풀어, 집을 사서 팔아 돈을 남길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의 공급이 늘어나는데도 반대로 집값은 폭등한다는 데 있다. ‘거품’은 점점 커지고, 서민들은 올라가는 임대료에 등이 휜다. 작은 집을 가진 사람도 큰 집으로 옮겨갈 때 부담을 키운다. 가계가 대출을 통해 뛰는 집값을 감당하는 사이 그만큼 소비 여력은 줄었고 경기흐름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정부는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진정으로 보유세 실효세율을 의미있게 올리도록 해야 한다.
종합부동산세도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투기나 과다 보유를 억제하고자 한 입법취지를 충분히 살려야 할 것이다.

한편 토지 보유세를 강화하되 대신 건물분 재산세, 부동산 거래세(취득세, 등록세 등)와 같이 건축 활동, 부동산 거래 등을 위축시키는 ‘나쁜 조세’를 감면하는 ‘조세 대체’를 통해 투기억제와 경제 활성화는 물론 조세 저항 문제도 함께 해소하는 정책도 시도해볼만 하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기득권세력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보유세 강화 의지와 종합부동산세 도입 취지가 크게 퇴색하면서 초기의 약속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인가 신자살(殺)주의인가, ‘외양간 무너지는 데 소값 흥정에만 정신 팔려’

주로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추진으로 상징되는 개방화, 세계화는 우리 사회에 세 가지 상반된 불안요소를 안겨주고 있다.

하나는 FTA가 WTO와 달리 ‘당사자주의 및 지역주의적인 특혜무역체제’라는 특성상 블록화를 통해 역외국 차별이 심해지고 있는 만큼 적극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무분별한 대외개방과 세계화로 외국 자본 및 상품과의 가격경쟁과 이윤경쟁을 심화시켜 자본과 기술에서 경쟁력을 지닌 기업들에게는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반면에, 중소기업들에게는 가격경쟁력 약화에 따른 생산 포기를,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노동강도 강화,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농민들에게는 값싼 농산물의 수입에 따른 소득 감소를 가져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방을 밀어붙일 경우, 반발과 사회분열만 증폭시킬 것이란 것도 문제다.

한국정부도 각종 FTA 협상 추진으로 개방화 세계화를 내걸고 있으나 국민의 권익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평가도 많다. 그럼에도 참여정부는 ‘개방형 통상국가 전략’에 따라 2007년 안에 20여개 국가와 FTA 체결을 목표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과 캐나다를 비롯 일본, 중국 등과도 FTA를 체결하고 이어 아세안까지 아우르는 경제공동체를 구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통상교섭본부는 최근 FTA국을 새로 출범시키는 등 사실상 ‘올인’체제로 들어갔다.

물론 개방화, 세계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주요한 발전전략으로 삼아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서 FTA는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일 수 있다.

올해부터 전 세계 교역량의 50% 이상이 FTA 체결국 간에 이뤄질 전망인 가운데 한국도 무역 규모 세계 11위로 수출 비중이 높고, 대외의존도가 70%에 이르는 나라인 만큼 교역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서, 또한 FTA 확산이라는 흐름 속에서 배제될 때 가격경쟁력 저하와 시장상실 및 생산기지 이전의 가속화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해외시장 유지를 위해서는 FTA를 보완적인 통상정책으로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더욱이 한국 경제상황이 생산 소비 투자 등 모든 지표가 저조하고 수출마저 주춤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FTA를 통한 수출 증대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한-싱가폴 FTA의 경우처럼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한국산(내부거래)으로 인정키로 합의하면 북한 진출기업의 걱정을 덜고, 남북 경협의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의 영미식 시장만능주의, 개방 완충장치 빨리 마련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시장개방을 전제로 한다. 시장이 개방되면 얻는 것이 있지만 잃는 것도 없을 수 없다.

특히 일본과 FTA가 맺어지면 자동차, 전자 등 한국의 주력산업이 대부분 일본과 경쟁관계인데다 부품소재•기계산업 등 기술경쟁력에서 뒤지는 국내 핵심산업도 구조조정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고,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력 악화로 잘못하면 나라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도하개발아젠더(DDA) 협상의 경우처럼 미국 주도의 초국적 자본의 무한 이윤창출을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대다수 서민대중에게는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개방화로 타격을 받게 될 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국내 산업의 고도화와 경쟁력의 확보를 통해 실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수립으로 ‘개방화 수용기반’을 미리 다지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준비된 전략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체결했을 경우 자칫 외국에 우리 시장만 내주고 기술력이 뒤지고 경쟁력이 취약한 기업의 줄도산을 자초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에 따른 국민적 반발을 사게 될 우려도 매우 크다. 올해 개방이 본격화되면 경쟁력이 낮은 중소기업 등이 반발, 사회적 마찰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방으로 피해를 입을 이해집단의 반발을 무마하고 이들의 생존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다. 그런점에서 지금 정부는 그간의 협상결과도 불만이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고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다자간 무역자유화와 달리 FTA는 정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인 만큼 시장에 모든 걸 맡길 게 아니라 국가가 개입해서 폐해를 줄이고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경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일부 품목의 양허제외 및 이행기간 설정,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고 우리 산업에 피해가 적은 곳부터 시작하는 등 개방대상과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어떤 모델이건 지금보다는 사회적 연대와 형평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미 개방경제로 가면서 농업•재래중소기업•재래유통시장은 경쟁력을 잃었다. 이들을 연착륙시킬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건설을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협상을 추진하는 정부관료들의 적극적인 FTA 추진만이 살 길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조급성’때문에 개방화의 부작용을 소홀히 하거나 , 협상의 투명성과 국민적 의견수렴 절차에 무성의한 그들만의 ‘밀실주의’는 가장 먼저 시정해야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통상협상은 국민의 생존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협상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통상정책 체결절차에 관한 법 및 정보공개법, 잘못된 협상에 대한 국가보상법 제정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추진된 개방화 정책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재점검하고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시장에서 사회적 연대원리를 확보하고, 개방에 따른 완충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우리사회가 이를 어떻게 수용할 지를 공론의 장에서 해결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국가의 조정 능력을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개발독재의 잔재 속에서 영미식 시장주의가 매우 조악한 형태로 들어왔다. 요즘 말하는 시장은 사실은 자본의 이해관계를 시장의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측면도 있다.

지난날의 과오와 외국사례 등을 돌이켜보고 우리의 경제성장 단계에 맞는 통상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 편집위원
 
(계속 이어집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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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진보. 좌파가 너무도 절실한 사회
양극화 다룬 ‘대립과 갈등을 넘어’방영
2005/01/25 [20: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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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5.1.25)

:
Posted by 엥란트

명품 진보. 좌파가 너무도 절실한 사회
짝퉁 판촉경쟁에 외면받는 진품, 서민대중 사랑받는 명품으로 거듭나야
 
김영국
오늘날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추구하는 개혁의 실체를 일컬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사자성어만큼 적절한 표현도 드물것이다.
정치는 기회주의적 개혁, 경제와 외교는 성장위주의 보수.수구적이며 대미의존적인 노무현 정권의 좌충우돌식 ‘실용주의’의 폐혜는 어제 오늘 지적된 사항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개혁의 표상들은 참여정부 출범이후 각종 개혁정책의 후퇴와 반서민적 변질 그리고 어제 주미대사로 내정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인사까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며 그 결과는 고스란히 서민대중의 외면과 레임덕에 가까운 지지율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민주노동당의 노회한(?) 한 의원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권의 각종 정책을 둘러싸고 벌인 볼썽사나운 좌파, 진보 입씨름을 보면서 “한나라당이 ‘좌파 짝퉁’인 열린우리당을 ‘좌파 명품’이라고 하면 허위사실유포죄에 해당하고, 여당도 짝퉁인데 명품인 척하면 사기죄에 해당한다. 정작 우리 명품(민주노동당)은 조용히 있다.”고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체성 부분에 관한한 가히 촌철살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진보, 좌파의 ‘진품’이라는 데는 그런대로 동의할 수 있겠으나 과연 ‘명품인가,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 민주노동당 보다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정당들이 명품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진품이 아닌 짝퉁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지는 명품이 드물고 비쌀 때 어쩔수 없이 짝퉁을 주로 찾게되는 소비구조에 기인한 것이다.

어쩌면 민주노동당을 비롯 진보진영 모두에게 부족하고, 시급히 달성해야할 과제중의 과제가 바로 ‘진보가 명품 되기’ 아닐까.

이미 대한민국의 진정한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기회주의적 노선으로 보수화 되면서 일탈해 가고 있다면 그 짐을 고스란히 민주노동당과 노동계, 그리고 진보적 시민사회단체가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진보가 하루속히 명품이 되어야 할 이유는 그만큼 절실한 과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민주노동당은 대기업, 공공부문 노동자 중심주의에 따른 중소기업, 영세기업, 비정규직, 실직자 등 광범위한 소외계층의 주변화와 이로 인한 계급적 협애함과 노동자 계층간 양극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전선 부족, 투쟁과 파업 등으로 점철된 단편적 전투방식의 식상함과 이로 인한 서민대중과의 괴리와 고립 등으로 두 거대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을 진보진영으로 물꼬를 트는데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와 여,야당의 민주노동당 ‘무시’는 도를 넘어 진보정당이라는 사자새끼를 키워줄 수 없다는 듯 의도적으로 전개되면서 전체 국민의 15%에 달하는 진보적 서민대중들의 목소리까지 제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열린우리당의 우왕좌왕식 개혁 이벤트에 동원되는 ‘5분 대기조’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노동자 농민 빈민등 절대다수의 소외계층을 대변하겠다는 민주노동당이 이들의 본부중대나 최소한 정찰조가 되려는 노력보단 열린우리당의 보조정당에 그치고 있는 모습에 지지자들이 답답해 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열린우리당의 대체정당이 되려 하지 않고 보완정당에 그치는 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열린우리당과 함께 개혁.진보라는 패키지로 연동하여 움직이는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계하고 어떻게 하면 서민대중으로부터 진보가 명품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물론 민주노동당이 처한 현실에 비추어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매우 중압적이다. 맛뵈기로 10석 안겨주고 요구수준은 100석에 가까운 일을 해내라고 하니 가랭이가 찢어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대가 존재하는 만큼 희망적인 것은 없다’는 신념으로 극복해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해답 또한 ‘서민대중의 삶’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건 불문가지가 아닐 수 없다.

서민대중의 경제사회적 삶의 문제보다 본질적인 것은 없다

'728만원 對 53만원'로 표현되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월평균 소득격차, 전국 10가구중 3가구꼴로 적자, 가구당 빛 3,000만원꼴 사상최대, 기초생활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자살 등 극단적 선택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新빈곤층만 300만명, 정규직 임금의 절반수준에 각종 혜택 배제대상인 비정규직 800만명, 80만 실업자에 청년 실질실업률10%대 육박,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신용불량자 380만…

발표될때마다 ‘사상 최고치’라는 꼬리표가 붙어 나오는 부정적인 경제지표들,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다는 근로자들, 갈수록 위기를 넘어 절망을 체감하고 있는 국민들...

2004년 마감을 앞둔 한국사회의 서민경제가 그려낸 비극적인 자화상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절대다수의 서민대중이 겪고 있는 경제사회적인 삶의 황폐화보다 더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실제문제(real issue)는 없다.

아마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노무현 정부와 60년대식 간첩사건 레크드판을 틀어놓고 활극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 그리고 특정 당파성에 휘둘리며 ‘넷심’을 조종하려드는 일부 인터넷 정치사이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이 명품대접 받기 위한 정책역량의 핵심은 서민대중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기업, 자영업 노동자, 실직자와 신용불량자 등 정부는 물론 여.야 정당에서 조차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대변해주지도 않는 이들을 ‘생존의 문제’로 한데 묶어내는 거대한 ‘생명벨트’를 시급히 구축하는데 기울여야 할것이다.

경제문제에 관한한 한나라당과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성장우선주의와 친재벌적이라는 정체성에서 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플러스마이너스 2%쯤에 불과하다.

노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는 사회 양극화 해소 의지와 분배적 관점의 유럽식 모델에 근거한 소외계층 지원 의지를 소리 높여 외치고 다니면서 마치 한국사회가 사민주의 나라가 건설될 것처럼 홍보하고 다녔다.

그러나 국내에선 어떤가. 실제 정책으로 추진되는 입법과정에서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을 심화시킬 ‘비정규직관련법’, 전무후무한 재벌특혜법이라는 ‘기업도시특별법’, 소외계층을 수혜대상에서 간단히 제외시켜버린 ‘퇴직연금법’, 여.야 거대 정당에게 400억이 넘는 면세혜택을 가져다주는 ‘조세특례제한법’ 등을 옹골차게 추진하면서 이제는 대통령이란 자리마저 해외용과 국내용으로 분리하는 희안한 분권(?)의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그 잘난 시스템주의는 개혁 대통령과 보수.수구적 관료들사이에서 환상의 엇박자 놀이판이 된 지 오래다.

시스템은 대통령과 정권의 철학이 보다 민주적이고 세련되게 투영되고, 피드백하기 위한 보조수단이지 그게 개혁의 전부가 아님에도 정권의 철학과 노선에 정반대의 조작을 해대는 장관들을 뒤죽박죽 배치해 놓고서 성과가 없자 이제는 뜬금없이 개혁후퇴와 혼선을 변명하기 위한 기제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구세력으로부터 좌파란 영예(?)까지 부여 받으며 입만 열면 개혁을 말하는 열린우리당은 또 어떤가.

각종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데는 신공을 발휘하지만 정작 힘쓰는 데 가서는 그런 걸레하나 빠는 데도 공룡같은 자신들의 몸집조차 가누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여당의 논객이라는 모 의원의 뒤늦은 실토대로 권력만을 위해 뭉친 잡탕정당에다 기회주의적 속성까지 겹쳐, 탄핵사태를 이겨냈던 총선전 47석만도 못한 152석이 되어버렸다.

한나라당이 다수당이어서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으니 과반수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치던 열린우리당의 호소에 이끌렸던 국민들은 대체 뭘 믿고 저런 정당의 감언이설에 속았는지 후회가 밀려오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반서민적인 경제정책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와 부각으로 서민대중들이 그들의 삶의 문제에 관한 실체적 진실에 제대로 눈을 뜨게 하는 것 오롯이 진보진영의 몫으로 넘어오고 있다.

국민 대다수, 경제영역에선 프롤레타리아 혁명군 수준

경제문제에 관한한 국민 대다수는 진보, 좌파적이다. 최근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경제 부문에 관한 설문에는 60%가 넘는 국민들이 진보적 방향에 찬성을 보내고 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집 또는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높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종합부동산세, 부동산 가격 하향화 정책, 재벌개혁, 공정거래법 개정 등 소위 수구언론이 경제 망치는 좌파정책이라며 연일 십자포화를 퍼부어 대는 정책에 대한 국민적 찬성율은 압도적으로 높아 이 같은 수구언론의 굿판에 서민대중은 아직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다.

또한 모 정치학회의 연구에는 경제문제에 관한한 일반국민이 정치인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총선 승리 이래 “경제와 민생을 챙기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거듭 말해왔다. 그러나 경제관료 중심으로 기존 정책 패러다임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경기를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이렇다 할 새로운 처방이 제시된 바 없었다. 따라서 정부•여당이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하더라도 국민들이 볼 때 “경제를 챙긴다는 것은 말뿐이며, 실제로는 정치 공방만 벌인 것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누가 봐도 지금은 “경제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높아지면서 정부•여당 지지도가 하락하고, 이에 따라 정부의 정책 추진에 대한 저항감이 커지며 이는 다시 국정 수행을 어렵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라는 한 연구소의 보고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분석이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근로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는 한국식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불신을 받고 있는 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우월한 경제체제인가 대해 60%의 근로자들이 ‘노(No)’라고 말하며, 70%에 가까운 근로자들은 정부가 ‘국민소득이 높아지는 것, 선진국이 되는 것’ 등 외형적 경제성장보다 ‘빈부격차 해소, 완전한 복지제도 구축, 완전고용실현’ 등 분배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수구세력의 좌.우를 가르는 기준에 따르면 위와 같은 서민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정서는 가히 ‘프롤레타리아 혁명군’ 수준이 되어 있다.

그만큼 서민대중의 삶이 피폐할 대로 황폐화 되었기에 이들의 삶의 질 개선에 역행하는 소리는 그 어떤 이념도, 막강한 수구언론의 여론조작도 쉽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이는 다른말로 표현하면 지금이야말로 서민대중의 경제적 삶과 관련 진보, 좌파적 대안정책을 가지고 진보진영이 대중들에게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 진보 , 좌파는 이 부분에 관한한 왠지 자신감이 부족한 것 같다. 또한 역량의 부족까지 드러내고 있어 이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의 익숙한 투쟁은 매우 민활하나 경제적 부문에서는 이슈선점과 아젠다 설정에 둔감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진보진영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슈화 시도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향후 진보진영의 집중적인 이슈제기 영역은 마땅히 사회경제적 개혁이어야 하며 피폐해진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진보, 좌파적 대안을 담아 보수.수구진영과 치열한 싸움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이 영역이야 말로 진보, 좌파의 가치를 드높여줄 최대의 진지이다. 미래 한국사회를 책임지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사회경제적인 영역의 광활한 땅을 더 이상 만주벌판 다루듯 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엔 생존의 위협속에서 ‘전환의 계곡’을 건너고 있는 서민대중의 황폐함은 너무나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다수는 어쩌면 ‘명품다운’ 진보, 좌파적 정책과 실천적 노력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셈이다.

수구 세력의 ‘성장만이 살길’이라는 감언이설에 시장이 고착화 되기 전에 시급히 좌판을 펼쳐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투쟁방식의 다변화, 서민의 언어로 빚어내는 장인정신 필요

진보진영은 성장우선주의에 대한 대안적 경제정책을 시급히 개발해내는 것과 동시에 국민들의 사고의 유연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홍보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운동을 별여가야 한다.

보수진영의 뉴라이트 운동을 단지 “댁들은 80년대 뭐했느냐, 그게 무슨 자랑이냐”는 식으로 역성을 내고 폄하하는 데 그쳐서는 진보진영의 위기의식의 발로로 비춰질 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적인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이들이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보수,수구진영의 정권탈환을 위한 수구 탈색 리모델링에 불과한 운동이라는 지적이 옳다 하여도, 그 이슈의 중심에 참여정부와 개혁.진보진영이 좌파의 구습에 얽메여 경제를 망치고, 서민대중의 삶을 방치하고 있다는 레토릭은 생존의 위기에 하루하루 숨을 헐떡이고 있는 서민대중의 뇌리에 강력한 잔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800만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380만 신용불량자, 80만 실업자, 500만 자영업자들이 전국적 노조형태의 강력한 조직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강력한 조직으로 결성된 힘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한국정치와 언론환경에서 이들이 자력으로 대정부, 대언론 싸움이 가능한 단계로 끌어 올려놓는 것이 시급하다.

일부 소수의 귀족화 되어가는 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서민대중이 신 하류층화 되어 가는 지금이야말로 사회적 열패자란 부담감을 떨쳐내고 이들의 조직력을 업그레드할 수 있는 최적기가 아닐 수 없다.

필요하다면 정규직의 비정규직을 위한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진보가 서민대중의 삶의 문제에 결코 소홀하지도 무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명품대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민대중의 삶과 관련된 진보진영의 이슈화 방식이 진보진영의 전매특허인 ‘투쟁 일변도’이어서는 곤란하다.

정책의 원칙과 방향 그리고 내용은 변함이 없되 이를 서민대중에 전달하는 언어는 철저히 ‘서민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비롯 빈부격차해소 등 서민대중의 절실한 문제를 끄집어내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세력은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밖에 없음에도 60%가 넘는 지지를 받아야할 세력이 고작 10%대에 머무르고 있는 데에는 진보진영이 서민대중에게 ‘말은 고마운데 우리편이 아닌 것 같다’란 인식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저에는 진보진영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한 투쟁일변도의 단순한 대중노선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들’로 여겨지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단순한 대중노선 때문에 서민대중이 한국사회에서 제대로된 진보정권 하나 세울려면 만사 제껴놓고 울긋불긋한 깃발들고 만날 투쟁판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의 가치, 불가피성을 폄하하거나 왜곡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서민대중속에 진보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전파하고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서민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언어와 방식으로 변환해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나 자신을 위한 생존투쟁이어야 함에도 저들만의 싸움으로 왜소화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진보진영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투쟁방식의 변화다.

서민대중이 사회경제적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 그리고 진보적 대안의 적절성을 인식하고 진보진영과 함께 발맞춰 갈수 있는 창조적이고 긍적인인 방향의 운동방식은 어쩌면 강고한 보수, 수구세력을 격파하는 최대의 전략일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기술력은 진보를 더욱 빛내주고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진보진영의 집회, 시위로 점철되는 길거리 투쟁방식은 서민대중에게 진보진영의 주장이나 가치를 전달하는 유효적절한 방편이기 보다는 단지 ‘투쟁’이라는 행위만 기억되는 의식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다.

비록 짝퉁으로 판명나고, 되레 자신이 빚어낸 작품의 소비자들로부터 공격까지 받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한 변호사 출신 정치인을 안티조선이라는 핵심을 꿰뚫은 시대정신과 결부시켜 대선후보라는 상품으로 까지 빚어낸 강준만의 집념과 스킬은 그래서 과소평가할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진보진영에 턱없이 부족한 명품 ‘진보 이데올로그’ 한 명이 수천명의 길거리 전사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서민대중의 경제사회적 삶의 문제를 진보진영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민대중의 귀에 쏙쏙 박히는 서민의 언어로 전파하는 집념의 장인 논객이나 이데올로그가 양산되면 될수록 지금의 침체를 벗어나 또다른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정당의 정책에 붙여지는 명칭의 전투성부터 제거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공감할 수 있는 서민의 언어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도 요구된다 하겠다.

따라서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언어의 전파력과 감성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시대에 걸맞게 투쟁의 방식도 변해야 하고, 한층 다양화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지난 권영길 의원의 ‘헌정사상 첫 국회 의사당 앞 노상철야 단식농성’이라는 상징투쟁과 정권이 바뀔때마다 변신을 거듭하여 권력의 2인자 자리를 거머쥐었던 노정객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한 노회한(?) 언변의 신출내기 의원의 사례 등에서 충분히 입증해주었다.

이번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과성 보도로 그칠뻔 한 일이 뒤늦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급기야 전 세계로 타전되게 만들고, 실제 행동으로 여론을 주도해가는 네티즌의 힘을 우리는 여러번 경험한 바 있다.

현재 한국언론에 만연된, 유명정치인 홈페이지까지 뒤져 펌질해가며 정쟁거리 만들어대는 ‘파파라치식 정쟁상업주의’로 인해 노출빈도와 인용도에서 턱없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진보진영이야말로 한나라당 지지세력, 친노세력보다 더 네티즌 여론광장에 자신들의 정책 홍보력을 투여해야 함에도 가장 뒤처지고 있다는 건 투쟁방식 다변화와 관련 지적되어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 진보진영이 귀가 따갑게 듣고 있는 소리중 하나가 “대안부터 내놓고 이야기 하라”는 윽박이다. 그러나 진보적 대안은 내놓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의제로 올려져 국민적 이슈화가 거의 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치와 언론환경의 척박함이 더 큰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은 언론이 다가서기 전에 스스로 좌파정책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홍보에 도움이 될만한 곳을 찾아 발로 뛰어다녀야 할 처지일 수 밖에 없다. 아쉽게도 진보세력은 아직까지 그들만의 공간에서 좌파연하는 ‘골방좌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 현실에서 제 아무리 명분이 강한 정치이슈를 올려놔도 서민대중의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회경제적 이슈와 대안이 담지되지 않는 정치이슈는 정쟁이라는 단어 한마디로 서민대중의 눈을 간단히 돌려버릴 수 있다는 현실에 진보진영의 고민이 투영되어야 한다.

그런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의 진로 및 정책방향 설정과 관련하여 일부 지지자들이 민노당의 지나친 정치이슈 올인과 그로인한 경제사회적 대안 제시 노력 미흡을 지적하는 움직임은 매우 유의미하고 시의적절해 보인다.

어차피 진보가 진보다울 수 있는 영역도 사회경제적인 영역 아니던가.

서민대중의 삶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진보, 어떤 진보적 경제적 대안도 내놓치 못하는 진보, 아예 이슈화할 의지 조차 없는 진보는 국보법이 아니라 어떤 명분있는 정치적 이슈를 주장해도 어디까지나 평품일 뿐 ‘집권가능한 명품’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명품이 되지 않는,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진보의 집권이란 영원히 이상의 영역에만 머물 수 밖에 없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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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7 [20: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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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