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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발제문 및 녹취록 전문] 김수행 교수 특별강연 "긴급진단, 미국의 금융공황과 한국경제"  

아래는 지난 10월 13일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주최로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진행한 김수행  교수님의 특별 초청강연 "긴급진단, 미국의 금융공황과 한국경제" 강연의 발제문 및 녹취자료입니다.


  
  
▲ 마르크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가 13일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가 주최한 특별강연에서 '미국의 금융공황과 한국경제'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남소연  김수행  


미국의 금융공황과 한국경제


(2008.10. 13)


김수행(성공회대 석좌교수)


1. 미국의 산업위기와 금융위기의 반복 : FRB가 산업부문에서 과잉생산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금융회사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수습할 수 없는 거대한 금융공황이 일어나게 되었음.

1) 1997년의 아시아 금융공황 --> 1998~99년. FRB의 금리 인하와 자금 공급 --> IT산업에 집중 투자. Dot-com Craze --> 2000년 IT산업의 과잉생산 --> IT산업의 파산

2) 실질GDP성장률 급속히 저하 --> FRB가 경기후퇴(recession 또는 crisis)의 악화를 우려해 2000년 중반부터 금리 인하, 자금공급 --> 주택시장에 투자.

3) 주택산업의 활황 --> 주택가격 상승 -->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급증 --> 파라임, 알트-에이, 서브프라임 등 각종 모기지를 분류해서 유동화하는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의 등장 -->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모기지의 원리금 상환능력은 묻지 않고 모기지 제공(은행과 모기지 회사) --> 투자은행이 주택저당권을 바당 주택저당증권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판매 --> 증권의 신용등급을 높게 매기는 신용평가기관이 개입하고, 증권의 원리금이 상환되지 않을 때 그 금액을 대신 갚아주는 금융상품(credit default swap)을 보험회사가 개발 판매 --> 모기지 회사, 투자은행, 신용평가기관, 보험회사의 주가 폭등 --> 금융엘리트는 크게 부유해짐. 금융활동의 사기성과 투기성 및 기생성.

4) 실업자의 증가와 임금수준의 하락, 모기지를 받은 주택소유자들의 원리금 상환 연체율의 증가, 주택산업의 과잉생산, 주택가격의 하락 (2006년 가을) --> 모기지 회사의 파산 위기, 주택저당증권의 가격 하락 --> 투자은행과 보험회사의 파산 위기 --> 금융회사들의 주식 가격 폭락 --> 모든 신용거래가 현금거래로 전환 --> 신용경색 --> 금융시스템의 붕괴 --> FRB가 일부 금융기관을 국유화하고 값싼 자금을 대규모 제공 -->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폭락을 거듭하고 금융회사의 파산은 계속되고 있음

5) 2007년 9월부터 모기지 부실로 자금이 부족한 금융회사를 위해 FRB가 금리를 낮추고 자금을 공급함 --> 금융회사는 모기지 부실에 따른 손실을 메우기 위해 곡물, 금, 석유에 대해 투기함 --> 곡물과 석유가격의 폭등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짐.


2. 미국의 금융공황은 산업공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2~3년은 계속될 것임.

1) 금융활동은 자금을 모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경우에만 '간접적으로' 새로이 부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임. 예컨대 주식의 발행시장은 사회의 유휴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지만, 주식의 유통시장은 노름이나 마찬가지로 새로운 부를 전혀 창조하지 않음(개미군단의 돈을 금융회사가 빼앗아 감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확대하고 있음)

2) 금융활동이 산업생산 활동보다 더욱 큰 이득을 낳은 '경제의 금융화(financialisation of economy)'는 자본주의의 사기성·투기성·기생성을 명백하게 드러낸 것임.

3) 산업자본가가 산업의 혁신(Innovation)을 통해 이윤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금융활동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업자가 증가하고 평균적인 임금수준은 저하하며 국제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없었음. GM, Ford, Chrysler 등 자동차회사는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음

4) 미국경제는 지금까지처럼 외국의 빚으로 소비와 투자를 유지할 수가 없음. 이렇게 되면 미국 달러는 세계통화의 지위를 빼앗기면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를 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릴 것임.

5) 국내시장을 개척해야 할 것임. 전쟁경제를 버리고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해야 할 것임. 빈익빈 부익부가 경제성장을 더욱 촉진한다는 무당경제학(voodoo economics)을 빨리 버려야 할 것임.

6) "모든 것은 시장에 맡겨라; 민간경제의 효율성이 최고다; 국유화는 소련경제를 멸망시킨 최대의 악이다" 등 입에 발린 이야기를 이제 중단할 때가 되었다.


3. 한국경제의 장래

1) 미국 모델이 우리나라의 미래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미국과 같은 '깡패자본주의'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2) 따라서 '한미FTA'는 국회가 인준해서는 안 된다. 물론 미국의 새 대통령은 지금 형태의 한미FTA를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정부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압력을 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1997년 외환위기와는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 환율이 1,500원이나 그 이상으로 올라갈 때 정부가 가만히 보고 있지 않고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할 때는, 외환보유고 2,000억 달러는 단기외채 2,000억 달러를 갚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4) "시장에 맡기자"는 주문을 자꾸 외우지 말고, 정부는 금융기관들, 특히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활동을 주시하고 감독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소국개방경제'에서는 '자본통제(capital control)'가 필수적이다.

5) 수출에 목을 매는 경제구조를 탈피해야 한다. "수출 증진을 위해서는 원가 절감이 필요하다 --> 임금수준을 억제하고 비정규직을 늘린다. --> 국내시장이 더 좁아지니 수출을 더 증가시키지 않을 수 없다. --> 임금수준을 억제하고 비정규직을 늘린다." --> 이 논리로 '수출 증대와 서민 불행의 증대'가 악순환을 이룰 것이다.

6)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배우지 말고 스웨덴의 복지국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면서 평등중, 연대주의, 평화주의를 한국 사회에도 뿌리내려야 지금과 같은 금융공황이나 산업공황을 피할 수가 있다.

7) 김대중 대통령 이래 계속 노동자와 서민들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만약 앞으로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파산하게 될 때 1997년의 IMF 사태처럼 금융기관과 금융엘리트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국민의 혈세를 구제금융에 사용한다면 큰 폭동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8) 1인당 국민소득이 연간 2,000만 원이 되는 한국은 생산능력의 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더욱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4인 가족이 세금을 공제한 뒤 8,000만 원을 받으면 매우 여유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고통을 분담한다"는 뜻에 따라 박정희 시대로부터 쌓아온 '깡패자본주의'의 기반을 좀 무너뜨려야 하지 않을까?


김수행 강연록 녹취록


<이사장 인사말>

당이 자리를 잡았다. 연구소도 이사진을 꾸렸다.
첫 초청 강연회이다. 평생 학문에 매진하고 학자의 큰 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신뢰와 존경을 표한다.
김수행 교수는 맑스 경제학자이다. 맑스 경제학은 실천이다. 김수행 교수는 실천가이다. 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애정과 동참을 해오신분이다.
오늘 이 자리는 일반 강연회, 공부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늘은 민주노동당이 확실히 정책적 문제해결의 방도를 제시해서 현 어려운 경제 난국면을 돌파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수행 교수를 환영한다.


<김수행 교수 강연>


박사논문이 맑스의 공황이론이었다. 현재 논의가 좁게 진행되고 있다. 시야를 넓혀서 뭘 의미하는지를 봐야 한다. 그래야 정책적으로 포괄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이 나온다.

미국 금융 공황 이야기

금융기관들을 구제하는 자금이 투여되었다. 웃기는 일이다. 금융기관이 해먹을 것 다해먹었는데 이제와서 문제가 생겼다고 공적자금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렇게 해도 금융공황을 해결 할 수 없다.

이번 금융위기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해 발생한 것인데, 그 이전에도 위기가 올 때마다 구제금융을 넣었다. 몇 차례 넣었는데 투기가 한계에 다다라서 생겨난 사태이다. 투기가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넘어갔을 것이다.

부실 금융자산이 정리되지 않고 모여 있다가 터진 것이다. 첫 번째 예는 IT 산업 공황과 관련된다. 1990년대에는 미국이 IT로 호황을 봣다. 그 산업이 주도해서 미국 산업이 발전했다. 근데 97년 아시아 공황이 일어났다. 아시아 나라도 손해를 봤지만 미국 금융기관도 손해를 많이 봤다. 투자를 많이 했는데 손해를 엄청나게 봤다. FRB가 나서서 금리를 낮추고 싼 자금을 공급한다. 이 자금이 IT로 모였다. 인터넷 관련 산업에 엄청나게 투자되었다. 너무 많은 투자가 되어서 인터넷 산업에서 과잉생산이 일어났. 팔리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2001년부터 인터넷 산업 주가가 폭락한다. 또 FRB가 돈을 댄다. 인터넷 산업에 투자한 산업은행 등이 손해 보니까 공적자금으로 구제한 것이다.
이 자금들이 주택산업으로 간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기생적 사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 투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택시장에 들어가서 주택건설이 일어나고 주택가격이 올라가고 은행들의 투자가 잘된다는 주택산업에 몰린 것이다. 결국 못사는 사람들도 “아하 주택가격이 올라가서 안되겠다. 나도 주택을 사야겠다”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주택이 사람사는 곳이 아니라 엄청나게 이익을 보는 투기상품이 되었다는 뜻이다.

모기지회사라는 것이 있다 .집을 사려는 사람에게 25년 30년 집을 저당잡고 대출하는 회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기지를 받는데 이 모기지회사가 주택저당권을 갖고 투자은행에 판다. 모기지회사는 투자은행으로부터 미리 돈을 받는다. 이 돈을 다시 대출해주고 투자은행은 자기가 받은 모기지증권을 다른 투자은행, 외국에 판다. 주택경제가 좋아서 모기지회사가 주택을 구매하려는 사람에게 대출을 하는데 주택을 구매하는 사람이 소득 있는 사람인지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무시하고 돈을 빌려준 것이다. 집을 팔면 원금이자 받는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원리금 갚을 능력이 없지만 장기대출 받아서 집을 사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기이다. 모기지회사가 그렇게 대출하면 안된다. 법이 그렇게 안되어 있다.

투자은행은 저당증권을 다른 투자은행이나 투자자나 외국은행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증권을 치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는 것이 신용등급회사에 가서 신용등급을 좋게 받는다. 즉 “이 증권은 신용이 좋다”는 등급을 받는다. AIG와 같은 보험회사는 그 증권이 원리금을 못받을 때 그것을 자기가 대신 갚겠다는 보험을 해준다.

주탱저당권을 담보로 빌려가는 사람들의 신용이 천차만별이다. 프라임 대출, 알트에이 대출, 서브프라임 세 등급이 있는데 이것을 모아서 증권을 만든다. 즉 하나의 증권에 세 개의 대출자가 받은 것을 섞어서 넣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주택저당증권을 사는 사람은 돈 잘 갚을 사람이 섞여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주택가격은 올라가지 신용평가회사가 보증해주지 보험회사가 보장하지 그러니까 이 증권이 정신없이 값이 올라갔다.

보통 우리가 이야기할 때 경제의 금융화를 이야기한다. 경제활동 중에서 생산활동이나 상업활동보다는 금융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 경제의 금융화이다. 실제로 그랬다. 규모가 커지고 전 세계의 자금이 거기로 갔다. GE, 포드 등 모두 생산을 해서 돈을 벌 생각 안하고 전부 주식사고 채권사고 돈 꿔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실업이 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낮아진다. 이렇게 산업이 완전히 죽고 금융만 큰 것이다.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어느 사람이던지 직장을 얻어서 봉급을 받으면 새로운 부를 창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맑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생산물을 만들어내고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즉 생산부문과 산업부문의 종사가가 부를 생산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고 본다.

금융부문은 둘로 나뉜다. 주식이 발행되면 그것을 팔아서 마련한 돈이 생산에 투여된다. 그러나 그렇게 안되고 유통시장이다 보니 사고파는 과정에서 왔다갔다 한다. 생산에 투여되는 것이 아니다. 밤새 노름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가치가 창조 안된다. 그 뿐 아니라 주식을 그렇게 거래하면 정보에 밝은 사람, 아니면 부자들이 더 돈을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통계가 나와있다. 미국의 투자은행이 매년 엄청난 이익을 본다. 주식을 사고 팔아서. 51%가 증권회사 혹은 투자은행에 있는 전문가가 각 회사의 내부정보를 빼내서 회사의 돈을 주식을 사고 팔아서 이득을 봤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나라 개미군단, 돈번다고 들어가면 안된다.

이런 식으로 주식시장이 운영되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 은행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못사는 사람들 돈을 전부 가져가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강조하는 것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특색 하나가 금융활동이 산업, 생산활동보다 크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윤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지 않고 재산의 재분배만 일어난다. 부자는 더 부자, 가난은 더 가난해진다. 강부자들이 보기에 이게 경제발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금융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되지 않는다. 사기다. 두 번째 하면 투기고 세 번째 하면 금융엘리트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된 것이다.

2006년 초반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 했고 부익부 빈익빈 되면 될수록 경제 성장이 잘 일어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것을 무당경제학이라고 한다. 이걸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 경제가 암튼 심각해 진 것이다.

금융활동이 늘어나니까 산업자본가들이 생산을 하지 않고 금융활동을 해서 주식, 채권 사고팔고 해서 거기서 돈을 벌겠다 해서 이 지경까지 왔다. 산업이 경쟁력이 생기겠는가. 실업자가 줄어들겠는가. 임금수준 떨어진다. 모기지의 부실화가 문제됐다. 못사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집값이 올라가서 그 집을 샀는데 갚을 돈이 없는 것이다.

그게 하나이고 두 번째는 금융기관에 있는 거대한 자본들이 주식시장에 너무 많이 들어와서 주식생산이 과잉생산이 된 것이다. 주택이 과잉생산됐다. 주택 가격 떨어진다. 원리금상환하지 못한다. 주택저당증권의 가격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주택저당증권을 투자은행이 발행했는데 갚을 수도 없다. 신용평가회사들의 신용이 덜어져서 운영 못한다. 보험회사들 자기가 대신 갚아야 할 상황이라 어려워 진 것이다. 한번 꼬이면 게속 꼬이게 된다.

이러니까 금융기관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모든 금융기관이 현금이 없어서 야단이다. 현금을 얻을려고 담보를 줄려고 해도 담보물이 없다. 전부 부실화된 것이다. 금융기관끼리도 저 금융기관이 언제 망할 지 몰라 현찰을 빌려줄 수 없다. FRB가 일반적인 어음을 재할인해준다고 해도 그럴 어음이 없다. 신용경색이 그런 것이다. 현금을 구할 수가 없다. 자기가 언제 당할지 모르니까 쥐고 있는 것이다. 자금경색이란 말이 계속 나오게 된다.

미국 달라는 인쇄기에 찍어내는 것이다. 급하면 찍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 은행부실이 커서 양대 모기지 회사의 부채가 5조 3천억이다. 이번에 공적투여된 7천억 달러는 문제도 아니다. 달러를 많이 찍어내면 아무도 달러를 안가지려 할 것이다. 세계화폐가 될 자격을 잃어버린다.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뉴욕의 증권시장의 증권 아무도 안가지려 한다. 달러로 되어 있으니까. 발행하면 더 망하는 것이다.

어떻게 조달하려느냐 하니까 국채를 발행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자금공급이 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걸 잘 알아야 한다. 각 국이 공조를 한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계적으로 경제정책을 공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사정이 다 있다. 공조가 안되면서 나아가고 있다.

또 하나 이야기하면
이렇게 미국 금융이 어렵다. 금년 초에 모기지부실로 인해서 은행이 어렵다고 해서 FRB가 이자율을 내렸다. 5.25%였다. 4월 2%까지 내려갔다. 이런식으로 금리를 떨어뜨리면서 자금을 푸니까 은행들이 이 자금을 받아서 곡식 석유 금에 투기했다. 그래서 석유값이 150달러까지 갔다. 자연적으로 석유가 생산 안된 것이 아니다. 금융기관이 돈 버는 방법은 다 사기다. 남의 것 뺏아오는 것이 발달했다.

세계경기, 즉 산업생산이 얼마나 늘어날 것이냐. 노동자들 임금이 얼머나 늘 것이냐가 중요하다.
노름해서 남 주머니에서 털어온 것 뿐이다. 이것을 강조해야 한다.
미국의 국내 제조업을 살리지 않고서는 미국은 계속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2, 3년은 걸릴 것이다. 신뢰 신뢰하는데 되는 걸 봐야 신뢰가 생긴다. 지금 신뢰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생산을 확립해야 한다. 디트로이트 가봐라. 미국 자동차 산업 메카다. 가보면 폭격맞은 도시같다. 공장 없다. 미국이 그런 사회다. 그런 나라다. 내가 보기에 이 공황을 미국이 벗어난다 이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본주의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가 이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시장에 의존하는 것 못하겠다 해서 국유화 얼마나 했나. 개인을 가장 창의적이고 했는데 창의라는 것이 남들 돈 뺏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제대로 되겠는가.

결국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문제이다. 금융공황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살려면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다. 생산이 일어나야 하는 8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는 외국의 빚으로 살았다. 무역수지 적자났지, 전쟁한다고 돈 부었지 그래서 재정적자가 났다. 그 돈을 외국의 투자자들이 미국의 주식을 사기 때문에 미국의 적자운영이 유지될 수 있었다. 순채권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채무국이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 민간들의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미국 경제가 지탱이 되었는데 그 소비가 전부 개인들의 빚이었다. 모기기대출, 소비자금융, 카드금융 등 빚으로 산 나라다. 빚으로 안살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문제가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중요한데...
하나는 미국은 국제경쟁력이 많아서 그것을 외국에 팔아서 돈 벌수 있는 사정이 아니다. 자동차 3사가 곧 파산 지경이다. 뭘 가지고 국제경쟁하겠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엄청 크고 자원도 많고 사람능력도 많은데 국내 시장을 개발해야 한다. 국내시장을 개발할려면 지금처럼 빈부격차를 늘리면 국내시장은 개발이 안된다. 서민들이 먹고 살 것이 있어야 물건을 살 것이 아닌가.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정책으로서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둘째는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고 개선해야 한다. 씨코 보지 않았나. 미국처럼 국민소득 4만달러에서 30%가 빈곤, 돈없으면 죽는 이런 사회가 어디있나. 깡패자본주의이다. 이명박 자구 따라서 깡패자본주의 만들려고 하는데 안된다. 깡패자본주의로는 수요가 늘지 않는다. 실업수당줘야 먹고 산다. 기술 가르쳐야 한다. 정부가 사업을 만들어서 고용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 국내 시장이 늘어난다. 미국은 지금 국내시장 개척하지 않으면 계속 빚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금융공황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 하나도 안한다. 은행 돈이 없으니까 몇억달러 넣으면 되지 않겠냐 생각하는데 안된다. 모기지대출 받은 사람이 모기지원금 받지 못하면 1억 달러 날라간다. 기업에 대출해도 기업에서 원리금상환 못하면 은행은 망한다. 해서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를 고쳐야 한다. 사회를 개혁해야 하는 단계다.

내가 보기에 오바마나 매케인이나 기본적으로 선거공약이 사실 똑같다. 정부가 월스트리트의 금융엘리트와 금융기관살리자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주택이 차압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사람들, 실업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 하나도 없다. 더 나가서 자동차산업, 3사가 5천억 구제해 달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한다.
앞으로 2, 3년은 걸려야 미국 경제가 조금 나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한다. 7천억 달러 구제금융 상원과 하원 통과할 때 어려웠다. 일반 시민들은 경기가 좋을 때 그렇게 금융기관이 많이 쓰고 연봉 많이 받았는데 문제가 생기니까 세금으로 다 갚아달라는데 말이되느냐 생각한다. 우리 나라보다 시민운동,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이 당했는가. 아마 큰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영국에서 10년 살았는데 대처가 할 때도 전국 큰 도시에서 유색인종을 중심으로 해서 폭동이 많이 일어났다. 이렇게 정부가 금융만 생각하고 실업자, 제조업, 생산분야 생각안하면 서민들의 생활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 사회보장이 가장 형편없다. 서민들이 뭐 하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29년 대공황 때 33년 루즈벨트가 대통령됐다. 루즈벨트라는 사람은 미국 자본주의를 완전히 뜯어고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 이전에 모든 관료들은 시장에 맡겨 놓으면 해결한다, 기다리자 그랬는데 루즈벨트는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 도로깔고 농업에 지원국 주고 했던 것이다. 1주에 한번씩 라디오 방송했다. 모든 국민이 라디오에 집중했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그냥 라디오 방송한다고 듣지 않는다. 부자 잘 살게 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듣겠는가.

기본은 이거다. 우리도 굉장히 어렵다. 어려운 상황일때는 부자들이 돈을 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 실제로 굉장히 어렵다. 97년 IMF 때부터 서민 노동자 농민 다 죽었다.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이걸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공황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특히 우리는 작은 나라면서 무역의존도가 높다. 이런 나라는 세계경제가 이런 식으로 붕괴해 버리면 우리는 꼼짝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시장을 넓혀야 한다. 안 넓히면 다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소득분배해야 한다. 남이 어렵다 하면 불쌍히 여기는 연대주의가 나타나야 한다. 남북간에 전쟁하자 하지 말고 평화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국내에서 뭘 만들어내는 것을 해야지 옛날에 하듯이 미국 모델이 최고다 하듯이 하면 우리는 망한다.

민노당에서 국회의원도 나왔는데 우리 국민들이 내가 말하는 평등주의 연대주의 평화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당에 투표해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국회의원의 많아야 이 나라가 바로 잡힌다.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복지국가이다. 왜 그렇겠나. 1933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빼놓고 사회민주당이 계속 집권해서 그렇다. 다른 부르주아 정당은 빈부격차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성 하면서 비정규직 내고 실업수당 적게주는 법안 내는데, 사회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국민들이 찍어줬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복지국가를 만든 것이다.

그런 정치세력에게 투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 이야기좀 하겠다.
나는 공황이라고 하는 것을 수학문제풀듯이 생각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황 이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게 뭐냐 이렇게 봐야 한다. 환율 문제 봐야 얻을 거 없다. 환율은 매일 변동하는 것이다.
이 상황 오래간다. 푸근하게 생각하면서 문제의 핵심이 무언가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모두가 미국이 모델이다. 글로벌스탠다드 하면서 미국 따라갈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 연속선상이 한미FTA이다. 한미FTA는 단순히 관세낮추는 협정이 아니다. 미국 모델을 따가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법을 많이 고쳐야 한다. 미국 모델 따라가는 것인데. 미국 모델은 깡패자본주의 모델이다. 왜 하필 그걸 따라가느냐. 한미FTA를 국회에서 비준하지 말아야 한다. 그걸 통해서 한국이 스스로 우리는 어떤 사회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미FTA로는 지금의 위기를 피할 수 없다.

투자자 국가소송제도가 있어서 한국정부에서 한국 농민 서민을 위해 정책을 쓰면 미국의 농업자본가나 다른 자본가들이 손해를 봤다고 한국 정부를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를 하게 되어 있다. 한국 정부가 손해 다 물어줘야 한다. 그냥 관세 낮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한미FTA로 제한받아서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미국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외환보유가 많아서 옛날과 다르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원화가 1500 1600 뛰면 정부가 가만 있겠는가. 달러를 풀어야 환율이 떨어진다. 언제까지 할 것인가. 2,300억 달러 금방 날라간다. 돈 많이 있다고 자랑할 것 아니다. 단기외채 2,000억 달러 된다. 1997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외국 투자자들이 생각할 때 한국경제는 앞으로 잘 되겠다 싶으면 갚으라고 독촉안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면 다 달라고 한다. 단기외채는 1900억으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미국이 어려운 곤경에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시장에 맡기자고 하는데, 금산분리완화 이야기하는데, 금융은 사기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금융거래하는 사람들 주식 증권 대출업을 하는 사람들을 금리생활자라고 했다. 케인즈가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했다.
난 동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놀음 좋아한다. 정선카지노 해서 돈 다 뺏기면서, 사람들 못딴다, 주식 해서 날리고 펀드 해서 날리고. 우리 나라 서민들이 전부 남 주머니 다 넣어준다.

(강대표를 지적하며)노름금지법 만들어야 한다. 노름안해야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노동하고 자기의 앞날을 찾아야 한다. 내가 생각할 때는 우리나라도 큰 은행들 몇개 날아간다. 안날아갈 수 없다. 날아가는데 날아갈 때 절대로 거기다가 공적자금 넣는다는 이야기안해야 한다. 우리나라 금융 부문 너무 팽창했다. 몇 개만 있으면 된다. 동네마다 금융관련 온갖 건물들 많다. 엄청난 낭비다. 정부가 금융활동을 감시감독해야 한다. 규제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갖고 있는 노름벽을 없애고 자원을 절약해야 한다.

수출이야기 한번 더 하자.
수출만이 살길이다 하는데. 문제가 많다. 우리는 크게 기술이 없다. 연구개발 투자 안한다. 그런 상태에서 수출한다는 것은 원가싸움이다. 가격싸움이다. 그래서 수출 많이 할려고 하면 임금깎자고 한다. 80년 이후 세계시장의 규모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보장을 없애는 정책이다. 상품을 팔려는 하는데 세계시장 좁아졌다. 그래서 무한경쟁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돌아와서 한다는 것이 임금을 더 깎자 이러는 거다. 이러니까 수출을 증가하자는 아이디어와 서민의 가난해지는 것이 쳇바퀴 도는 것이다.

전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세계적인 대공황 온다. 수출해서 살 생각 말아야 한다. 안되면 국내에서 시장 만들어야 한다. 소득분배 평등 이루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한테 어디서 돈이 나오는가. 정부가 취업 기회 만들어주고 일자리 만들어주고 실업수당 많이 줘야 한다. 그래야 구매력이 생겨서 국내시장이 형성되고 국내에서 물건 파는 회사들이 일어난다.
정책적인 전환이 특별히 필요하다.

우리가 미국을 생각할 때,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사실은 상당히 상대적으로 문제를 잘 보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책은 경제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이 경제의 힘으로는 세계를 재패못한다. 남은 것은 군사력이다. 군사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 군사력을 이용해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려 한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부 석유와 관련된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다. 세계에서 자기의 위치를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문제가 그런 거 아니냐. 미국 주둔 비용 50% 다 내라고 한다. 100% 다 내라고 할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나라를 윽박질러서 그래서 나는 조공받는 거라고 하는데 그것 밖에 없다.

전력적 유연성, 기지이전이 한국을 기지로 해서 작전을 수행하게 해달라 이거 아니냐. 도대체 뭐하는 거냐. 우리나라 뭐하는 거냐. 요새 보니까 북한과 협상한다고 가까워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한국에 미국 무기를 팔려고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 문제를 일으켜서 비싼 무기를 팔려는 작전이다. 이것이 미국이 자국 경제를 위한 길이다. 그래서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 미국이 망해가는데 그렇게 할 필요 없다. 대강하면 된다.

한미FTA도 그렇고 미국하고의 관계가 정부는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국민들이나 서민들이 생각할 때 잘못하다가는 반미로 갈 가능성이 많다. 미국에서 요구가 많을 것이다. 어떻게 합리적인 선에서 해결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불했는데. 4인 가족이면 8천만원이다. 세금뺀 금액이다. 아주 큰돈이다. 그런데 그만큼 버는 사람있는가. 이말은 곧 각자에게 2000만원 줄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성장했다는 이야기하다. 우리나라 생산능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말은 갈라먹자는 것이다. 몇 사람이 다 먹지 말고.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국이 올 때 갈라먹으면서 복지국가 만들고, 깡패자본주의 조금이라도 불식해나가자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미국의 금융공황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곧 맞이하는데 우리가 대처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사회
열강해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드린다.
질의 있으면 받겠다.

송재영 본부장
최근 우리나라도 키코로 인해 많은 문제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파생상품으로 금융위기가 온 부분과 미국과의 관계.

김수행
사실은 잘 모른다. 다만 키코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납득이 안간다. 환율이 뛸 때 수출업자가 은행에 줘야 한다는 것인데 전혀 말이 안된다.
파생상품 상당부분은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안나타난다는 것이 문제다. 영국 베어링 은행의 파산 때 그랬다. 딜러가 파운드 얼마 내려갈 때 어떻게 하겠다 계약했는데 대차대조표에 없다. 아무도 모르고 딜러 혼자 안다. 파운드가 떨어졌다. 은행은 돈을 전부 갚아야 한다. 은행은 파산한다.
딜러의 자유에 맡기자고 하는데, 딜러는 이윤을 많이 만들 생각만 한다, 위험도가 높지만 수익률이 많으면 유인이 생긴다, 파산하기가 쉽다. 그래서 귬융감독에서 규제를 하고 감독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경제에 노출이 많이 되어 있다. 그래서 외국자본의 입출폭이 심하다. 확 들어왔다가 확 나간다. 자본통제가 힘들다. 말레이시아는 들어올 때는 환영하는데 단 6개월 이후부터 나갈 수 있다고 규제한다. 이런 것을 많이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두 미국 유학파가 많아서 미국 것만 봤다. 미국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망해도 생각을 안 바꾼다.

장지화 국장
한국사회의 대안경제 모델 이야기한다. 스웨덴 복지 모델 말씀하셨는데, 북유럽모델 차용도 많이 한다. 실제로 대안경제모델을 고민할 때 그 나라 상황과 우리 나라 상황이 다를텐데. 최근엔 남미 모델, 중국·러시아 모델 많이 고민된다.
한국의 대안경제모델 상이 있다면.

김수행
작년 11월 정년퇴임하면서 낸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책이 있다. 맑스 엥겔스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경제체제를 논의한 것이다.
경제정책이든지 경제사상이든지 각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한다. 그건 굉장히 좋은 이야기다. 그대로 따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살아봐야 한다. 정책을 할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런 것을 한국에 가져왔을 때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어떻게 매치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곧 책이 하나 나올텐데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이야기”라는 8권의 강의서가 있다.
새로운 사회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모든 사람이 협동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지금 문제는 그런 사회로 직통으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평등주의라는 사상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려고 하는 것이다. 사회문제인데 공동으로 모여서 해결하려는 생각이 없다. 그런 식으로 평등주의 연대주의라는 것이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사회화라든지 그런 것에 앞서서 해야 한다. 그것이 안되면 그런데로 못간다.
우리나라 사람들 박정희를 제일 좋아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런 것을 없애가야 한다. 조그마한 일부터 시작해서 가능한 것들을 하나씩 고쳐가고 바꿔가면서 연대의식이 늘고 힘이 커지는 것이다.
맑스는 이것을 혁명적 실천이라고 했다. 옆에 있으면서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확대해 가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스웨덴 사민주의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해 공감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 아니냐.

방석수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맹위를 떨쳤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금융위기가 단지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문제인지 그래서 건강한 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지.

김수행
노동자 농민이 힘이 되어 부르주아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가능하다. 민주주의 혁명하고 사회주의 혁명하자고 하는데 즉 2단계를 이야기하는데 그건 미친 생각이다.
문제가 터지면 다른 체제가 없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우리가 이런 체제가 좋다고 했을 때 그럴 힘이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를 할 것인가 폭동을 할 것인가.
그런 모든 생각을 한 후에 나온 결론이 옳은 결론이다.
공황이 터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있는데 자본가들이 경제적 권력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못사는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맑스에 따르면 몸이 생산력이다. 옷이 생산관계이다. 몸이 커지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과잉생산이 나왔는데 이 말은 자본가들이 이익을 얻기에 너무 과잉생산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잉해서 공황일어나서 공장문 닫고 해고되고 기계 놀고 있고, 몸이 너무 커진 것이다.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데 자본가들이 새로운 옷이 좋다고 몸을 잘라내는 것이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자본주의 이외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 기본은 다 되어 있는데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안을 낼 것인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좋은 질문인데 언제나 역사는 몇 지도부가 이리 간다고 해서 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우연을 갖고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사장
현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주의 제국주의이다.
금융과 산업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포기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이상 금융을 드러낼 수가 없다.
이채언 교수가 이전 토론회에서 했던 이야기와 김수행 교수는 견해 차이가 있다. 이채언 교수는 현 시기 미국의 금융공황은 29년 자본주의 위기가 질량적으로 증폭된 끝장 내는 공황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김교수는 2, 3년 간다는 진단의 차이가 있다.
김교수는 케인즈 처방이 유효하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이채언 교수는 안된다고 본다. 금융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금융의 국유화 사회화 민주화 인민화를 이야기했다.
스웨덴 사민주의 이야기했는데,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을 창당하면서 강령 제정할 때 서른 명의 진보학자가 스웨덴 사민당의 강령을 복사했다. 그렇게 해서 민노당의 강령이 만들어졌다.

김수행
미국의 금융공황으로 끝난다고 했다는데 끝장은 경제적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나는 것이다. 서민이 못산다 해서 가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서민이 들고 일어나야 정치가 바뀌든지 한다. 경제로 끝나는 것은 절대 없다.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이야기하면서 나도 좋아한다고 했는데. 안락사시키는 것 하고 안락사시키면 다 해결되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채언이 주장하는 것이 금융의 사회환데 중요하다. 97년 외환위기 때 168조원을 금융기관 살린다고 다 부었다. 혈세를 그렇게 부었으면 적어도 공공기관화 해야 한다. 그대로 둬서 이윤추구하게 하면 안된다. 사회가 관리해야 한다. 그것을 사회화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한테는 금리 낮게, 중소기업에게도 저리로 대출해줘야 한다.
미국 공황이 2, 3년은 간다. 어려워진다. 그 때가 되면 공공화해야 한다. 다시 옛날 주주가 들어와서 자기 이익에 맞게 운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
한국의 특수성에 대해 남북문제 중요하다. 앞으로는 더 중요하게 될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이때까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군수산업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말이 안된다. 군사산업 해서 기계원료 수요가 늘고 소비재 늘었다고 하는데. 군수산업 하는거나 학교 무료로 짓는 거나 똑같다. 전쟁을 없애야 한다. 국방비도 돈이 많이 들어갈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다.
영국노동당은 극좌 극우 다있다.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강기갑
감사드린다. 빈익빈 부익부, 선성장 후분배 이야기 많이 하는데, 외국 자본이 그만큼 점령해있고 구조적으로 근본적으로 문제 있다는 것 알고 있다. 지금 산업구조가 수출구조 되어 있다. 이 구조를 내수진작과 노동자 서민을 살리는 구조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가진자들이 그렇게 특단의 결단 내지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자본가들이 내놓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구조적 모순이 극대화되어서 금융의 실상이 거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그런 지경까지 가야하는 것이 아니냐.
이제 위기가 닥쳐왔고 때가 오고 있다. 이제 우리가 준비하자. 예언자적인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촛불정국 이상의 격변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내수진작으로 전환을 시킬 수가 있다고 보는 건지. 아니면 바로 이런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김수행
대답할 게 없다.
그런데 너무 기다려버리면 지친다. 지치기 전에 우리가 뭐를 만들어내야 한다. 데모를 좀 하자. 가만 있으면 안된다.

부성현
97년과 비교, 한미FTA 문제 다 말슴하셨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김수행
97년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매커니즘이 똑같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인 매커니즘의 이야기로 집중해야 한다. 다음달 환율이 어떻게 된다 이렇게 접근하면 예언의 문제가 되어서 싸움이 안된다.
한미FTA는 노무현이 아시아금융허브 하면서 금융강조를 많이 하면서 미국금융자본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데서 출발할 것 같다. 한미FTA는 한국이 미국을 본받자는 것이 기본아이디어이다. 그래서 경제가 통합이 되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우리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미국이 누가되건 개정을 하자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를 많이 할 것이다. 살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 얼마나 한국이 만만했냐.

ㅁ 원문 출처 ==> http://policy.kdlp.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02_3&wr_id=115



ㅁ "금융엘리트들은 기생충... 서민 살려야 위기 극복"
'마르크스 경제학 대부' 김수행 교수가 바라보는 금융위기 원인과 해법(2008.10.13)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93939


ㅁ 김수행 "MB정부, '무당경제학'부터 버려라"
마르크스주의자의 현실인식…"금융으로 금융위기 극복 못 해"
“한국선 자본통제 필수…세계공황 오면 국내은행 도산 우려”
“새로운 사회 이행위한 정치적 각성 필요”
내수 확대와 소득평등으로 경제위기 대처해야(2008.10.13)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81014082501&Section=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99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32326325&code=10010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2312789


ㅁ [경향과의 만남] 김수행 “경제위기 ‘깡패 자본주의’ 탓”(2008.10.27)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271749445&code=210000


ㅁ 김수행 교수 “美 주도 신자유주의 더는 활로 없다”(2007.11.19)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191734341&code=100203


ㅁ “FTA 이익 기득권에만 돌아가기 쉽다” 김수행 교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221756035&code=100203


ㅁ 김수행교수 “경제학자들 중요한 문제엔 관심조차도 없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161801275&code=960205


ㅁ [名士멘토의 열공특강]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공부 잘하기 위해선 체력 길러야 합니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12/2008101200376.html


ㅁ 서울대, '마르크스 경제학' 김수행 전 교수 후임 '공석'
서울대, 20년 이어진 마르크스 경제학 폐강
끝내 왼쪽 날개 스스로 꺾은 서울대 경제학부
다시 무산된 마르크스경제학 교수 임용... 20년 전으로 퇴행(2008.6.13)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140273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0939329&cp=nv
http://gonews.freechal.com/common/result.asp?sFrstCode=012&sScndCode=003&sThrdCode=000&sCode=2008072814540884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28759


ㅁ 서울대생들, `마르크스경제학'교수 채용 무산 반발(2008.6.17)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133018


ㅁ 경제학자 80명 “서울대 마르크스경제학 교수 임용을”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75128.html


ㅁ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 교수 다시 강단에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내달부터 강의(2008.4.22)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4/h20080422031843843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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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 책 2권 소개]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경제이야기  




김수행| 한울(한울아카데미)| 2008.11.15 | 260p 가격 14,000원


책 소개

세계경제위기가 폭로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말하다
- 김수행 교수의 대중과 함께하는 자본주의 경제 읽기 -

김수행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과 작동 방식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공황론을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주기적으로 위기와 공황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1997년에 아시아를 강타한 IMF 위기와 2008년 현재 전 세계를 경기침체 상황에 빠뜨리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위기 속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꿈꾸는 새로운 사회상을 이야기하면서 과도기적 단계로 한국 사회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대중과 함께하는 한국경제·세계경제 읽기

2008년 2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를 정년퇴임하고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임명된 김수행 교수의 첫 강연을 책으로 묶었다. 2008년 5월부터 6월까지 총 8회에 걸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열린 강연에서 그는 쉽고 명쾌한 설명과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금융위기와 이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대응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강연회 이후 금융위기가 심화된 현실에 대한 분석을 추가해, 현재 금융위기 상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진단과 해법을 최신 버전으로 접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주기적인 위기와 공황, 그리고 금융화로 인해 더 불안정해진 세상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은 지 이제 겨우 10년.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탈규제와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던 미국이 이제는 자국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사상 최대의 공적 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쏟아놓는 주먹구구식 대책과 시시각각 바뀌는 전망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미국 경제는 과연 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 금융위기가 휩쓸고 지나간 후 세계경제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러한 위기를 주기적으로 겪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평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고수하며 살아온 김수행 교수가 이러한 한국경제와 세계경제의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주기적인 위기와 공황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김수행 교수의 설명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생산이 자본가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무계획적으로 행해지면서 과잉생산 공황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닌 데다가 작은 풍문 하나에도 세계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금융화의 흐름까지 더해져 위기는 점점 더 증폭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식투자는 노름이다! 생산하지 않는 자본, 금융자본의 기생성

김수행 교수는 현재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근본적 속성을 기생성으로 본다. 산업 혁신과 생산활동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재산을 재분배하는 데만 몰두하는 투기적 금융 자본주의는 사기 행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활동보다 투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내면서 산업은 죽고 금융만 비대해졌다. 이에 따라 실업자는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지나친 투기 열풍과 반복되는 구제금융, 이에 따른 부실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주기적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서민경제가 움츠러들고 있다.

미국식 ‘깡패 자본주의’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

김수행 교수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깡패 자본주의’라며 일갈한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빈곤율이 가장 높고 빈부 격차가 심하며, 의료보험 같은 기본적인 복지조차 마련되지 않은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미국식 경제 모델을 고수하면서 한미 FTA를 통해 이들과 한배를 타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겠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경제위기의 해법은 복지 확대와 소득 분배를 통해 서민 경제를 살려내는 데 있다

김수행 교수는 금융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미국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책과 한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과 같은 소국 개방 경제에서 경제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는 방법은 국외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시장과 산업을 살리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부실화된 금융기관에 돈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각종 복지 정책을 통해 이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것으로 위기를 타파할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지분을 줄이는 방법도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국내 경제가 튼튼해지면 중장기적으로 금융위기는 해소되리라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제언: 가능한 것부터 바꾸는 것이 혁명적 실천이다

노교수가 꿈꾸는 혁명과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는 온건해 보이는 한편 현실적이다. 그가 말하는 혁명은 대중의 올바른 선택,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서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정권을 세우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가깝고 작은 목표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평등주의를 확대하고 있는 스웨덴 모델을 한국 경제가 과도기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보면서 지금 시급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깡패자본주의적 특성을 제거하는 개혁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가능한 개혁들을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20년간 좌파 정치경제학에 외곬으로 매진하며 노교수가 터득한 담담한 제언은 변화를 향한 그 어떤 외침보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

작가 소개
저자 | 김수행

1942년 10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모교인 대구상고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녔다. 이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서울대 조교 생활을 그만두고 외환은행 조사부에 들어갔다. 이후 외환은행 런던 지점에 부임하면서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영국의 사회보장제도와 1973년 10월의 석유 파동 이후 사회 변화에 흥미를 느껴 런던 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에 들어가 다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1977년에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82년에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10월 귀국하여 1987년 1월까지 한신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학장 불신임안 사태로 해직되었다. 민주화의 열기 속에 1989년 2월 좌파 정치경제학의 불모지였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다. 20여 년간 주류 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2008년 2월에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세 권을 완역한 것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든다.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재미있게 읽는 것을 보면 매우 흐뭇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새로운 사회’를 연구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목차  

- 강의를 시작하며

1.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구조
2. 경제의 금융화
3.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
4. 세계경제의 구조와 발전
5. 1997년 한국 공황의 원인과 결과
6. 세계 속의 한국: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7.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8.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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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정치경제학-제2개정판  




김수행|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03.15 | 457p 가격 18,000원


책 소개

저자가 『자본론』강의를 하면서 경제학을 처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정치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가르칠 필요를 느껴 집필한 책으로, 현실 경제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1년 처음 집필된 이후 2004년에 제1개정판이 나오고 2008년에 제2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는데, 책에 실린 현실경제에 대한 묘사나 통계가 조금만 낡았다 싶으면 새로운 통계와 상황을 묘사하여 이 책을 공부하면서 동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려 하고 있다.

이번 제2개정판에서는 주제 하나하나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전 책의 상당 부분을 삭제했고, 부록에 있던 '시험문제 모음'도 없앴다. 그리고 '좌파 신자유주의'라 불렸던 노무현 정부에서 일어난 주요 사항들을 포함하였다. 한미FTA의 핵심은 무엇인지, 성장과 분배는 함께갈 수 없는 것인지, 외국자본은 어떻게 규제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또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확대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참고문헌에 최근까지의 저작 목록을 모두 올려놓아, 이 책을 읽고 궁금증을 느꼈을 때 찾아갈 길을 터 놓았다.

실업, 금융공황, 주가 폭락, 사회보장제도, 재벌, 노동조합,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 1997년의 한국공황, 세계공황의 가능성, 이명박 정부의 장래 등 주류경제학이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경제학의 관점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접함으로써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제2개정판을 내면서
제1개정판을 내면서
머리말

제1장 시장이란 무엇인가?

제1편 시장을 구성하는 요소
제2장 상품
제3장 화폐와 가격
제4장 기업
제5장 권력

제2편 경제발전과 시장의 발전
제6장 경제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
제7장 자본축적과 노동시장
제8장 화폐시장과 자본시장
제9장 해외시장
제10장 정부의 경제정책

제3편 경제위기와 시장기능의 마비
제11장 경기변동의 주요 개념
제12장 경제공황을 야기하는 환경
제13장 공황이 전개되는 과정
제14장 세계대공황의 역사
제15장 1997년 12월의 한국공황

제4편 자본주의적 발전과 자유경쟁의 제한
제16장 독점
제17장 노동조합
제18장 국가에 의한 경제 재편

제5편 21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
제19장 자본의 세계화 경향
제20장 디지털 혁명의 국내외 파급효과
제21장 한국경제의 개혁 : 과거 정권의 교훈과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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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황? '경제학 공황'엔 왜 침묵하나"

경상대 정치경제학 대학원 신설…김수행·김세균 등 강의

[프레시안] 2008-11-04 오전 9:18:06


경제보다 경제학에 먼저 공황이 닥쳤다. 미국발(發)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 교수들 사이에서는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역력하다. 불과 지난 학기만 해도, "공부 열심히 해서 AIG 같은 곳에 취직하라"고 제자들에게 권하던 교수들이었다.

미국 박사로 채워진 대학, 금융자본주의 위기 앞에서 할 말 잃다

경제학 교수들의 이력만 살펴도, 이런 현상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2006년 2월 기준으로 수도권 대학 경제학과 교수 중 미국 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85.7%에 달한다. 흔히 주류경제학이라 불리는 이론을 전공한 비율은 90.5%다. 아예 100% 미국 박사만으로 경제학 교수진이 채워진 대학도 6곳(경희대, 중앙대, 단국대, 동덕여대, 홍익대, 서울여대)이나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벗어난 경제 질서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위기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이런 교수들에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는 속담이 어색하지 않다.

물론, 미국에서 보수 주류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대학 강단을 독점한 상황은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학의 경우, 2003년 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에 재직 중인 49명의 교수 중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는 48명이고 국내 박사 학위 소지자는 1명뿐이다.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가운데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는 43명으로 외국박사의 90%에 달했고 전체 교수의 88%에 이른다. 이들은 주로 미국식 주류 정치 이론을 연구한 사람들이며 한국 사회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학술단체협의회. 2003. <우리 학문 속의 미국>)

"숫자에만 갇힌 경제학을 거부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들이 결국 뭉쳤다. 미국식 주류 사회과학이 놓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탐구하는 대학원 과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미국식 주류 보수 이론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의 본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기존 분과 학문 체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게 세 번째다.

이런 세 가지 문제의식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많다. 그 중 하나가 '정치경제학'이다. 아담 스미스 시절부터 경제학은 '정치경제학' 이었다. 경제학이 지금처럼 숫자에만 갇혀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책은 <국부론>이 아니라 윤리를 다룬 <도덕 감정론>이었다. 경제학은 태어날 때부터, 철학과 형제지간이었다. 통계 뒤에 숨어 있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제학이 오히려 이단에 가깝다.

'진주사회과학연구회', 학제간 연구로 정치경제학 기틀 다지다

미국만 바라보는 사회과학 강단에 절망한 이들이 모인 자리 역시 정치경제학이다. 이들이 경상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정치경제학과를 개설했다.

오는 2009년 첫 신입생을 받는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은 '학과 간 협동과정'으로 운영된다.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정치경제학을 위해서는, 개별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학문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다들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 참가하는 경상대 교수 15명의 전공은 다양하다. 경제학과, 사회학과, 정치행정학부, 사학과, 경영학부, 사회교육학과, 법학과 교수가 두루 포함됐다.

이들 15명은 지난 1991년 생겨난 토론 모임인 '진주사회과학연구회' 회원들이다. 이들은 지난 17년 동안 400회 이상의 연구 발표회 및 독회를 열었다. 또, '한국사회의 이해',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사회운동' 등 교양 과정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학제 간 연구 및 교육의 경험을 쌓아왔던 셈이다.

이런 시도는 학문간 벽이 높은 한국 사회과학계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한국 대학 교수 대부분을 배출한 미국에서도,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지닌 대학이 많다.

로스쿨 발판 아닌, 현실 모순 풀어내는 사회과학!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UMass,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뉴스쿨 대학(New School University) 등이 대표적이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대학원 과정은 마르크스 경제학 외에도 페미니즘 경제학, 환경 경제학 등 이론적 영역을 폭넓게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학에서 운영하는 정치경제학 연구소(PERI, 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는 세계적으로 수준을 인정받는 기관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뉴스쿨 대학 역시 역사와 사회학, 정치학 등을 두루 포괄하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소년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학생들에게서 인기가 높다. 로스쿨 진학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현실에서 겪는 모순을 풀어내는 '진짜 사회과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이 주로 찾는다는 뜻이다.

김수행, 김세균 등이 참여하는 강의…활동과 이론의 결합 꿈꾼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 역시 이들 대학의 사례를 참고해서 설립됐다. 그래서인지, 석사 과정 6명, 박사 과정 4명을 첫 신입생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 대학원에 쏠리는 관심은 만만치 않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비판 사회과학의 거목으로 꼽히는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이 강의하기로 한 것도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에 기대를 품게 만드는 한 요소다.

대학원 설립 과정에 참가한 장시복 경상대 연구교수는 "노동조합 관계자와 사회단체 활동가, 진보적인 연구자들이 벌써부터 대학원 입학에 대해 문의한다"고 전했다.

"미국식 주류 경제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다음은 경상대 정치경제학 협동과정 설립을 주도한 정성진 교수(경제학)와의 전화 인터뷰.
▲ 정성진 교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정치경제학 대학원 설립을 여러 해 동안 준비했다고 들었다. 마침, 대학원 개원을 앞둔 시기에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일어났다. 주류 경제학계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을 포함한 비주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성진 : 최근 사례는 주류 경제학이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읽지 못한다. 체제를 정확히 분석하기보다,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것도 그래서다.

이런 상황에서 비주류 경제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는 다양한 흐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경상대 정치경제학 대학원에서 다루는 것을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이라기보다 마르크스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원리와 한계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는 더 가속화돼야 한다.

"케인즈주의, 위기 해법 아니다"

<프레시안> :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정성진 : 미국발(發) 금융위기를 놓고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함께 처방으로 제시되는 게 케인즈주의로의 복귀다.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 등 주류 매체들에서도 드러나는 흐름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케인즈주의적 처방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겨난 경향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과연 정답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1930년대 공황을 극복할 수 있게끔 한 공로는 케인즈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에 돌리는 게 옳다. 케인즈의 처방은 사실 별 효과가 없었다. 1970년대 미국은 적작 재정을 중심으로 한 케인즈주의적 처방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국가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어져온 경제적 황금기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막을 내렸다. 본격적인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 국가자본주의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대안으로 떠오른 게 신자유주의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역시 해답은 될 수 없었다.

전체 자본의 지속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을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거품을 부추기는 것을 통해 공황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적 처방마저도 한계를 드러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케인즈주의를 꺼낸다? 정답이 아니라고 본다.

"본격화된 공황, 탈출 못하면 폭력적 수단 나타날 수도…"

<프레시안> :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가장 익숙한 주제를 꼽으라면,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론'과 자본주의는 공황을 피할 수 없다는 '공황론'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전공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된 셈인데, 지금이 정말 공황 국면이라고 보나.

정성진 : 그렇다. 본격적인 공황이 시작됐다. 주류 매체가 정부에 주문하고 있는 케인즈주의적 처방은 결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모색과 실천이 필요한 때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주도할 세력은 미미하다. 노동운동 진영의 실력 역시 부실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대안을 당장 구체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자본가들은 다시 폭력적인 방법을 꺼낼 가능성이 있다. 세계대전 당시처럼 말이다.

<프레시안> :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런데 이른바 정치경제학 연구의 중심지를 지향했던 대학의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한신대 경제학과가 대표적이다. 김수행, 정운영, 윤소영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한신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했었다.

정성진 :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김수행, 정운영 등이 학교에서 내몰리면서, 한신대는 정치경제학 연구가 많이 약해졌다. 과거 한신대에서는, 학내 갈등이 정치경제학 연구의 발목을 잡았었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교수진은 오랫동안 공동연구를 하며 호흡을 맞춰왔다. 그래서 팀워크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외국에도 정치경제학 연구가 활발한 대학이 많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UMass,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뉴스쿨 대학(New School University)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 대학에서는 정치경제학과가 별도로 운영되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섞어서 가르친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와 비슷한 모델을 찾는다면, 호주 시드니 대학을 꼽을 수 있다. 이 대학에서는 정치경제학과가 별도로 운영된다.

"신입생 중 상당수는 사회단체, 노동조합 활동가로 채워질 것"

<프레시안> : 최근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한 김수행 교수의 후임을 놓고 말이 많았다. 서울대 측이 김 전 교수의 후임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한 명도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학계에서 지내는 처지를 잘 보여준다.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졸업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정성진 : 서울대 경제학부처럼 모조리 주류 경제학자로만 채워진 대학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으면서 다시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본다. 주류 경제학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난 상황 아닌가. 대학과 연구소가 비판적 사회과학을 계속 외면하기는 어려울 게다.

그리고 경상대 정치경제학과 대학원 졸업생 가운데 학계로 진출하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나머지는 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활동할 전망이다. 애당초 신입생 선발과정에서부터 사회단체, 노동조합 활동가를 상당수 뽑을 계획이다. 이들은 공부를 마친 뒤, 다시 현장에 복귀하게 되므로,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을 조화시킬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성현석 기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031155855&Section=
 

http://www.cjycjy.org/bbs/view.php?id=anybody&page=1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882

:
Posted by 엥란트

[이대근칼럼] 54%가 말하는 것 


[경향신문] 입력: 2008년 04월 16일 18:09:09  


민주주의 선거는 선택 가능한 대안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18대 총선은 그러지 않았다. 한국의 정치계급들은 대안을 내놓는 대신 선택의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자기의 기득권을 재생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선거일정을 늦춰 후보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했다. 낙하산·밀실·나눠먹기 공천을 통해 시민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택한 것을 시민들이 선택하게 했다. 쟁점은 피하고, 시민사회의 토론은 막았다. 정당들의 이념·노선·정책은 불분명했을 뿐 아니라, 서로 구별되지도 않았다.


- 선택의 기회 차단당한 유권자 -


이렇게 시민참여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선거에서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만큼 흥미 없는 일도,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민의 46%가 투표장을 찾았다. 그러나 그 나머지, 아니 54%의 절대다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합리적 선택이다. 루소는 “시민들은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했다. 선거 때 투표행위 한 번으로 주권을 넘겨받은 의회가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제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한 말이다. 그러나 대의제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루소의 이 18세기적 걱정조차 21세기 한국인에게는 사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거 동안에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54%에게 자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표장에 갔던 46%에게도 자유는 없었다. 17개의 정당과 수많은 후보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대안이 있다고 기만하는 숫자에 불과하다.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고르든 결과는 십중팔구 같았다. 보수당, 보수성향의 당선자는 어림잡아도 200석이 넘고, 통합민주당의 우경화를 고려하면, 18대 국회 그 자체가 하나의 보수당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46%의 시민은 자기의 대표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표자가 시민을 선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시민들이 주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착각이다. 장 보들리아르식으로 말하면,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속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가 보수적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결과는 보수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보수의 과잉 대표체제에 있다. 견제와 균형을 잃은 이런 체제에서는 보수세력간 권력투쟁이 정치를 대체한다.


- 다시 거리서 권력과 마주하나 -


물론 보수정파간 찬반이 엇갈리는 한반도 대운하처럼 보수에 의한 보수의 견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며, 있다 해도 보수정파간 권력 투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것이다. 간혹 그들간 차이가 커 보이는 때가 있을 텐데, 그것은 권력 배분을 둘러싼 갈등의 치열함 때문이지 차이의 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갈등이 반복되고 간혹 이회창과 민주당이 끼어들어 실랑이하는 소리도 자주 들릴 것이고, 이런 정치판의 소란이 마치 견제와 균형이 작용해서 정치가 잘 가동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복당이니 당권이니 하는 것들은 서민들의 삶의 개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이다.


이런 것 말고도 보수 과잉 대표체제가 안고 있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체제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가치·이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닫힌 구조’라는 점이다. 10년 만에 민주화 정권은 몰락했지만, 시민사회는 민주화 20년간 성장해왔다. 이는 정치사회가 이 시민사회의 성숙함과 다양성을 억압하고, 시민사회와 분리되어 서로 어긋나고 충돌하는 정치구도를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54%가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지반이 허약한 이 정치판은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다. 한마디로 보수 과잉 대표체제는 불안을 제도화한 체제이다. 이 불안을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민주당? 그러나 민주당의 81석은 보수세력을 견제하기에 너무 적은 의석이며, 위기감을 느끼고 노선과 조직을 전면 쇄신할 정도로 자극받기에는 너무 많은 의석이다. 더구나 민주당은 새로운 보수당으로 탈색되고 있다. 81은 의미없는 숫자이다.


정치 현실이 이렇다면, 자기의 욕구와 이익을 대변할 정당을 잃은 이들은 권력과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은 의사당에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아스팔트. 다시 거리의 정치인가.


〈 정치·국제에디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161809095&code=990339


ㅁ [시론]새 진보를 향한 대전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161816475&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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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진보 지식인들, '민노당 해체 진보신당' 대세
[진단] 진보신당 걸림돌은 '심상정·노회찬'의 '민노 중심주의와 기회주의'
 
취재부
"더이상 '진보'라는 이름으로 민족주의 자주파(NL)와 함께 갈 수 없다"

고종석, 손호철, 홍세화, 박노자, 진중권, 우석훈, 박상훈...

민주노동당 외곽의 소위 내로라하는 진보 지식인과 논객들이 '민족주의 자주파(NL) 및 종북·친북(從北·親北) 노선과 결별, 민노당 분당(해체)과 새 진보신당 창당'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같은 요구가 급속하게 대세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진보 지식인이나 논객 중에, 자주파의 주장처럼 "자주파(NL)와 평등파(PD)가 더욱 단결·단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민주노동당이 당내 다수파인 민족주의 자주파(NL)의 기득권적이고 패권적인 '자기방어'에 막혀, 대선 참패 후에도 철저한 자기 반성은커녕 당을 추스릴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조차 꾸리지 못할 정도로 막막한 상황인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한마디로 당 안과 밖의 '온도차'가 '극과 극'인 셈이다.

* 진보개혁 '지식인·논객'들의 최근 민노당 관련 주장들
이름 및 주장일자 주장 내용 요약(해당 글·기사 제목)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한국일보 칼럼, 2007.12.20)
민주노동당은 민족통일이라는 의제를 제 가치목록의 변두리로 밀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정분을 공식적으로 끊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족지상주의와 통일근본주의는 좌파정당 민주노동당의 근본가치가 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우익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시간이 없다)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레디앙 기고, 2007.12.20)
이제 민주노동당의 서로 다른 정파는 조정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명예롭게 차이점을 조정하면서 하나의 '정치행위'를 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가 많아 보인다.
손에 있는 작은 '단맛'을 틀어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권영길 후보와 그를 앞세워 '과일 따먹기'만 하는 집단(NL·자주파)이, 입으로만 "반 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 이 '차가운 자본주의'에 대한 작은 쉼터라도 될 수 있을 것인가? 도저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권영길 후보는 정계에서 은퇴하라)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레디앙 기고, 2007.12.21)
당 지도부를 맡아왔던 지배분파(NL·자주파)와 권영길 후보가 먼저 책임 있는 답을 해야 하고, 그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될 것이다.(인민 '종이 짱돌'로 복수하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
(한국일보 기고, 2007.12.23)
만일 친북적인 자주파가 당내 다수파라는 현실로 인해 이 같은 개혁이 힘들다면 이번 기회에 친북적인 조선노동당과 그렇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갈라서야 한다.
특히 심상정, 노회찬 의원 같은 민주노동당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중요하다. 결국 민주노동당, 아니 한국 진보정당의 미래는 심상정, 노회찬 의원과 같은 차세대 스타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심상정, 노회찬의 결단)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레디앙 인터뷰, 2007.12.28)
당권을 잡고 있는 주체파(NL·자주파)의 환골탈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토론이 가능해야 기대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는 광신자 집단이나 사교(邪敎) 집단의 그것에 가깝다.
이들을 허덕이면서 안고 가는 것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당 창당이 더 낫다.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 예컨대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의원은 진솔한 자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데 이들은 관성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용기가 부족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분당과 새로운 당 창당 문제에 대해 너무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염증을 느끼거나 식상해서 떠나고 벗어난 사람들이 많다.("진보신당 창당이 원칙적이고 현실적")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레디앙 기고, 2007.12.28)
민주노동당 아닌 새 진보정당의 창당 시기가 내달이 될지, 내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진보정치운동의 흐름을 민주노동당에서 새 진보정당으로 트는 노력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많이 알려진 바대로 민주노동당을 넘는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첫 이유는 '주체사상파(NL)' 때문이다.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노동운동이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압도적 다수의 근로대중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무능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눈치를 살피느라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깨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 당이 더 이상 도전하거나 혁명하지 않는 정당이기 때문이다.(이제 민주노동당을 넘자-새 진보정당, 개방적 현대 이념정당을 만들자)
김영국 -대자보 편집위원
(대자보 기고, 2007.12.28)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의 양대 정파인 민족주의 자주파(NL)와 평등파(PD)는 서로 증오의 단계를 지나 '혐오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처럼 자주파(NL)와 평등파(PD)가 '혐오적 동거' 상태에 있는 한, 어떤 것도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건 누구보다 민주노동당 구성원들이 더 절감하고 있다. 그동안 양 정파가 적당히 봉합해서 '별거적 동거'를 거듭해온 결과,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는' 식물상태로 전이돼 왔다는 게 민노당 안팎의 냉혹한 평가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당의 해체'와 함께, 이번 대선 참패로 사실상 상실해버린 진보 진영의 대표성과 기득권 의식을 과감히 버리고 '일원'으로서 '새로운 범진보개혁 정당'의 창당 수순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민주노동당이 우리 사회의 진보개혁적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상황으로까지 와 있다고 판단된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민노당 등 진보 진영에서 노선, 철학, 정책(컨텐츠), 대중성으로, 임종인·김성호 의원은 범여권 등 민주개혁 진영에서 일관된 개혁·진보적 정치 행보와 정책(컨텐츠)으로 검증된, 몇 안되는 '신뢰도 높은' 정치인들이다.
이들이 결합한다면 명실공히 개혁과 진보의 신뢰도 높은 상징적 인물들이 결합하는 의미를 담게 된다. 개혁·진보 진영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기에 따라서는 단박에 범여권과 자웅을 겨룰 수도 있고, 개혁·진보 진영 전체를 평정할 수도 있는 강력한 새 정치 주체로 우뚝 설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요, 창조적 외연 확대다.(노무현과 민노당 '해체'가 최고의 진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한겨레블로그, 2007.12.29)
당원은 아니지만 민노당 창당 이후부터 지금까지 민노당을 계속 "응원"해왔다. 민노당이 분당이 되어서 나와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한 소위 "좌파민족주의자(NL)"들이 당을 떠나면 아마도 나도 당원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도 "분당"쪽이지만 객관적으로도 이 길 이외에 없는 것 같다.(민노당 분당 - 필요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프레시안 기고, 2007.12.30)
심상정 의원 내세워 대충 봉합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위를 가득 채운 기생충들에게 잠시 대장 쪽으로 내려가 있으라 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불행히도 민주노동당의 '혁신'은 불가능해 보인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그들(NL·자주파)이 과연 이깟 일로 자신들의 목표를 포기하겠는가?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이제 진지하게 분당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라 부르든, '민주사회주의'라 부르든, '사회국가'의 실현을 이념으로 하는 현대적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앞길이 아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더뎌 보여도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혁신적 좌파정당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은 아직도 이 사회에 충분히 뜨겁게 존재한다.
종북파와는 애초에 만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민족자주당 만들어서 열심히 '조국통일사업'에 매진하게 내버려 두라. 뭐 하러 전혀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진 두 세력이 하나의 당에서 계파싸움이나 하면서 정력을 낭비해야 하는가?(민노당 쇄신, '새 진보정당' 건설이 답이다-'자주' 앞세운 당내 '종북파'와 결별하라)

민노당, 비대위 구성조차 못한 '무능력한 정당'

대선 참패 이후 당의 진로와 쇄신 방안을 논의하고 결정할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중앙위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남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지난 29일 오후 3시 30분부터 다음날(30일) 새벽 3시까지 무려 '12시간' 가까이 비대위 구성과 당의 진로 및 종북·친북 노선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였지만 결론은커녕 비대위 구성조차 못한 채 산회했다.
이에 따라 향후 평등파 사이에선 분당 움직임이 더욱 본격화될 수도 있어 민노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날 중앙위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산된 데에는, 그동안 민주노동당 운영과 대선 참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NL) 수장들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출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당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는 '비례대표 불출마 선언' 요구를 이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미 상대 정파에선 비례대표 출마 포기를 선언했음에도 최대 책임이 있는 자주파 수장들이 자신들의 '쪽수를 믿고' 알량한 기득권에 취해 권력을 놓지 못한 게 최대 요인이다.

또 한가지는 평등파 측의 민노당 종북·친북(從北·親北) 노선의 '정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읺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요구는 자주파의 노선과 사상을 버리라는 요구여서 애초부터 합의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향후에도 양대 정파인 민족주의 자주파와 평등파가 당 진로와 쇄신 방안에 극적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 결국 당내 논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시간과 동력만 소진하기보단 차라리 하루 속히 갈라서서 각자 갈 길 가는게 모두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이른바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론'이 더욱 힘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무엇보다 '민노당 자주파와 결별 후 분당 및 새 진보신당 창당론'은 당 밖의 진보적 지식인과 논객 그룹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지'라기 보다는 사실상 '강력하고도 절박한'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정도다.

당 밖의 잠재적 우군들은 현재처럼 자주파와 평등파가 사사건건 대립·갈등하는 민주노동당에 환멸을 느끼고 있어, 차라리 이참에 깨끗하게 갈라서 각자의 노선과 비전을 가지고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쪽으로 급속히 기울고 있다.

특히 이들은 민노당 내 자주파의 시대착오적인 북한 추종주의(종북주의)와 기득권적이고 패권적인 조직 운영에 대해 더이상 진보의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양상이다.

또한 현재 범여권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새로운 버전의 진보신당 창당 이슈를 먼저 던짐으로써 정계개편 흐름을 선점하는 게 향후 정국 주도권과 관련 훨씬 유리하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과거에는 선거에서 참패한 보수 정당에서 으레 정계개편을 들고 나왔으나, 이번엔 진보 진영이 먼저 치고나오는 것이 범여권 포함 개혁·진보 진영 전체의 정계개편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대선 참패로 개혁·진보 진영 전체가 침몰 직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먼저 돌파구를 마련해서 내놓는 세력이 정계 재편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분당·재창당론은 죽음의 길, 정계재편 추동해야

따라서 지금은 '그들만의 재창당론'이나 '그들만의 분당론'이 아닌, 범여권까지 포괄하는 개혁·진보 진영 전체의 '정계 재편' 흐름으로 이어질 때만 반한나라당 진영이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롭게 정치 주체를 만들어가는 주체들에 대한 개혁·진보 진영의 폭넓은 신뢰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민주노동당 측에서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과 범여권 등 민주개혁 진영에서 무소속 임종인·김성호처럼 일관된 개혁·진보적 정치 행보로 '검증된' 정치인들이 '코어(핵심)'가 돼 새로운 판을 주도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범여권과 민주노동당의 몰락의 핵심 원인도 주도세력에 대한 국민적 '불신'에 있는 만큼, 새롭게 정치 주체를 창출해가는 세력은 반드시 주도세력의 개혁·진보적 노선과 정책·비전 등에 대한 신뢰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현역 정치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대외 활동 등으로 검증된 지식인 그룹, 예컨대 反한미FTA 전선의 '쌍벽'인 '정태인, 이해영' 교수와 전국민에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우려를 일깨워준 이강택 KBS PD 등이 결합한다면, 이 정치세력은 개혁·진보 진영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처럼 '코어'그룹을 확실하게 구축한 다음, 민주노동당의 좌측과 우측인 범여권까지 그나마 개혁·진보 진영에서 덜 망가진 지식인·시민운동가·단체와 연대의 폭을 넓혀 외연 확대에 나선다면 내년 총선에서 큰 바람을 일으킬 여지도 높아 보인다.

최소한 '이대로 힘 한번 못써보고' 개혁·진보 진영이 내년 총선에서도 전멸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는 흐름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설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개혁·진보 유권자들로 하여금 지난 대선처럼 투표장에 갈 마음조차 없게 만드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진보 유권자들이 당락 여부를 떠나 지지 후보를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권유할 수 있고, 보람 있고 당당하게 투표장으로 가게 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심상정·노회찬의 민노당 중심주의와 기회주의

그러나 이런 당 안팎의 '자주파 결별과 분당 및 진보신당 창당'이라는 거센 요구는 민노당 내 자주파의 기득권 고수라는 측면보다 오히려 평등파 대표 격인 심상정·노회찬 두 스타 의원의 결단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민주노동당 의원 중 대중적 영향력과 흡인력을 갖고 있는 이들의 결단과 합류가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흐름에 큰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결단이 우선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자주파의 종북 노선과 패권적 조직 운영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지만, 이들과의 결별이나 민주노동당 분당에는 "지금 시점에서 적절치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심상정 의원의 경우 3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주파와의 결별을 목적으로 하는 신당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노회찬 의원도 지난 28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에서 "조승수 소장과 생각이 다르다. 대선 민심이 민노당 분당은 아니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민노당이 자주파(NL)의 기득권 고수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할 경우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심상정·노회찬 의원이 자신들에게 찾아온 당 대표나 주도권에 연연해 개혁·진보 진영 전체의 판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 아니냐.", "민노당이라는 한 줌도 안되는 기득권에 안주해 '용기'를 내지 못한다.",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다.", "자주파와 적당히 타협해 도로민노당으로 귀결될 경우, 그들도 '진보 양아치 두목'으로 전락할 것이다."는 볼멘소리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여전히 '민노당 내에서 최대한 혁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분당이나 '안티 자주파'보다는 진보 진영이 무엇을 대표하고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 마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민중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획득하고,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통제해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NL)의 시대착오적이고 기득권적(패권적인) 사고 때문에 비대위 구성조차 못할 정도로 '불임정당'인 민노당 안에서 어떻게 그런 '거창한' 일까지 할 수 있는지가 대단히 회의적인 상황이라는 점이다. 심상정·노회찬의 '민노당 제2창당론'으로 대변되는 혁신론이야말로 '가장 실현 불가능한 관념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차라리 "자주파와 적당히 타협해 주도권이나 찾아오겠다."고 말하는게 더 솔직해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기회주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설사 심상정·노회찬 의원이 새로운 진보신당 창당 움직임에 합류한다 해도, 지금처럼 '민노당 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한, 당 밖의 잠재적 우군이나 지지층의 합류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 밖의 진보 지식인과 잠재적 지지 세력은 이번 대선 참패 과정에서 보듯이 현재의 민주노동당이라는 틀이나 기득권을 인정하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진보를 지향하면서도 민노당을 향해 '그런 진보정당은 더이상 필요 없다.'는 정도의, 범여권 못지않은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민노당이라는 조직을 안고 기득권을 행사하려는 '민노당 중심주의'로는 민노당 쇄신이든, 재창당이든, 분당이든, 진보신당이든 그 어떤 시도도 당 밖의 호응을 얻어내기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하고 현실적인 진단에 가깝다. 이것을 대통합민주신당의 정치꾼들처럼 민노당 안에 있는 사람들만 '정치 청맹과니'가 되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작금 민노당 정치인들의 정치적 감각과 판단력이 결코 범여권 정치꾼들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방증이기도 하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에게는 지금의 정치적 판단과 행보가 향후 '대중 정치인'으로 한단계 도약하느냐, 아니면 정파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 '그저 그런' 진보 정치인으로 묻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들이 지금처럼 민노당의 틀에 안주할 경우, 심상성·노회찬이라는 진보 스타를 '내년 4월 9일 이후에는 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99%'라는 점이다. 민노당 자주파의 종북관도 시대착오적이지만, 기회가 왔음에도 이를 낚아채지 못하거나 현실에 안주해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정치인 또한 시대착오적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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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우려스런 민주노동당 비판
노무현과 민노당 '해체'가 최고의 진보다
'잡탕과 구태' 민노당은 이제 제 갈길 가라

2007/12/31 [2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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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노무현과 민노당 '해체'가 최고의 진보다
[정치시평] 심상정·노회찬+임종인·김성호=新진보개혁정당이 '최선'
 
김영국
* 목 차 *

- 경악스러운 참패, '기분은 권영길하지만 차라리 홀가분하다'

- 뒤늦게 봇물 터진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 요구들

- 노무현과 친노 세력 '응징' 없는 쇄신·환골탈태는 '원천무효'

- 개혁·진보 진영은 '노무현과 이건희 구속'에 앞장서야

- 공황상태 민노당, 얼굴만 바꾼 봉합이냐 분당이냐

- 민주노동당 참상(慘狀)의 근원들

- '북한 군사왕조집단 추종주의'와 '단절' 없인 어떤 시도도 무의미

- 민주노동당은 해체 후 '범진보개혁 신당' 창당으로 옮겨가야

- 심상정·노회찬·조승수, '진보 양아치 두목'은 되지 말라

- 침묵의 카르텔 깬 '조승수'가 옳다

- 왜 심상정·노회찬+임종인·김성호 조합이 '최선'인가

- 최악(最惡)은 '최선(最善)으로만' 치유된다

경악스러운 참패, '기분은 권영길하지만 차라리 홀가분하다'

노무현과 민노당이 죽어야 '진보'가 산다. 둘은 '지지층 배신'과 '행태적 수구좌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무현'은 단지 대통령 한 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과 친노 세력 그리고 범여권 정치집단과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댄 지식인과 시민사회단체를 통칭(統稱)한다.

2007년 사상 최악의 대선 참패는 이들의 해체와 새로운 정치 주체의 창출 없이는, 진보의 어떤 몸부림도 백약이 무효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기분도 권영길한데', 오늘은 개혁·진보 진영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금은 구체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그동안 개혁·진보 진영 쪽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오늘의 참담한 결과에 대해 면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난 12월 19일 누군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과의 삼보일배'라도 제안했더라면 단박에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나만은 개혁·진보적 노선에 충실했고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기 위해 일관된 신념을 가지고 대중을 향해 외쳐왔으나, 소수에 불과했다는 변명조차 무의미한 상황이다. 몸을 던져 오늘의 사태를 막지 못한 나 자신의 나약함을 책망하는 게 오히려 속은 편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금은 홀가분하다. 비록 맞아야 할 매였지만, 너무 큰 바윗돌로 맞아 너무도 아프지만, 그걸로 국민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졌다면 차라리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국민의 개혁·진보 진영에 대한 '무관심·냉소·혐오' 가득한 시선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응징'의 크기에 대해 늘 불안한 마음으로 가슴 졸여온 때문이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당선자보다도 많은 표와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그 화려하고 찬란했던 '지지탑'은 참담하게 붕괴됐다.

지지층을 향한 '약속'과 믿고 찍어준 지지자들의 '염원'을 배반하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오만과 독선에 빠져 지지층을 우롱한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어떤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 충격적으로 목도했다. 충격파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늦게나마 이명박 당선을 축하한다. 또한 지지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도 전체 유권자의 30%라는 '사상 최저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를 지지하지 않은 70%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 부디 '제2의 노무현'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범여권과 문국현 등 민주개혁 진영과 민주노동당 등 진보 진영의 참패는 누구를 비난하고 책임을 추궁할 의욕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 모두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욕 먹는 것보다 슬픈 건 잊혀지는 것이다. 지금은 뼈가 부서지는 '채찍'마저 감사해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건, 위장전입, 위장취업, BBK 의혹 등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선 출마조차 어려울 정도의 도덕적 흠결을 지닌 사람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녀들에게 부모 세대의 치부(恥部)를 드러낸 것이다. 해외 언론의 조롱대로 'X 같은 후보'만도 못한 '사상 최고로 못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세에 우리는 어떤 선조로 기억될지 벌써부터 두려움이 앞선다.

뒤늦게 봇물 터진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 요구들

이번 총선에도 낙선운동이 있다면, 제1호는 마땅히 이해찬, 유시민, 이광재 등 노 정권의 좌충우돌과 지지층 배신을 온몸으로 옹호하며 한자리씩 해먹고도 모자라 대통령까지 해먹겠다고 난장판을 벌였던 '친노 세력'과 올해에만 당적을 4차례나 바꿔가며 정당정치를 걸레로 만든 '김한길계', 강봉균, 김진표, 안개모 등 '실용'의 탈을 쓰고 진보개혁 지지층을 우롱한 무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선 참패로 이들 모두가 사실상 '자연 낙선' 대상으로 굳어진 이상, 스스로 대대적인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백의종군·정계은퇴)를 선언해주는 게 그나마 그들이 망친 개혁·진보 진영을 살리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소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몰락에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구태스런 정파 싸움에서 주류에 있었던 사람들까지 개혁·진보 진영 붕괴에 책임이 큰 사람들은 이 대열에 대대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범여권과 문국현 진영을 오가며 '단일화 거간꾼' 노릇한 지식인과 '늙은 여우' 시민운동가들도 총선 불출마 대열에서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은 '대대적인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가 시대정신'이다. 최소한 그 정도의 결단도 보여주지 않고 작금의 개혁·진보 진영에 대한 국민적 냉소와 혐오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에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이다.

나는 이같은 주장을 대선일 훨씬 전인 지난 11월 2일부터 줄기차게 펼쳐왔다.[☞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천만의 말씀'들-범여권 핵심 정치인들의 대대적인 '총선 불출마' 선언이 필요하다(대자보, 2007.11.2) 전문보기]

참담한 패배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단일화, 대통합 같은 감기약 처방이 아닌, 범여권과 문국현 진영, 민주노동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의 대대적인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 선언이 다른 어떤 조치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런 살신성인의 자세만이 국민적 냉소와 혐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특효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필요성과 절박함은 이미 임계점에 와 있다.

대선 참패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 때는 어느 곳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막상 경악스런 참패가 현실이 되자 지금은 각 진영 여기저기서 총선 불출마와 2선 후퇴(백의종군·정계은퇴)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이다.

그마저 모두가 책임지는 모습이 아닌, 정치집단 간 '네탓 공방'으로 변질되고 있다. 똥 묻은 견공(犬公)들끼리 서로 꼴 보기 싫다고 짖어대는 꼴이다. 이래선 다음 총선도 해보나 마나다. 가장 책임이 큰 순서대로 솔선수범하면 될 일이다.

노무현과 친노 세력 '응징' 없는 쇄신·환골탈태는 '원천무효'

그 어떤 노력도 노무현과 친노 세력에 대한 응징이 없는 쇄신이나 환골탈태는 '원천무효'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친노 측근'들의 도덕적 파탄이 계속되고 있다. 대선 참패가 충격적으로 펼쳐지던 순간에도 노 대통령의 청와대 참모들은 눈 하나 까딱 않고 알량한 청와대 근무 경력을 '딱지' 삼아 총선 지역구를 고르느라 눈알이 빠질 정도란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뻔뻔함이 노무현을 망친 주범임을, 측근이라는 정치 청맹과니들만 주제 파악 못하고 날뛴 게 오늘날 '노무현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제발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겠다."는 자신들의 공언대로 꼭 '노무현黨'을 만들어 총선에 나서주길 바란다.

국민들의 분노를 쏟아내고 씻김굿 제물으로 이들만한 존재가 없다. 이들이 끼어 있는 당이나 정치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든 친노 세력과 함께 하는 정치인과 정치집단은 저승사자를 불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을 보수 진영이 아닌 개혁·진보 진영에서 앞장서 응징해야 한다. 국민의 분노를 '자체 정화(淨化)' 노력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 이것이 이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보수 진영이 나서기 전에 개혁·진보적 시민단체가 앞장서 펼쳐야할 이유이다.

이런 정도의 '자기 정화'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는 개혁·진보 시민사회는 똑같이 썩은 집단에 불과하다. 오늘날 국민의 개혁·진보 세력에 대한 불신의 핵심도 보수 세력을 비판하는 데는 저승사자 같으면서 자기 쪽 사람에게는 너무도 관대한 이중적 처신에 있었다.

개혁·진보 진영은 '노무현과 이건희 구속'에 앞장서야

오늘의 개혁·진보 진영 몰락의 '원흉(元兇)'은 누가 뭐라 해도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친노 세력' 그리고 이들과 결탁해 대한민국을 통째로 말아먹은 '삼성제국 이건희 회장'이다.

이들은 오로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슬로건으로 똘똘 뭉쳐, 재벌과 기득권 세력은 '입이 찢어지고' 서민은 사상 최대의 양극화 고통 속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약육강식의 정글 사회를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개혁·진보 세력이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이들을 거둬들여야 한다.

'삼성 특검'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집중적으로 압박함으로써 반드시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 핵심 인사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을 응징하도록 개혁·진보 진영이 누구보다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그러면서 개혁·진보 진영 스스로 '노무현 족쇄'를 벗어던져야 한다.

공황상태 민노당, 얼굴만 바꾼 봉합이냐 분당이냐

"권영길에 대한 투표는 '비난적 지지'이자 민주노동당과 작별을 고하는 '고별 투표'였다." 도살장에 소 끌려가는 심정으로 투표장에 들어가 권영길을 찍고 나온 사람의 푸념이다.

권영길 후보의 17대 대선 득표율은 원내 진출 이전이던 16대 대선 성적(3.9% 득표)에도 못 미치는 참패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대선 이후 당내 평등파(PD) 사이에선 '더이상 이대로는 자주파(NL)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당내 양대 정파인 민족주의 자주파(NL)와 평등파(PD)는 서로 증오의 단계를 지나 '혐오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부 당원은 "이번 대선 참패로 정치적 생명력을 잃게 될 자주파(NL)들이 새로 창당할 좌파연합정당으로 또다시 밀고 들어올 지도 모르니, '자주파 명단'을 작성해서 자유롭게 회람토록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1일엔, 김혜경 전 당대표, 조승수 현 진보정치연구소장, 김형탁 전 대변인 등 민주노동당의 전·현직 고위 간부들까지 나서, "알량한 권력 놀음에 취해 당이 진보적 대중에게 외면받는 결정들을 하도록 자초한 '다수파(NL·자주파)의 수적 우위에 근거한 전횡'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선 참패 책임론을 본격 제기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시대에 고통받는 대중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민주노동당은 이제 칼을 입에 무는 심정으로 반성해야 한다."며 당의 대선 참패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책임, 당의 근본적인 쇄신을 논의하기 위해 즉각적인 '임시 당대회 소집'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나섰다. 당내 각 의견그룹들도 철저한 대선 평가와 '재창당' 수준의 전면적 당 쇄신을 촉구하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설상가상으로 현재의 당 구조로는 미래가 없다며 자주파(NL)와 결별해야 한다는 평등파(PD)의 '분당론'이 본격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는 분당과 함께 새로운 '좌파연합신당'을 창당하기 위해 집단 탈당파를 규합하는 사이트까지 개설하기도 했다. 홍세화 씨 등 일부 명망가들은 탈당을 예고했다.

이에 대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NL) 계열 인사들은 당 안팎에서 파상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자주파 망당론' 공세에 숨을 죽이며 현 지도부 전원 사퇴를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뭉쳐야 한다는 '단합론'을 내세워 봉합되기를 바라는 속내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권영길 후보와 자주파 지도부의 정계은퇴와 함께, 경쟁자인 심상정·노회찬 의원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번 참패를 기회로 당의 주도권에만 마음이 가 있다거나, 당이 망해가고 있는 판국에 당 대표나 자기 식구 비례대표 한 자리 차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한 줌도 안되는 비례대표 몇 석을 차지하려고 투전판을 벌여봤자, 민주노동당은 과거 자민련의 좌파 버전인 '좌민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란 지적은 NL, PD 모두에게 뼈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 참상(慘狀)의 근원들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참상(慘狀)을 초래한 근원은, 당내 정파(NL·PD) 간 갈등과 담합에 따른 자기교정능력 상실과 변화에 둔감한 행태적 수구성, 원내 진출 이후 다양한 진보적 대중정치의 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외연 확대에도 실패한 점,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주의로 인식돼가고 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일방적 의존(민주노총당), 서민대중의 삶과 피부에 와닿는 비전·정책 제시보다 북한 군사왕조집단 추종주의와 감상적 통일지상주의에 매몰된 당 활동(친북·종북당) 등으로 대중들에게 '시대착오적인 정치세력'으로 비친 점 등에 있다.

이런 것들이 축적돼 '지지층 상실'을 거듭해온 결과 대선 참패라는 성적표로 나타났다는 게 당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즉, 민주노동당의 대선 참패는 지루한 후보와 따분한 선거 켐페인 등 선거 전략적 문제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그간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실적에 대한 대중들의 냉혹한 평가를 반영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그들만의 재창당'이나 '그들만의 분당' 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특히 민족주의 자주파(NL)와 동거 조건으로 지도부의 몇몇 대표 얼굴을 평등파(PD)로 바꾸는 '수평적 쇄신'책으로는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이런 수준으로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냉소가 개선될 여지 또한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건 이미 대선 참패 전에 했어야 하는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일을 가래로 막기에도 버거운 현실'에 처해 있음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이런 마당에 민족주의 자주파(NL)의 단합론에 이끌려 갈등을 적당히 봉합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민주노동당은 저승사자를 불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이란 우리 사회 진보개혁의 소중한 자산을 스스로 불태우는 짓이다.

'북한 군사왕조집단 추종주의'와 '단절' 없인 어떤 시도도 무의미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해 '그런 진보정당은 더이상 필요없다.'는 수준의 경고장을 보낸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 양극화에 고통받고 있는 서민대중의 일상적인 삶을 개선시킬 비전과 대안 제시는 물론, 앞서 제기한 민주노동당 '참상의 근원'들과 고통스러운 단절을 하지 않고선 지금의 난관을 돌파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처럼 자주파(NL)와 평등파(PD)가 '혐오적 동거' 상태에 있는 한, 어떤 것도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건 누구보다 민주노동당 구성원들이 더 절감하고 있다. 그동안 양 정파가 적당히 봉합해서 '별거적 동거'를 거듭해온 결과,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는' 식물상태로 전이돼 왔다는 게 민노당 안팎의 냉혹한 평가이다.

이제 더이상 서로에게 족쇄가 되어서는 안된다. 민족주의 자주파(NL)는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쳐 '통일 만세' 운동을 마음껏 하고, 평등파(PD)는 지긋지긋한 자주파의 방해 없이 비정규직 등 민생문제 해결에 올인하도록 서로를 놔줘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폐쇄적인 종북黨, 민주노총黨, 정규직黨 안에서 체질에 맞지 않은 일들을 '해피하게' 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은 범여권인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해 '잡탕정당'이라고 몰아세우며 '해체'를 요구해왔다. 이제 그 비판의 날은 민주노동당 자신에게 세워야할 때가 됐다.

물론 당을 해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수없이 당을 만들었다 부수는 범여권 정치집단의 후안무치에 질린 국민이 적지 않다. 그러나 국민이 크게 변해야 한다고 분명한 사인을 보내줬는데도 꿈쩍 않고 버티는 정치집단도 문제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당의 해체'와 함께, 이번 대선 참패로 사실상 상실해버린 진보 진영의 대표성과 기득권 의식을 과감히 버리고 '일원'으로서 '새로운 범진보개혁 정당'의 창당 수순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민주노동당이 우리 사회의 진보개혁적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상황으로까지 와 있다고 판단된다.

새로운 진보개혁 정당의 창당 과정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성은 물론, 특히 민족주의 자주파(NL)의 통일지상주의와도 과감하게 단절해야 한다. 이건 더이상 진보개혁 진영 환골탈태의 상징조차도 될 수 없다. 하나의 출발점이자 대중에 대한 인사치레에 불과하다.

하물며 민주노동당이란 기존의 틀 속에서 진보의 대표성과 기득권을 고수하며 단지 외연 확대를 위한 '그들만의 재창당론이나 분당론'에 안주할 경우, 그들에게 2008년 '4월의 봄'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선 참패에 이은 '총선 몰살'이란 비극을 피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해체 후 '범진보개혁 신당' 창당으로 옮겨가야

재창당론이든 분당론이든 발전적이고 창조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금방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당 쇄신론, 재창당론, 분당론 이 모든 것의 성패는 필연적으로 '외연 확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노선과 지향점을 큰 틀에서 공유하고 공감하는 당 밖의 잠재적 지지 세력이 민주노동당의 몸부림에 관심을 보이고 실제로 결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의 어떤 시도도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그들만의 쇼'로 비춰질 경우 외부에 있는 진보개혁적 시민운동가와 지식인들이 그 틀에 참여하기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당의 얼굴을 바꾸고 내부 혁신만 잘하면 당 밖의 진보 세력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 같지만, 운동권 동창회 같은 민주노동당 구성원에 '플러스알파'가 되어주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발상으론 민주노동당의 어떤 시도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범진보개혁 정당' 창당으로 옮겨가야 하며, 그 중심에 심상성·노회찬·조승수 같은 개혁·진보 진영에서 그나마 노선과 정책적 '일관성'이 검증된, 신뢰도 높은 인물들이 앞장서야 한다.

이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온 민주노동당 대표 자리가 탐이 나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 자주파(NL)가 우글거리는 민주노동당의 틀에 안주할 경우, 그들은 훗날 '진보 양아치 두목'이란 평가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이 소중한 진보 정치의 자산들이 한낱 '양아치 두목'으로 끝나서야 되겠는가.


시대정신을 구현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소수 정파의 한 줌 기득권에 안주해 창조적으로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하는 정치인 치고 양아치가 되지 않은 걸 보지 못했다.

지지자들이 그렇게 '길이 아니다.'고 만류했음에도, '대통합이 시대정신이다.'만을 외치며 잡탕정당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가 범여권을 홀라당 날려버린 '김근태'가 산증인이다.

일각에선 민주노동당 안에 있는 자주파조차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들에게 진보개혁의 가치를 설파할 수 있겠느냐고 빈정대기도 한다. 이건 솔직하지 못한 푸념이다. "대중은 설득해도 '주사끼' 있는 자주파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이 대중에게 깨우쳐준 현실이다.

민주노동당에서 분당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이상 상대방의 상처 난 데 소금 뿌리며 자신마저 상처받는 '자학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 서둘러 뜻을 모아 '조용히', '집단적'으로 광야로 떠나면 된다. 지금은 한가하게 당내에서 서로를 물어뜯으며 세월을 죽일 시간이 없다. 남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된다.

진정 새로운 진보개혁 정당이 필요하다면, 내부에서 험한 말로 정력을 소진하기보단 당 밖의 진보 세력을 모으는데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명분이고 실천이다.

지금은 민주노동당 당사에 있으나 벌판에 있으나 춥기는 매한가지다. 차라리 광야가 낫다. 최소한 구질구질하지는 않다. 어쩌면 지금이 광야로 나가 뭔가를 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주어진 시간'일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주사파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민주노동당, 전국민적 왕따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베리아 벌판보다 추울 것이다. 지금은 민주노동당 안에 있고 밖에 있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다. 중요한 건 새로운 희망을 조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고 '상처받지 않는 열정'이다.

심상정·노회찬·조승수, '진보 양아치 두목'은 되지 말라

나는 심상정·노회찬·조승수가 설혹 민주노동당 틀 안에 있다 해도 그동안 이들이 보여준 검증된 정치적 행보와 소신·신뢰도로 볼 때, 무소속 임종인 의원과 김성호 전 의원 등과 함께 다음 국회에서도 이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당당한 모습을 꼭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마 자신을 개혁·진보 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이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沈·魯·趙의 경우 아무리 구출하고 싶어도 민주노동당이란 '행태적 수구좌파'의 '등짐'을 지고 있는 한, 그 무게 때문에 '동반 몰살'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아무 짐도 없는 무소속 임종인·김성호가 구출하기에는 손쉬워 보인다.

심·노·조가 총선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시대착오적인 민족주의 자주파(NL)와 '구질구질'하게 동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표 외투' 때문일 것이다.

심·노·조가 제아무리 아까워도, 국민은 민노당의 틀에 안주해 위세나 부리는 '진보 양아치 두목'들에게서 새 희망을 찾기란 '마누라를 바꾸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수많은 호조건 속에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그라진 이유도 시대정신을 쫓아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사고의 협소함' 때문이었다.

지금 민주노동당에게 절실한 것은, 알량한 '주도권 행사'가 아니라 '밀알이 되어 주는 것'이다. 살신성인 없는 감동은 없다.

침묵의 카르텔 깬 '조승수'가 옳다

그런 점에서 조승수 현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장의 '반성문'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그는 경향신문 24일자 <민주노동당, 다시 광야에 서라>는 기고에서 "만일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적당히 표를 받았다면, 우리는 아마 적당히 싸우고 대충 반성하는 척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선거 결과를 되짚어보면 우리 국민들이 눈물나게 고맙고, 그 현명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표로써 민주노동당에 회초리를 들면서 새로운 길로 가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이것을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도자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퇴장해야 한다. 최소한 앞으로 이 극단의 이윤추구와 경쟁이 압도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떨쳐 나올 세대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을 했다.

나는 조승수 소장의 이 반성문을 개혁·진보 진영 몰락의 원흉인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 세력, 대선에서 참패한 범여권, 문국현 진영, 민주노동당은 물론, 이번 대선 과정에서 '단일화·대통합 만능론'만 외쳐댔던 늙은 여우 시민운동가와 재야원로, 지식인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

최근 조승수 소장의 거침없는 자주파(NL) 공격이 화제다. 민주노동당의 내부 문제에 대한 공론화라면, 개혁·진보 진영이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이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일보와 인터뷰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내용은 무시하고 조선일보만 끄집어내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작'에 불과하다. 조선일보가 민주노동당과 진보 진영에 해악을 끼쳐온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반한나라당, 안티 조선일보 캠페인 또한 그리 아름답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노무현을 위시한 사이비 개혁 세력의 헤게모니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왜 진보 세력이 그런 틀에 갇혀 말문을 닫아야 하나.

조선일보보다 더 큰 해악은 내부의 문제를 적당히 봉합하려는 '단합주의'다. 이것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을 골방에 가둬놓고 고사시키자는 '자폐주의(自閉主義)'이기 때문이다.

왜 심상정·노회찬+임종인·김성호 조합이 '최선'인가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민노당 등 진보 진영에서 노선, 철학, 정책(컨텐츠), 대중성으로, 임종인·김성호 의원은 범여권 등 민주개혁 진영에서 일관된 개혁·진보적 정치 행보와 정책(컨텐츠)으로 검증된, 몇 안되는 '신뢰도 높은' 정치인들이다.

이들이 결합한다면 명실공히 개혁과 진보의 신뢰도 높은 상징적 인물들이 결합하는 의미를 담게 된다. 개혁·진보 진영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기에 따라서는 단박에 범여권과 자웅을 겨룰 수도 있고, 개혁·진보 진영 전체를 평정할 수도 있는 강력한 새 정치 주체로 우뚝 설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요, 창조적 외연 확대다.

혹자는 왜 민주개혁 진영에서 임종인·김성호밖에 없냐고 물을 것이다. 그건 현재 범여권 등 민주개혁 진영의 정치인들이 왜 '집단적'으로 망가졌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범여권 정치인들 중에 개혁·진보적 노선과 신념에 따라 '일관된 정치 행보'로 검증된 사람을 꼽아보라 한다면 내 머리론 아무리 쥐어짜도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울 자신이 없다.

비록 당장의 숫자는 적지만 개혁·진보의 알짜배기인 이들의 결합이라면, 어둑한 들판에 불을 지를 순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이 '코어'가 돼 확실한 주도세력이 된 연후에 민주노동당 왼쪽과 오른쪽 범여권까지 그나마 일관성을 갖춘, 한마디로 지금까지 '덜 망가진' 정치인과 정치집단 그리고 지식인과 시민운동가들의 합류를 추동한다면 이 정당은 지리멸렬한 개혁·진보 진영을 재편하는 확실한 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년 총선에서도 과거 창당 한 달 만에 제1야당으로 등극한 '신민당 돌풍'(1985년)에 버금가는 바람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현재 개혁·진보 진영에서 그려볼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어디다 내놔도 쪽팔리지 않고, 지지자들이 자신 있게 주변에 권유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내년 1월부터 외연 확대에 본격 나서고, 주요 민생 관련 진보개혁적 비전을 가지고 정책 대결로 정치판을 변화시켜 간다면 이 정당은 기존 대통합민주신당, 문국현당, 민주노동당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닐 것이다. '해봤자 택도 없는' 소리와 '하면 좋은데 쉽게 안될 것 같은' 소리와는 구별해야 한다.

최악(最惡)은 '최선(最善)으로만' 치유된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그 해법 역시 '최후의 한가지'뿐이다. 바로 차선이나 차악 따위가 아닌 '최선(最善)'을 만들어내야 한다. 범여권은 그동안 차선도 차악도 아닌, 최악(最惡)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그 결과 또한 헌정 사상 최악의 대참패를 당했다.

따라서 개혁·진보 진영이 기존의 관성대로 '무조건 합치고 보자.'는 대통합론이 아니라, 그나마 개혁·진보적 노선에 따라 '일관된 정치적 행보'를 보여온 '검증된 사람'들을 발굴해 대표로 내세우거나, 이들을 중심으로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혁신을 하지 않으면 이미 붕괴된 신뢰를 회복하기란 요원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개혁·진보 진영은 대통합민주신당, 문국현당, 민주노동당 등 기존 정치집단을 뛰어넘을 '새로운 정치 주체'가 반드시 탄생해야 하며, 만들어진다면 '정치 주체들'에 대한 '신뢰도', 새로운 '비전과 정책', 새로운 '정당정치와 정당문화' 이 삼박자가 모두 최선(最善)이거나 최선을 향해 달려갈 때만이 떠나간 지지자들의 허망한 마음을 다시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길만이 개혁·진보 진영이 부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하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할 수밖에 없다.


설사 당장 '최선(最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작금의 개혁·진보 진영이 가진 한계이자 역량으로 인정해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으면 되는 일이다.

팽팽 자빠져 놀다가 선거에 임박해서 '각설이 타령' 하듯 꺼내드는 '민주평화개혁세력, 대통합, 대연합, 선거연합' 따위의 감기약 처방은 결코 암환자를 살려낼 수 없다는 게, 이번 대선 참패가 개혁·진보 진영에 남겨준 유일한 교훈이자 자산이기 때문이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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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12/28 [15: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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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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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아무리 꼴통 신문이라 해도 이런 지적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꼴통 신문이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게 지금 진보가 할 일이다. 범여권과 민노당은 너무 많은 책을 잡혔다.

그런데 중앙일보가 용어 사용을 잘못한 부분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대선에서 범여권 단일화를 호소한 백낙청, 박형규, 고은, 함세웅, 황석영 등 원로들은 민주 인사는 맞지만 결코 "좌파"는 아니다.

특히 노무현과 민주당 세력을 진보좌파 그룹으로 묶어서 싸잡아 비난하는 건 명백한 '좌파 마타도어'다. 이들른 결코 진보도 좌파도 아닌 신자유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만 빼면 조중동에 더 가까우면 가까웠지 좌파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들이다.

아무리 편가르기로 먹고사는 조중동이라지만 제발 용어 사용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지면을 통해 고등학생을 상대로 논술을 가르치려 드는 모습 정말 눈 뜨고 봐주기 힘들다. 개념을 상실한 사람이 개념을 가르친다는 게 좀 웃기지 않는가.



[김종혁시시각각] 좌파는 왜 망가졌는가  

중앙일보  2007.11.20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형규 목사, 함세웅 신부, 고은 시인, 소설가 황석영씨. 이 분들의 이름을 들으면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맞다. 진보진영 쪽의 어른들이다. 16명의 ‘진보 어른들’이 19일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요점은 간단하다. “진보진영 총 단결하라”는 것이다.

그 심정 이해가 간다. 대선은 이제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한데 돌아가는 상황은 진보 쪽에서 보면 기가 막힐 것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좀체 내려가지 않고 있다. 그의 처신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도 그렇다. 진보로선 더 억장 무너지는 게 있다. 이회창 후보가 나오면 보수의 분열로 진보가 득을 볼 거라고 했다. 웬걸, 대신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가 3등으로 내려 앉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당신들 재집권이 싫다”고 유권자들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인심 참 무섭다. 불과 5년 전이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진보가 기세 등등했던 게. “앞으로 수십 년간 보수는 집권 못 한다”는 거침없는 발언도 있었다. 한데 몇 년 사이에 정치 지형이 확 뒤바뀐 것이다.

‘진보 어른들’은 기자회견에서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 기세 등등하다”고 말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기사를 읽으며 이런 생각 했다. ‘진보,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그 논리에 따르면 ‘이명박·이회창 지지=역사 퇴행’이다. 그러니까 우리 편을 지지할 땐 국민의 위대한 선택이고, 반대편을 지지하면 역사를 퇴행시키는 한심한 유권자란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은 군사정권 때가 아니다. 국민은 자기 맘에 드는 후보를 자유롭게 선택할 무제한의 권리가 있다. 자기들이 잘못해 민심이 떠났는데 그게 국민 잘못인 것처럼 호도하면 안 된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린다. 내 반대편이 집권할 권리를 인정하는 게 바로 민주주의다.

‘진보 어른들’의 분석과는 달리 나는 5년 사이에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진보 좌파의 교만과 무능, 그리고 부도덕성이다.

우선 교만. 요즘은 좀 덜하지만 그동안 진보 좌파는 ‘우리는 정의의 화신, 남들은 수구 꼴통’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부터 앞장서서 그랬다. 제멋대로 역사와 전통을, 혹은 제도와 시스템을 때려 부수면서 “개혁한다. 거기 반대하나?”라면서 몰아붙였다.

둘째로 무능. 5년의 집권 기간 동안 진보 좌파는 남을 욕하고 비난하는 데는 선수지만 스스로 뭔가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데는 한계가 크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줬다. 경제적으론 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기보다 부자에게 손가락질하고, 내가 못사는 건 잘사는 놈들 때문이라는 증오의 분위기를 퍼뜨린 혐의가 짙다. 전 국토가 투기장이 됐고, 신의 직장 공기업과 공무원들은 갈수록 비대해졌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친구를 만드는 게 외교인데 지금은 미국도 일본도, 중국까지 누구도 우리편이 아니다. 북한이 핵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더니 지금 꼴은 뭔가.

셋째는 부도덕함이다.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하더니 탈당쇼를 벌이고, 어떻게 해서든 깜짝 이벤트로 표를 긁어모으려는 행태를 계속하고 있다. 대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합당이네 마네 하는 걸 보면 화가 치민다. 대체 유권자를 뭘로 보는 건가.

이런 비판이 신랄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진보는 반성해야 한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래야 부활한다. 보수도 다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나. 어차피 민주주의는 한쪽만으론 안 된다. 진보가 건강성을 되찾아야 보수도 긴장하고 그래야 나라가 발전한다. 이번 대선 과정을 통해 확인된 게 있다. 대한민국 유권자는 변덕스럽다. 까다로운 소비자다. 그러니 보수도 옛날처럼 부패하고, 수구꼴통 짓 하면 다시 외면당한다. 진보든 보수든 엉터리 상품을 속여 팔지 말라.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절대 안 산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
[kimchy@joongang.co.kr]    
2007.11.20 19:39 입력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95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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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범여권, '올바른 패배'의 기회도 놓쳤다"

[정치와 사람들② 이대근] 2007 대선, 신보수주의의 '입구'

[프레시안] 2007-11-14 오후 1:57:25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가 노무현 대통령이나 범여권을 비판한 글을 보고 있자면 그 거침없음에 적이 당황하게 된다. 그는 에두르는 법 없이 비판의 과녁을 향해 직진한다.

가령 "대통합이 기여할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이 한 바구니에 담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무덤이다"(2007년 9월 12일자 칼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는 구절, 또는 "정동영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그게 정동영이다…노무현을 기준으로 하면 정동영의 앞날에 어떤 무궁무진한 변화가 펼쳐질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우회전·좌회전, 신정치·구정치, 친노무현·반노무현, 시장주의·반시장주의를 넘나드는 그의 현란한 곡예를 목격하고 있다"(2007년 10월 24일자 칼럼 <정동영, 노무현보다 나은가>)는 대목 같은 게 그렇다.

물론 그의 비판은 지난 5년간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이 쏟아낸 험한 말들과는 입각점이 전혀 다르다. 이는 지난해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돼 진보개혁 진영 안팎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진보개혁의 위기>를 그가 총괄했던 데서도 짐작된다. 혹은 지난 5월 작고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추모하며 쓴 칼럼의 다음 한 토막은 어떤가.

▲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프레시안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2007년 5월 23일 칼럼 <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

이 에디터의 글은 '진보개혁' 진영이 현 정권에 대해 갖는 배반감의 실체와 절망의 깊이를 겉치레 없이 드러낸다. 그는 "한 때 한국사회의 희망이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몰락하게 됐나"를 묻는다. 무능, 원칙의 실종, 정체성의 상실 따위가 열쇠말로 떠오른다. 이 가운데 '무능'은 어쩔 수 없는 능력의 한계로 보아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칙'과 '정체성'은 다르다.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층의 이반과 함께 시작된 '범여권 잔혹사'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 에디터가 '원칙'과 '정체성'을 유독 강조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 범여권은 '산수'에 몰두했다. 1년 넘게 덧셈과 뺄셈을 지루하게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최근 거둔 성적이 61.9%대 23%다. 이 에디터의 표현을 빌면 '바보 산수'다. 범여권은 '바보 산수'의 가속 페달을 밟을 태세다. 통합신당과 민주당은 24일 합당하기로 했다. 범여권의 정치기술자들은 거기서 기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그들의 기대는 실현될까. 가능성은 흐릿하다. 범여권 사람들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인다. 확신도 없는 일은 하는 건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공학적 정치관에 입각해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7개월 동안 범여권의 영악한 공학적 사고는 정치적 실리를 줄기차게 배반했다. 그들의 '산수'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성적만 놓고 보면 엉터리임이 드러났다. 차라리 "범여권은 이미 패배했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패배했다. 그걸 인정하고 이번 선거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우직한 원칙주의자의 처방이 보다 실리적인 충고로 들린다. 그것이 이대근 에디터를 만난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집권해도 신보수주의의 개막"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지난 7월 칼럼에서 "이명박이 되든 통합신당의 빅3가 되든 우리는 민주화 20년 만에 한 시대의 종언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번 대선의 정치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대근 : 민주세력 집권 기간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끝났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정통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시한은 지났다. 이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새로운 개혁의 동력을 갖고 있느냐, 개혁을 실천할 정교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는 시대로 넘어갔다.

구여권 세력은 민주화 20년의 시대 열망을 체현해서 개혁을 실천하는 세력이 더 이상 아니다. 기득권 구조 안에 들어가 있는 기득권의 일부다. 만약 재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보수정당간 경쟁에 의해 권력을 잡는 것일 뿐 다른 운동적 의미는 없다.

그 결과 신보수주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의 차이가 없어졌다. 이명박 캠프의 다수가 운동권 출신이다. 민주화에 일정한 공을 가진 세력이 뉴라이트를 결성했고 그들이 한나라당과 결합했다. 한나라당은 6월항쟁의 토대 위에 선 새로운 보수 세력으로 변해왔다. 신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정당 간 차이라는 게 매우 작아졌고, 그 차이를 작게 한 전반적 흐름은 신보수주의다.

프레시안 : 민주화세력 집권 10년을 사회가 운동세력에게 가졌던 부채의식을 털어버린 시간으로 평가한 게 흥미롭다. 부연해 달라.

이대근 : 과거 정치개혁의 주요 관심사는 '새 피 수혈론'이었다. '새 피'는 대부분 운동권이었다. 운동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킨 데 대한 기대와 보상의 의미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집권까지 하게 됐다. 총리, 장관, 위원회 등 운동권에서 웬만큼 역할 했던 사람들은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열정과 변화의 열망이 국가 운영에 투영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관료체계 속에 들어가서 똑같이 포로가 됐고, 거기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렸다. 과거에 헌신했다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잘 운영할 거라는 기대를 갖기 힘들어졌다.

프레시안 : 민주화세력 집권 10년 동안 그들이 추구해온 민주적 가치가 국정에 반영되는 정도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이대근 : 국가를 장악한다는 것, 국가를 책임지고 맡아서 한다는 것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국가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국가를 장악하는 게 곧 민주화고 개혁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들어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오랫동안 축적된 관료체제를 바꾸기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국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개혁의 종착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 없이 들어가다 보니 국가에 의해 포섭됐고, 기존에 있던 거대한 관료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톱니바퀴의 일부가 됐다. 스스로 도구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 국가를 운영한다는 게 주관적인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로 들린다. 요컨대, 나중에 진보정당이 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국정운영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동일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대근 : 그럴 가능성이 많다. 가령 예산처에 내년 예산안이 만들어져 있다. 진보세력이나 개혁세력이 지금 당장 들어가서 예산 10%라도 바꿔놓을 능력이 있는가. 정부 나름의 우선순위가 100가지 있다고 하면 그 중 50가지라도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는가. 그거 쉽게 바꿀 수 없을 거다. 정부가 수 십 년 해왔던 연속적 사업이 있고 배분의 순서가 있다. 30번 순위인 걸 1순위로 올리고, 1순위에 있는 걸 30번 순서로 맞춰서 예산안을 짤 수 있는가. 우선 그것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본다면 얼마나 개혁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반부패, 잘 먹히지 않을 것"

프레시안 : 경제, 부패, 평화, 이념 가운데 이번 대선의 주된 이슈는 무엇이 될 것이라고 보나. 또 선거 구도는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나.

이대근 : 이슈는 경제, 부패, 평화, 이념의 순서가 될 것이다. 삶의 문제를 누가 개선할거냐, 이게 경제 이슈다. 성장주의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제와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경제의 구도다.

그 다음이 부패와 반부패다. 범여권에선 부패세력과 반부패세력의 대결로 이슈를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이 이슈는 경제 이슈만큼 크지 않다. 이명박 후보의 약점이 부패라고 할 때, 보수 세력이 그 대안으로 이회창을 생각한다는 건 이회창을 부패와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부패로 묶는 게 잘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을 전쟁 세력, 범여권을 평화세력으로 대립시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나라당의 정강정책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포용정책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포용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다. 임기 말 정상회담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그 결과에 대한 지지가 낮으면 60%, 많게는 80%까지 나왔다. 이를 반대하는 엄청난 세력이 있다고 고발하는 게 사람들한테 진실로 와 닿지 않는다.

프레시안 :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대근 : 이회창 후보의 등장으로 범여권에 유리하게 됐는가는 불분명하다. 이명박과 정동영의 대결이 아니라, 이명박과 이회창의 대결, 어떤 보수냐의 대결로 갈 수 있다. 두 후보의 지지율이 60%를 넘었다. 노무현과 노무현을 계승하는 세력은 사람들 관심 밖이라는 얘기다. 범여권은 부패 대 반부패, 미래세력 대 과거 세력과 같은 몇 가지 대선 구도를 만들려고 하지만 정권교체 대 정권계승, 과거세력 대 미래세력, 노무현 세력 대 반대세력, 말 잘하는 세력 대 일 잘하는 세력, 국정파탄세력 대 국정안정세력, 무능한 세력 대 유능한 세력, 이렇게 이명박 후보가 내세우는 이슈와 대립구도가 훨씬 더 잘 먹힌다.

"범여권 단일화, 시너지 효과 어렵다"

프레시안 : 범여권 후보들의 단일화 논의가 급류를 타고 있다. 단일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하다고 보는지, 단일화가 이뤄지는 경우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는지 궁금하다.

이대근 : 범여권 문제를 단일화 중심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지금 범여권 지지율이 낮은 게 단일화가 안 되어 있어서라면 단일화의 필요성이 높아지겠지만 그게 아니다. 지금 단일화는 지난 2002년 후보 단일화와 다르다. 군소후보 연합이다. 외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저건 뭐 조무래기들 모아놓은 거네'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정상적으로 단일화를 하려면 노선과 정책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지났다. 이제 시간도 없고 관심 가질 사람도 없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단일화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전환의 계기가 될지는 불확실하다. 자리와 지분을 나누는 밀실야합을 한다든지, 사기도박 하듯이 여론조사 식으로 하면 지푸라기를 잡는 게 아니라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

프레시안 : 세 후보의 지지율을 단순 합산하는 것 외에 단일화에 따른 기대효과가 불분명해 보인다.

이대근 : 장점을 갖고 있는 걸 모아서 시너지를 내자는 게 후보단일화의 의도인데 지금은 단점이 큰 후보 셋을 모으는 거다. 정동영 후보는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상황에 따라 입장이 수시로 바뀐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불복으로 한국정치를 후퇴시킨 장본인이다. 문국현 후보는 정당배경이 없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검증되지 않은 개인이다. 이 불확실하고 단점 있는 셋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프레시안 : 이번에도 비판적 지지론이 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은 '민주노동당 표는 사표'라는 주장을 하며 결국 범여권 후보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유권자 개개인의 권리다. 만약 투표권의 행사라는 게 반드시 당선돼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비판적 지지론은) 맞는 얘기다. 그러나 표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당선만을 위한 게 아니다. 당선자를 견제하라는 의미도 있는 거다. 견제도 왼쪽에서 하느냐, 오른쪽에서 하느냐가 다르다. 이런 것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구성 요인이 되는 거다. 당선되는 것 하나만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가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건 선거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거다.

"盧, 관료체계의 포로 됐다"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에디터는 칼럼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통합신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먼저 현 정권의 공과가 뭔지 짚어 달라.

이대근 : 공이 많지는 않다. 비주류가 집권했다는 것이 제일 크다. 또 권력집중을 완화시켰다. 그리고 돈 없는 선거 등 정치개혁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부 업무처리 혁신은 공이었다고 생각한다.

잘못은 크게 네 가지다. 먼저 개혁진영의 지지기반을 붕괴시키고 해체시켰다. 노 대통령의 구체적인 정책은 진보나 개혁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진보나 개혁이라는 수사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현 정권의 실정이 마치 진보개혁이라는 가치를 추구한 데 따른 것으로 오인됐다. 진보나 개혁이 낡은 가치인 것으로 비춰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전면 도입했다. 한국사회에 완고하게 있는 게 시장주의인데 이걸 확산시켰다. 또 분열과 대립, 갈등을 조장했다. 개혁세력이라도 결집시켜서 새로운 변화의 동력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내부조차 분열시켰다.

끝으로 전혀 준비 없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거대한 관료체계의 포로가 됐다. 정책 관료주권의 시대로 역전시켰다. 관료가 결정하면, 정부가 정부정책으로 만들고, 대통령이 자기노선으로 확정해서 국회로 넘기고, 국회에서 뚝딱 처리해서 시민에게 던져주는 식이었다. 관료들은 기술자이지 정책결정자가 아닌데, 현 정권에서는 관료가 정책결정자가 돼버렸다. 시민이나 국회는 정책의 집행 대상으로 전락했다.

프레시안 : 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을 들라면.

이대근 : 한미 FTA다.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지 않았다. 대통령이 처음부터 준비해온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분열과 파장, 우리사회에 미칠 영향, 이런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검토와 준비 없이 단기간에 대통령의 권력 하나로 밀어붙였다.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편의적으로 '원칙'과 '소신'을 뒤집는 정치인으로 묘사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대근 : 노 대통령이 원칙과 소신의 사나이라고 했던 건 대통령 되기 이전이다. 국가의 운영을 맡기 전까지는 원칙과 소신을 일관되게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운영을 맡는 위치로 들어오면 달라진다. 원칙을 어떻게 실행해야 될지에 대한 면밀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다.

노 대통령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원칙은 말로만 있었을 뿐, 그것을 국가운영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관료들에게 휩쓸리고 그 때 그 때 보이는 문제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까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한 것이다. 원칙과 원칙에 따른 노선, 그리고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모든 행보 하나하나가 착착 준비되고 그것들 간에 보조가 맞춰져 있었을 텐데, 그게 없다 보니까 어젠다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거다. 하나의 어젠다에 매달렸다가 그게 사라지면 새로운 걸 찾아서 매달리고 하는 게 반복돼 왔다.

대통령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좌파건 신자유주의건 모두에게 좋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건데, 그 어젠더들 간에 서로 충돌하는 요인이 있다는 건 보지 못한다. 여기에 노 대통령 특유의 독선이나 오만, 여전한 비주류의식이 더해졌다. 대통령에게 설득과 대화의 수단이 얼마나 많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주류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설득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노 대통령이 관료들에게 휘둘렸다고 했는데, 노 대통령이 국민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은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이대근 : 노 대통령을 토론의 달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토론이라는 건 설득의 기술이다. 노 대통령에겐 그게 전혀 없었다. 말을 위한 말이었다. 자아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서 자기의 고집과 아집을 표현하는 데는 능하지만 자기의 정책을 설득해서 필요성을 인정하게 하고 집행하는 능력은 없었던 거다.

"정동영, 盧 대통령과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열린우리당 해체부터 통합신당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숫자놀음만 하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 같은데, 이른바 범여권의 정체성이 뭐가 돼야 한다고 보나.

이대근 : 그건 내가 답할 바가 아니다. 범여권 스스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얘기를 안 하니까 '너는 누구냐'고 묻게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정의를 해야 하는데 안 했다. 얼마 전부터 선거가 본격화되니까 이런 저런 주장을 하고 있는데, 선거를 앞두고 주장하는 건 사람들이 안 믿는다. 정체성은 진짜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이 믿는 거다. 일시적인 선거전술은 진정성도 없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공과를 계승하겠다고 한다. 그럼 뭐가 공이고 과인지, 노 대통령하고 뭐가 같고 다른지 분명하게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어제(11월 7일) 관훈토론에서 정동영 후보가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설명한 게 있다. '철학과 뿌리는 같다, 그러나 실행방법과 정치방식은 다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철학과 뿌리가 같으면 같은 것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본다. 노 대통령이 하던 것처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정 후보는 실행과 정치방식은 달리 하겠다고 했지만 뭐가 달라질 것인지 막연하다.

프레시안 : 이 에디터가 범여권을 보는 시각은 대단히 신랄하고, 때론 글에서 '분노' 같은 게 느껴진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또 직설적인 화법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비판을 받는 당사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대근 : 자신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범여권으로선 행복한 거다. 지금 범여권은 사람들에게 분노할 대상도 못된다. 잊혀져가고 있고 관심도 없다. 내가 범여권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고 하지만, 일반 시민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바로 끄집어낸다면, 내 비판은 그것의 천만분의 일도 반영하지 못하는 거라고 본다. 그렇게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게 비판을 받아도 정신이 들까 말까한 지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반응? 간접적으로 듣는다. '한숨 쉬더라'는 얘기도 들리고.

프레시안 : 우리 정치에서는 왜 '정체성', '일관성', '원칙' 같은 가치들이 지켜지지 않을까. 어떤 구조적인 요인이 있는 건 아닌가.

이대근 : 정당의 구조가 문제다. 민주당에 있건, 신당에 있건, 문국현 당에 있건, 다 비슷비슷하다. 예를 들어 김한길 같은 사람은 당을 만들고 없애고 해서 여러 군데 다녔는데, 그 당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회의 균열이 정당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정당들이 사회의 다양한 이익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보수정당이 전부를 다 대표하다 보니까 그 안에서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긴들 별 차이가 없다. 이 쪽 저 쪽의 경계선 자체가 없으니까 정체성을 굳이 따질 필요도 없고, 일관성을 따질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레토릭이 된 '진보'
▲ ⓒ프레시안

프레시안 : <경향신문>이 지난해 '진보개혁의 위기'를 기획해서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이 에디터께서 그 기획을 총괄했는데, 기획의 배경이 뭐였나.

이대근 : 직접적 배경은 지난해 5.31 지방선거다. '반(反) 노무현 광풍'이랄까, "노무현이 아니면 누구라도 찍어준다"는 '묻지마 투표'가 나타났다. 당시 한나라당 사정이 어땠나. 공천비리 등 한국 정치의 온갖 나쁜 행태가 다 드러났다. 한나라당에 지방자치를 맡기면 나라가 절단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나라당에 표를 다 몰아줬다.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게 우선이다, 심판의 결과로 부작용과 문제점이 노출되더라도 우선 노 정부를 심판해야 된다"는 '눈 먼 심판론'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어쩌다 이렇게 몰락했나, 단순히 노무현 정부의 몰락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전체가 동반 몰락하는 일이 왜 일어났나, 한 때 한국사회의 희망이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몰락했나를 알아보자는 게 취지였다.

프레시안 : '진보'는 인기 없는 정치상품이 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외려 낡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뭐가 잘못된 건가.

이대근 : 노 대통령이 솔직하게 "나는 보수주의자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하고 있다", "내가 추구했던 진보적 가치는 국가 운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등 이런 것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으면 됐는데, 거듭되는 실정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진보와 개혁의 슬로건을 끌어들였다. 왜? 그 때만 해도 진보는 아직 참신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실정을 "좋은 것을 하려고 한다"는 의도로 덮으려고 '진보' 수사를 동원했다.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 정부가 진보와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오인됐고, 그 결과 '진보=실정'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범여권, 기둥뿌리가 썩었다"

프레시안 : 범여권에 '미래가 있는 패배', '올바른 패배'를 주문했다. 어떤 의미인가.

이대근 : 이번 대선에서 이기려고 단기의 수를 쓰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외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회창 후보의 등장 이후 범한나라당의 지지율이 60% 넘게 나타나고 있다. 이건 한 마디로 "노무현은 절대 안 된다"는 의미다. 5.31 지방선거의 재판이다. 노무현 정부와 함께 했거나, 노무현 정부와 관계가 있거나, 암튼 '노'자 들어가는 건 절대 안 찍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되어 있다.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범여권은) 이미 패배했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패배했다. 그걸 인정하고 이번 선거를 바라봐야 한다. 단기간에 기교를 부리고, 슬로건을 바꾸고, 이미지 개선해서 이겨보려고 한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설혹 이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범여권이 이길 수 있는 환경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올바로 져야 한다. 그러나 올바로 지기 위한 시간도 없고 기회도 놓쳤다. 신당 만드는 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경선 과정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정동영 후보 선출되고 나서도 문제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제대로 하려면 먼저 노무현 정부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실패의 원인이 뭔지 반성하고, 무엇을 고쳐야 되고 무엇을 새로 준비해야 되는지를 제시하고, 그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정당을 만들고, 그 노선과 원칙에 맞는 후보를 선출하고, 그 후보가 노선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올바른 패배의 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무조건 뭉치자'고 몸집불리기를 했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 바뀐 게 없는, 기득권 세력의 이름만 바뀐 정당이 됐다.

이런 상태에서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기둥부터 무너지게 된다. 패배해도 붙잡고 일어날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기둥뿌리가 썩어있기 때문에 붙잡고 일어날 여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대선 끝나고 나면 인책론이 나올 텐데, 총선 앞두고 "위기다, 똘똘 뭉치자"고 하면서 대충 선거 치르려고 하면 또 다른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 (범여권은) '다음을 준비하는 패배'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프레시안 : '진보개혁' 세력에겐 암울한 정세가 예고되고 있다. 총선 이후 정치구도를 어떻게 전망하나.

이대근 : 대선이 끝나고 바로 총선이 이어진다. 총선은 대선 결과의 영향이 남아있을 때 치러진다. 새로 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고, 신당은 대패할 가능성이 많다. 대통령과 의회를 한 당이 장악하게 되면 국정운영의 장악력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는 반면 견제할 세력이 없는 데 따른 다른 문제가 나올 수 있다. 신당이 패배하는 방식은, 그것이 한국 정치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면, 신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좋은 면에서건 나쁜 면에서건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의 덕목'에 대해 전례 없이 풍부한 성찰의 경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정권의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대근 : 이미 합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국정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분열과 대립, 갈등형에서 설득과 대화형으로 전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세대와 이념,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다. 대립과 갈등을 치유해야 하는데, 노 대통령은 외려 대립 상황을 이용했다. 대립과 분열을 조장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실정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비주류이고 힘이 없는 탓이라고, 사회적인 구조 탓이라고 변명했다. 미국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더 하다. 대통령이 올바로만 한다면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수단은 많다. 대통령에겐 특히 '말'이라는 중요한 수단이 있다. 대통령의 '말'은 시민적 동의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촉발시키고 분쟁을 확산시킨 진원지로 잘못 활용됐다.

민노당은 왜 엘리트들만의 정당이 됐나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에디터께서는 영화 '괴물'을 다룬 한 칼럼에서 "삶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사회적 모순에 맞선 일상적인 투쟁만이 자기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패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그 결과는 '일상적인 투쟁'보다는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처지'와 '의식'의 분리가 왜곡된 정치적 선택을 불러온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한 건 뭔가.

이대근 : 일상적인 투쟁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쉽게 말하면 작은 실천이다. 우리는 항상 거창한 것을 말한다. 거대담론에 쉽게 빠진다. 그게 편하다. "정치판 다 갈아엎어야 돼", "대통령 갈아야 돼", "전부 다 고쳐야 돼"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잘못은 안 본다. 작은 실천을 할 필요가 있다. 풀뿌리 운동, 지방자치 공동체 운동 같은 것을 통해 작은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에 대한 성공과 만족이 또 다른 변화의 동력이 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처지'와 '의식'의 분리를 말한다. 강남 사람은 계급적으로 생각하는데, 강북 사람은 자기 계급을 배반한다고 한다. 거창한 얘기에 빠지면 결국 다 똑같은 얘기를 하게 된다. 강남 사람이나 강북 사람이나 똑같이 하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강남 사람이 해야 할 일과 강북 사람이 할 일은 다르지 않나. 이런 차이는 자기 주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가장 서민적이라고 자부하는 민주노동당이 고전하고 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대근 :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세대에 맞는 진보적 가치를 전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가 뭔지 알고는 있나, 이런 생각도 든다. 특히 민족자주파니 하는 세력이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이념과 노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자기가 대표해야 할 노동자, 서민이 무엇을 갖고 고민하며 고통 받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선언적으로 과거 세대의 낡은 가치를 강요하고 주입하려고 한다.

민주노동당이 왜 엘리트의 지지정당이 됐나. 왜 노동자의 지지정당이 안 됐는가. 단순하다. 노동자의 관심사와 이익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영길 후보가 경선에서 지명되고 맨 처음 내세운 구호가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지 않겠나. 당장 내가 잘릴지 모르고, 저임금에 우유 값, 사교육비로 고통 받고 있는데,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만들어주겠다니 이게 무슨 서민들을 위한 건가. 기층과 괴리된 운동권 일부의 '쑥덕공론'의 결과가 아닌가. 이번 선거에서 민노당이 고전하는 건, 물론 진보정당이 처한 열악한 조건 탓도 있겠지만, 서민들이 가장 아파하고 관심 갖는 것을 내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하다. //정제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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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조봉암 진보당 학살은 헌정사상 대사건
<조봉암의 진보당>은 오늘의 양극화 사회를 막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
 
김영국
조선일보·경향·민노당 한목소리, '조봉암 명예회복 서둘러라'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조선일보 2007.9.29일자 사설 '조봉암(曺奉岩)'의 결론)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경향신문 2007.9.29일자 사설)

"1959년 조봉암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 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민주노동당 2007.9.28일자 대변인 논평)

한 '진보 정치인'의 명예회복을 놓고 반공·보수의 아성인 조선일보와 진보·개혁신문의 대표 주자인 경향신문, 그리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좌우합작'하여 한목소리로 고무·찬양하는 경사스런(?) 일이 오늘(29일) 벌어졌다.

"조선일보가 왠 일로...", "도대체 우리 역사 속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무엇이길래..." 모처럼 벌어진 스스러운 광경에 뜨악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죽산(竹山) 조봉암과 진보당은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통일 방안으로는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여 무려 216만여 표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반공보수·독재자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한 명실상부한 '진보적 정치세력'이었다.

특히 조봉암의 216만여 표는 당시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조봉암의 좌파 성향을 문제 삼아 야권 연합 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는 등 비열한 정치행보를 보임으로써 무려 185만여 표에 이르는 무효표가 발생한 가운데 거둔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컷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은 대선 결과에 위기 의식을 느낀 독재자 이승만으로부터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쓴 채 처형되고 진보당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에 대해 지난 9월 27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과와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조봉암 진보당>의 타살 그 후 '비정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고려 후기 묘청의 서경 천도 좌절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자주파와 김부식의 사대파와의 싸움에서 김부식 파의 승리와 묘청의 좌절을 두고 '한국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했다. 즉, 단재는 사대파의 승리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단재의 이 비판은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판정에 앉아 있는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맨 앞이 이승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     © 민주화운동기념자료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한 사법살인 이후 한국 사회는 친미사대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에 주류를 차지했고, 야당 또한 개량적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돼왔다. 그 결과 오늘날 약육강식의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민중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진보당 타살 이후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사 또한 일제-친일파, 미제국주의-친미파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탄압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찾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2007년 오늘도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 보수 독점 체제라는 또 다른 거센 도전을 만나 진보좌파의 가치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고, 진보 운동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가히 조봉암 진보당의 학살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일대 사건이요, 현대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이자 가장 유력했던 '진보정당'이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반공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대사건이었다.

<조봉암 진보당>의 가치와 대안들, '2007년에 살아 숨쉬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마저 '은사죽음'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에 내세웠던 '진보좌파'적 기치(旗幟)와 대안들이 마치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오늘의 서민대중들을 구하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과도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5년 12월 22일 발표한 창당 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을 살펴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확연해진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하고, <강령>으로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 등을 내세웠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진보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조봉암의 진보당 노선이 중증 상태인 2007년의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볼수록 오늘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대안을 미리 마련코자 한 '선각자의 예지(銳智)'마저 느껴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 당시처럼 야당의 주도세력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정글 법칙'만이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비정한 사회'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 조봉암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신문인 <대자보>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진보·개혁 정당이 이 땅에 견실(堅實)하게 자라나 서민대중들이 극심한 양극화의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아래는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정문 전문'이다. / 편집위원

◆ ‘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끝)



☞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 전문'(진실화해위원회, 2007.9.27) 바로가기

☞ [조봉암 생전의 모습과 장녀 조호정 씨 인터뷰 동영상] "국가가 사과하라"…죽산 조봉암 선생은 누구(SBS, 2007.9.27)

☞ [조선일보 사설] 조봉암(曺奉岩)(조선일보, 2007.9.29일자)

☞ [경향신문 사설] ‘조봉암 신원(伸寃)’과 사법부(경향신문, 2007.9.29일자)

☞ [민주노동당 논평]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민주노동당.뉴스와이어.파란, 2007.9.28)

☞ 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한겨레신문, 2007.9.28)

* 글쓴이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9/29 [22:48]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9.29)
:
Posted by 엥란트

[사설] 조봉암(曺奉岩)

[조선일보] 입력 : 2007.09.28 22:56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27일 ‘국가 變亂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만들고 북한 간첩 노릇을 한 혐의’로 1959년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과 그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와 함께 일제시대 장기간 복역하고도 사형 판결 때문에 독립유공자에서 빠져 있는 조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도록 권고했다.

조봉암(1898~1959)은 20세기 초·중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지만 해방이 되자 1946년 공산당과 결별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연이어 출마해 이승만 대통령의 政敵정적이 됐다. 특히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유세 중 별세한 1956년엔 216만 표를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1958년 1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전격 체포되고 이듬해 7월 조봉암은 사형됐다.

조봉암의 사형은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다. 1심에서 국가 변란과 간첩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5년이 선고됐는데 석 달 뒤 2심에서 갑자기 혐의가 모두 인정되고 사형이 선고됐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 조봉암이 청구한 再審재심이 기각된 바로 이튿날 서둘러 사형이 집행됐다.

그가 받은 혐의는 진보당의 ‘평화 통일’ 綱領강령이 국가 변란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이런 강령들이 당시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간첩 혐의도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의 불법감금 상태에서 북한의 자금과 지령을 전달했다는 對北대북 공작요원의 진술에만 의존했던 점을 들어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법률적 사실 판단을 벗어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논리에 의해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轉向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刑場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9/28/20070928011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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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조봉암 신원(伸寃)’ 과 사법부

[경향신문] 입력: 2007년 09월 28일 18:05:4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죽산 조봉암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이승만 전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가 당시 정권측이 조작한 ‘진보당 간첩사건’으로 1959년 사형당한 죽산이 48년만에 국가기관에 의해 원통함을 풀게 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진보당 사건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면서 “국가는 유족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죽산 신원(伸寃)’을 계기로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공안사건들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진실화해위의 이번 결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뼈저린 성찰을 해야 할 곳은 바로 사법부가 아닌가 한다. 비록 독재정권 치하였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사법부는 확실한 증거없이 죽산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렸고, 공안사건에서의 이같은 기계적 판결은 그 이후 군사정권 내내 계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사법부는 정권의 명령에 따른 ‘거수기 판결’ 따위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를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기고문, 강연회 따위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는 등 비상식적인 판결을 내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요구에 부응했다면 지금은 자본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사법부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취임 두 돌을 맞았다. 이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국민의 신뢰없이 사법부는 존속할 수 없다”고 천명한 바 있다. 사법부는 자신이 국민적 신뢰에 의해 존속하고 있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281805441&code=9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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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논평-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2007년 09월 28일 (금) 12:07   뉴스와이어

(서울=뉴스와이어)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아울러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1959년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진실을 진실로 밝히지 못한 후배들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한번 내려진 판결은 뒤집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안이한 역사의식을 탓해야 할까.

그러나 실상은 진보진영의 등장을 막기 위한 보수·수구세력의 암묵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국가 기관이 밝힌데 대한 기쁨을 감출 수 없지만, 더 나아가 48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왔던 진보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여전히 염원한다.

또한 우리의 염원은 어느 누군가의 결정과 판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수고로움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도 다시한번 되새긴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

2007. 9. 28. 민주노동당 대변인 김형탁

보도자료 통신사 뉴스와이어(www.newswire.co.kr) 배포
보도자료 출처:민주노동당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053321&year=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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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국가 사과·재심 권고도 

[한겨레신문] 이순혁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가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 결과를 의결했다고 27일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고 이 과정에서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가 이뤄져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 판결까지 이어졌다”며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며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 침탈 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인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사형 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은 조봉암이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표를 얻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진보당을 창당해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육군 특무대와 서울시경이 수사에 나서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기소해 사형이 선고·집행된 사건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기사등록 : 2007-09-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389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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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

[한겨레신문 2007-09-28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조봉암 사건’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80)씨는 28일 “결정문을 받는 대로 변호사와 상의해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조씨가 재심을 청구하면 조봉암 사건은 50여년 만에 다시 한 번 재심 청구 대상이 된다. 조봉암은 처형되기 전인 1959년 재심을 청구했으나 대법원은 그해 7월30일 이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이 지나 홍진기 법무장관의 확인 서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조봉암 사건’ 수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판·검사 가운데 1심 배석판사였던 이병용(81) 변호사와 2심 배석판사 조규대(83) 변호사는 모두 진실화해위 조사에 응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 부장판사는 조봉암 선생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고, 국가보안법의 통신·회합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로 그는 ‘용공판사’로 몰렸고, 그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유 판사는 4·19혁명 뒤 한 신문과 했던 인터뷰에서 “5년 형량을 선고한 자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1966년 53살의 나이로 숨졌다.

당시 유 판사로부터 서구 혁신정당의 강령과 진보당의 강령을 비교해 달라는 지시를 받았던 이병용 변호사는 진보당이 서구 우파정당보다도 온건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변호사는 진실화해위에서도 “2심과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고 증언했다. 이후 대한변협회장(1983년)과 국회의원(13대)을 지낸 그는 조봉암 선생의 제사에도 참석해 유족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2심 때 배석으로 참여해 유죄 판결을 내렸던 조규대 변호사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당시 2심 판결은 옳았다”는 취지로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변호사는 28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도 진실화해위 결정에 대해 묻자 “노코멘트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2심 재판장이었던 김용진 부장판사는 전주지방법원장(1960년)과 단국대 대학원장(1966년)을 지냈고, 대법원 주심을 맡았던 김세완 대법관은 국민대학 이사장(1960년)과 성곡재단 이사장(1967년)을 역임했다. 1·2심 재판 때 공소 유지를 담당한 조인구 검사는 내무부 치안국장(1960년)도 지냈지만 4·19 혁명 이후 구속되기도 했다. 대법원 재판 때 공소 유지는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검사가 맡았다.

고제규 기자 unju@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391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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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9월 27일 발표한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전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의 '진보정당'이 반공주의자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조봉암 등 주요인물이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 쓴 채 처형·체포·불법감금 등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음으로써, 이 땅의 진보가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사건입니다. 돌이켜볼수록 우리 헌정사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자 반공주의자에 의해 진보의 싹이 무참하게 짓밟힌 대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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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붙임 :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 요지 1부.  끝.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끝)

ㅁ 원문 출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read.asp?num=74&pageno=1&stype=&sval=&data_years=2007&data_month=

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download.asp?filename=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보도자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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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달팽이 뿔 위에서 '개혁·진보의 길'을 묻다
[김영국의 정치시평] 책사 '윤여준'과 오차범위 내 '범여권 대선주자'들
 
김영국
'블로그 생활정치' 들고 돌아온 '책사'

어제 낮에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전 의원이 그제(28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국민의 미사일 검증>이라는 글을 <대자보>에 전재(全載)할 수 있도록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대자보>가 비록 진보매체이긴 하지만, 윤 전 의원의 글 중에 범여권은 물론 개혁·진보진영에게도 참고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윤 전 의원은 "평범한 글인데 부끄럽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두 차례나 지낸, 윤여준 전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진영 내 '정세 분석가', '선거 기획통'으로 불린다. 이 부분만큼은 범여권은 물론 진보진영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할 정도다. 사실 그는 굵직굵직한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의 '숨은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 여의도연구소장     ©대자보
3년 만에 여의도로 돌아온 윤 전 의원은 최근 '윤여준의 정치카페'(http://www.yooncafe.com/)라는 블로그를 개설, 생활정치 확산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최근 언론과 인터뷰 및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을 통해 범여권의 현황에 대한 거침없는 진단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진단에는 침체 일로를 걷고 있는 개혁·진보진영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도 적지 않았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진보 진영의 정세 판단과 일치되는 부분도 많았다.

물론 윤 전 의원은 한나당을 위해 존재하는 '책사(策士)'이다. 그의 진단을 범여권이나 개혁·진보진영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다. 또한 자신의 속내와 전략을 다 밝혔다고 볼 수도 없다.

다만 한나라당 최고의 정세 분석가가 하는 말이니 똥이든 된장이든 내가 다시 달여 보약으로 쓰면 그만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윤 전 의원이 그동안 쏟아낸 진단서들을 살펴보고, 개혁·진보진영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몇가지 단상(斷想)들을 끼적거려 보려 한다.

오~마이 문국현? "글쎄"

윤여준은 말한다. "범여권이 왜 안 되냐구요? 민심 이탈이 워낙 심하기 때문이죠."

뻔한 답이다. 문제는 그 뻔한 답을 개혁·진보진영이 그동안 외면하거나, 일부러 회피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채워넣어야 할 정답으로 남아 있다.

윤 전 의원은 지난 27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 여권은 어떻게 해도, 누가 나와도 경쟁력이 없다."며 "지난 5년간의 국정 실패에 대해 국민이 워낙 냉철한 인식을 하고 있고, 심판하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권은 다른 선거 전략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오마이뉴스 등 일부 인터넷신문의 '문국현 띄우기'를 겨냥한 듯 "요새 CEO형 국가 지도자가 좋다는 게 유행처럼 돼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CEO는 본질적으로 사익을 추구하고, 국가 지도자는 공익을 추구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의 경우는 서울시장이라는 막중한 공직에서 4년간 일 해본 경험이 있다. 그건 문국현 씨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문국현 씨는 경제인(CEO)로서는 몰라도, '정치경제가'로서 그를 평가할 만한 실적 자체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더 첨가한다. 문국현 측이 지금처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어정쩡한 평가와 범여권과의 단일화 미련을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면, 그는 범여권의 1/20 속에 이내 녹아들고 말 것이다.

윤 전 의원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선거공학적으로만 보면 대운하를 공격하는 쪽은 간단명료하게 공격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걸 방어하는 쪽은 말이 굉장히 장황해야 한다. 그건 선거기술상 유리하지 않다."

이날 그의 인터뷰의 압권은 범여권의 최대 희망 사항인 이른바 '51:49 구도' 만들기와 '대선은 유권자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적 성격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전망투표를 한다.'는 두 가지 선거의 일반이론이 "현 정권에 대한 민심 이탈이 워낙 심하고 국민이 냉혹한 평가(심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엔 잘 안 맞을 것이다."고 일축한 점이다.

"범여권 대선주자들 국민 검증 이미 끝났다"

윤 전 의원은 또 그제(28일) '윤여준의 정치카페'에 쓴 <국민의 미사일 검증>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보다 상세한 정국 진단들을 쏟아냈다.

이 글에서 윤 전 의원은 "어쩌면 국민은 벌써 여권 후보에 대한 검증을 끝내놓고 있는 지도 모른다."며 "이들의 턱없이 낮은 지지율이 이를 입증하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윤 전 의원은 현재 예비경선에 돌입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주자들에 대해서도 "따지고 보면 9명의 예비 후보 중 대부분은 이 정권의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다."며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데 대해 진정한 사과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와서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 국민 입장에서 보기엔 너무 몰염치하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윤 전 의원은 "누가 되든 여권 후보에 대한 국민의 검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며 구체적인 검증 자료로 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 사례 6가지를 열거했다.

윤 전 의원이 현 정권과 범여권에 대한 검증 자료로 제시한 6가지 중에 '국가 채무 증가'와 '경제 성장률 둔화' 지적은 한나라당의 기본 코드이니까 그렇다 쳐도, '극빈층 확대', '청년실업 증가 및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심화', '가계 빚 사상 최대'는 사실 진보 진영에서도 노무현 정권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일관되게 제기해온 이슈들이다. 오늘날 노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의 핵심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윤 전 의원은 대선을 앞두고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의식한 듯 "여권은 부족한 경쟁력을 보완하는 방법의 하나로 평화 담론을 생각하는 듯하다."고 전제한 뒤 "여당 후보의 ‘평화’가 이명박 후보의 ‘경제’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며 평화 이슈의 대선 파괴력를 낮게 평가했다.

"이명박 60% 지지는, 盧 정권이 사전 선거운동해준 덕택"

그러면서 최근 60%까지 치솟은 이명박 후보의 대선 지지율은 사실상 "현 정권이 이명박 후보의 사전 선거운동을 착실하게 해준 덕택."이라고 꼬집었다. 노 정권의 실정이 한나라당 이 후보의 지지율을 천정으로 끌어올린 '트로이 목마'라는 지적이다.

윤 전 의원은 이에 대해 "현 정권의 국정 실패로 고통을 당해 온 국민들은 이 후보의 경제 대통령 이미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며, 또한 역사니, 민족이니, 진보니, 분배니 하는 추상적인 거대담론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민생을 돌보지 않은데 대해 국민이 현 정권에 책임을 묻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윤 전 의원은 이를 "국민들은 그동안 참았을 뿐이지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로 압축했다.

윤 전 의원은 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해서도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여권이 시장 바닥의 야바위로 묘사되기도 하고 ‘잡탕당’, ‘도로당’ 이라고까지 불리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새로 만든 건,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두려운 나머지 아예 심판의 대상인 당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하면 국민의 심판은 과녁을 잃어버린 화살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범여권이) 기대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미사일 시대다. 아무리 세탁을 해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라는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며 "국민 심판이라는 미사일은 그 흔적을 끝까지 예리하게 추적할 것이다."고 힐난했다.

윤 전 의원은 마지막으로 질 때 지더라도 박근혜 전 대표처럼 '아름다운 패배'라는 소리라도 들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어쩌면 그의 진단서를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생각을 빌어 개혁·진보진영의 오늘을 비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좀 구차스럽긴 하지만, 상대편 책사의 생각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한번쯤 돌아보는 것도 과히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도 있는데.

사실 윤 전 의원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범여권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내리고는 있지만, 그 기저(基底)는 어디까지나 '범여권에 대한 극심한 민심이탈'이다.

결국 범여권에 대한 '국민적 신뢰 붕괴'가 오늘날 범여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하나같이 플러스 마이너스 3.1%(±3.1%)란 오차범위 수준도 채 안 되는, 이른바 '오차범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든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리고 이건 비단 범여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개혁·진보진영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건 최고의 책사 윤여준이 지적한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지점일 것이다.

개혁·진보진영, 무너진 '신뢰 회복'이 최우선 과제

그렇다면 현재 범여권은 물론 개혁·진보진영이 취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하다. 신뢰를 잃어버린 근원적인 이유부터 차근차근 걷어내는 것이다.

첫째는 지난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때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여권에 대해 국민들이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보내면서 기대했던 '그 무엇'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것은 '잘 사는 부자들은 입이 찢어지고, 못 사는 서민들은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만든 노 정권과 여권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전면 재검토가 첫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미FTA 폐기', 학부모들을 교육 노예로 만들고 있는 '사교육 폐해 해결', 부동산 가격 하향안정화, 고금리 사채 법정이자율의 대폭 하향 조정 및 불법 채권추심행위 근절, 사모펀드 육성 등 금융신자유주의 정책 전면 재검토 등이 될 것이다.

둘째는 정당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당에 대한 국민 혐오를 희망으로 바꿔놓지 않고선 어떤 정치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지지자들을 섬기지 않는 정당, 지지자들을 '단무지'(단순 무식한 지지자)로 만드는 정치인은 더이상 정치판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은 각자의 노선에 따라 정도를 걸어야 한다.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외롭더라도 일관성 있게 진정성을 가지고 헌신해야 한다. 너무도 속이 뻔히 보이는 대선·총선용 이합집산으로는 정치에 대한 환멸만 가중시킨다. 국민의 수준을 얕보는 꼼수 정치가 범여권을 '오차범'으로 전락시킨 주범이다.

셋째는 책임을 져야할 정치세력은 깨끗하게 책임지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당연히 현재 대통합민주신당의 오차범 대선주자들이 0순위에 해당된다.

한나라당에서 3등짜리 후보를 데려다 1등 후보와 싸움 붙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극단적 패배주의'다. 노 정권 실패에 무한책임을 져야할 친노 대선주자들의 몰염치가 범여권에 대한 환멸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넷째는 그동안 개혁·진보적 지지자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그나마 일관성 있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온 인사들 즉 '신뢰할 수 있는 인사'들이 중심이 돼 기존 범여권과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창출해가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평가에 걸맞는 현실정치인이 임종인 의원(무소속)과 김성호 전 의원 정도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은 그만큼 소위 386 정치인들이 집단으로 망가졌다는 오늘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김성호 전 의원(좌)과 임종인 현 의원(무소속). 이들은 구 열린우리당에서도 개혁·진보적 노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실천해온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현재도 범여권에 합류하지 않고 제대로 된 개혁·진보 노선의 정치세력을 창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 합성
 
'배제'가 아니라 '단절'을 말하는 건, 단순히 범여권에 속하는 기성 정치인들과의 관계 단절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중도우파 노선은 물론 구태스러운 정치 방식까지 모든 적폐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세력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정치세력이 개혁·진보적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다시 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신자유주의·성장중심주의·시장만능주의 패러다임과 제대로 한판 대결을 펼쳐야 한다. 그들과 다른 각도에서 '함께 사는, 따뜻한 공동체 사회' 건설이라는 미래 비전과 국가 정책 방향을 가지고 정면 대결해야 한다.

차기 정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39.8% 국민에 답을 줘야

윤여준 전 의원은 작년 9월 3일 세계일보(황정미 정치전문기자)와 인터뷰에서 올 대선의 '시대정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민심은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먹고 살기 힘드니 경제를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싸우는데 지쳐 국민통합을 원하는 흐름이다. 그런데 이것이 산업화 시대의 성장, 즉 정경유착하고 대기업 키우는 식의 성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서민층 삶의 질 향상을 통한 통합을 얘기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배, 평등 가치가 상당히 반영된 통합이다. 이걸 단순히 보수화 흐름으로 보면 안된다. 변혁적 요구, 에너지가 깔려 있다고 본다. 경제정의 없는 시장경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경제정의는 얘기하고 있지 않다."

이런 윤여준의 진단에 100% 동의한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다른 방향의 '분명한 선택지'를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반(反)한나라당'을 말할 자격이 없다. 국민들은 같은 값이면 원조 보수를 선택하지 굳이 중도라는 '짝퉁 보수'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범여권의 중도 노선이 국민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국민들 중 39.8%가 차기 정부의 이념 성향은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오래 전(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2006.12.8~9일자 여론조사)부터 분명하게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럼에도 범여권은 이를 자신들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난데없이 '중도'라는 이상한 나라의 섬에서 신선놀음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지지기반마저 거덜내버렸다.

그러다 급격하게 추락한 위상에 당황하며 지금은 이를 모면하느라 정답은 제쳐 둔 채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시대정신에 맞지도 않고 내용조차 없는 '대통합'이라는 허울 속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허우적대고 있다.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도 '행태적 수구좌파'의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한 채, 범여권과 동반자살 일보 직전이다.

더욱 암울한 건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이 앞으로도 개전(改悛)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제(28일) 대통합민주신당은 초대 정책위의장으로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를 임명하면서 창당 대회 코미디에 이어 또다시 '포크레인질'을 했다.

대표적인 친재벌 성장중심주의자이자 신자유주의 관료 출신인,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는 임기 중 부동산 폭등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모든 여론조사에서 '가장 시급히 교체돼야 할 장관'으로 손꼽히는 등 오명을 뒤집어쓴 채 물러난 인물임에도 유독 노무현 정권만이 애지중지해 온 인사다.

안 그래도 도로잡탕우리당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이처럼 연속되는 패착으로 인해 국민과의 거리를 좁히기는커녕 '안드로메다급 민심이탈 행성'을 향해 나홀로 비행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여당 굴욕'과 유일한 '돌파구'

윤여준 전 의원은 이미 오래 전에 범여권을 향해 정답에 가까운 '힌트(?)'를 준 바 있다. 윤 전 의원은 지난 1월 22일 뷰스앤뉴스라는 인터넷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범여권의 정계개편은 국민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모양새여야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열린우리당 핵심 위치에 있었고, 노 대통령과 책임을 나눠져야 할 사람들이 중심이 돼 간판만 바꿔달아 본들 국민은 그들을 '새로운 세력'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이건 윤여준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머리만 있으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전 의원의 예상은 7개월이 지난 지금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 범여권은 대통합의 기치 아래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으나 국민들이 이들을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인식하기는커녕 과거 열린우리당보다 더 구태스러운 도로잡탕우리당이라는 인식만이 압도하고 있다.

그 결과 대통합민주신당을 비롯 범여권의 대선주자 중 그 누구도 이명박 후보와 게임 자체가 안 되는 '70 대 10'이라는 '경악스러운' 사태가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하나같이 오차범위 수준도 안 되는 데에다 전체를 다 합쳐도 10%가 안 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여당 굴욕' 사건이다.

이제 노 정권과 친노세력 그리고 범여권에 대해 배제가 아닌 '단절'을 말해야 한다. 아울러 범여권의 구질구질한 생존 방식과 절연하고 대중에게 희망을 줄 새로운 개혁·진보적 정치세력 창출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다. 어쩌면 이게 그나마 지금 개혁·진보진영이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정치적 실적'으로 말하라

범여권이 무너질 때를 기다렸다 치고나오는 정치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속 보이는 기회주의로 취급받기 딱 좋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가야 한다. 국민적 지지는 '기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치적 실적'으로부터 나온다. 실적이 없는 인물이나 세력은 제아무리 '묻지마 띄워주기'를 한다 해도 단박에 성공하기 어렵다.

정치판이 아무리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더라도 정치인으로 들어선 순간, 그가 평소에 자신의 노선과 신념을 얼마나 일관되게 현실정치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느냐라는 '정치적 실적'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경제계나 다른 분야에서 국민의 감동을 줄 만한 뛰어난 업적을 달성했다손 치더라도, 제아무리 훌륭한 정치·경제적 비전을 제시한다 해도, 그가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연속되는 정치적 선택의 과정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해왔으며, 어떤 실천을 보여주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바로 그것이 국민들이 한 정치인을 상대로 '앞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인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정치·경제적 비전 제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정치적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1차 관문일 뿐이며 '국민적 신뢰 쌓기'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2차 관문은 정치적 실적 없인 통과할 수 없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한 정치인이 대중정치인으로서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2002년 아니라 '노무현 학습효과'가 시퍼렇게 살아 숨쉬는 2007년이다. 2002년의 '향수'로 2007년의 시대정신을 관통할 수 없다.

2007년의 시대정신을 관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정치적 실적과 일관된 진정성'이다. 신뢰가 철저히 붕괴된 오늘의 참혹함이 개혁·진보진영에게 남겨준 뼈 아픈 교훈이다.  / 편집위원

* 글쓴이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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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중도.우리당 NO! 진보신당 갈망"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8/30 [21:57]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8.8.30)


:
Posted by 엥란트


김근태의 대통합론은 '노무현 부활운동'
[김영국의 정치세평] 범여권 '묻지마 대통합론'은 '제2의 국민 사기극'
 
김영국
김근태, '어벌쩡한' 反한나라당 연합 주창

사실 김근태에 관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그에 대한 기대도 없었거니와 관심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근태를 비난해 봐야 '더 나쁜 노무현과 친노세력도 있는데'라는 핑계로 쓸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속이 뒤틀려 봐줄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론 나같은 사람이 글 한 줄 써서 비판한다고 내 글을 보거나 설사 본다고 달라질 김근태가 아니라 해도, 김근태가 지금처럼 민주세력이니 개혁.진보를 팔며 진짜 개혁.진보 세력의 얼굴에 똥칠하고 그를 아끼는 '괜찮은 사람들'마저 바보로 만들고 있는 한, 이렇게라도 씹어야 겠다.

어제(13일) 열린우리당 대선주자 중 한 사람인 김근태 의원이 "대통합은 시대정신"이라고 주창(主唱)했다.

그는 어제 자신의 홈페이지와 지지자 모임인 <김근태 친구들>에 올린 글에서 "통합하면 승리했고, 갈라지면 패배했다."며 97년에도 통합해서 승리했고, 2002년에도 노무현을 중심으로 통합에 성공해 승리했다며 이번에도 대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번에도 중산층과 서민의 승리를 위해,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해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과 정치세력은 이 대통합의 걸음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도 절박한 마음으로 대통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권 일각에서 누구 누구는 안 된다고,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어이가 없다.'고 일갈했다.

지자자 모임 대문은 '통합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김근태 지지자 모임인 <김근태 친구들> 사이트 대문에는 어제 김근태의 주장을 강력히 반박한 '김근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대통합은 시대정신이 아니다'란 제목의 글이 나란히 올라와 김근태의 글을 짓누르고 있었다.

사실 나도 어제 김근태의 글을 읽는 내내 어느 '찌질이의 낙서장'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나도 좀 끼워달라.'는 투정으로 도배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미 다른 사람이 다 선점하고 자리 깔아 논 곳에, 뒤늦게 들어와 한 쪽 구석에 돗자리 깔고 앉아 사주팔자나 보겠다는 노파를 연상케 했다. 김근태 주변에 파리만 날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또다시 확인했다.

그가 말하는 대통합의 원칙 속에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알맹이'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한나라당 싫은 사람은 무조건 모여라.'는 강다짐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은 김근태의 이런 태도와 주장을 대통합을 위한 열정이라고 봐줄까, 아니면 자신이 배제될까 두려운 나머지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볼까. 오히려 '어이 없는' 건 김근태요, '안타까운' 건 그의 지지자들이 아닐까.

도대체가 김근태의 길이 없다. 하긴 언제 김근태의 길이 있었어야 하는 말이지만.

김근태의 통합신당 투항은 '노무현 부활운동'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한가지 분명한 건 있다. 김근태가 대통합의 길에 동참하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누굴까다. 바로 김근태가 치를 떨며 비판하고 있는 '노무현과 친노세력'들일 것이다.

왜냐고? 김근태가 통합신당에 몸을 싣는 순간, 노무현과 친노세력은 그들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트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김근태 일행이 지역연합 통합신당으로 기어들어가는 순간, 김근태가 그나마 상징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개혁.진보 혹은 중도좌파, 좀 더 쉽게 말하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큰 공간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이게 바로 김근태가 개혁.진보 진영에겐 여전히 '계륵(鷄肋)'인 이유이다.

그동안 그 공간에서 상징적으로나마 터줏대감 노릇하던 김근태 일행이 사라져버렸으니 노무현 일파에게는 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그들에겐 또다시 양두구육(羊頭狗肉)식 사이비 개혁이란 좌판을 펼쳐들고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쳐먹을 공간이 생겨나는 데 이 얼마나 기쁠소냐다. 김근태 일행이 개혁.진보적 공간에 제대로 진을 치고 있으면, 노무현 세력은 기껏 해봐야 '부산노빠당'밖에 할 게 없는데 말이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후보를 키우기 위해 범여권 후보들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는 김근태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지만, 노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큰소리 칠 수 있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김근태 자신의 '어리버리한 정치적 행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이 김근태를 죽이려 들고 있지만, 김근태는 그에 맞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개혁.진보적 동력마저 스스로 밟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한, 김근태는 죽었다 깨어나도 노무현의 계략을 이길 수 없다. 그는 영영 '노무현이나 김근태나 똑같은 놈.'이라는 세간의 비아냥을 벗어날 길도 없다.

김근태 일행이 통합신당 안에서 제아무리 개혁.진보를 외쳐봐야 사람들은 통합신당 내 '찌질이들'로밖에 안 본다. 이 사실을 도외시하는 한, 김근태와 주변 측근들은 오로지 다음 총선의 '배지'가 걱정돼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밖엔 안 된다. 이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만 있다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대통합 신당은 서민 죽이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변종'

대통합? 도대체 누구를 위한 통합인가. 한나라당만 이기면 노무현 정권보다 더 보수적이고 잡탕스러운 정권이 탄생해도 좋다는 '무모한 통합'이 결국 누구를 죽이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김근태가 주장하는 대통합의 길에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평화개혁 진영을 대표해 온 시민사회, 종교계의 인사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공간은 없다. 한 자리 욕심나는 정치꾼이 아니라, 제 정신 박힌 인사라면 시민단체 명함 들고 그런 대통합의 길에 기어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 범여권이 말하는 사실상 '묻지마 대통합'은 누가 봐도 역사의 후퇴다. 좌파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과 잡탕 열린우리당이 '국민 사기극'으로 끝나고 있는 마당에 제2의 노무현을 꿈꾸는 '제2의 국민 사기극'이다.

김근태는 자신의 대통합 노력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중산층과 서민의 곁으로 가기 위한 '발버둥'으로 봐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김근태와 그 주변 측근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발버둥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것도 어물전 털어먹고 이제 꼴뚜기 장사나 하겠다는 것 아닌가.

분명한 노선과 정책의 정립 없이, 선거에 이기기 위한 97년 통합과 2002년 대통합의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민주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의 참혹함이다.

잡탕 세력이 신자유주의 물결에 대책 없이 몸 담고 순응한 결과 '사상 최대의 양극화'라는 고통을 안겨준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대통합인가. 중산층과 서민으로 다가가기 위한 대통합이라는 김근태의 주장은 명백히 '대국민 기만'이다.

지금 대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두 가지가 있다. '기득권을 버려라.'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길을 가자.'란 언표다. 기득권을 버리라는 주장은 그렇게 말해야 자기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통 큰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해서란 구호는 그렇게라도 말해야 욕을 덜 먹기 때문이다.

버려야할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수구적 마인드와 노선'

그러나 정작 서민을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지역이나 세력 따위의 기득권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는 '경제 정책과 노선'이다.

한나라당과 별반 차이도 없는 정치세력이 反한나라당을 주창하며 표 달라고 하니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다. 이것이야말로 국민 수준을 얕보는 짓이다.

김근태는 지금 중산층과 서민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평화적인 대북관 빼고는 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회경제적 정책 노선이 한나라당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수구적인 세력과 통 크게 합쳐 '잡탕 정당'을 또 만들자고 주장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김근태는 자신의 노선이 한미FTA 광신도인 손학규와 보수적인 박상천 그리고 제2의 자민련 국민중심당의 노선과 '사소한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이상 자신을 개혁.진보가 아니라 보수라고 해야 옳다. 그렇지 않으면 그 또한 기만이다. 김근태도 노무현처럼 좌파신자유주의라고 말할 셈인가.

그의 말대로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DJP 연합의 부활을 꿈꾼단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대통합을 제대로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김근태가 아니라 '박상천 민주당 대표'이다. 그는 사실상 한나라당 정책 노선이나 다름 없는 '중도적 사고'을 갖고 있는 사람끼리'만' 통합하자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색깔도 자기와 맞지 않고, 거기에다 노 정권 실패의 공동 책임까지 있는 김근태, 천정배, 정동영 일행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통합신당에 한사코 오지 말라고 한다. 아울러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도 확실한 차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박상천 민주당 대표의 주장이 김근태, 정동영의 찌질이성 주장보다 확실하게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이런 박상천의 주장이 훨씬 솔직하고, 정당정치의 본령에 걸맞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박상천의 중도 노선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한나라당도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마당에 박상천이 추진하는 정당이 설사 반서민-친한나라당 노선이라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정치적 자유이다. 최소한 정당정치에 관한 한 박상천의 주장이 백번 옳다.

박상천이 김근태보다 '솔직하다'

그에 비하면 김근태의 대통합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벌쩡한 투정'에 불과하다. 김근태가 '진보 찌질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정책 노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그에 걸맞는 길을 가는 것뿐이다. 개혁.진보니 민주세력이니 따위의 계급장 달고 국민을 더이상 기만해서는 안된다.

민주당도 모자라 한나라당보다 더 보수적인 국민중심당까지 모인 통합신당에서, 그것도 지역적 기반이 확실한 이들 세력과 지분 싸움에서 소수에 불과한 김근태 일행이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누가 봐도 솔직하지 못한 자기합리화이자 변명이다.

김근태는 어제 대통합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김근태가 개혁.진보 진영의 앞길을 지금처럼 가로막고 나설 바엔 이쯤에서 비켜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더이상 추한 몰골로 개혁.진보 세력의 그나마 남아 있는 자존심마저 뭉개지 말라고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김근태 일행을 꽤 진보적인 민주개혁 세력으로 '오인'하고 있기에 드리는 당부이다. 노무현이 개혁.진보라고 자처하면서 지난 5년 동안 개혁.진보의 이미지를 그만큼 조져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김근태마저 똥칠하고 나설 셈인가.

김근태가 싸워야 할 것은 앞에서는 통합을 얘기하고 뒤에서는 분열을 고착시키는 일체의 행위와 집단이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면서 한나라당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정치세력과의 통합으로 제2의 노무현 정권을 만들어내는 '제2의 국민 사기극'이다.

오로지 자신과 주변 정치꾼들만이 살기 위한 이런 길을 '시대정신'이라고 감히 말하는 김근태의 '무모한 용기'가 어이 없을 뿐이다. 아울러 '그건 당신의 길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지지자들이 측은할 뿐이다.

김근태보다 나은 지지자들

김근태는 개혁.진보 진영을 상대로 대통합을 '협박'하기 전에 자신의 지지자들로부터 나오는 진심어린 충언(忠言)을 먼저 경청하는, '닫힌 귀'부터 열어야 한다.

당장 김근태 지지자들의 인터넷 진지에 올라온 '김근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작성자-이민)'라는 글과 '통합은 시대정신이 아니다(작성자-푯대를 찾아서)'는 글을 읽어 보라.

김근태가 이 지지자들의 반박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그의 대통합론은 한낱 허울뿐인 투정에 불과하다. 나는 김근태가 이들의 반박에 쉽게 답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해봐야 어벌쩡한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민'씨는 '김근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란 글에서 "대통합은 이미 물건너 갔고, 처음부터 되지 않을 일이었다."며 "열린우리당이 바로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크게 모였다가 '망한 케이스'인데, 이 판국에 더 크게 모이자고 외치니 애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고 못박았다.

더군다나 이념과 노선도 다른데다 각자의 이해관계마저 다르기 때문에 더욱더 가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민씨는 김근태를 향해 "노무현과 그 일파들과 멋지게 갈라서고, 박상천 민주당에게도 침 한번 뱉어주고, 실용의 무리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 다음 김근태의 길을 뚜벅뚜벅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근태에게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가야 하며, 대신에 '옳은 길'을 가면 된다고 충고했다. 지금은 김근태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다 버려야 하며, '살 궁리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고언했다.

이민씨는 "보수 대연정의 와중에 민주세력이 몰락하고 진보 진영은 고립된 것이 현 시국"이라고 진단한 뒤 "민주세력이 몰락을 했으면 재건을 해야할 것이고, 재건을 위해서 우선 해야할 일은 무너진 노선을 복원하는 일."라며 지금 이 수순이 빠져버렸기에 '묻지마 대통합'이 되어버린 것이고, '중구난방', '개판 오분 전'이 된 것이라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에 따라 이민씨는 "분명한 것은 '묻지마 대통합'은 답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는 "노무현이 잘못됐다고 박상천, 조순형, 이인제가 옳은 것은 아니다."며 "대통합은 되지도 않고 옳지도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 곳에 김근태를 위해 마련된 빛나는 자리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김근태가 해야할 일과 관련해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왜 실패했는지를 김근태의 시각으로 분명하게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김근태의 몫으로 남겨진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 한, 답은 영영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다른 글에 단 댓글의 표현을 빌리면, 김근태가 남들과 차별화되는 상품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게 우선이지, 범여권 대통합을 위한 시나리오나 주절거리면 이미 날 샌 거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민씨는 마지막으로 "묻지마 대통합인지 독자 노선인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직진인지 후진인지는 '계산기를 내려놓는 순간' 머리 속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올 것."이라며 민주세력이 멸종되지 않도록 김근태가 밀알이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푯대를 찾아서'라는 지지자는 김근태의 글이 올라오자 '통합은 시대정신이 아닙니다.'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국민들은 '얼치기 통합'을 원하지 않는다."며 "소수정예라도 선명하고 깨끗하고 미래지향적인 '쓸만한 집단'을 원한다."고 주장했다.

김근태보다, 주변의 측근 국회의원들보다 그의 평범한 지지자들이 더 정확하게 현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 사심(私心)이 그만큼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김근태 지지자들의 공통된 인식은 아니겠지만, 국외자 입장에서 볼 때 꼭 해야될 말을 제 때 한 것으로 보인다.

죽더라도 양아치 두목은 되지 말라

지금 김근태 진영의 모든 문제는 자신의 지지자들 마음조차 읽지 못한 채, 세상 사람의 마음을 한 꺼번에 얻으려는 조급증과 무모함에서 나온다.

김근태는 멀리 가서 조언을 구할 것 없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애정을 가지고 글을 올리는 지지자들의 소리부터 꼼꼼히 챙겨보는 것이 훨씬 영양가 있을 것 같다.

어느 네티즌의 지적처럼, 김근태가 뿌려놓은, '비위 상하는' 오물들을 치우느라 그의 지지자들이 인터넷 사이트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구차하게' 김근태를 설명하게 만드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근태가 뜨지 않고, 뭘 해도 안되는 핵심 이유이다.

주변 사람과 지지자들을 구차하게 만드는 지도자는 이미 지도자가 아니다. '양아치 두목'일 뿐이다.

연일 쇠똥에 미끄러지고 개똥에 코 박고 다니는 김근태. 이 수렁에 빠진 김근태를 구하는 길은 김근태 지지자들의 '창조적 반란'밖에 없을 것 같다.

좋은 농사꾼에게 나쁜 땅은 없다.

☞ 김근태, "통합은 시대정신입니다" 전문 보기

☞ 이민, "김근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전문 보기

☞ 푯대를 찾아서, "통합은 시대정신이 아닙니다" 전문 보기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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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5/14 [11: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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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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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