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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평균 시청률 '꿈의 1%' 돌파했다   

 

4대 프로스포츠 케이블TV 시청률 비교해 보니... '배구 대박' 행진  

 

[오마이뉴스] 2014.1.27 

 

                    시청률·시청자수는 1경기 생중계 기준. 녹화방송·재방송의 시청률·시청자수는 합산하지 않았다

 

 

국내 프로 스포츠 중 최고 인기 콘텐츠는 프로야구다. 인기 지표인 TV 시청률과 관중 수에서 다른 종목에 크게 앞선다.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나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경기가 프로야구보다 앞서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장기간의 정규리그가 아닌 단발성 이벤트다.

이런 가운데 최근 몇년 동안 TV 시청률에서 프로배구의 비약적인 상승세가 눈에 띈다. 특히 2014년 새해 들어 프로배구의 시청률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자 프로배구의 경우 대부분의 경기가 케이블TV 대박 시청률인 1%대를 넘나들고 있다. 1월 1일부터 26일까지 케이블TV에서 생중계된 15경기 중 절반인 7경기가 1%를 넘었다. 1%가 안된 경기도 대부분 0.9%대다. 특히 최근 2주간 평균 시청률은 '꿈의 1%'마저 돌파했다. 총 8경기에서 평균 1.02%를 기록했다. 더 고무적인 건 시간이 갈수록 상승 추세인데다가 상위권 팀과 최하위권 팀을 가리지 않고 고공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새해 들어 '대박 시청률' 무더기 속출    

 

국내 프로 스포츠에서 케이블TV 1%대 시청률은 '대박' 또는 '꿈의 시청률'이라 불린다. 드라마나 영화 채널 등과 비교해서 시청자층이 남성 위주로 한정된 측면이 있고, 채널 번호도 한참 뒤에 있어 높은 시청률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배구도 올해부터는 주말에 2경기가 동시에 열리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는 하루에 1경기씩만 열렸다. 작년까지 없었던 네이버,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생중계도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배구 시청자층도 다양한 매체로 분산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TV 시청률은 프로야구처럼 하락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런데도 프로배구는 케이블TV 시청률이 더욱 상승하면서 '꿈의 1%' 시대가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7개 구단이 세계적인 외국인 선수와 초대형 국내 신인의 가세로 전력 평준화가 이뤄지면서 매 경기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놀라운 건, 만년 꼴찌 팀 한국전력의 인기다. 한국전력은 올 시즌도 변함없이 최하위를 기록 중이다. 그런데도 TV 시청률에선 대박을 치고 있다. 올 시즌 1%를 넘긴 게 벌써 4번이나 된다. 1위 삼성(9번), 2위 현대(6번)에 이어 가장 많은 횟수다. 1월 12일 한국전력-현대캐피탈 경기의 시청률은 1.26%를 기록했다. 리그 최고 빅매치인 삼성-현대전 시청률(1.31%)과 거의 대등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초대형 신인 전광인(24세·194cm·한국전력) 때문이다. 전광인은 현재 프로배구 역사상 신인의 기록들을 모두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다. 공격·서브·수비 전 부문에서 상위권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방송 중계진과 배구팬들은 그를 '한국산 용병'으로 부른다. 한국전력은 올 시즌 3-2 풀세트 접전을 가장 많이 치른 팀이다.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늘 막판에 한 끗 차이로 패하면서 '언더독'(Underdog·약자가 강자를 이겨주길 바라는 마음)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외국인 선수 비소토(32세·212cm·현 브라질 국가대표)까지 가세했다. 팬들의 관심도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프로야구, 여전히 최강자... 프로축구·농구 시청률은 '정체'

프로야구는 최근 3년 연속 케이블TV 평균 시청률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1% 시대'가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여전히 국내 최고의 스포츠 콘텐츠다. 프로야구는 하루에 그것도 동시에 4경기가 열린다. 어떤 면에선 4경기 시청률을 합치는 게 프로야구의 진짜 시청률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스마트폰 등을 통해 프로야구를 보는 시청자수도 타 종목보다 많다.

프로축구는 정규리그 경기가 방송 3사 스포츠전문 채널(KBSN Sports, MBC SPORTS+, SBS Sports)에서 생중계되는 횟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프로야구와 시즌이 겹치면서 더 외면당하고 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프로농구는 관중수나 기사 보도량은 늘고 있는데 반해 TV 시청률은 고전하고 있다. 프로농구연맹(KBL) 관계자는 24일 "관중수나 다른 부분들은 나아졌다. 그런데 TV 시청률은 작년과 거의 똑같다. 변동이 없다"고 말했다. 낮은 시청률의 원인에 대해 "TV 주 시청자층인 중장년 연령대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표적 농구 캐스터인 정우영 SBS Sports 아나운서는 최근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주 시청자층이 어리다는 점이 프로농구 시청률이 낮은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며 "농구대잔치 시절의 극성 농구팬과 프로농구 초창기의 올드팬을 모두 놓쳤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청률 하락의 근본 원인은 콘텐츠 자체"라며 수비 위주의 전술, 국내 빅맨의 부재, 확실한 빅매치 부재, 스타 만들기 실패 등을 이유로 들었다.

0.1% 차이에 시청자수 4만 명이 왔다갔다

시청률에서 고작 0.1%~0.5%가 무슨 차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시청자수로 추산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시청률 조사 전문기관(닐슨코리아, TNmS)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시청률 1%당 지상파는 대략 46~47만 명, 케이블TV는 36만 명의 시청자가 본 것으로 추산한다"고 한다.

따라서 케이블TV 시청률 0.1%의 차이는 시청자수로 따지면 3만6000명이 해당 프로그램이나 경기를 더 봤다는 걸 의미한다. 0.5% 차이면 무려 18만 명이 차이가 난다. 지상파(KBS1·KBS2·MBC·SBS)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 벌어진다. 방송사나 연예인, 광고주 등이 매일 발표되는 TV 시청률의 소수점 자리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에서는 인기의 지표로 크게 TV 시청률과 관중수를 중요하게 여긴다. 관중수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가 돈을 내고 관람한다는 측면에서 팬들의 충성도를 보여주는 지표라면, 시청률은 보다 광범위한 일반 대중의 인기도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의미가 있다.

다만 방송의 영향력과 파급력 등을 감안하면 TV 시청률이 보다 비중있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 TV 시청률이 높아야 해당 종목의 경기를 더 자주 중계하게 되고, 중계가 많으면 기존 팬을 유지하고 신규 팬을 확보할 가능성도 높아지면서 선순환하게 된다. 반대로 시청률이 낮으면 중계 자체가 줄어들고 대중의 관심도나 인기가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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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미니멀리즘 (minimalism)


요약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최소한도의, 최소의, 극미의’라는 minimal에 'ism'을 덧붙인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 등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미술이론가이기도 한 도널드 주드(Donald Judd)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합주곡처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박자에 반복과 조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도 소재와 구조를 단순화하면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으며, 루드비히 미스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리차드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니멀리즘은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식적인 디자인을 가능한 제거한 심플한 디자인이나 직선적인 실루엣의 선정적인 옷, 또는 최소한의 옷으로 훌륭한 옷차림을 연출하는 방법 등이 모두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미니멀리즘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만을 주장하는 금욕주의 철학, 복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흐름 등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뮤턴트(mutant. 돌연변이체 突然變異體)


요약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새로운 유전자형이 나타난 개체나 조직, 세포.


돌연변이체는 돌연변이(突然變異:mutation)가 일어나서 새로운 유전자형이 나타난 개체나 조직, 세포를 말한다. 이는 DNA의 구조에 변화가 발생하여 그 결과 유전자(遺傳子: gene)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혹은 DNA의 집합체인 염색체(染色體: chromosome)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유전적 요인의 변화로 인하여 외부로 나타나는 표현형(表現型: phenotype)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 돌연변이체라고 한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유전자를 복제하여 세포분열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으며 방사선이나 화학물질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해서 발생할 수도 있다. 돌연변이는 생물체에 유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돌연변이체 생물은 기존 생물에 비하여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세포생물의 조직이나 세포 차원에서 이러한 돌연변이체가 발생하면 이는 암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돌연변이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침묵돌연변이(silent mutation)였기 때문에 표현형으로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메타포어 (metaphor. 은유)


정보의 전달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개념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기법. 메타포어는 '은유'라는 뜻으로 사용자의 적절한 연상 작용을 유도하여 어떤 개념이나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메타포어는 사용자의 적절한 연상 작용을 유도하기 위하여 일관성 있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브나로드(Vnarod) 운동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귀족청년과 학생들에 의해 전개된 농촌운동


'브 나로드'(v narod)란 러시아 말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층은 미르(mir)라는 농민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농민의 계몽을 위해 이 운동을 벌였습니다.


1873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이듬해 여름까지 농민을 대상으로 급진적 혁명사상의 계몽과 선전을 벌이기 위해 2,0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면서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정작 농민들로부터는 별로 호응을 받지 못했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193인 재판'을 받으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운동은 농촌을 근간으로 한 사회주의적 급진사상의 시발점이었으며, 많은 혁명가가 이를 통해 양성되었고, 주변 여러 나라의 농촌계몽활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운동을 본떠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많은 학생들이 참여,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며, 1933년 계몽운동이라고 개칭하면서 폭넓게 지속되었으나 193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브나로드V narod 운동은 동아일보가 1931 - 1934까지 4회에 걸쳐 실시한 민중계몽운동입니다. 또한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한 활동이라면 같은 시기에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귀향학생 문자 보급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 농민의 농업생산성은 극도로 떨어졌고 1차대전 중에는 식량을 요구하는 일본인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황한 일본정부는 부족한 식량을 우리나라에서 징발해갔고 그 결과 일본으로 실어간 쌀이 1920년의 175만 섬에서 1728년에는 740만5천 섬으로 무려 4.2배나 증가합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는 식량이 모자라 하루 죽 한 끼도 먹기가 어려워졌고 이 땅에 건너 온 일본인들이 식량 뿐 아니라 토지를 수탈하여 농민은 빈사상태였습니다.


곳곳에서 농민의 저항이 일어났고 일제 경찰에 검거된 농민만 2만 명이 넘자 총독부는 농민에 대한 회유정책으로 '농촌진흥운동'을 벌입니다. 즉 조선 농민의 절대빈곤이 일본의 수탈 때문이 아니라 조선 농민이 무식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며 생활개량을 통해서만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에 협력적인 지식인들을 이 운동에 투입합니다.


여기에 호응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참여한 것이 조선일보의 귀향학생 문자보급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브나로드 운동이란 원래 러시아의 차르 체제 말기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러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제창된 구호로 그 뜻은 "민중 속으로"입니다. 그것을 동아일보가 차용한 것이죠.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의 핵심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조선민중의 불행이 근본적으로 식민지 지배체제 때문이 아니라 농민의 무지와 이를 계몽, 각성시킬 책임이 있는 지식인의 이기심, 나태함에 있으며 그러므로 학생 등 지식인(주로 친일적)이 농촌으로 들어가서 계몽해야 하고 농민은 그 계몽에 잘 따르라는 것이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물론 거기 참여한 학생 등 지식인이 그대로만 한 것은 아니고 민족의식을 깨우치는데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밀 (John Stuart Mill, 1806.5.20~1873.5.7)  


요약
영국의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과학자 ·사상가. 공리주의 사상가 존 밀의 아들. 초기에는 공리주의에 공명하였으나 후에 사상적으로 전환하여 종래의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대신하여 인간정신의 자유를 해설한 《자유론》을 저술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초기에는 공리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가, 후에는 사회주의 경향을 띄었으며 모든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옹호하는 철저한 민주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말년에는 영국 의회의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의원직을 물러난 뒤 집필활동을 계속하며 남프랑스 아비뇽의 자연속에 살면서 곤충학자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국적  영국
활동분야  사회과학
출생지  영국 런던
주요저서  《자유론 On Liberty》(1859)


런던 출생. 경제학자 J.밀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3세에 라틴어, 8세에 그리스어, 12세에 논리학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미 10대에 어엿한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아버지가 근무한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1823) 한편으로는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소년기에 읽은 J.벤담의 저서에 영향받고, 공리주의(功利主義)에 공명하여 공리주의협회의 설립에 참가하여 연구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26년 우울증에 걸린 것이 전기가 되어 감정을 경시하고 이성(理性)을 만능으로 보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칼라일, 워즈워스, 콜리지 등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5∼1868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사회개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표적인 경제학 저서에 《경제학 시론집(試論集)》(1830)과 《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48) 등이 있는데, 그는 A.스미스나 D.리카도 등의 영국 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경제공황이나 빈곤 등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도 고려하여, 종래의 고전파 이론의 재구성과 보완을 시도하였다. 즉, 자연적인 생산법칙에 의하여 발생한 사회적 곤란을 분배의 인위적 공정(公正)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에 의해서 회피하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반성으로서 저술한 《논리학체계 A System of Logic》(1843), 종래의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대신하여 인간정신의 자유를 해설한 《자유론 On Liberty》(1859), 정치상의 대의제(代議制)와 분권제(分權制)의 의의를 강조한 《대의정체론(代議政體論)》(1861) 등이 있고, 그 밖에 《공리주의 Utilitarianism》(1863) 《해밀턴 철학(哲學)의 검토 Examination of Sir William Hamilton’s Philosophy》(1863)등의 철학적 저서와, 영국의 여성해방사상 기념비적 문헌이 된 《여성의 종속 The Subjection of Women》(1869) 《자서전 Autobiography》(1873) 《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 Three Essays on Religion》(1874) 《사회주의론》(1879)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만년에는 점차 사회주의에 가까워져 갔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그 후의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개량주의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 사상>


1. 유년시절과 철학적 배경


어느 철학자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3살에 그리스어, 8살에 라틴어를 완전히 떼고

9살에 플라톤, 12살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끝냈다. 그리고 14살부터 아버지에게 경제학을

배웠다. 쉬는 시간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천재가 되었다. 그 천재의

이름은 바로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에게 소년시절은 없었다"며 쓰라린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통념과는 달리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속에서도 그의

심성은 결코 비뚤어지지 않았다. 그는 향후 가장 위대한 자유의 대변자, 여성권익의

옹호자, 사회개혁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존 스튜어트 밀이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중도개혁' 인사였다. 예를 들면 그는 누진세 도입에는 반대하면서도

상속세 도입에는 적극 찬성하는 일견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누진세를 열심히

일한 사람에 대한 벌금이라고 생각한 반면, 기회의 평등 및 노동의욕강화를 위해서는

상속세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누진세도 상속세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당시에 밀의 주장은 상당히 개혁적인 것이었다.


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레미 벤담의 이성중심적 공리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경구로 유명한 이론이다. 계몽주의의 연장

선상에 있는 공리주의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이성을 중시했다. 그러나

밀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벤담의 '양적(量的)'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독특한

감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질적(質的)' 공리주의를 제창했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것이었다.

돼지는 그저 사료가 충분하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아무리 군만두를 배터지게 먹었다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준다지만 감옥에 갇히거나 군대에 다시 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유의지와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창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 경제학적 성과


밀은 경제학에서 '자연법칙'의 영역을 제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변화가

가능함을 논증했다. 밀의 업적은 특히 분배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경제학자로서 밀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로서의 행복을 전혀 누릴 수 없는 '굶어죽는 소크라테스'가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른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당시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끔찍한 빈곤에 아예 눈길도

주지 않거나 한 숨만 쉬며 한탄할 때, 밀은 적절한 국가개입을 통한 구호를 설파했다.

영국 의회에서 '빈곤구제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밀은 빈곤층 중에서 장애인,

노약자, 아동에 대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밀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학문적으로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당시까지 고전파 경제학자들 대부분은 '임금생존비설'을 신봉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하거나 노조가 파업을 해보았자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질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부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빈곤구제법'이 빈민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폐지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기도 했다.(노동자들의 임금이 생존에

필요한 비용 이상으로 인상될 수 없다는 '임금생존비설'은 절대로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밀은 향후 50여년간 거의 모든 대학에서 경제원서로 쓰일 '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1847)에서 생산성 향상에 따른 분배개선 가능성을

논한다. 밀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부의 분배는 사회의 법률과 관습에 달려 있다. 분배를 결정하는 법률은 공동체 내 다수

성원들의 의견과 정서에 따라 만들어지며, 시대와 나라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밀에 의해 분배의 문제는, 홍수나 태풍처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능동적 '선택'의 문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제 국가가 분배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밀은 기본적으로

'임금생존비설'에서 분화한 '임금기금설'(전 사회의 임금총액은 고정된 '임금기금'에서

지급된다는 학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활동을 통한 개혁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임금은 자본과 인구의 상대적인 양에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경쟁이 득세하는 상황

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임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임금은 노동자의 고용에 사용되는

기금 총액이 증가하거나 취업 경쟁자 수가 감소될 때만 오를 수 있다"


밀이 '임금기금설'을 전면적으로 폐기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의 일이다.

그는 그 결과가 장기적으로 옳든 그르든,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명망있는 학자로서 이렇게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고백한 이도 드물 것이다.


"지금까지 전부 또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가르친 학설, 즉 노동조합이 임금을

인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인정하더라도 노동조합 활동의 영향력은 그런

활동이 없었다 하더라도 시장의 경쟁 때문에 일어났을 약간의 초기적인 임금 상승을

달성하는 것에 국한된다는 학설은 과학적 근거를 잃었으므로 버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밀은 리카도와 맬서스에 의해 '음울한 학문'이란 별명이 붙은 경제학에

개혁의 희망을 불어 넣었다. 비록 그가 전적으로 자유시장을 부정하거나 분배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이제 점진적 사회주의의

정신적 토양이 되기에 이른다. 지금 우리에게는 밀이 지극히 당연한 주장만을 펼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밀의 학설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찜통더위에

불어오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3. 자유주의 사상


존 스튜어트 밀은 대표적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아담 스미스에서

하이에크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경제학 전통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중시한 '자유'란 어떤 것일까? 대표적인 저서 '자유론'(On Liberty)

에서 밀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이와 똑같은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

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밀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이 항상 옳다는 판단과 책임감 아래 다른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전파할지도 모른다고 노심초사하는 이들"에게도 친절한 한마디를

아끼지 않았다.


"온갖 논박을 거쳤지만 허점이 발견되지 않은 어떤 생각을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과, 아예

그런 논박의 기회를 봉쇄하기 위해 그것을 진리로 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이 마음놓고 믿는 것일수록 온 세상 앞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단단해지는 것이다...그런데도 어떤 특정원리나 교리는 진리임이 분명하므로,

다시말해 그것이 진리라고 자신들이 확신하니까 질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어떤 명제에 대해 토론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렇지 허용되기만 하면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의 진리 여부를 판가름하는

심판이기 때문에 여타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편 밀은 자본주의와 민주적 정치제도 발전의 이면에 인간의 개성상실에 대한 위협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밀은 인간의 개성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자

독창성과 열정, 패기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발전의 '에너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개성'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에서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적대적인 시선과 가공할만한 검열의 위협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자기 성격과 취향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타고난 최고-최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최대한 키울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재미삼아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먼저 살피고서 따라하고, 군중 속에 묻혀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선택도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 가운데서 고르는데 국한된다. 독특한 취미나 유별난 행동은 범죄처럼

기피 대상이 된다"


밀은 기본적으로 자유시장을 옹호했지만, 말년에는 점차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경쟁없는 사회라는 이상은 거부

했다. 경쟁없는 사회는 결국 독점으로 이어지고, 독점 상태에서는 인간의 개성이 꽃 필

수 없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었다. 밀은 자본주의의 가능성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성장할수록 문제 해결능력 또한 발전할 것이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밀을 '자유 사회주의자'(liberal socialist)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여전히 음미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자본과 부의 정체상태가 끔찍한 상태라는 고전학파의 주장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상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이 인간의 정상적 상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서로를 짓밟고

압박하고 밀어내고 유린하는 현재의 세태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상태일 뿐, 산업발달

과도기의 부작용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4. 여성해방에 대한 지지


경제학자들 가운데 존 스튜어트 밀만큼 '자유연애'를 몸소 실천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밀은 유부녀였던 해리엇 테일러와의 18년 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그녀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밀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그녀는 심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밀에게 지대한 도움을 주게 된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밀은 여성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죽기 4년전인 1869년에 집필한

'여성의 종속'이라는 책에서 밀은 남성들의 여성차별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인류의 절반에게 족쇄를 채우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처음부터 차단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해도 과연 우리는 잃는 것이 전혀 없을까?

...그런 불의는 당사자인 여성에게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능력을

발휘했을 때 혜택을 받을수도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피해를 입는 셈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은 의사나 변호사, 의회 의원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은

그들에게만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의사나 변호사를 고용하고 그런 의원을

선출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개인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졌을 뿐 아니라 상호 경쟁을

통해 경쟁자들의 보다 큰 능력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전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밀은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줄 것을 주장했다. 차티스트 운동조차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1928년에야 비로소 영국에 여성 참정권이 도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당시에 밀이 공개적으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 맺으며


여태까지 밀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밀은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오류의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식민지배를 옹호했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2표 이상 복수 투표권을 주자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며, 여성의 동정심을 비난하면서 "나쁜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자원과 선의를

낭비하는데는 여성의 책임이 아주 크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밀이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빛나는 통찰력과 함께

일관된 소신과 품위를 겸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밀은 언젠가 "영국 노동자들은 거짓말

쟁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의 노동자들보다는 낫다. 적어도 죄의식은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참석한 노동자들의 집회

에서 상대편이 그것을 문제삼았다.  밀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누군가 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즉시 '그렇게 말했습

니다'(I did)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우뢰같은 박수갈채가

집회장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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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  


요약
독일의 경제학자·정치학자. 헤겔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엥겔스와 경제학 연구를 하며 집필한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을 정립하였으며《공산당선언》을 발표하여 각 국의 혁명에 불을 지폈다. 《경제학비판》, 《자본론》등의 저서를 남겼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사회과학
출생지  독일 라인주(州) 트리어
주요저서  자본론《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http://www.cjycjy.org/bbs/view.php?id=anybody&page=8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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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네덜란드 태극듀오', 내긴침에 결승전 가자
[스포츠] 아인트호벤, 승부차기 신승 리옹 물리쳐, AC 밀란과 결승다퉈
 
김영국
네덜란드 태극듀오, 'Again 2002' 신화 재연

유럽축구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네델란드 태극듀오' 박지성, 이영표가 맹활약한 PSV 에인트호벤이 난적 프랑스 리옹을 맞아 승부차기 끝에 신승, 꿈의 4강 무대를 밟게 됐다.

에인트호벤은 14일 새벽 3시 35분(이하 한국시간) 홈구장인 필립스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사투끝에 1-1로 비긴뒤 승부차기에서 4대2로 극적인 승리를 낚았다.

에인트호벤은 전반 10분 프랑스 대표팀 출신의 공격수 윌토르에게 뼈아픈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5분 알렉스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면서1-1로 비겨 연장전에 돌입했다.

피말리는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한 에인트호벤은 승부차기에서 브라질 출신 골키퍼 고메즈가 두 번이나 상대 키커의 슛을 막아내면서 결국 4-2로 승리했다.

이영표와 박지성은 이날 경기에서 선발 출장,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전후반 연장 12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사력을 다한 끝에 팀 승리에 공헌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어 다시 한번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4강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두 선수는 영국의 '스카이스포츠'로부터 이날 출전선수중 활약도에서 팀내 최고의 평점을 받을 정도로 에인트호벤 승리의 1등 공신이 됐다.

에인트호벤의 히딩크 감독은 승리가 확정된 순간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특유의 '어퍼컷'을 날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특히 이날 에인트호벤의 승리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이 8강전에서 스페인과 피말리는 승부차기 끝에 4강에 진출한 것과 닮은꼴을 연출하면서 'Again 2002'의 의미를 더했다.

이로서 에인트호벤은 오는 27일 새벽 먼저 4강에 오른 이탈이라 명문 AC밀란과 결승 진출을 놓고 이탈리아 원정 1차전을 치른다. 홈앤드어웨이로 벌어지는 4강 2차전은 5월 4일 에인트호벤 홈구장에서 벌어진다.

한편 같은 시간에 벌어진 잉글랜드의 리버풀과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와의 8강 2차전에서는 득점없이 0-0으로 비겼으나 리버풀이 1차전 승리로 인해 4강에 진출했다. 리버풀은 같은 잉글랜드 소속인 첼시와 결승진출을 위한 4강전을 벌인다.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 한국선수론 사상 처음, 아시아선 3번째

이날 에인트호벤의 4강 진출로 박지성과 이영표는 한국 축구선수로는 사상 처음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준결승)에 오른 선수가 됐으며 아시아 선수로는 3번째다.

아시아 선수로는 일본의 오쿠데라가 지난 77년 FC쾰른 소속으로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 전신) 준결승까지 뛴 적이 있고, 지난 98~99시즌에는 이란축구의 전설 알리 다에이가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준결승에 교체출전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자랑 오쿠데라는 현 챔피언스리그의 '32강 조별예선-16강 토너먼트'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인 77~78시즌에 활약했다는 점에서 명성과 권위가 떨어지고, 또 다에이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주로 교체요원으로 뛰었다는 점에서 박지성, 이영표 등과 비교된다.

준결승에서 AC밀란마저 꺽고 결승에 진출한다면 그야말로 아시아 선수중 새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특히 에인트호벤에서 맹활약한 선수중에 잉글랜드 등 빅리그로 진출한 전례가 많아 두 선수도 이번 4강 진입으로 유럽무대에서 명성과 함께 빅리그 진출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4강 맞상대 'AC밀란'은 어떤 팀?

에인트호벤과 결승 진출을 놓고 4강전을 벌이게될 AC밀란은 챔피언스리그 통산 6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명문클럽이다. 세리에A 우승횟수는 유벤투스에 뒤지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9회 우승의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클럽대항전에서 강한 면모를 과시해 왔다.

더군다나 에인트호벤은 AC밀란과의 역대전적에서도 2패로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현재 이탈리아 리그(세리에A) 1위를 달리고 있는 AC 밀란은 선수 면면도 브라질과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톱스타들로 구성돼있다.

공격가담이 뛰어난 수비요원 카푸와 판카로, 말디니, 네스타 등이 포진한 '빗장 수비'는 AC밀란의 자랑이다. 간판공격수 세브첸코가 여전히 건재하고 크레스포가 컨디션을 회복 안첼로티 감독의 고심을 덜어주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에인트호벤의 오른쪽 공격을 전담하고 있는 박지성은 AC밀란의 왼쪽 수비요원 말디니(판카로 또는 칼라제)와 1:1 대결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PSV의 왼쪽 수비수 이영표는 세브첸코, 가투소, 카푸의 날카로운 예봉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박지성 이영표 태극듀오가 '세마리 사자가 사는 굴'(라 포싸 데 레오니-La Fossa dei Leoni)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 지 관심이 모아진다.

유럽축구 꿈의 무대에서 4강 진출로 성공시대를 활짝 열어가고 있는 태극듀오가 내친김에 2002년 월드컵에서 못다 이룬 결승 진출까지 일궈내 초대형 사고(?)를 칠 수 있을 지,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히딩크 감독의 어퍼컷은 어디까지 이어질 지 국내 축구팬들은 벌써부터 오는 27일 AC밀란과의 준결승 1차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2005/04/14 [10: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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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