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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진보당 학살은 헌정사상 대사건
<조봉암의 진보당>은 오늘의 양극화 사회를 막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
 
김영국
조선일보·경향·민노당 한목소리, '조봉암 명예회복 서둘러라'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조선일보 2007.9.29일자 사설 '조봉암(曺奉岩)'의 결론)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경향신문 2007.9.29일자 사설)

"1959년 조봉암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 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민주노동당 2007.9.28일자 대변인 논평)

한 '진보 정치인'의 명예회복을 놓고 반공·보수의 아성인 조선일보와 진보·개혁신문의 대표 주자인 경향신문, 그리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좌우합작'하여 한목소리로 고무·찬양하는 경사스런(?) 일이 오늘(29일) 벌어졌다.

"조선일보가 왠 일로...", "도대체 우리 역사 속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무엇이길래..." 모처럼 벌어진 스스러운 광경에 뜨악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죽산(竹山) 조봉암과 진보당은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통일 방안으로는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여 무려 216만여 표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반공보수·독재자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한 명실상부한 '진보적 정치세력'이었다.

특히 조봉암의 216만여 표는 당시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조봉암의 좌파 성향을 문제 삼아 야권 연합 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는 등 비열한 정치행보를 보임으로써 무려 185만여 표에 이르는 무효표가 발생한 가운데 거둔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컷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은 대선 결과에 위기 의식을 느낀 독재자 이승만으로부터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쓴 채 처형되고 진보당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에 대해 지난 9월 27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과와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조봉암 진보당>의 타살 그 후 '비정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고려 후기 묘청의 서경 천도 좌절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자주파와 김부식의 사대파와의 싸움에서 김부식 파의 승리와 묘청의 좌절을 두고 '한국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했다. 즉, 단재는 사대파의 승리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단재의 이 비판은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판정에 앉아 있는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맨 앞이 이승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     © 민주화운동기념자료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한 사법살인 이후 한국 사회는 친미사대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에 주류를 차지했고, 야당 또한 개량적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돼왔다. 그 결과 오늘날 약육강식의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민중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진보당 타살 이후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사 또한 일제-친일파, 미제국주의-친미파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탄압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찾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2007년 오늘도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 보수 독점 체제라는 또 다른 거센 도전을 만나 진보좌파의 가치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고, 진보 운동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가히 조봉암 진보당의 학살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일대 사건이요, 현대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이자 가장 유력했던 '진보정당'이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반공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대사건이었다.

<조봉암 진보당>의 가치와 대안들, '2007년에 살아 숨쉬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마저 '은사죽음'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에 내세웠던 '진보좌파'적 기치(旗幟)와 대안들이 마치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오늘의 서민대중들을 구하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과도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5년 12월 22일 발표한 창당 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을 살펴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확연해진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하고, <강령>으로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 등을 내세웠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진보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조봉암의 진보당 노선이 중증 상태인 2007년의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볼수록 오늘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대안을 미리 마련코자 한 '선각자의 예지(銳智)'마저 느껴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 당시처럼 야당의 주도세력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정글 법칙'만이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비정한 사회'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 조봉암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신문인 <대자보>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진보·개혁 정당이 이 땅에 견실(堅實)하게 자라나 서민대중들이 극심한 양극화의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아래는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정문 전문'이다. / 편집위원

◆ ‘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끝)



☞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 전문'(진실화해위원회, 2007.9.27) 바로가기

☞ [조봉암 생전의 모습과 장녀 조호정 씨 인터뷰 동영상] "국가가 사과하라"…죽산 조봉암 선생은 누구(SBS, 2007.9.27)

☞ [조선일보 사설] 조봉암(曺奉岩)(조선일보, 2007.9.29일자)

☞ [경향신문 사설] ‘조봉암 신원(伸寃)’과 사법부(경향신문, 2007.9.29일자)

☞ [민주노동당 논평]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민주노동당.뉴스와이어.파란, 2007.9.28)

☞ 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한겨레신문, 2007.9.28)

* 글쓴이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9/29 [22:48]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9.29)
:
Posted by 엥란트

[사설] 조봉암(曺奉岩)

[조선일보] 입력 : 2007.09.28 22:56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27일 ‘국가 變亂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만들고 북한 간첩 노릇을 한 혐의’로 1959년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과 그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와 함께 일제시대 장기간 복역하고도 사형 판결 때문에 독립유공자에서 빠져 있는 조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도록 권고했다.

조봉암(1898~1959)은 20세기 초·중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지만 해방이 되자 1946년 공산당과 결별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연이어 출마해 이승만 대통령의 政敵정적이 됐다. 특히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유세 중 별세한 1956년엔 216만 표를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1958년 1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전격 체포되고 이듬해 7월 조봉암은 사형됐다.

조봉암의 사형은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다. 1심에서 국가 변란과 간첩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5년이 선고됐는데 석 달 뒤 2심에서 갑자기 혐의가 모두 인정되고 사형이 선고됐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 조봉암이 청구한 再審재심이 기각된 바로 이튿날 서둘러 사형이 집행됐다.

그가 받은 혐의는 진보당의 ‘평화 통일’ 綱領강령이 국가 변란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이런 강령들이 당시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간첩 혐의도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의 불법감금 상태에서 북한의 자금과 지령을 전달했다는 對北대북 공작요원의 진술에만 의존했던 점을 들어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법률적 사실 판단을 벗어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논리에 의해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轉向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刑場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9/28/20070928011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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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조봉암 신원(伸寃)’ 과 사법부

[경향신문] 입력: 2007년 09월 28일 18:05:4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죽산 조봉암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이승만 전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가 당시 정권측이 조작한 ‘진보당 간첩사건’으로 1959년 사형당한 죽산이 48년만에 국가기관에 의해 원통함을 풀게 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진보당 사건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면서 “국가는 유족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죽산 신원(伸寃)’을 계기로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공안사건들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진실화해위의 이번 결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뼈저린 성찰을 해야 할 곳은 바로 사법부가 아닌가 한다. 비록 독재정권 치하였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사법부는 확실한 증거없이 죽산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렸고, 공안사건에서의 이같은 기계적 판결은 그 이후 군사정권 내내 계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사법부는 정권의 명령에 따른 ‘거수기 판결’ 따위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를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기고문, 강연회 따위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는 등 비상식적인 판결을 내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요구에 부응했다면 지금은 자본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사법부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취임 두 돌을 맞았다. 이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국민의 신뢰없이 사법부는 존속할 수 없다”고 천명한 바 있다. 사법부는 자신이 국민적 신뢰에 의해 존속하고 있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281805441&code=9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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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논평-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2007년 09월 28일 (금) 12:07   뉴스와이어

(서울=뉴스와이어)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아울러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1959년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진실을 진실로 밝히지 못한 후배들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한번 내려진 판결은 뒤집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안이한 역사의식을 탓해야 할까.

그러나 실상은 진보진영의 등장을 막기 위한 보수·수구세력의 암묵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국가 기관이 밝힌데 대한 기쁨을 감출 수 없지만, 더 나아가 48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왔던 진보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여전히 염원한다.

또한 우리의 염원은 어느 누군가의 결정과 판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수고로움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도 다시한번 되새긴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

2007. 9. 28. 민주노동당 대변인 김형탁

보도자료 통신사 뉴스와이어(www.newswire.co.kr) 배포
보도자료 출처:민주노동당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053321&year=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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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국가 사과·재심 권고도 

[한겨레신문] 이순혁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가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 결과를 의결했다고 27일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고 이 과정에서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가 이뤄져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 판결까지 이어졌다”며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며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 침탈 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인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사형 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은 조봉암이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표를 얻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진보당을 창당해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육군 특무대와 서울시경이 수사에 나서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기소해 사형이 선고·집행된 사건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기사등록 : 2007-09-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389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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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

[한겨레신문 2007-09-28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조봉암 사건’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80)씨는 28일 “결정문을 받는 대로 변호사와 상의해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조씨가 재심을 청구하면 조봉암 사건은 50여년 만에 다시 한 번 재심 청구 대상이 된다. 조봉암은 처형되기 전인 1959년 재심을 청구했으나 대법원은 그해 7월30일 이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이 지나 홍진기 법무장관의 확인 서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조봉암 사건’ 수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판·검사 가운데 1심 배석판사였던 이병용(81) 변호사와 2심 배석판사 조규대(83) 변호사는 모두 진실화해위 조사에 응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 부장판사는 조봉암 선생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고, 국가보안법의 통신·회합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로 그는 ‘용공판사’로 몰렸고, 그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유 판사는 4·19혁명 뒤 한 신문과 했던 인터뷰에서 “5년 형량을 선고한 자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1966년 53살의 나이로 숨졌다.

당시 유 판사로부터 서구 혁신정당의 강령과 진보당의 강령을 비교해 달라는 지시를 받았던 이병용 변호사는 진보당이 서구 우파정당보다도 온건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변호사는 진실화해위에서도 “2심과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고 증언했다. 이후 대한변협회장(1983년)과 국회의원(13대)을 지낸 그는 조봉암 선생의 제사에도 참석해 유족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2심 때 배석으로 참여해 유죄 판결을 내렸던 조규대 변호사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당시 2심 판결은 옳았다”는 취지로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변호사는 28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도 진실화해위 결정에 대해 묻자 “노코멘트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2심 재판장이었던 김용진 부장판사는 전주지방법원장(1960년)과 단국대 대학원장(1966년)을 지냈고, 대법원 주심을 맡았던 김세완 대법관은 국민대학 이사장(1960년)과 성곡재단 이사장(1967년)을 역임했다. 1·2심 재판 때 공소 유지를 담당한 조인구 검사는 내무부 치안국장(1960년)도 지냈지만 4·19 혁명 이후 구속되기도 했다. 대법원 재판 때 공소 유지는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검사가 맡았다.

고제규 기자 unju@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391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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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9월 27일 발표한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전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의 '진보정당'이 반공주의자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조봉암 등 주요인물이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 쓴 채 처형·체포·불법감금 등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음으로써, 이 땅의 진보가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사건입니다. 돌이켜볼수록 우리 헌정사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자 반공주의자에 의해 진보의 싹이 무참하게 짓밟힌 대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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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붙임 :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 요지 1부.  끝.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끝)

ㅁ 원문 출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read.asp?num=74&pageno=1&stype=&sval=&data_years=2007&data_month=

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download.asp?filename=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보도자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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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임종인 변호사 (법무법인 해마루, 전 국회의원)
격월간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2009년 1~2월호


미네르바

결국 권력은 ‘공익을 크게 해쳤다’는 죄목으로 미네르바를 인신 구속했다. 그가 해쳤다는 공익은 과연 무엇일까? 인터넷게시판에 쓴 그의 글 하나가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국가신인도가 과연 법이 보호해야 할 공익에 속하는 것인지도 의문스럽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과연 얼마만큼 떨어졌으며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입은 공익의 손상은 어느 정도인지 온전히 죄질을 측량하고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가 더 큰 의문이다.

온(on)세상의 사람들이 미네르바에게 보낸 열광의 이면에는 마치 국가의 존재 이유가 기득권의 탐욕 실현이라도 되는 양 시대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중구난방의 대책을 쏟아내는 벌거벗은 권력을 향한 야유가 또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그의 구속과 더불어 그 야유의 대상과 범위는 더욱 확장됐다. 무엇보다도 법 그 자체가 권위의 실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분명 세상은 ‘막걸리 반공법’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일찍이 루소는 “자유로운 시민은 오직 법에만 복종하며 타인에 의한 지배를 강제당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법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법의 지배’가 정당한 것으로 승인되는 이유는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하는 그 무슨 영물이라서가 아니라, 루소의 말처럼 부당한 권력의 행사나 강제적인 지배로부터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개념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두드러진 현상은 이 같은 ‘법의 지배’의 의미가 법의 ‘자의적 동원에 의한’ 지배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 집행의 정당성 여부는 그것이 ‘누군가를 규율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들을 억압하려는 것’인지에 달려 있다.

또한 공익이란 다짜고짜 무조건 전체의 이익이나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매 맞는 아내나 상습적으로 돈을 떼이는 하청업체처럼 누군가의 부당한 권력 행사나 강제적인 지배로 인해 침해당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얻게 되는 이익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미네르바를 옥에 가둔 법은 과연 시민의 소중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의 보루로써 작동된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심기보존을 위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인가? 과연 미네르바로 인해 부당하게 침해당한 선량한 시민들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혹여 누군가의 부당한 권력 행사로 인해 미네르바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자신의 이익을 억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구치소에 갇힌 미네르바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머리는 비었으나 힘은 철철 넘치는 이 권력이 ‘지배자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고 침묵하라’는 명령과 함께 지금 옥에 가둔 것은 법의 이름으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선량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이기 때문이다.

민변 창립 21주년을 맞는 해에 이처럼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에 관해 다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프지만,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민주사회인가 아닌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항의하여 삼보일배를 하는 임종인 변호사와 강기갑 의원(왼쪽) ⓒ 뉴시스


입법 전쟁

언술 그 자체에서 권력의 왜곡된 상황 인식이 그대로 베어 나온다. 그들에게 입법이란 민주주의의 중요한 작동 과정이 아니라 타격해야 할 군사적 전략목표이며 반대당은 곧 적이다. 전쟁의 와중에 여권 인사들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온 얘기가 ‘민주주의의 원리는 다수결’이라는 말인데 그 의미구조는 ‘다수당인 자신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며 ‘복종을 거부하면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에 앞서 우선 잘못된 개념부터 바로잡자. 첫째, 민주주의의 원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다수의 지배’다. 다수결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사결정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둘째, 다수의 지배는 ‘원내 다수당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다수는 ‘국민들 가운데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원내 다수당’은 다음 선거까지 불변일지 몰라도 ‘국민들 가운데 다수’는 개별사안별로 계속 그 구성이 변한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에도 민주주의의 과정은 중단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참여다. 민주공화국 자체가 신분제의 구질서를 철폐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배할 뿐 그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 ‘시민’으로 거듭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participation)해서 함께 세운 나라다.

이때 참여란 무엇인가? 대표자 선출과 입법을 포함한 모든 공적 사안들에 관한 합리적 토의와 결정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참여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과정이며 따라서 참여가 배제되는 순간 나라의 이름을 뭐라 붙이든 간에 그 나라는 귀족국가나 왕조국가, 혹은 전체주의 국가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중요한 것은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므로 상대적 소수나 약자라 할지라도 배제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다수파의 의견이 전체의 의견인 양 일방적으로 관철되고 소수파의 입장이 일상적으로 억압된다면 그것은 다수의 횡포이며 그 자체로 구조적 폭력이다.

원내 다수당은 총선을 통해서 국정운영을 주도하라는 총론적인 위임을 받은 것이지 모든 개별정책의 각론에 대한 백지위임장을 들고 민주주의의 과정마저 생략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충분한 사회적 토론이나 원내 합의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수결이니 무조건 복종하라’며 그 무슨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는 것은 바로 독재의 논리이며 반대당의 극한투쟁은 그 당연한 반작용이 된다.

지난 1월 12일 이명박 대통령은 새해 첫 라디오 연설에서 ‘해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때렸다’며 연말 임시국회에서 벌어진 폭력사태를 개탄했다. 또한 ‘분열을 조장하고 통합을 가로막는 정치적 양극화야말로 극복해야 할 과제’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은 바로 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때린 것은 해머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과정을 무시하고 입법전쟁을 선포한 다수당의 오만이며, 지금  ‘분열을 조장하고 통합을 가로막는’ 것은 국회의 권위와 야당의 존재를 무시한 채 무조건 밀어붙이라고 ‘속도전’을 주문하는 대통령 자신이다.

민변 창립 21주년을 맞는 해에 이처럼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에 관해 다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프지만,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민주사회인가 아닌가?


북유럽 탐방 도중 만난 유학생들과 함께 ⓒ 임종인


촛불과 촛불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을 모아 밝혀들었던 2004년 봄의 촛불은 불과 4년 뒤인 2008년 봄 배반의 시대를 향한 절망의 촛불로 바뀌었다. 그리고 촛불로 시작해서 촛불로 끝난 17대 국회.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지난 해 촛불시위의 현장에서 삼보일배를 했던 것은 속죄의 의미였다. 무릎에 심각한 무리가 올 수 있다며 의사가 중단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래서 도중에 멈출 수 없었다. 노무현 정부 5년의 좌절과 실패는 결국 민주개혁세력의 몰락과 수구보수세력의 재집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끊임없이 거꾸로, 거꾸로 가는 것이 그들이 보인 행태의 전부였다.

강기갑 의원과 함께 청와대까지 가는 동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던 것은 ‘나는 진짜 최선을 다했는가? 이 비극적인 사태에 나의 책임은 없는가?’였다.

물론 나는 열심히 노무현 대통령에게 반대했다. 국가보안법, 이라크파병, 대연정, 대추리 사태, 한미FTA, 비정규직 법안 등등. ‘그러려면 차라리 당을 나가라’는 모욕을 받아가며 그때마다 반대하고 또 반대했다. 그 일들은 모두 2002년 대선과 17대 총선 민의에 정반대되는 정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는 열심히 했지만 결국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막지 못했으니 반대했다고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열린우리당은 잘못을 고치는 대신 통합논의에 매달렸다.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 길은 한나라당 집권을 돕는 길이었다. 성난 민심 앞에서 잘못을 고칠 생각은 안하고 정권을 못 넘겨준다고 손에 쥐고 버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해 연말 당은 공개적으로 정계개편을 선언했다. 그것으로 백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약속마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고심 끝에 통합신당에 동참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2007년 1월 22일 당을 ‘가장 먼저’ 탈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뺀 열린우리당 의원 전원과 한나라당의 손학규씨가 합류해서 만든 대통합신당은 대선에서 대참패를 했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합신당은 민주당과 통합하며 당명을 다시 통합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입당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가 많았지만 나는 역시 그 당에 갈 수 없었다. 이름을 바꾼다고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낙선했다. 그러나 다시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진짜 최선을 다했는가? 이 비극적인 사태에 나의 책임은 없는가?’ 반대하고 낙선했다고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촛불로 시작해서 촛불로 끝난 17대 국회. 그 안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어느 여름날을 지나며 촛불시위는 잦아들었고 그 사이 17대 국회 임기도 끝났다. 의원 생활 동안 나는 국방위원회와 법사위원회 소속이었는데, 그러나 나의 또 다른 관심은 경제와 복지였고 틈틈이 관련 공부를 하면서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해마루에서 변호사 업무를 재개하는 것으로 진로를 정하고 나니 중간에 남는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은지 정하는 일이 나머지 과제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자유시간이 다시 쉽게 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여정은 아니지만 핀란드는 교육, 스웨덴은 노사관계식으로 국가별로 이슈를 정해서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그동안 궁금했던 사안들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하면 나름대로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은 8월20일부터 9월19일까지 한 달 동안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일랜드 등 북유럽 5개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복지에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복지국가모델을 탐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인상 깊었던 몇 가지만 소개하면 스웨덴(900만)을 제외하고 모두 인구 500만에 불과한 작은 그 나라들은 추운 기후와 척박한 땅을 가졌지만 매년 국가경쟁력 1,2,3위를 다투는 강국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그들 특유의 사회모델이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경우 같은 일을 한다면 어느 직장에 다니건 같은 임금을 받게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준다. 비정규직 비율은 10%밖에 되지 않으며 반면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80%에 이른다.

만약 한국적 상식에 따른다면 이런 조건에 놓인 스웨덴 경제는 노사분규로 인한 고비용저효율로 인해 진작 망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해도 후발국가였던 스웨덴은 볼보(자동차), 에릭슨(통신), 일렉트로스(가전), 이케아(가구)같은 세계 일류기업을 보유한 경제 강국이 되어있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근로자이고, 근로자 대우를 잘해줘야 기업도 산다’는 사회적 합의와 더불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제도의 정착과 소득의 편중 없이 보통사람들도 고루 잘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정부가 교육비와 의료비를 거의 무료로 해주고, 연금과 주거를 보장하며 정리해고 된 실업자들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보살피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될 총비용은 줄어든다. 그 대신 기업은 불필요한 일에 노동력이 낭비되지 않게 하고, 연구개발과 경역혁신으로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의 비율을 높여 인건비를 줄이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쥐어짜 원가절감을 한다. 이렇게 떠넘겨진 사회적 비용을 짊어진 중소기업과 근로자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생산성과 효율이 급강하하며 사회적 갈등이 구조화되는 악순환 구조를 이룬다.

여행을 하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똑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인데 어떻게 해서 저들과 우리는 이토록 다른가?'하는 의문이었다. 빛나는 문화유산과 높은 교육 수준 그리고 세계 11~13위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가진 우리나라는 저들과 비교할 때 결코 약소국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진 역량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론은 결국 정치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대학을 나와 평생 열심히 일 해도 집 한 채 가질까 말까인 나라의 국민에게 세계수준의 경쟁력과 근로의욕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열심히 일하는 보통사람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사회적 합의 없이 복지사회는 요원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나마 이루어놓았던 민주화시대의 성과마저 갉아먹으며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거꾸로 후진화를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정치를 다시 바꿀 수 있는가?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ㅁ 출처 : 임종인 블로그 ==> http://blog.daum.net/demokra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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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인 "북유럽,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보다 높다"
"농업과 제조업 포기 절대 안돼, 대한민국은 약소국이 아니다" 강조
 
취재부
효율성 명목 비정규직 늘리려는 기업, '살길 아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모델'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5개국을 탐방 중인 임종인 전 의원이 어제(18일)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 교육, 의료 분야에 이어 세번째로 '노사정 관계'를 소개했다.

임 전 의원은 "북유럽은 '사람 값을 비싸게 치는 사회'였다."면서 "특히 비정규직이 10%밖에 안되고, 오히려 비정규직에게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준다."고 전했다. 그 이유는 비정규직은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

또한 "북유럽 국가들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줘야 된다'는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비정규직은 계속적으로 근무하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따름이지 직종 간 차이나 임금의 차이는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향에 대해 "매우 염려된다."고 토로했다.

임 전 의원은 이들 복지국가들에 있어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했다며 "정부가 교육비와 의료비를 거의 무료로 해주고, 연금과 주거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될 비용을 줄여주었고, 실업보험을 80% 정도로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가 되어도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죽을 각오로 해고에 반대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직업 교육을 시켜서 재취업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같은 정부 비용은 30~50%에 이르는 높은 세금으로 해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국민들의 조세 저항 등 반발이 거세지 않는 것은 세금을 낸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보는 '보편적 복지' 시스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 전 의원은 북유럽 국가들에게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점으로 ▲이웃 국가들과 통합적 관계 강화 ▲정책적 독자성 유지 ▲농업과 제조업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아니며 자신감을 갖고 서로 위하고 살 것 등을 꼽았다.

임종인 오늘 귀국, 대안 제시할 터

한편 임 전 의원은 오늘(19일) 한달간의 북유럽 탐방을 마치고 귀국했다. 임 전 의원은 그동안의 북유럽 복지국가 조사·연구 결과를 토대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과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쓸 계획이다.

다음은 어제 임종인 전 의원의 <북유럽 리포트> 인터뷰 전문이다.

김미화 : 지금까지 임종인의 북유럽 리포트, 두 차례에 걸쳐서 북유럽의 선진 제도를 탐방하고 있는 임종인 전 의원을 연결해보고 있죠. 오늘은 북유럽의 교육, 의료 분야에 이어서 북유럽의 노사 관계는 어떤지 들어보는 시간 마련해 보았습니다. 임 전 의원 님 안녕하세요.

임종인 : 네 안녕하십니까. 임종인입니다.

김미화 : 네.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임종인 : 네. 다 나았습니다. 내일(19일)이면 서울에 도착합니다.

김미화 : 아유 그러시군요. 북유럽이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노사 간에 원활한 대화하고 합의 이게 아주 주요 요인인 것 같던데 직접 보시기에 어떻든가요?

임종인 : 네. 그렇습니다. 여기는 '사람 값을 비싸게 치는 사회'드라고요. 여기도 1930년대까지는 매우 어려워서 미국으로 이민도 많이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노사 간의 서로 타협과 협의를 통해서 좋은 산업을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스웨덴을 보면은 자동차의 경우 볼보, 통신의 에릭슨, 가전의 일렉트로스, 가구의 이케아 이런 것들을 발전시켰죠.

김미화 : 네. 북유럽에서도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있을 거잖아요.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 뭐 사회적 문제 이런 것은 없나요.

임종인 : 여기도 조금은 있습니다만, 우리 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는 우선 비정규직이 10%밖에 안됩니다. 우리나라는 60%에 육박해 있죠. 그리고 오히려 비정규직을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줍니다. 왜냐하면 고용이 불안정하니까요. 그 다음에 1년 있으면 자동으로 정규직으로 되고 있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줘야 된다'는 정신에 바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화 : 정규직,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일할 때 어떤 차이 같은 게 있나요?

임종인 :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비정규직은 계속적으로 근무하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따름이지 직종 간의 차이랄지, 임금 차이랄지 이런 건 없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임금은 오히려 더 주는...

김미화 : (비정규직에) 왜 더 주죠?

임종인 : 고용이 불안하니까 그렇습니다. 그 대신 돈을 조금 더 주는 거죠.

김미화 : 근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분위기인데, 북유럽은 어떻게 비정규직 근로자가 10%대인가요.

임종인 : 저는 우리나라의 경향이 매우 염려되고 있는데요. 여기서는 기업에 있어서 가중 중요한 재산은 근로자다. 근로자는 대우를 잘해줘야 된다 이런 게 하나가 있고, 그 다음에 노조 조직률이 높습니다. 노조의 힘이 세죠. 노조가 한 80% 조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1%밖에 안되고 있어서 힘을 못 쓰고 있죠.

김미화 : 근데,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실제 생산력 증대로 이어지는지 그거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요?

임종인 : 그렇죠.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면 그게 생산력이 높아지는지 그런 문제가 여기도 60년대, 70년대에 있었더라구요, 생산력이 떨어지는 게...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대책을 세워서 기업에 대해서는 해고의 권한을 좀 준달지, 실업보험을 90%에서 80%로 낮춰준달지 이렇게 해서 도덕적 해이를 막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김미화 : 그러니까 기업의 어떤 권한을 가지고 도덕적인 해이를 막는다?

임종인 : 예, 기업도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경영이 어려우면 그런 이유를 노조에 제시해서 해고를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주었드라고요.

김미화 : 그렇군요. 한 나라의 경제가 잘 움직이려면 기업, 노조, 정부가 서로 협력을 잘  해나가야 하는데, 그럼 북유럽에서 정부의 역할은 어떤가요?

임종인 : 정부가 중요하죠. 우선 정부는 교육비와 의료비를 거의 무료로 해주고, 연금과 주거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기업이 그걸 부담해야 될 비용을 줄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실업보험을 80% 정도로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가 되어도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죽을 각오로 해고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아도 되죠. 그 다음에 직업 교육을 시켜줍니다. 재교육을 시켜줘서 재취업을 할 수 있게 이렇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김미화 : 그럼 그런 교육, 의료, 연금, 주거 등 정부에서 대주는 이런 비용은 어떻게 처리를 하나요?

임종인 : 그건 국민의 세금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세금이 적게 버는 사람은 약 30%, 많이 버는 사람은 50% 정도 세금을 내서 세금으로 기본적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김미화 : (그 부분에 대해서) 저번에 말씀을 하셨는데, 세금에 대한 반발이 그렇게 거세지 않다. 그러셨잖아요.

임종인 : 예. 그것은 미국하고 다른데요. 미국하고 달리 (북유럽이) 세금에 대한 조세 저항이 낮은 것은 세금을 낸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보는 '보편적 복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은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내면서 선별적 복지라고 해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미화 : 네. 격차 없이 보편적으로 복지 혜택이 간다...

임종인 : 예. 모든 사람한테 교육, 의료 다 거의 무료로 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미화 : 임 전 의원 님. 지금까지 북유럽 국가를 쭉 둘러보셨는데, 그러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좀 정리해 주신다면요.

임종인 : 일단 유럽은 통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유럽연합이 27개국인데 평화와 경제협력으로 가고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남북 대결이니 이렇게 분열로 가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미국과 영국 등 유럽 국가들 그리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고요.
그리고 두번째로 이 작은 나라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이런 나라들이 500만 내지 900만 인구밖에 안되는데 독자적인 화폐를 유지하고 있드라고요. 핀란드는 유로를 쓰고 있었지만은...그래서 여러가지 정책에 독자성을 주장하는 게 재미있었고요.
그 다음에 1차 농업, 2차 제조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도시국가가 아니니까 절대 그래서는(농업, 제조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아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경제 규모가 11~13위이고, 올핌픽 메달도 7위로 땄고, 한국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 수도 18위였습니다.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서로 위하고 살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화 : 아유 그랬군요. 우리 국민이 또 똘똘 뭉치면 잘하는 국민이거든요. 마지막에 이렇게 힘을 주시네요.

임종인 :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가 순위가, 국가의 경쟁력 순위가 저는 200개 국가 중에 최소 20등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도로나 공중화장실이랄지,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렇고요. 우리나라가 많은 힘이 있습니다. 힘을 내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미화 : 그럼요. 3주에 걸쳐서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 드리구요. 내일 잘 돌아오시구요. 고맙습니다.

임종인 : 예,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임종인 "북유럽 복지국가, 자본주의 가장 좋은 형태"
임종인 "남보다 빨리 아닌 함께 달리는 게 국가경쟁력"

2008/09/19 [21: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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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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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보다 더 많은 나라 
  [덴마크 통신]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세 배 되기도"(2008.7.22)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722115621&Section=
:
Posted by 엥란트


임종인 "북유럽 복지국가, 자본주의 가장 좋은 형태"
방송인 김미화, "임종인 따라다니면서 북유럽 복지 배우고 싶다" 밝혀
 
취재부
"사람은 아플 때 가장 서러워, 국가가 해결해줘야"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모델'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5개국을 탐방 중인 임종인 전 의원이 어제(11일)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 지난 주에 이어 두번째로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의료 체계'를 소개했다.

임 전 의원은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와 같은 건강보험 형태가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 모든 게 해결되고 있다."며 "국민들은 세금만 내면 교육이 무료고, 의료가 거의 무상이고, 노후연금이 보장되는 이런 체제였다."고 전했다.

특히 "검사비, 수술비, 입원비가 무료라서 아프면 자기가 내는 돈(본인 부담)은 5%도 안된다. 그에 반해서 우리나라는 본인 부담률이 38%다."며 "큰 병에 걸렸을 때 예컨대 2억쯤 든다고 했을 때 스웨덴은 1천만원 정도 밖에 안 드는데, 우리나라는 8천만원 정도 들어야 된다."고 말해 북유럽과 우리나라 의료 복지 수준의 현격한 차이를 지적했다.

북유럽 국가들 '검사비·수술비·입원비 무료, 본인부담 5%도 안돼'

임 전 의원은 "북유럽 국가 국민들이 이런 의료제도에 대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다."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좀 사회에 내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벌면서도 교육은 모든 사람이 다 받아야 되고, 아프면 누구나 다 치료를 받아야 되고, 나이 들어 은퇴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게 보장돼 있어서 3~40년 후에도 이런 것들이 잘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북유럽 복지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그러면서 임 전 의원은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자본주의 형태 중에서 가장 좋은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며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잘 되는 형태"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명박 정권이 추구하는 영리의료법인 병원과 민영의료보험에 대해서는 "결국은 돈 없는 사람들은 대상이 안 되고, 돈 많은 사람들만 양질의 서비스를 받게 되는 잘못이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한편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김미화(개그우먼 출신 방송인) 씨는 "마음 같아선 나도 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우고, 느끼고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북유럽 복지 시스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다음은 이날 임종인 전 의원의 <북유럽 리포트> 인터뷰 전문이다.

김미화 : 저희가 지난 주부터 매주 목요일, 북유럽 선진 문화를 탐방 중인 임종인 전 의원을 연결해서 북유럽의 이모저모를 들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시간으로 '북유럽의 의료 환경' 이것은 어떨까 알아보겠습니다. 북유럽을 탐방 중인 임 전 의원님, 안녕하세요?

임종인 : 네. 안녕하십니까. 임종인입니다.

김미화 : 네 반갑습니다. 지난 번엔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거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방송을 해주셨는데..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임종인 :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서 어제 아일랜드 더블린에 도착했습니다.

김미화 : 지금 쉴 틈도 없이, 여기저기 모니터를 많이 하고 계시다던데..고생 많으시죠?

임종인 : 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힘들게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까 입술도 부르트고, 며칠 전에는 감기에 걸려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김미화 : 이번에는 북유럽의 의료 환경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보셨다구요? 감기에 걸려서 가신 거에요?

임종인 : (웃음) 병원에는 제가 아파서 가진 않았고요.

김미화 : 집중적으로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임종인 : 주로 스웨덴을 봤는데요. 스웨덴하고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는 거의 다 비슷했습니다. 특징을 말씀드리면, 여기는 우리와 같은 건강보험 형태가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 모든 게 해결됐습니다. 국민들은 세금만 내면 교육이 무료고, 의료가 거의 무상이고, 노후연금이 보장되는 이런 체제였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3%의 저소득층은 국가가 보장해주고, 97%는 소득에 따라 건강보험료를 내면 해결해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죠.

김미화 : 그러면 북유럽은 국민건강보험제도라든지 민간보험제도 국가가 관여하는 그런 게 없어요?

임종인 :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세금으로 의료비를 책정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여기의 특징은 대부분이 무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검사비, 수술비, 입원비가 무료라서 아프면 자기가 내는 돈(본인 부담)은 5%도 안됩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나라는 본인 부담률이 38%입니다. 그래서 동네 병원에 가는 경우는 별 부담이 안 되지만, 큰 병에 걸렸을 때 즉 1억~2억 든다면 2억쯤 든다고 했을 때 스웨덴은 약 1천만원 정도 밖에 안 드는데, 우리나라는 약 8천만원 정도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큰 부담이죠.

김미화 : 그런데 의원님, 그렇게 무료로 다 해주면 좋은데 복지 수준이 그렇게 높으면 대신 세금부담률이 엄청나지 않을까요? 많이 낼 것 같은데요.

임종인 : 우리나라의 경우보다 세금이 좀 높죠. 개인소득세를 보면 저소득층은 약 30%정도 내고, 고소득층은 약 50%까지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인세는 그렇게 높지 않았고요, 세금이 높긴 하지만 세금의 투명성이 분명해서 탈세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탈세와 절세가 너무 많죠.

김미화 : 국민들이 이런 의료제도에 대해서 만족을 할까요?

임종인 :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약값의 경우에  여기는 1년에 30만원 정도만 내면 그 이상의 약값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왜냐하면 큰 병에 걸리면 계속 약을 복용해야 되지 않습니까? 병원도 1차 진료기관이 동네에 있고 주치의가 다 있습니다. 주치의가 필요에 따라서 병원에 입원하라고 하면 가는데, 입원할 경우에 여기도 1인실, 2인실, 6인실이 있는데 이런 병실에 들어가는 것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병 상태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돈 많은 재벌이라고 자기가 1인실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더라구요.

김미화 : 북유럽은 교육도 그렇고, 의료도 그렇고 국가가 책임진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좋긴 한데 한편에서는 과연 30년, 40년 후에 현재의 복지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지금처럼 재분배가 가능할까라는 현실적인 우려의 목소리도 있을 것 같아요.

임종인 : 저는 여기에 와서 보고 자본주의 형태 중에서 가장 좋은 형태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좀 사회에 내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벌면서도 교육은 모든 사람이 다 받아야 되고, 아프면 누구나 다 치료를 받아야 되고, 나이 들어 은퇴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게 보장돼 있어서 3~40년 후에도 이런 것들이 잘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화 : 많이 내는 사람들의 반발은 없어요?

임종인 :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도 50% 정도는 자기 소득입니다. 예를 들면 3억원을 벌면 1억 5천만원은 자기 돈이거든요. 5천만원 버는 사람은 30% 정도를 (세금으로) 내니까 3천5백만원은 자기 돈입니다. 3천만원 버는 사람보다 1억 5천만원 버는 사람은 소득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고 서로 돕고 그리고 저소득층들도 소득이 있어야만 소비가 돼서 그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잘 되는 그런 형태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양극화가 심해서 저소득층, 돈 없는 사람은 쓸래야 쓸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화 : 최근 한국에서는 "제주도가 영리법인 병원을 설립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의 시도는 없나요 거기는?

임종인 : 예. 여기도 돈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만이 있더라구요. 나 빨리 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싶은데 왜 안 해주느냐, 돈 좀 더 내겠다는 일도 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리의료법인 하는 것은 이런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민영의료보험 그러니까 국민건강보험에서 적용되지 않는 것들을 민간 의료보험사에 들어서 해결하자는 것은 매우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리의료법인도 그렇게 되면 국민건강보험의 적용대상이 줄어들어서 결국은 돈 없는 사람들은 대상이 안 되고 돈 많은 사람들만 양질의 서비스를 받게 되는 그런 잘못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김미화 : 마음 같아선 저도 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우고, 느끼고 그랬으면 좋겠는데..아유 부럽습니다.

임종인 : 우리나라가 여성이 82세가 평균수명이고, 남자가 78세가 평균수명이 된 것은 그래도 국민건강보험제도 덕분이었습니다. 60년 전에는 불과 39.5세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었습니다. 사람이 아플 때 가장 서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국가가 공동체가 잘 해결해줘야 하고 그러한 체제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미화 : 네네. 임종인 전 의원님 고맙습니다. 다음 주도 기대를 해보겠구요. 감사합니다.

임종인 : 네. 안녕히 계십시오.


관련기사
임종인 "남보다 빨리 아닌 함께 달리는 게 국가경쟁력"

2008/09/12 [17: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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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8.9.12)
:
Posted by 엥란트



임종인 "남보다 빨리 아닌 함께 달리는 게 국가경쟁력"
북유럽 5개국 탐방중 MBC 라디오 출연, '복지국가 교육 시스템' 소개
 
취재부
학교간 서열 없고 대학까지 무료, 교육 경쟁력은 '세계 최고'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모델'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5개국을 탐방 중인 임종인 전 의원이 어제(4일)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교육 체계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임 전 의원은 이날 스웨덴에서 전화 연결을 통해 "이들 국가들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모든 사람들은 배워야 된다라는 것은 기본이고, 배우는 것은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며, 남보다 먼저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학습능력을 올려가는 것이 목표라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며 "그러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경쟁력을 갖고 있고, 학생들 수준도 다 높다는 것이 놀랍다."고 평가했다.

임 전 의원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가 국가경쟁력 1,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교육 경쟁력이 아주 높다."면서 여기에는 학교 간 서열 특히 대학 간에 서열이 없고, 대학까지 무료이며, 학생들의 개인 경쟁보다는 팀별로 과제 수행을 하는 걸 중시하며, 평생교육 체제를 갖추고 있는 등 4가지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임 전 의원은 이들 나라는 '남보다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달리는 것이 진정한 국가경쟁력이다.'고 보고 있다며 "이런 교육 체제가 국가경쟁력의 기본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특목고와 자립형사립고? 그런 건 없다!

임 전 의원은 또 "(북유럽 국가들은)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가 전혀 없고, 특목고니 자립형사립고니 이런 것도 전혀 없었다."며 "사회경제적으로 대학을 나오나 고등학교를 나오나 큰 소득 차이가 없고, 어느 대학을 나오나 사회적 지위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부가 적성에 맞는 사람들은 대학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되는 구조가 부러웠다."며 "여기서는 좋은 학교, 더 좋은 영재들만 모이는 학교 이런 건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소개했다.

임 전 의원은 가장 살기 좋다는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환경, 교육, 산업, 노사정 타협, 정치 구조 등 다양한 복지 모델을 현지에서 조사를 통해 좋은 점들을 어떻게 우리나라에 접목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지난 8월 20일 핀란드로 떠났다. 이후 노르웨이, 스웨덴을 거쳐 덴마크, 아일랜드를 탐방하고 오는 9월 20일 경 귀국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이날부터 3주 동안 매주 목요일에 '임종인의 북유럽 리포트' 코너를 마련, 임 전 의원이 북유럽 국가 탐방을 통해 보고 느낀 바를 소개토록 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날 임종인 전 의원의 인터뷰 전문이다.

김미화 : 임종인의 북유럽 리포트.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3부에서는 앞으로 3주 동안 매주 목요일에 임종인 전 의원의 '북유럽 리포트' 시간을 마련해 봤습니다. 북유럽 하면 교육, 복지, 환경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인 곳들이 많은데요.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북유럽의 교육 환경이 어떤지 좀 알아보겠습니다.
북유럽 선진 탐방을 하고 있는 임종인 전 의원 님 안녕하세요?

임종인 : 예, 안녕하십니까. 임종인입니다.

김미화 : 아유 반갑습니다.

임종인 : 반갑습니다.

김미화 : 항상 정치 이슈로만 전화를 드리다가 이렇게 전화 드리니까 느낌이 참 색달라요.

임종인 : 예, 저도 편안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까 재미있습니다.

김미화 :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임종인 : 지금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습니다.

김미화 : 어디 어디 다니시는 건데요.

임종인 : 핀란드에 지난 8월 20일날 왔어요. 핀란드에서 5일 정도 있었고 그 다음에 노르웨이에 가서 노르웨이에서 일주일 있었고 그리고 지금 스웨덴에서 3일째 있습니다.

김미화 : 갑자기 북유럽을 탐방하고 계시다고 그래서 깜짝 놀랬는데, 어떻게..

임종인 : 저번 선거에서 우리 안산 지역에서 저를 선택해주지 않고, 많은 시민들께서 공부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북유럽의 복지, 환경, 교육, 산업, 노사정 타협, 정치 구조 이런 걸 공부해서 우리에게 접목시키고자 제가 한 달 시간을 내서 왔습니다.

김미화 : 아 네. 북유럽에 경쟁력 있는 나라들이 많은 이유로 무엇보다 이제 높은 교육 수준, 지금까지 다니신 나라들 아까 얘기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이 세 나라의 교육 구조의 특징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임종인 : 그렇습니다. 이 세 나라가 국가경쟁력 1,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교육 경쟁력이 아주 높습니다. 여기에는 4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학교 간 서열이 없는데, 특히 대학 간의 서열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대학까지 무료입니다. 우리나라도 GNP의 7%를 교육비로 쓰고 있지만, 사교육비가 2.8% 그리고 공교육비는 4.3%로 사교육비가 너무 많죠. 그런데 이 나라들은 GNP의 7%를 교육비로 쓰면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개인 경쟁보다는 팀별로 과제 수행을 하는 걸 중시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남보다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달리는 것이 진정한 국가경쟁력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네번째로 평생교육을 할 수 있다. 누구나 원하면 대학 졸업하고도 공부할 수 있는 이런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 국가경쟁력의 기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화 : 아 예. 예를 들어서 지금 대학까지 무료다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데, 그러면 입시 경쟁이라든지 사교육비 급증 같은 그런 문제들은 북유럽에는 전혀 없는 건가요?

임종인 : 예 그렇습니다.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가 전혀 없고, 특목고니 자립형사립고니 이런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회경제적으로 대학을 나오나 고등학교를 나오나 큰 소득 차이가 없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 다음에 어느 대학을 나오나 사회적 지위 차이가 없었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여기는 18살부터 선거권이 있고 국회의원 나올 수 있는 피선거권도 있는데 20대 국회의원이 한 10%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나온 사람도 국회의원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미화 : 소득 차이가 어떻게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요. 학력은 중요하게 생각 안 한다며요.

임종인 : 그러니까 페인트공이나 세탁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아니면 도로에서 일하시는 분, 오히려 육체 노동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수입은 더 많았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뭐 하는 것보다. 변호사나 의사도 저도 뭐 변호사입니다만은 변호사나 의사가 소득이 높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회사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사람 즉 적성에 맞는 사람들은 어느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중학교 졸업하고도 인문계 고등학교 갈 사람은 인문계 고등학교 가고, 실업계 고등학교 갈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가고 이렇게 하는 구조가 부러웠습니다.

김미화 : 그니까 딱히 먹고 살기 위해서, 더 많이 돈을 벌기 위해서 공부하는 그런 거는 없다?

임종인 : 그렇죠. 고른 학습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 다음에 학습 부진아의 비율이 적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특별히 영재교육을 시키는 것은 아니고요, 모든 사람들이 두루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만들어주고 부진한 사람들은 따로 교육을 친절하게 시켜주고 이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김미화 : 아 그렇군요. 북유럽은 영어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참 궁금합니다. 한국은 뭐 영어 교육 때문에 난리거든요.

임종인 :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나라들이 바로 북유럽 나라들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니까 어떤 사람들 예를 들면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이나 길거리에서 청소하시는 분들도 다 영어를 상당히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이렇게 보니까, 첫째는 언어적 유사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말을 잘 배울 수 있듯이 영어나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나 기본적으로 어원이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예를 들면 솔러(solar)라고 하면은 해라는 뜻인데 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어서 여기서도 솔이라고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시험 평가를 일주일에 한번씩 성적 내고 이런 게 아니라, 영어 교육을 보통 초등학교 3, 4학년부터 받고 있었는데 1년 연말에 어느 정도 수행능력이 있는가 이런 것만 평가하고 즐겁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는 프랑스와 독일은 인구가 많은 나라이고 큰 나라인데 비해서 여기에 있는 나라들은 인구가 9백만, 5백만 정도이기 때문에 영어가 굉장히 필요하다는 걸 알고 집중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30년 전부터 교육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었습니다.

김미화 : 지금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교 선택제라고 해가지고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추진 중인데요. 이게 교육 현장에서 학교의 서열화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논란이 있는데요. 북유럽에서는 학생들이 진학을 어떤 식으로 하나요.

임종인 : 여기는 자기가 자유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가 9년제로 보통 합쳐져 있었는데요. 여기도 자기가 가고 싶으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실업계 고등학교 가고 싶으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도 마찬가지로 일반 대학 가고 싶으면 일반 대학을 가고, 실업계 대학을 가고 싶으면 가고, 실업 전문대학을 가고 싶으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자기가 좋은 학교를 가가지고, 더 좋은 영재들만 모이는 학교 이런 건 개념이 아예 없었습니다.

김미화 : 북유럽의 교육 현장을 돌아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부럽기만 하셨나요.

임종인 : 예.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모든 사람들은 배워야 된다라는 것은 기본이고요. 배우는 것은 자기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먼저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학습능력을 올려가는 것, 이런 것이 목표라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것, 학생들 수준이 다 높다는 거 이런 것들이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김미화 : 거기서 공부만 하지 마시고, 백야 같은 것도 멋있고 그렇다는데 그런 것도 좀 즐기고 그러시지.

임종인 : 여기는 위도가 높기 때문에 여름에는 낮이 길고 겨울에는 밤이 긴 나라인데, 밤이 기니까 겨울에는 스트레스를 많은 받는다고 그래요. 지금은 보니깐 밤 10시 정도까지 훤하구요. 낮 4시 정도에 훤해지고 이렇습니다.

김미화 : 이제 어디로 갈 예정이세요?

임종인 : 여기서 한 3일 정도 더 교육기관, 장례기관, 복지기관 등을 본 다음에 덴마크와 아일랜드를 갈 생각입니다. 덴마크도 북유럽에서 아주 같은 선진국이고 또 영국 옆에 있는 아일랜드가 노사정 대타협이 잘 돼 있어서 90년대 이후 발전했다고 해서 보고 9월 20일 경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김미화 : 그러면 다음 주에 뵐 때까지 건겅하시고요. 고맙습니다.

임종인 : 예. 고맙습니다.

김미화 : 지금까지 북유럽을 탐방하고 있는 임종인 전 의원과 얘기 나눠봤습니다.

2008/09/05 [16:1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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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진중권씨, '사민주의 전도사'로 변신
진보누리 활동접고, 불온이스크라로 활동무대 옮겨
 
취재부

민주노동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진보누리(www.jinbonuri.com)에서 좌파담론의 확산과 친노무현 지지논리의 허점과 당파성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해온 진중권씨가 돌연 진보누리에서의 절필선언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전위를 자처'하면서 사회당에 경사된 '불온이스크라(www.buloniskra.com 이하 '불온'으로 약칭함)에서 활동하기로 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진중권씨는 지난 16일 불온의 '사실상의 운영자'인 수군작씨와 다음과 합의문을 작성했다. 합의문의 중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진중권과 수군작은 진보누리를 절필한다. 쟁토방을 비롯 진보누리의 어떤 곳에서도 수군작과 진중권은 글쓰지 않는다.
2. 진중권의 [불온타임즈] 사민주의 전도사 칼럼이 개설되건 안되건 상관없이, 진중권이 불온이스크라의 정회원이 되건 말건 상관없이, 그로 인해 <좌익소아과> 개설이 되건 말건 상관없이, 진중권이 준회원으로써 불온이스크라에서 <좌익소아병 치료 활동>을 지속하는 그 기간 동안 만큼, "1주 1개 이상, 한달 평균 4개 이상" <좌익소아과 치료행위용 글 1개, 좌우 꽉꽉 채워서 평상시 진중권의 일반적 칼럼>처럼 작성하는 만큼, 수군작은 불온이스크라에서 신화를 비롯하여 기타 정치/비정치적 글들을 포함한 일체의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3-1. 진중권은 [불온타임즈]에 <사민주의 전도사>(또는 이와 동일내용의 다른 유사제목 가능)라는 정치칼럼섹션을 맡도록 한다.
3-2. 진중권의 <사민주의 전도사> 칼럼란이 개설되면, 수군작은 앞으로 영원히 평생동안 불온이스크라 및 [불온타임즈]를 비롯한 모든 인터넷 정치사이트에서의 정치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3-3. [불온타임즈] 초동주체들의 의사결정과정으로 진중권의 <사민주의 전도사> 칼럼란이 개설되지 못하고, 진중권의 [불온타임즈] 참여가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수군작은 진보누리에서 영원히 철수한다.
4. 이상의 쌍방합의내용은 진중권과 수군작, 두사람의 아래 쪽글 서명을 기점으로 즉각 발효한다. 앞으로 수군작과 진중권은 위에 합의된 내용과 앞으로의 행동절차를 모든 지켜보는 이들 앞에서 성실하게 평생같이 지킬 것을 약속한다.


[진중권-수군작 최종합의문 전문보기] 불온이스크라(2003. 9. 16)

▲진중권-수군작 합의에 의해 불온이스크라로 둥지를 튼 모습을 풍자한 모습:불온이스크라의 네티즌 작품     ©불온이스크라
합의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진중권씨는 그동안 거점이었던 진보누리에서 절필할 것과, 새로 불온, 또는 불온에서 발행할 좌파매체인 불온타임즈에서 <사민주의 전도사> 컬럼을 개설하고 일정한 활동을 한다면 그 대신 수군작씨는 불온과 진보누리, 나아가 일체의 정치사이트에서 절필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인터넷 논객이라 할 수 있는 진중권씨의 진보누리 절필은 충격적이라고 할만큼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진중권씨는 9월 11일 진보누리를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다음 인터넷 사이트 간의 '이라크파병반대 연대'을 제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파병반대 연대' 제안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씨가 급작스러운 결정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수군작씨 등 이른바 불온 일부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진보누리에 대한 비판과 게시물을 연달아 올리는 행위(도배) 등으로 진보누리의 활동마저 위축 혹은 왜곡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진중권씨 못지않게 인터넷에서 왕성한 활동과 필력을 자랑하는 수군작씨는 노동자 계급혁명을 주장하는 등 급진좌파적 경향을 띄어왔다. 나아가 좌파논객들과 연대, 불온이스크라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전파하는데 힘쓴 한편 우파 개량주의와 심지어 민주노동당(과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진보누리)을 부단히 비판해왔다.

따라서 진중권씨와 수군작씨는 이념적으로 같은 좌파이고 진보정당 계열이지만, 흔히 말하듯 현실의 변혁노선을 둘러싼 차이에서 반대파보다 더 격렬한 내부투쟁을 벌여왔다. 진중권씨는 안티조선부터 시작해 노무현 지지자들의 당파성 및 좌파 내부의 경직성을 주로 비판해온데 비해 수군작씨와 그에 동조하는 좌파논객들은 진중권씨의 작업을 노무현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에만 치중한 '우파 개량주의'로 폄하하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진중권씨의 표현을 빌리면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진중권-수군작 논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을 둘러싼 뿌리깊은 이론투쟁의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지난 대선을 전후로 진보진영의 단일후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대한 노무현 지지자들의 압박과, 대선 전후 각종 인터넷 등 온/오프를 망라한 각종 미디어에서 소외된 대한 좌파의 분노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좌파매체 건립방식, 그리고 인터넷에서 좌파담론의 주도권과 확산을 둘러싼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선 이후 좌파들은 대선 기간 보여준 오마이뉴스, 한겨레신문, MBC 등 우호적이라 할 수 있는 매체들이 권영길 후보를 외면하다시피 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특히 '글빨과 말빨' 밖에 없다는 좌파들이 인터넷에서 주도권을 못잡고 각종 인터넷 매체에서 소외되자 깊은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대선 직후 좌파 간에는 매체, 특히 인터넷 매체의 건립을 당면과제로 삼았고, 인터넷 매체의 중요성을 절감한 민주노동당 마저 지원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좌파매체 건립은 지지부진 하였고, 인터넷 담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공세는 더욱 가열되면서 진보정당 및 좌파진영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또한 인터넷언론의 절대강자 오마이뉴스와 친노무현 지지의 본산이랄 수 있는 정치웹진 서프라이즈닷컴의 득세는 좌파들에게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자연히 좌파들은 대선 전 이문옥 전 감사관 후원사이트인 '깨끗한손(www.moonok.com)에서 분파한 '민주노동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공동체' 진보누리(www.jinbonuri.com)에 결집했다.

진보누리를 통해 좌파들이 속속 결집하고, 특히 진중권씨 등이 가세해 친노 진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 등을 통해 진보누리는 짧은 기간 유력한 좌파매체로 진용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좌파웹진 진보누리의 기본적 정신인 좌파=사회주의적 가치관의 전파와 진보정당 외연의 확대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따른 비판과 대안모색 속에서도 이를 '역비판'하는 민주당 지지자들과의 정치투쟁에 상당 부분 소진된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서프라이즈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진보누리의 위상과 역할을 제고하였지만, 반면에 정치적 이슈에만 편중한다는 따가운 비판도 제기되었다. 특히 일부 진보누리 구성원들은 진중권씨 등의 작업이 화물연대 파업이나 환경, 기층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보다 민주당 비판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고공정치'론으로 비판했다. 이와는 별도로 수군작씨 등 불온의 구성원들 역시 진중권씨 등을 자유주의자로 몰아치면서 사회변혁의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제기 및 현 단계에서의 좌파의 역할에 관해 끊임없는 시비를 걸었다.

특히 불온의 구성원들은 노동이나 환경의 문제가 발생하면 '기동전'이라는 이름하에 같은 주제의 내용을 게시판에 연속 올리는 작업을 해 진보누리의 '의제설정' 기능을 무력화 시키거나 사이트를 혼란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진중권씨는 이런 현상에 대해 '불온'의 방법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론'이며, 인터넷에도 맞지 않음을 지적하며 불온의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진보누리와 불온간, 진중권씨 등과 불온의 멤버들은 서로 연대는커녕 끊임없는 신경전과 대립이 지속됐다.
그러나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진중권-수군작 양인이 갑작스러운 '빅딜'은 어떤 면에서는 좌파진영과 인터넷 담론에서의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우파, 친노세력이 장악한 인터넷에서 좌파의 목소리는 크지 않은 반면에 분열되어 있어 전력의 집중을 꾀할 수 없었다. 진보누리는 정치웹진으로 진보정당을 대변하는 위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프라이즈와의 대립각 이외에는 자체 '의제설정' 기능이나 진보적 가치관의 확산이 부족한 편이다. 또한 성장세도 둔화추세이다(진보누리의 인터넷 (좌파)매체로의 변신은 후속으로 다룰 예정이다).

따라서 인터넷의 생리와 속성을 잘 아는 진중권씨는 수군작씨와 불온의 '도발', 그리고 그들의 방법론에 대한 정지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에 수군작씨의 제안에 동의했을거란 추측을 할 수 있다. 이는 진중권씨가 불온의 '좌익(사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익 소아병은 진보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좌익소아병은 실제의 계급투쟁에서는 아무 역할도 못 합니다. 좌익 소아병은 기껏 해야 좌파와 진보진영을 희화화하는 부르주아 개그의 소재만 될 뿐입니다. 우리의 이데올로기 싸움은 앞으로 더 구체적이고, 더 전문적이고, 더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워낙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거저 먹고 들어온 부분이 많아서,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좌파적 비판이 위력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진보누리, 9. 7)

이를 보면 진중권씨는 (불온 또는 사회주의)좌파들의 방법론의 문제점을 여실히 지적하면서 부르조아(우파) 공격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청년좌파들의 이론적 미숙성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을려는 욕심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이점은 '빅딜' 이후 가진 중대신문사(진중권씨는 이번 학기부터 중대 독문과 겸임교수가 되었음)와의 인터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소위 좌파라는 젊은 층은 기본 수준도 안된다. 그들은 아직도 80년대 문헌적인 내용만 외우고 있다"

[관련기사] 최은주, 좌파는 현실적 과제를 향해 모여야 한다. 유토피아는 그곳에서 만들어진다, 중대신문(2003. 9. 27. 제1535호)  

수군작씨 역시 불온에서 함께 하는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좌파, 현실변혁 이론의 전파가 지지부진하고 내부의 대오도 흐트러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에 충격요법으로 진중권씨를 끌어들여 불온(과 좌파)의 내용을 새롭게 재편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온을 매개로 한,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좌파매체 '불온타임즈' 창간을 꿈꿔온 그로서는 불온타임즈가 인터넷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중권씨의 참여가 절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양인은 대선 전후부터 깨손, 아웃사이더 게시판, 진보누리 등 인터넷을 전전하면서까지 치열한 대립을 펼쳐왔지만, 서로의 입장은 달리한채 나름대로 빅딜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번의 빅딜로 진중권씨는 나름대로 탄탄하게 구축해 논 좌파정치웹진인 진보누리를 떠나게 되었고, 새로 불온이스크라에서 <좌익소아과> 코너를 개설하면서 좌파들과 현실변혁을 놓고 이론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나아가 불온의 멤버들이 동의하고 본인 또한 동의하면 11월 중순 경 창간되는 좌파매체 <불온타임즈>에서 '사민주의 전도사'로 이땅의 사민주의 역할과 개념에 관한 칼럼을 담당하게 된다. 반면 진중권씨가 약속을 지킬 경우 수군작씨는 불온은 물론 진보누리 등 일체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글쓰기를 영구 중단한다는 선언을 한바 있다(깨손에서 개인적인 '신화방'을 운영하는 것은 가능).

이번 진중권-수군작 양인의 '빅딜'은 지난 5.18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운영권에 따라 분화된 서프라이즈와 달리 인터넷에서 좌파의 역할과 진보정당의 외연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진중권씨가 '사민주의 전도사'로 나서서 좌파진영의 현실변혁에 대한 이론적 정지작업이 어느정도 공감대를 받는 경우 그 폭발력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좌파 고유의 이론과 다종다기한 현실정치의 상관관계를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어쨋거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극우 파시스트 연구> 로 이땅의 '극우꼴통'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풍자하면서 한국 사회에 화려하게 등장한 진중권씨가 이제 같은 좌파진영 내부에서 이론투쟁을 벌이게 된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에서 좌파담론이 대중적으로 확장됐다는 측면과 이제는 21세기에 맞는 사회주의적 현실변혁 방법론이 새롭게 정립되는 계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고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진중권-수군작 두 사람의 빅딜이 좌파진영이 억압된 현실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쟁취하는 계기는 아무래도 내년 총선에서 드러날 것이다.

[관련사이트]
ㆍ진보누리 http://jinbonuri.com
ㆍ불온이스크라 http://buloniskra.com
ㆍ깨끗한 손 http://moonok.com
2003/09/25 [18: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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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