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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권, 참여없는 신자유주의 정권
[비나리의 초록공명] 임기말 인기만회용 프로젝트 가동하면 대파국 초래
 
우석훈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월 18일 새해 대국민연설을 했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일단 대통령의 의도와는 별개로, 대통령으로서 수행한 ‘결과물’만 놓고 중간평가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정치공학’이라는 말이 좋은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어쨌든 세상을 그러한 시각으로 보는 것 같다. 진보진영 혹은 운동진영의 많은 사람들도 정치공학적인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입만 열면 “좌파정부” 혹은 “분배만 앞세우는 정부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극우파들만큼이나 운동진영에서도 정치공학적인 생각이 팽배해 있다. 별로 도움되지 않는 정파논쟁으로 날 새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실 진보진영에서 정치공학적인 생각이 더 많은 것 아닌가.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어떻게 토호들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내용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라는 차분한 고민보다는 “역시 4년 중임제가 좋을 것 같다”는 식의 별로 본질적이지 않은 개헌논의만 하다가 대선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이 삼켜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대선은 가장 큰 전환점이며 동시에 한국식 정치과잉의 그야말로 ‘끌개(attractor)’로 작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레임덕이라는 꽤 정의하기 어려운 현상이 생겨날 것이다. 이미 스스로 출범 초부터 레임덕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만큼 2006년도부터 이 레임덕이라는 현상이 상당히 심해질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게 황우석 사태로 시작되었을지 혹은 유시민 의원 입각사태로 시작하였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가능하면 정치공학적인 생각을 잠깐 접고, 도대체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상 가장 기묘한 ‘경제성장’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오로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알게 됐다. 이를테면 황우석 학습효과인데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들을 오로지 노무현 한 개인의 책임 유무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얘기일 것 같다.
 
어차피 정부라는 실체가 있고, 또 정책기조라는 잘 변하지 않는 하나의 흐름이 있고, 법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제도들이 이 나라의 실체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여기에 지방경제를 비롯해 지역의 정치구도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통령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접근 자체가 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어쩌랴. 한국은 대통령제이고, 어쨌든 취임 이후 국정 전반의 책임은 대통령으로 수렴된다는 진부한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참여의 실체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단어 본래의 의미에서 이전 정권에 비해 별로 그렇게 참여가 늘어난 정권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강화된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얘기하면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울 것 같다. FTA(자유무역협정)라는 단어가 국가 발전의 척도처럼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고, 농업이 실제로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고, 비정규직이 일반화되는 일이 진행되었고, 농지를 중심으로 땅값이 엄청나게 오르는 일들이 노무현 정부의 초기 3년 동안에 벌어졌다.
 
정부에서는 부동산투기로 물러났던 전 이헌재 총리를 전면에 내세워 ‘한국형 뉴딜’이라는 기형적인 케인스우파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GDP의 20% 밑으로 내려갔던 건설업을 부양하겠다는 소위 건설업 연착륙 정책을 2년 동안 강도 높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지방에 수만 평씩 땅 가지고 있는 토호들의 배로 정부가 푼 돈들이 대부분 들어간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서민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빈곤층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실제로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에서는 재산이 1000억대가 되어야 지방정치에서 소위 ‘힘 좀 쓰는’ 토호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불과 4년 만에 우리나라의 토호들은 10배는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부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 뉴딜정권인가 아니면 FTA 정권인가 아니면 농민들의 주장대로 ‘반농업정권’인가?
 
반면에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죽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상공회의소나 전경련 같은 곳에서도 중소기업들에 대한 양극화가 너무 심화되어서 대책을 세워달라고 하는 상황이니 도대체 이 정권 3년 동안에 누가 이득을 보게 된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정말 모두가 손해만 보고 있단 말일까? 사회적 손익대차표를 구성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 와중에도 4%씩 꼬박꼬박 성장을 하고 있고, 여러 가지 통계적 착시현상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수출은 계속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으니, 이 경제시스템은 참으로 해석이 어렵다.
 
증가를 하고 있으니 제로섬 게임은 아닐 것이고, 각 지역마다 못살겠다며 개발정책을 만들어달라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엄살을 피우고 있다는 가설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다.
 
각 지역 현장에서 느끼는 ‘피부로 느끼는 빈곤’은 3년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어디선가 누군가 몰래 샴페인이라도 터뜨릴 정도로 새는 데가 있지 않고서야, 이건 정말 불가사의한 상황이다. IMF 때처럼 저가에 쏟아져 나온 부동산 급매물을 헐값에 거두어들이는 일부 부자들이 “이대로!”를 외치는 상황도 아닌데, 도대체 이 이상한 시스템을 만들어낸 노무현 정권의 특징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잘한 정책이 ‘주거복지’라고?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 대통령의 운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정권이 디자인한 대로라면 참여정부에는 레임덕이라는 현상이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전두환 때와 노태우 때 그리고 YS와 DJ 때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다른 현상이 한 가지는 존재한다. 매년 연초가 되면 국정운영 100대 과제니 5대 과제니 하는 말들을 제시하면서 국정 운영의 기조를 다시 만들거나 새로운 정책들을 전면에 내세우던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DJ 때에 2000년을 맞으면서 각 정부 부처에서도 밀레니엄 과제 같은 걸 만들기도 했는데, 지금은 정말이지 그때의 과제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에 비하면 정부 운영방식에 차이가 벌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로드맵을 작성해서 그 큰 틀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합의한 대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사람의 정치를 하지 않고 시스템의 정치를 하겠다는, 노무현 정부가 초기에 내세운 틀과 로드맵 방식은 그 자체로는 그야말로 진보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렇게 로드맵을 세우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개혁’의 본질이라면 사실 노무현 정부가 그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비판은 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정치인 노무현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정부에서는 레임덕이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옳고, 또 내용은 모르겠지만 절차적 개혁은 진행되었다고 평가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호사가들은 이미 레임덕은 시작되었다고 사방에서 떠들어대고, 또 현재의 경제운용을 포함한 국정운영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게 단순히 단기적인 착시현상에 불과한 것인가?
 
3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측근들이 만들어낸 숱한 ‘구설수’가운데는 정말이지 서민들 가슴에 아프게 박힌 말들이 많다. “골프도 이제는 대중스포츠”라고 얘기할 때에는 한때 개혁진영의 ‘동지’로서 여기던 그에 대한 최소한의 정나미마저 떨어졌다.
 
그 화려한 어록들 중에서 이 정권 상층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말은 바로 얼마 전까지 교수였던 조기숙이라는 분의 입에서 나왔다. 이분은 참여정부가 제일 잘한 정책으로 ‘참여복지’라는 말을 꺼내들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DJ 정부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가장 후퇴한 부분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부분이 복지정책이다. 조기숙씨의 말 중에서 가장 민망했던 것은 복지 중에서 ‘주거복지’라는 분야가 발전했기 때문에 복지정책이 가장 잘 된 것이고, 그게 참여정부가 한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좋았다고 평가한 대목이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무주택자인 국민들의 50%가 주거비용이 증가했다는 원칙적인 통계는 떠나서라도 실제로 전국적으로 진행된 재건축으로 인하여 철거민 현상이 일반화된 이 시점에서 주거복지가 최고로 잘 한 정책이라는 자화자찬은 듣기에 민망스럽다.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공들여 추진했다고 이해찬 총리도 틈만 나면 강조하는 그 임대주택 정책이라는 게 사실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그린벨트를 푸는 조건으로 ‘임대주택 50% 건설’이라는 미봉책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린벨트가 풀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수익률이 떨어지는 등 각종 이유로 실제 임대주택 비율은 그보다 훨씬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나마 임대주택을 40평짜리로 고급화한다는 안대로라면 돈이 없는 서민들은 재입주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지역에 세입자 비율이 90%가 넘었지만 10%도 안 되는 지주들이 결정해버린 아현 뉴타운의 경우, 재입주율이 10%도 되기 어려운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나마 스스로 잘했다고 하는 주거복지 정책이 이렇다면 다른 분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을 정도가 아닌가?
 
국민들 서로 칼 들게 만드는 로드맵
 
왜 노무현 정부의 레임덕 현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가? 우선은 로드맵 설정이 잘못된 경우가 많고, 또 옳든 그르든 본질적 내용을 떠나서 내용을 당사자에게 알리고 제대로 사회적 합의를 거친 경우가 거의 없다.

황우석 교수를 보자.
 
본인 스스로 자기 연구의 정책 우선순위를 높이고 자신에게 돈을 주도록 과학기술정책의 로드맵을 작성했다. 지금 농민들이 소위 농정로드맵 10개년계획에 대해서 알기나 하고 또 제대로 동의하기나 했던가?
 
‘2만달러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과 ‘한국형 뉴딜’이라는 큰 기조하에 그야말로 자기들 마음대로 설정한 로드맵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정부는 기조를 지키겠다고 경찰력을 내세워서 버티기로 나서니까 한 시위에서 두 사람이나 참변을 겪는 일이 벌어진 것 아닌가?
 
수정되거나 보완되거나 때로는 중대한 결함이 생겼을 때에는 재고되는 절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로드맵은 필요하지도 않은 사회적 저항을 만들어내게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인구는 노령화 사회로 들어가면서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동북아중심국가라는 정책 기조 위에 각 지자체들이 만들어 놓은 2020년 계획들에 나온 ‘계획인구’를 다 더하면 황당한 결과가 나온다.
 
우리나라 인구는 2020년이 되면 지금보다 2배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로드맵 위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로 지역별로 중앙의 교부금을 흩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국토종합계획하에서는 어떤 지자체라도 난개발 방식으로 자체 계획을 세우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 과정에서 정말로 불필요하게 지방마다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서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청와대에 앉아계신 분들은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양보와 타협이 없을까 라고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어느 국민이 ‘로또 당첨’이라고 표현하는 땅값 따먹기 경쟁이 벌어지는 이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싶겠는가?

이런 걸 경제학에서는 ‘카르텔 경제’라고 부른다. 사회적 이익을 위한 로드맵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서로 등에 칼을 꽂으라고 강요하는 로드맵인 것이다.
 
수정하고 보완하는 절차를 가지지 않은, ‘이해당사자’라고 불리는 이익집단들끼리만 살짝 합의하고 만들어낸 로드맵들이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더구나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이 ‘코드 인사’로 대체되어 버린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로드맵은 작동될 때마다 기층 민중들과 정부 사이에, 그리고 기층 민중들끼리 갈등을 일으키고, 시스템 아닌 코드 장관들이 실세행세를 하는데, 이런 데도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여기에 어떠한 대의나 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 상황은 레임덕이라기보다는 잘못 디자인된 시스템이 소위 붕괴 절차로 들어간 것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시카고보이즈’를 기용해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양극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용어의 기원이 중남미 경제에 대한 분석에서 나온 용어라는 것은 잘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중남미 경제에서 종종 등장하는 ‘시카고 보이즈’라는 용어는 미국 방식의 경제구조를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중남미에 적용하려다가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장관들이 주로 시카고 대학의 유학생 출신이었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건설산업과 관련된 몇 가지 한국 사회의 일본형 문제점을 제외하면 중남미형 경제구조에 상당히 가깝게 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금융만큼은 상당히 ‘선진화’되어 있는 우리나라 경제의 다소 기형적인 구조가 이러한 전환이 가속화될 위기를 막고 있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내 판단이다.
 
중남미형 사회로의 전환점
 
‘카우디요(Caudillo)’라고 부르는 토지형 군벌들에게 대부분의 사회 경제의 결과물이 귀속되는 중남미형 경제는 자본주의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스템 중의 하나이다. 토지와 부동산을 매개로 한 소득의 부등가교환이 더욱 심화되고, 지하경제가 GDP의 20%를 넘어가서 음성거래가 늘어나는 몇 가지 사건들이 벌어지면 크기와 상관없이 구조는 중남미형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여러 실물지표들은 중남미형 경제로의 체질악화 아니면 부동산 디버블링에 의한 일본 헤이세이형 장기공황의 목전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조업 성장률 1%, 일본 우정국 민영화를 통해서 이래저래 1경 원 규모의 돈이 국제금융시장에 풀린다고 하는 추가 변수들을 고려하면 사실 한국 경제는 지금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경제는 좋아질 것인데, 다만 소득불균형에 의한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하는 이해찬 총리의 상황 인식은 참으로 안이해 보인다.
 
이 상태에서의 레임덕을 만회하기 위한 청와대 기획통들의 이런저런 프로젝트 만들기, 이것이 불안하다. 한 번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경제살리기’에 매진할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비전이라고 가지고 왔던 소위 로드맵의 논리 근거들을 다시 살펴보기를 바란다.
 
현재 민중들이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답이 없다. 힘드니까 힘들다고 하는 것인데, 지금 힘든 것은 지난 3년 동안의 로드맵과 정책운용 기조가 만들어낸 부작용일 가능성이 높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각계 원로들의 자문을 구하고, 각 진영에서 고민하는 것이 무언지 대화할 필요가 있다. 레임덕을 차단하기 위한 ‘업그레이드된 파워 로드맵’은 이 시점에서는 정말로 위험하다. 
 
노무현의 레임덕 기간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면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서 급속한 경제정책을 취하는 경우다. 그 경우 단기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거대 프로젝트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현재 한국을 보면 이미 혁신도시를 포함해 앞으로 2년 동안 신나게 보상금과 건설비가 지급될 토목공사가 산적해 있다. 여기에서 더 늘린다고 하면 그야말로 ‘대파국’이다. ‘상당히 개성 있던 대통령의 추억’ 정도가 좋지, IMF를 불러 온 YS의 추억 같은 건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
 
* 본 기사는 진보적 월간 <말>(www.mal.co.kr) 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2006/03/06 [12:22]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Posted by 엥란트

참여와 진보의 위선 혹은 역설
[논단] 행복하지 않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우리 안의 위선에 관한 성찰
 
김영국
김대중의 정권교체와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으로 우리 사회에 ‘참여’와 ‘진보’란 테제만큼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도 드물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며 환호했던 노무현 정부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개혁.진보진영은 두 테제에 얼마나 충실했고 얼마만큼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3쯤 채워진 물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기대수준의 차이만큼 다양할 것 같다. 현 정치판에서 그에 관한 논쟁도 곧바로 당돌벌이 소스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많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성과의 정도를 말하기 전에 참여와 진보는 ‘마냥 좋은 것’ 또는 ‘그것만이 살 길’라는 일념으로만 달려온 것은 아닌지 자문을 해본다.

개혁.진보진영이 두 테제를 위해 앞만 보고 줄달음쳐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겠지만 기실 우리가 선 자리는 여전히 출발선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말로 단순한 참여와 진보가 아닌 ‘어떤 참여’, ‘어떤 진보’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구체화해야 될 때가 아닐까.

‘참여’를 줄기차게 외쳤으나 정작 우리의 삶은 황폐화되었고, 신권력층으로 진입한 개혁장사꾼(개장사)들에게 개뼉따귀만 갖다 바친 참여는 아니었는지, ‘진보’를 강변했으나 관념적 희열을 위해 스스로의 삶은 내팽개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단식을 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참여, 그런 진보가 과연 행복했는가. 국민의 93%가 빈부격차가 심각하고 생활수준은 더 나빠졌다며 절규하고 있다는 오늘의 여론조사가 말해주듯이 많은 이들의 답변이 뻔히 예상되지만 ‘그래도 세상은 전진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습관적인 자위,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정권 또는 기득권 옹위에만 몰입하는 경향도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여해서 더 나은(진보적인) 세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은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그 집단적 열정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지금 청와대까지 진출해서 쌍꺼풀(?) 수술하고, 재벌연구소 찾아가 경제 공부하며 폼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억압과 소외에 짓눌린 탓에 우린 참여와 진보의 참 의미를 돌아볼 새도 없이 남에게 돌던져 머리 터지게 해놓고 ‘그것도 내 자유다’라고 외치던, 해방공간에서 광분하던 민중들의 모습을 답습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머리를 위한’ 진보와 ‘생존을 위한’ 진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장을 해왔고, 문명화되었다는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인구의 절대다수가 비정규직과 실직자, 신용불량자, 신빈곤층이란 ‘제3 신분’으로 떨어져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극화, 초극화로 명명되는 ‘빈곤의 문제’를 가장 심각한 과제로 올려놓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주식시장의 활황이 덮어놓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란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의문을 갖게 되기까지 꼬박 50여년의 세월을 정권과 자본의 잘짜여진 프로파겐다에 현혹되어 충견역할에 머물러 왔던 것은 아닐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중들이 가슴속에 품어왔던 ‘참여’의 열기를 쏟아내자 이제는 개장사들이 개혁을 팔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고 곧바로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본색을 들어내며 개혁과 진보의 의미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걸 목도하고 있다.

개도 얻어맞을 골목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노 정권마저 임기 중반을 넘어서자 김영삼, 김대중 정권처럼 수구언론과 재벌가의 뒷골목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보다 선명하게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들도 권력의 중심에 서면’이라는 의문의 꼬리표를 달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진보를 꽃피우기 위해 국보법이라는 이념적 장벽을 걷어내는데 천명이 넘는 사람이 단식을 해가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비정규직 악법 철폐와 권리보장 입법 같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진보에는 단식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회적 무관심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분신과 자살을 하거나, 찬바람 쌩쌩 부는 고공 타위크레인에 올라가 호소했을 뿐이다.

머리를 위한 진보는 ‘단식’을 하지만 생존을 위한 진보는 ‘단념’을 잘한다.
과연 그런 진보가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하지 않는 진보와 개혁은 짝퉁이요, 위선이며, 쓸모없는 짓이라고 까지 말한다면 오바인가.

와각지쟁(蝸角之爭)

고문을 자행했다는 한 의원은 특종에 굶주린 언론에 의해 전국적인 화제거리로 만들어지지만 800만 비정규직의 현존하는 ‘생존고문’에 우리 사회는 별 관심이 없다.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리고자 환장한 개장사들의 ‘참여놀이’에는 촌수도 없는 가계도까지 그려가며 분석해대지만 수백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의 탄생 뿌리와 해결책에는 ‘재미없다’는 것이다.

이기명과 전여옥의 논개잡설 중계와 조갑제의 홈페이지나 뒤지고, 김용갑 의원의 입만 쳐다보며 써갈겨 대는 기자정신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담항설(街談巷說)이나 즐길 요량이면 차라리 ‘정치 선데이서울’로 제호를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언론뿐만 아니라 서민대중은 물론 입만 열면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습성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앞서 예로 든, 잡설에 가까운 정치기사에는 댓글놀이까지 즐기며 왁자지껄한 소동을 빚으면서 방학중 1000만원 짜리 해외연수를 떠나는 부자동네 아이들의 사교육비와 5만원 짜리 교습소를 찾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무료급식과 교회 공부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로 뛰며 스케치한 기사는 진보적 인터넷신문에 댓글 한 줄 없이 방치돼 있다.

어른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즐거운 방학이 어느덧 우리 아이들에게는 빈곤의 대물림 기간이 되었다는 기자의 고발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분노하고 있는가. 틈만나면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우리는 진정 이 나라 교육을 말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하는 개혁장사꾼들 그리고 우리안의 위선

정치권 특히 열린우리당내에서 개혁파란 이미지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사람들이 자당이 얼마나 ‘친기업적이고 반서민적인’ 실용주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과 반발은 커녕 뭐가 문제인지 조차도 모르는 듯 보인다. 이는 비정규직 정부법안을 대하는 그들의 무관심과 안이한 태도만 보더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부나 열린우리당의 경제관련 정책담당자들이 분배가 벗겨진 동반성장론의 가면을 쓰고 연일 수구 기득권에 가까운, 친기업 반노동자적 경향성을 노골화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개혁정당은 고사하고 중도정당에 몸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넌센스(nonsense)이다.

그들 또한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해대는 잘 짜여진 개혁 프로파겐다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개판이고, 노조는 썩었다며 욕하고 뒤돌아서기 좋아하는 서민대중들은 어떤가. ‘비정규직 법안’이 자신들은 물론 향후 자녀 둘 중 하나는, 아니 둘 모두 심한 차별을 강요당하는 제3 신분으로 고착화하는 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사회적 교섭 참여 여부를 놓고 시너를 뿌리며 저항하는 노조를 욕하는데만 몰두한 채 격렬한 대립의 원인이 정권과 자본, 언론의 일방적인 폭격에 맞서 비정규직 법안 개악을 저지하고 권리보장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전략, 전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건 아닌가.

노조를 관료화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의 먹고사는 미래가 걸린 비정규직 법안의 해악을 걷어내야 한다는 대명제의 당위성과 절박성마저 씹어 삼켜서는 안된다.

노 정권이 아무리 열녀전(개혁)을 끼고 서방질(보수화)해가며 국보법을 비롯한 4대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기만했다고 해서 그 법안 취지의 당위성마저 부정되는 것이 아닌것처럼.

노무현 정권이 재벌, 수구언론과 한통속이 되어 탄생시킨 각종 친재벌적 정책들과 노동 관련법들이 향후 우리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비판적 참여 없이 훗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만 늘어 놓는다면 과연 양심적인 일인가.

새 이정표 세우기

이제 우리는 참여속의 진보라는 슬로건 자체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참여이며 진보인가를 분명히 해야 될 때가 됐다. 서민대중의 삶의 황폐화를 의미하는 경제적 양극화라는 아젠다를 ‘우리 자신의 먹고사는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논쟁과 참여에 관심과 정열를 쏟아부을 때이다.

북핵위기가 고조될수록 한반도 평화와 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서도 개성공단 사업 같은 남북경협 활성화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 모두가 상생하는 길위에서 돌파구를 찾겠다는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견지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적 사회발전이란 정당한 ‘분노’들이 사회적 운동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결집, 조직되어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표출될 때 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건 수많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염원하는 경제적 아젠다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개혁.진보진영은 진가를 발휘할 호기를 맞고 있음에도 자기모순적 시행착오와 분열, 도덕적 헤게모니마저 날려버릴 자중지란을 노정하면서 이렇다할 대응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갈수록 보수화되는 정권과 자본의 의지대로 현 상황이 굴러가도록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듯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끝내 현재의 개혁, 진보정당이나 단체들이 성에 안차 ‘새로운 정치주체의 탄생’이란 큰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면 비정규직, 실직자 등과 같이 제3 신분으로 굳어지고 있으면서 법과 노조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과 행복을 지켜주는 등대이기를 고대한다.

개혁.진보적인 단체와 언론매체, 지식인, 네티즌들의 분발을 거듭 당부하고 싶다.

물 한방울 없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담벼락도 여럿이 손잡고 한뼘 한뼘 올라가 기어이 넘어서고 마는 진보 담쟁이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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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7 [16: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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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