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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변희재에 낚인 우석훈…세대론은 계급문제로 가는 '우회로'

[레디앙] 박권일『88만원 세대』공저자 

2009.1.30

88만원 세대론이 결국 우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것도 <조선일보>가 파놓은 '독우물'에. 오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최근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다. 글이 좀 긴 편이니 사태의 전말을 일단 한 줄로 요약하자.

   
  ▲ 필자
'<조선일보>가 한껏 띄우고 있는 어떤 세대담론에 대해 『88만원 세대』의 우석훈이 <한겨레> 지면을 통해 격려와 지지를 보낸 사건'이다.

88만원 세대론을 기묘하게 비틀다

사실 극우언론이 진보담론을 멋대로 전유하고 이용하는 게 어제오늘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가지고 미리 세팅해놓은 담론구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우석훈이 자진해서 발을 담갔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짚어두자.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으로서 어떤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건 아니다. 그 책을 읽은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이 말을 소화하든 그것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이 아닌 <조선일보>라는 언론매체에서 기획연재를 맡은 변희재가, 『88만원 세대』의 우석훈을 간접 동원해서 88만원 세대론을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어놓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웃고 넘어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이런 글을 써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한동안 함께 작업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지식인인 우석훈에게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이 영 불편하고 어색하다. 공저자 두 명의 시답지 않은 갈등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전선'을 좀 명확히 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무엇보다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이 아직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역할을 조금 더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일말의 진보적 의미를 읽어냈을 많은 독자들에 대한 작은 '애프터 서비스'다.

변희재의 '노이즈 마케팅'

'실크로드 CEO포럼 회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는 변희재는 <조선일보>에 '실크세대를 찾아라'라는 기획연재를 진행중이다. 변희재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테니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TV 탤런트 분석서 <스타비평>이 데뷔작이며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동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안티포털 운동가'로, 요즘엔 <조선일보> 논객으로 활약중인 인사다. 최근작으로는 <코리아 실크세대 혁명서>가 있다.

그가 <조선일보>와 함께 최근 열심히 밀고 있는 담론이 소위 '실크세대론'인 것 같다. 자신이 소개한 글에 따르면 '실크세대'란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세대를 말한다"고 한다.(아래 링크 참고)

낡은 386은 가라 20-30대 실크세대가 간다
실크세대론과 88만원 세대론의 소통을 위하여

아무래도 실크로드 CEO포럼이란 단체에서 따온 말인 것 같다. '실크로드 CEO포럼'은 그럼 뭘까. "71년생 이하의 기업가들의 조직으로서 청년 창업의 붐을 조성하기 위해 2007년 6월 3일 출범하였다. 기업가들 이외에도 71년생 이하 대중문화 평론가, 시의원, 언론운동가 등등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하여 명실상부한 세대조직으로 성장하고 있다."

사실 이걸 읽어봐도 뭐하는 단체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저기에 '건설업체 사장'만 끼어있으면 어디 지역토호 모임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겠다.

변희재는 2008년에 나에게 몇번 연락을 시도했다.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게 2007년 8월이니, 책이 나왔을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 88만원 세대 담론이 시쳇말로 확 뜨고나자 연락을 취해왔다는 이야기다. 아마 우석훈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즈음 변희재가 어떤 단체를 꾸려 모종의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별 반응이 없자 그는 이번엔 "88만원 세대론을 폐기처분해야한다"며 실크로드 CEO포럼 명의의 공개토론서를 어딘가에다 발표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그 글을 나도 읽어보긴 했다.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대꾸하기조차 민망한 글이었다. 요컨대 "88만원 세대는 386을 예찬하고 20대를 폄하하는 나쁜 용어이니 폐기하라. 그리고 비겁하게 숨지말고 우리와 같이 세대 명칭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정도다.

내 잠정적 대답은 "고생하시는데, 일단 책부터 끝까지 읽으셔야죠"였지만, 사실 그런 대답조차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변희재의 수법은 똑똑한 중학생도 알고 있는 그것, '노이즈 마케팅'이기 때문이다. 만약 변희재가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었다면 내 대답은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지난 수년간 곳곳에서 그 수법을 너무 많이 써먹는 바람에 소위 이 바닥의 알만한 사람들은 전혀 '낚이질' 않게 됐다는 거다.

‘근성남’ 변희재, 우석훈을 낚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변희재가 하고싶은 말은 결국 "88만원 세대 대신 내가 만든 실크세대를 써야한다"는 소리가 전부다. 설령 토론을 한다해도 386에 대한 비난, 세대명칭에 대한 공방 밖에 나올 게 없다.

실크세대라는 명칭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일보>가 그토록 싫어하는 386세대를 비난하기 위해, 88만원 세대가 일방적으로 동원될 뿐이다. 그러면 책의 핵심이라 할 20대들이 처한 구조적 모순들에 대한 논의는 연기처럼 날아갈 게 분명하다. 그런 사태야말로 상상가능한 최악의 경우다.

그런데 1월 14일자 <한겨레>에 실린 우석훈의 칼럼이 '최악의 경우'를 현실로 만든 것 같다. '20대 당사자 운동과 변희재의 실크세대'라는 글이 그것이다.

그동안 변희재는 박권일보다 훨씬 학식과 명망이 높은 우석훈을 집중공략 했을테고, 우석훈이 변희재의 근성과 열정에 감동을 했거나, 아니면 귀찮아서라도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이 글이 실크세대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이라 보긴 어렵다. 텍스트 자체의 밀도를 봐도 변희재의 활동에 대한 그저그런 수준의 '덕담'이라 보는 게 공정하리라. 하지만 이 심심하기 짝이 없는 글 하나가 가져올 효과는 작지 않다.

88만원 세대론은 이제 조선일보의 실크세대 기획의 '부록'으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또한 이것이 우석훈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응이라 할지라도 변희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이 글을 써먹을 것이다.

'20대 진보 활동가'의 근황

우석훈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변희재와 그의 동료들이 ‘실크 세대’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운동처럼 하는 것도 일종의 당사자 운동이다.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에는 좌파 버전이 있을 수 있고, 우파 버전이 있을 수 있고, 또 전혀 상관없는 중도 ‘소통 그룹’이 있을 수 있다. 창업 운동이 먼저 움직인 형국이고, 다른 운동은 이제 막 움을 틔우는 상황이라는 게 내가 이해하는 현 상황이다."

   
  ▲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확인해 본 상황은 우석훈의 판단처럼 한가롭지가 않다. 특히 우석훈이 관여한 20대 당사자 운동들은 변희재의 '그 단체'보다 먼저, 더 왕성하게, 더 20대답고, 더 진보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악전고투, 아니 지리멸렬하고 있다.

20대 당사자 운동단체인 '희망청'의 경우를 보자.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힘을 얻어 뭔가 해보려했던 20대 활동가들이 "우리가 무슨 이벤트 대행업체냐"며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최근 한 명만 빼고 전원 그만뒀다고 한다.

'20대 저자' 데뷔 프로젝트 역시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알기로 애초에 우석훈이 관여한 팀이 세 개였다. 그런데 정작 구성원들은 자기들 외에 다른 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어 '설마 우리를 경쟁시키고 있었던 건가?'라는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두 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공중분해됐고, 나머지 한 팀이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개인적 열정과 지원에 힘입어 겨우 살아남은 상태다. 물론 책이 언제 나올지, 나올 수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나 역시 이 팀에 '코가 꿰어'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상태다.

나는 이들 당사자 운동이 지리멸렬하는 것이 우석훈의 책임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지금 우석훈이 <조선일보>-변희재와 함께 'CEO 운운'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거다.

88만원 세대론의 '약한 고리'

위에 적은 것들이 이번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핵심이라 할 수는 없다. 심지어 88만원 세대가 실크 세대가 되든, 앙고라 세대가 되든 그것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근본적인 문제는 『88만원 세대』가 글자그대로의 '세대론'에 갇혀버리는 상황이다.

처음 우리가 『88만원 세대』를 기획할 때 나는 20대, 구체적으로 20대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기자생활을 할 때 가장 열심히 썼던 기사들이 비정규직, 저학력, 여성노동자 문제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열악하고 위험한 지역일수록 봉사 점수가 높아 취업에 유리하다"며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는 어느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아득한 느낌, 내 안의 무언가가 송두리째 무너지던 기억이 그것이다.

우석훈은 "20대보다는 10대에 희망을 걸어야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고, 실제로 『88만원 세대』는 10대의 동거권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석훈의 통찰이 20대 문제를 분석할 때도 날카롭게 발휘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우석훈은 우파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면 '세대'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의 영민한 지적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말처럼 순조로울 리 없었다.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쉽다. 그래도 새로운 형태의 계급모순들을 세대모순의 형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이 센 세대, 이른바 386세대 비판은 필수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변희재가 주장하는 '이게 다 386, 특히 진중권 때문이다' 식의 억지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88만원 세대가 뚫어내야 하는 벽은 386세대 개개인이 아니라, 386세대가 싸우며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20대에게 굴레와 질곡이 되어버린 사회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88만원 세대론'은 단순히 세대끼리 싸움 붙이는 담론 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88만원 세대론이 진짜 ‘소통’해야하는 사람들

   
  
<조선일보>는 괜히 1등 신문이 아니라서 『88만원 세대』가 출간되자마자 이 부분을 치고들어왔다. 2007년 8월 24일자에 실린 박해현 문화부 차장의 칼럼 '포스트 386의 봉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잠깐 그때로 돌아가보자.

"현실 공간에서 386과 포스트 386은 경쟁사회의 원리에 따라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됐다. 정치·사회적으로 기득권 세력이 된 386세대가 포스트 386세대를 위해서 한 일이 없다는 비판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나온다. 386과 포스트 386의 투쟁은 정치적 이념적 차원에서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에 대한 판정을 대행한다." (강조는 필자)

나는 이 칼럼 하나에 <조선일보>가 세대론에 집착하는 이유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단언한다. 이 칼럼의 대단한 점은 이후 무수히 쏟아지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세대론이 노리는 부분까지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변희재의 '실크세대론' 같은 글을 '무려' 기획연재물로 실어주는 건 <조선일보>가 젊은 필자 하나를 북돋아주고 싶어해서가 아니다. 20대 이하의 세대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눈감아 버린 채 오직 386세대만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다.

게다가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저 발언을 보면서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탐욕스러운 유태인’과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지만 유태인들 때문에 고난을 겪는 아리아인‘을 명확히 구별한 콧수염 달린 어떤 사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거인 자크 랑시에르는 인간 능력의 차이를 과장하고 강조하는 담론들이 얼마나 무용하며 해로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인류에게 절실한 것은 '만인의 역량'을 각기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분류하고, 차별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능력은 동일하다. 다만 그 세대가 처한 환경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386세대의 성찰을 요구하고 그들이 88만원 세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며 잡아주어야 한다고 했던 『88만원 세대』의 주장과, 386세대는 사회적 해악이며 투쟁의 대상일 뿐이라는 주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우리가 정말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나 변희재같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통해야할 사람들은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전략)이날 모임에선 세대간 불평등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88만원 세대론'이 도마에 올랐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담론"이란 의견이 많았다. 노동시장의 '인사이더'에 대한 보호장치가 두터워 청년 세대의 신규 진입이 쉽지 않은 유럽과 달리, "외환위기를 계기로 일자리 보호장치가 파괴된 한국의 경우엔 불평등이 모든 세대에 걸쳐 증가하고 있다"(김영미)는 이유에서다.

"젊은층이 88만원 세대라면, 고령층은 50만원 세대"(박경숙)라는 지적과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우파 담론에 88만원 세대론이 이용당하고 있다"(한준)는 비판도 이어졌다. (후략)" ('한국사회 불평등 핵심고리를 천착하라'-비판사회학회 불평등연구회 <한겨레> 2009.1.12) (강조는 필자)

학자들 뿐만 아니다. 충남 서산에는 100% 비정규직 고용에, 법정최저임금‘만’ 주기로 악명이 자자한 동희오토라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콘베이어벨트를 타고있는 노동자들 대다수가 20대, 즉 88만원 세대에 속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청년들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중 한명으로서 내가 늘 부끄럽고 고민스러운 건,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가 이른바 명문대생이란 점이었다. 정작 88만원 세대에 한없이 가까운 20대들일수록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읽지 않는다.

지난 일년 반 동안 나를 괴롭혀온 숙제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좀체 사라지지 않을 화두다. 자,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한줄 요약이다. “<조선일보>와 변희재는, ‘소통’하기 전에 줄부터 서시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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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한윤형] 우석훈, 말의 덫에 빠졌다(2009.2.10)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0143820


ㅁ 변희재, "진중권 등 낡은 386 퇴출되어야"
조선닷컴에 386 비판글 기고, 치열한 댓글 논쟁(2009.1.26)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291


ㅁ 변희재, 진중권을 다루는 젊은 기자와 작가들에게
"당신의 전문분야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2009.1.27)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296


ㅁ 변희재, "언론노출 장사꾼, 진중권은 늙은 강의석"
실력없이 불러불러주는 대로 방송출연하는 비즈니스맨(2009.1.27)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294


ㅁ 진중권, “<조선> 변듣보 데려다 칼럼 채우는 신세라니..”  
“피해망상자를 방송·인터넷 까는 일에 내세워” 변희재 힐난(2009.1.27) ==>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6596

ㅁ [목수정의 진중권 옹호 변희재 비판 글] "희재야, 극우형님들 귀염받으며 잘 살아보렴"  
'진중권 스토커' 변씨를 보고 있자니…"오죽 할 짓이 없었으면"(2009.1.31)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472

:
Posted by 엥란트


조봉암 진보당 학살은 헌정사상 대사건
<조봉암의 진보당>은 오늘의 양극화 사회를 막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
 
김영국
조선일보·경향·민노당 한목소리, '조봉암 명예회복 서둘러라'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조선일보 2007.9.29일자 사설 '조봉암(曺奉岩)'의 결론)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경향신문 2007.9.29일자 사설)

"1959년 조봉암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 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민주노동당 2007.9.28일자 대변인 논평)

한 '진보 정치인'의 명예회복을 놓고 반공·보수의 아성인 조선일보와 진보·개혁신문의 대표 주자인 경향신문, 그리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좌우합작'하여 한목소리로 고무·찬양하는 경사스런(?) 일이 오늘(29일) 벌어졌다.

"조선일보가 왠 일로...", "도대체 우리 역사 속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무엇이길래..." 모처럼 벌어진 스스러운 광경에 뜨악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죽산(竹山) 조봉암과 진보당은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통일 방안으로는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여 무려 216만여 표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반공보수·독재자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한 명실상부한 '진보적 정치세력'이었다.

특히 조봉암의 216만여 표는 당시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조봉암의 좌파 성향을 문제 삼아 야권 연합 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는 등 비열한 정치행보를 보임으로써 무려 185만여 표에 이르는 무효표가 발생한 가운데 거둔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컷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은 대선 결과에 위기 의식을 느낀 독재자 이승만으로부터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쓴 채 처형되고 진보당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에 대해 지난 9월 27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과와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조봉암 진보당>의 타살 그 후 '비정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고려 후기 묘청의 서경 천도 좌절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자주파와 김부식의 사대파와의 싸움에서 김부식 파의 승리와 묘청의 좌절을 두고 '한국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했다. 즉, 단재는 사대파의 승리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단재의 이 비판은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판정에 앉아 있는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맨 앞이 이승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     © 민주화운동기념자료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한 사법살인 이후 한국 사회는 친미사대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에 주류를 차지했고, 야당 또한 개량적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돼왔다. 그 결과 오늘날 약육강식의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민중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진보당 타살 이후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사 또한 일제-친일파, 미제국주의-친미파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탄압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찾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2007년 오늘도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 보수 독점 체제라는 또 다른 거센 도전을 만나 진보좌파의 가치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고, 진보 운동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가히 조봉암 진보당의 학살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일대 사건이요, 현대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이자 가장 유력했던 '진보정당'이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반공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대사건이었다.

<조봉암 진보당>의 가치와 대안들, '2007년에 살아 숨쉬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마저 '은사죽음'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에 내세웠던 '진보좌파'적 기치(旗幟)와 대안들이 마치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오늘의 서민대중들을 구하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과도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5년 12월 22일 발표한 창당 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을 살펴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확연해진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하고, <강령>으로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 등을 내세웠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진보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조봉암의 진보당 노선이 중증 상태인 2007년의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볼수록 오늘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대안을 미리 마련코자 한 '선각자의 예지(銳智)'마저 느껴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 당시처럼 야당의 주도세력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정글 법칙'만이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비정한 사회'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 조봉암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신문인 <대자보>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진보·개혁 정당이 이 땅에 견실(堅實)하게 자라나 서민대중들이 극심한 양극화의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아래는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정문 전문'이다. / 편집위원

◆ ‘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끝)



☞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 전문'(진실화해위원회, 2007.9.27) 바로가기

☞ [조봉암 생전의 모습과 장녀 조호정 씨 인터뷰 동영상] "국가가 사과하라"…죽산 조봉암 선생은 누구(SBS, 2007.9.27)

☞ [조선일보 사설] 조봉암(曺奉岩)(조선일보, 2007.9.29일자)

☞ [경향신문 사설] ‘조봉암 신원(伸寃)’과 사법부(경향신문, 2007.9.29일자)

☞ [민주노동당 논평]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민주노동당.뉴스와이어.파란, 2007.9.28)

☞ 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한겨레신문, 2007.9.28)

* 글쓴이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9/29 [22:4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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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노무현과 조선일보, 정태인의 '사랑과 전쟁'
한미FTA가 만든 '노무현-조선' 동맹 VS '얼굴있는 딥 스로트' 정태인
 
김영국
한미FTA가 맺어준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불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졸속 추진은 전형적 한건주의이며 남은 임기 안에 업적을 남겨보려는 대통령의 조급증이 그 원인이다. 현재 盧정부는 조급증에 걸려 제 정신이 아니다.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미 FTA는 대연정에 이은 대패착이다.”

“이 전직비서관의 ‘싸가지 없음’은 말 그대로 ‘정치 도의’나 ‘일반 윤리’ 차원에서, 또 ‘참모학 개론’에 입각해 볼 때, 대통령이 아닌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괘씸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이 땅의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노대통령의 결정을 환영하고 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들이 지난 3년 대통령 옆자리에서 나라를 주무르고 미래의 청사진을 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니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하다.”

위 발언들을 보고 단번에 누가 했을 것이라며 특정인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위에 발언은 월간조선 조갑제씨나 구민주당 박상천씨의 말이 아니다. 밑에 발언 역시 조기숙 전 청와대 수석의 말이 아니다.

위에 독설을 한 당사자는 얼마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던 청와대 비서관 정태인씨이다. 그는 노빠주식회사 사장 유시민 장관의 친구이기도 하다. 밑에 정태인씨를 비난하며 노 대통령을 적극 엄호하고 나선 발언은 반공.보수신문의 대표주자 조선일보의 사설과 외부 칼럼 내용이다.

비호감에다 성격도 달라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던 남녀가 서로 미워하다 어느덧 정들어버리자, 남자쪽에서 조강지처를 차버린 경우라고나 할까.
노 대통령이 새 애인이 된 조선일보로부터 이처럼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조강지처 버린 사람 치고 잘 되는 사람 없다'고 그는 여전히 국민 대다수로부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본가에서는 '내논 자식' 취급받고, 새애인 집안으로부터도 천덕꾸러기다.

한미FTA가 결정적으로 다리를 놔준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플라토닉 불륜'. 결혼당시 하객들에게 맹세한 약속을 지켜보겠다며 바람피는 남편에게 바가지 좀 긁다 소박맞은 정태인. 그들이 요즘 언론 지면을 통해 '가사재판'을 받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때만해도 노 정권 아래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하객들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나 좀 뜨악하긴 해도 이젠 이런 모습조차 낯설지 않은 지 오래다.

노 대통령이 386 친노직계 중 삼성과 죽이 잘 맞는 그룹(특히 의정연구센터 소속 의원들)과 함께 그를 지지했던 개혁.진보진영을 배신해온 전력이 너무도 화려하기 때문이다.

대북송금 특검에서 이라크 파병, 분양원가 공개 반대, 친재벌 경제정책, 삼성 X파일 공개 물타기, 한나라당과 대연정 추진 등을 거쳐 한미FTA로 대미를 장식하려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이 찰 지경이다.

이런 사태가 날 때마다, 2002년 노무현을 찍었던 알토란 같은 지지자들은 실망과 배신감으로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둘씩 떠나갔다. 아직도 동류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곤 남은 임기동안 한몫 잡아보려는 사람들밖에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개혁.진보진영 일부에선 '한미FTA 올인'으로 미국의 속주(屬州)도 불사하려는 듯한 '盧의 객기'에 경악하며, 이제는 그를 세운 사람들이 나서 국민에 대한 속죄의 심정으로 '노 대통령의 민중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는 형편이다.

탄핵반대를 외치며 그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들고 일어나 탄핵을 요구할 판이다.

버림받은 조강지처(糟糠之妻) 정태인의 절규

정태인씨가 버림받게 된 진짜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행담도 개발사업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정치적 부담감으로 물러났으나 이는 지난 2월 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났다.

요새는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사람이 한미FTA 관련 자기를 비난한 신문의 사설(칼럼) 기사가 실린 곳마다 "이 글을 내리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입니다"란 댓글까지 달아가며 딱한 처지가 됐다.

또한 최근 그의 언론 인터뷰나 기고 등을 살펴보면, 한미FTA에 대한 노 정권의 무모함을 견제하려다 정부내 친미 개방론자들에게 밀려났다는 추론도 꽤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한미FTA 관련 정태인씨의 주장은 절박함을 넘어 절규에 가깝다. 그의 주장 핵심은 이렇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IMF 관리체제에서 겪은 변화보다 여러 방면에서 예측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국가와 국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한미FTA 협상이 작년부터 '깜짝쇼'하듯 본격화됐다.

그런데 이를 추진하는 정부내 협상 주도세력인 친미 개방론자들이 세계 최강국이자 FTA 협상 경험이 풍부해 능수능란하기 그지없는 미국을 상대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준비와 지극히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달리듯 유효한 협상 카드마저 미리 퍼줘가면서 10개월이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안에 미국과 대등한 수준에서 우리의 국익을 확보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FTA를 추진한다 하더라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한-아세안 FTA, 한-러 CEPA, 한-일 FTA에 의해서 중간지대를 설정한 후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이용해 최대한 실리를 챙기고, 국민들에게도 앞으로 올 이익과 피해를 샅샅이 알리고 절차에 따라 동의를 구해가면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 최강을 상대로 하는 협상에 앞서 우리 정부의 준비 부족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 부족은 형편없다 못해 기가 찰 정도다. 이는 경제전문가들은 물론 한미FTA를 지지하는 쪽에서도 공히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외교부 고위관계자조차 "솔직히 하면 좋다는 감(感)으로 하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엄청난 대사인 한미FTA가 소수 무책임한 관료의 감으로 결정될 일이라니...굳이 정태인씨가 아니라도 그 황당함에 치를 떨만한 일이다.

외교관례상 비밀이라서 공개하지 못한다지만, 미국의 전략은 이미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가 의회에 보고하고 공개해 우리도 그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관료주의와 철저한 비밀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한미FTA 관련 보고서가 기껏해야 3개 정도 밖에 안되는 데다 종합적인 연구보고서는 내년에나 마무리 되는 실정이다.

일이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진행되고 있는 이면에는 노 대통령의 '정권 작품'을 남기고 싶은 '조급한 한건주의'와 이를 부추기며 무조건 개방론에 매몰된 '친미 관료들의 합작품'이란 게 정태인씨의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을 마치 우리가 주도한 것처럼 광고하는 꼴이 됐고, 미국의 중국 견제 의욕과 TPA로 자국내 일정의 촉박함 등 미국의 약점을 우리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데도 다 날려버린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미FTA를 합리화하기 위한 정부의 주장은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사실의 조작에 기초한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분명한 미국측 의도 '대한민국의 미국 속주화'

정태인씨의 절규에 가까운 우려는 미국측이 공개한 협상전략인 미 무역대표부(USTR)의 '한미 FTA 협상 통보문'과 '연례 무역장벽 보고서'를 살펴보고, 우리 정부와 국회의 안이한 실태를 돌아보면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정태인씨는 작년 5월 현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FTA 업무를 총괄하는 실무책임자 중 핵심(사무차장)이었다. 따라서 정태인씨의 주장은 어떤 면에선 한미FTA 추진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의 어이없는 실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내부 고발 성격이 강하다.

한마디로 한미FTA에 관한한 한국 정부의 '얼굴있는 딥 스로트(Deep throat)'에 가깝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미FTA 협상 결과가 상당부분 미국측의 강한 집착대로 귀결된다면, 먼훗날 역사는 두말할 것 없이 대한민국을 미국에 팔아먹은 '제2의 을사늑약'이라고 평가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점에서 작년 11월에 을사늑약 100돌을 맞아 조약 체결 당시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의 생생한 비화가 공개됐던 일은 정태인씨 같은 용기있는 정부 관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후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준 귀감이다.

미국의 협상전략은 앞서 말한대로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대로 된다면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미국 속주화(屬州化)"다.

비단 상품뿐만 아니라 금융, 서비스, 통신, 지적재산권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미국 제품을 국내산과 똑같은 자격으로 팔고, 문제가 발생시엔 미국법으로 처리해 자국 기업만은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불법복제 의혹이 있을 경우 지적재산권 강화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까지 압수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어떤 법률을 제정할 때 미국측에 통보하고 사전에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 기존 법률도 미국식대로 개정토록 압력을 넣겠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정부 정책을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하고, 입법권이 대한민국 국회에 있는 게 아니라 미국의 간섭하에 놓이게 되면서 자주권이 침해되는 건 당연하다.

이를 두고 이미 국내 곳곳에서 슈퍼파워 미국이 FTA로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하려드는 것 아니냐며 긴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농업 부문의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한미FTA 타결시 큰 혜택을 볼거라며 들떠있는 섬유, 의류 같은 분야도 ‘얀 포워드(Yarn Forward)’ 유지와 원산지 규정 강화, 반덤핑ㆍ상계관세 등으로 한국에게 큰 실익이 돌아갈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측 협상안에는 노 대통령이 말한 ‘우리가 양보 못하는 절대 조건’들이 너무나 많다.

조선일보가 이런 미국측의 협상 전략을 보고서도 한미FTA를 적극 옹호하기 위해 정태인씨를 인신공격했다면, 그들은 미국의 협상통보문을 본국이 국내 CIA 지사에 내린 훈령쯤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밖에 볼수 없다.

정태인씨가 맘에 안들어 인신공격할 수도 있지만 그가 말하는 핵심 논란은 어디까지나 '한미FTA 협상이 현재 적절하게 추진되고 있는냐'이므로 최소한 이 부분에 대한 코멘트는 있어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국측의 압력보다 노무현 정부가 더 몸이 달아 설레발 치고 있다는 현실이다. 우리 정부가 한미FTA에 미쳐서 서두르느라 제대로된 협상이나 대응은 커녕, 미국측이 제시한 문서를 읽고 서명하는데 급급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

우리 정부의 미국측 일정에 맞춰가야 한다는 강박감, 노무현 정권의 '치적 만들기'에 대한 조급함, 한미FTA 타결시 국익에 대한 조잡한 분석 등 위로부터 쏟아지는 악조건들.

여기에 한미FTA에 대한 생소함과 난해함 등으로 국민들조차 장래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국가 중대사에 대한 무감각과 지독한 정치 무관심, 월드컵 광기를 이용한 장사에 미쳐있는 방송사와 거대신문사의 외면 등으로 한미FTA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각성에 따른 '국민적 대응 동력'의 부재.

그야말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은, '환상의 조건'들이 갖춰져 가고 있다.

온 국민이 월드컵 광장에서 춤추고 즐기는 사이 제2의 강화도조약이 씨익 웃고 지나갈 판이다.


생각할수록 뭔가에 홀린듯 답답함이 밀려온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불륜 그리고 소박맞은 정태인의 청승(?)을 보면서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를 상담하는 모 방송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 떠오른다. 거기에 신구씨가 마지막에 늘 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그 대사를 성대모사하는 셈치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한미FTA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어렵고 귀찮겠지만, 그토록 생소하기만 하던 IMF가 우리의 삶을 무자비하게 할퀴고 간 교훈을 부디 잊지 말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고쳐야 할 지를 생각해봅시다. 6월이면 한미FTA 협상도 본격화됩니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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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5 [23: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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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