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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2.23 타락해 가는 동반성장과 ‘만원의 행복’(2005.1.28)

타락해 가는 동반성장과 ‘만원의 행복’
[신년 제안] 이기준에서 김진표, '언저리 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2)
 
김영국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김진표 교육, 타락해가는 ‘동반성장’의 속살

교육부총리 인선을 두고 이기준, 김효석, 그리고 김진표로 이어지는 잇따른 ‘장고끝 악수(惡手)’는 올해 벽두부터 꺼내든 노 정권의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이란 화두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퇴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다.

후임자로 지목된 이들이 각각 ‘부도덕 종합세트’, ‘치졸한 연정’, ‘투기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듯 노 정권의 동반성장의 논리가 얼마나 ‘친재벌, 퇴폐적 성장론’에 마취된 채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지를 보여주는 시그널이 아닐 수 없다.

재임기간 동안 100조원이 넘는 부동산값 폭등, 분양가 원가 공개 반대, 이라크 파병 적극 찬성, 강북 특목고와 판교 학원단지 설치 주장, 무소불위의 상징인 재경원 부활론, 삼성그룹 예찬론 등 교육수장으로서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절감’ 의지는 커녕 교육마저 사교육 투기장으로 전환해 ‘재계가 요구하는 자판기’로 만들겠다는 속셈이 아니라면 이런 인물을 편집증적으로 고집하는 인사권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런 사람을 경제부총리로 다시 경제를 맡기려 했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은 그의 동반성장론 속에 감추어진 ‘타살된’ 분배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교육계는 물론 시민사회가 총력으로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퇴진은 물론, 설사 불발되더라도 향후 철저히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오죽하면 한나라당이 겉으론 반대하면서 노 정권의 실패를 보장해줄 원군으로 여기고 차라리 그냥 놔두고 보겠다 했겠는가.
정권이 타락 조짐을 보이면 이를 견제해야 할 열린우리당의 잇따른 감싸기와 총력방어 추태는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부적격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나서면서 이참에 타락의 맨홀에 함께 빠져들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최근 노 대통령의 잇따른 인사가 인재풀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려 들지만 터무니 없는 변명이다.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로 이어지는 참여정부 핵심의 인사 패착은 인재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작심하고 부패한 ‘경륜’장에서만 사람을 고르는 ‘인식풀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폼나게 드리블 하다 비정규직, 신자유주의 골대앞에 연속 ‘똥볼’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선진경제 진입을 위한 성장-분배의 동반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올해 주요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 진단과 처방책 일부를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위기 해소를 위한 교본’ 첫 장에 나와있는 목차는 잘 외우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각론은 제대로 읽지 않은 듯 보였다. 어떤 부분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거나, 아예 읽지도 않은 모양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 위기극복의 핵심이 양극화 해소에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으나 그 처방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있거나 실행하고 있는 ‘수박 겉핥기식’ 정책의 나열에 그치고 말았으며,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처방의 유효 적절성은 차치하고라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양극화를 사실상 조장해온 정부정책의 과오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기업 노조의 양보는 얘기하면서도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노동자 서민을 위해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 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은 재벌 환심사기 퍼레이드였다.

특히 비정규직의 무차별적인 확대를 가져올 수 있어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비정규관련법의 조속한 국회처리를 언급하고 밀어붙이려는 안이한 태도, 사회적 대타협을 이야기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노동계를 매도하거나 공격하는 데 열을 올려온 이중성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 맹종적 도입의지만 강조함으로써 양극화의 심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나라가 고루 따뜻해지기 위해선 신자유주의란 ‘보일러’를 먼저 점검하는 게 순서라는 일각의 당연한 지적은 외면한듯 보였다.

분배개선과 관련 조세, 재정, 노동, 복지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분배-재분배 방안의 제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분배가 자칫 조금 나은 서민과 정규직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분배’를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그래서 나왔다.

결국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축구선수처럼 ‘선진경제’를 가슴에 달고 폼나게 드리블하다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 골대 앞에서 연속 ‘똥볼’을 차버린 셈이다. 한국 축구의 고질병인 문전처리 미숙이 여전함을 확인하면서 씁쓸함을 곱씹어야 했다.

노 대통령이 틈만 나면 외치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장미빛 전망도 좋고 나쁨을 떠나서 1인당 국민소득이란 것 자체가 국내총생산을 총인구로 나눈 것이기에 그안에는 기실 분배의 개념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연간소득이 1백만 달러인 사람이 1백만명(경제활동인구의 5% 미만)이고 나머지 경제활동인구는 소득이 전무하더라도 2만달러는 달성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직하지 못하는 밑바닥의 유권자들에게 2만달러라는 ‘약속’은 정부의 진정성 여부에 따라 언제든 고통 전가의 캠페인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2만달러 시대론은 애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파이를 빨리 키워한다며 강조한 지론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련화한 것이고,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 핵심들이 경제에 관한 재계의 고귀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 배려보다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깃든 것이다.

투명성 강화와 재벌총수의 전횡 방지를 위해 재벌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을 향해 ‘외세를 등에 업고 삼성의 지배구조에 흠집내려는 작자들’이라는 논리가 국민소득 2만달러 구호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소득 2만달러’의 구호는 서민가계 회복과는 사실상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용카드 남발, 건설경기 부양, 재벌 등 대기업의 경상이익에 의존해온 성장은 서민대중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유지하기 위해 ‘효자 노릇’을 하는 대기업를 더 키워주는 동시에 건설경기를 최대한 부양시킬 수도 있다. 실제 참여정부를 비롯 역대 정부의 정책기조가 대체로 그래왔다.

국민소득 2만달러는 ‘환상’은 아니다. 최근 십여년간의 GDP 추이를 보면 2010년 2만달러 달성은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환율이 하향 안정화가 지속된다면 국민소득의 증가가 예상에 못미쳐도 목표는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 지가 먼저다. 약자를 딛고 서는 방법으로는 설사 2만달러가 돼도 약자인 서민대중은 여전히 빈곤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외침은 재계와 여.야 보수정당, 수구언론의 환호속에 노동.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되레 ‘양극화’를 불러왔다.

심지어 한나라당 마저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선진한국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환영하고 나설 정도였다. 노 정권과 재벌, 수구언론, 한나라당의 ‘新 4자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위용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경제가 어렵다’며 아우성치는 수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의 목소리에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서민 후보’로 인식하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겼다며 호들갑 떠는 일각의 성급한 해석은 이처럼 초장부터 어긋나고 있다.

분배정책에 관심조차 없는,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들

앞서 지적한 대로 노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 나타난 현실인식에 대한 안이함과 공허함 그리고 대안의 구체성과 종합성, 균형감, 이를 가능케 할 사회적 합의 방식의 제시 없이 내용과 의제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지적은 전문가, 언론,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진보진영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충분히 나왔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 아래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대통령의 구상을 행정과 입법으로 실행에 옮기게 될 정부관료와 여당의 대응은 답답하다 못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노 대통령 구상의 실질적 주무부서인 경제총수와 노동부 장관은 과연 이들이 그나마 대통령의 의지조차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헌재 부총리는 오늘날 신용카드 대란의 주범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일까. 저소득층에 대한 일부 원금탕감을 시사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헌재 같은 사람에겐 씨도 안먹히는 모양이다. 그는 참여정부 내에서 시간벌기와 물타기로 분배적 관점의 정책들을 뒤엎는 데 ‘귀재’ 노릇을 해왔다. 실패자란 평가가 지배적인 이헌재 부총리가 돌아온 또다른 실패자 김진표의 교육부총리 입성을 지원사격하고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정도다. 노동계를 향해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적대감을 보여오다 자신의 제자들로부터도 부끄러운 장관이 돼버린 인사가 노사정 대타협을 위한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며 손을 내밀수 있을 지, 그 손을 노동계가 흔쾌히 잡아 줄 지는 예측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참여정부의 대통령과 군사정권시절 마인드에 가까운 관료들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연주하기에는 환상에 가까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99년 수준에도 못미치는 최저생계비 책정을 하면서 1인가구 40만원으로 한달동안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뻔뻔스러움은 수백만명의 서민들에게 일년내내 ‘만원의 행복’을 체험해 보라고 놀리는 듯하다. 정말 ‘장난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정부가 경제 양극화에 주목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나, 해법을 찾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양극화를 독립적인 고민거리로 삼기보다는 성장을 통해 파이(몫)를 키우면 양극화는 자연스레 시장 기능에 따라 해결되는 종속변수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권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친재벌적인 한나라당은 물론, 중도라는 열린우리당도 그런 인식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계의 성장 일변도 논리에 바탕을 둔 이런 논리가 허구적이었음은 무엇보다 지금의 경제 현실에서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청와대 인사마저 “혜택받은 몇몇 경제 주체를 제외한 상당수 ‘일하는 국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다.

청와대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직속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를 중심으로 별도의 연구팀(TFT)을 꾸린 것은 ‘정부 정책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자인한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어떤가. 150석에 가까운 거대정당임에도 분배정책에 대한 어떤 대안도 독창적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럴만한 역량과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경제정책이란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정책들을 다시 읊어대는 데 급급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벤트에만 열중하고 있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열린우리당내 경제정책을 주관하는 부서의 인물들을 보라. 하나같이 과거 성장위주의 관료, 재벌출신의 인사들로 가득하다. 개장사(개혁장사꾼)만 아니라면 한나라당에 있어도 무방한 인사들이 여당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으니 경제에 관한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궁합이 잘 맞을 수 밖에 없고, 실제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킨 법안들은 친재벌, 반노동, 성장우선이 주조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올 한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쟁없는 해’로 만들자며 민생외면에 대한 그간의 국민적 비난을 의식한듯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 거대정당이 민생과 경제살리기라는 아젠다에 있어서 만큼은 정쟁을 하고 싶어도 할 꺼리가 없을 것이다.

‘성장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친재계, 반노동’이라는 경제정책의 기본 뼈대가 같은데 싸움판을 벌여봐야 둘다 반서민적이라는 실체만 들통날 굿판을 굳이 펼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생우선이라는 대국민적 이미지만 채워넣기 위해 적당히 화합한 척 해주면 될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국보법 폐지를 야합으로 무산시켜 가며 이를 지렛대 삼아 기금관리법, 민간투자법, 조세특례법 등 재벌과 정치권에 특혜를 안겨줄 민생악법은 열-한 공조로 사이좋게 통과시키고, 오는 2월에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확산시킬 비정규직 관련법 통과를 예정해 놓으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경제정책의 동질성을 몸소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권력게임과 연관된 일에는 잡탕정당이란 닉네임이 말해주듯 다양해 보이지만 경제사회적 정책에 대한 열리우리당 구성원들의 인식은 일사천리, 천편일률에 가깝다.

당선되자 마자 재벌을 위해 무얼 도와줄 것인가를 찾다가 결국 통과된지 한달도 안된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를 이야기하는 열린우리당의 신임 원내대표를 보라. 불과 한달전 연말 국회에서 “삼성의 로비에 굴복할 수 없다”고 몸싸움 직전까지 가며 출총제 유지를 관철시킨 당의 원내대표가 보여준 ‘기만적인 기회주의’가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란 변명기제를 지렛대 삼아 국민을 하염없이 우롱하고 있다. 얼마나 한심했던지 대통령까지 나서 원내대표에게 신중론을 주문할 정도다.

노동운동 출신이라는 열린우리당 노동담당자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인식은 훼절한 노동운동가들의 인식이 어떻게 현실에 영합할 수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386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삼성그룹 연구소를 찾아가 경제를 배우며 재벌의 문하생을 자처하고 나선 자기모순적인 추태는 그들의 비전이 어디에 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중도’를 내세운 거대정당에 눈에 띄는 분배적 관점의 정책브레인이 한 명도 없는 정당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정이 어러함에도 당내에서 입만 열면 개혁을 주창하던 사람들에게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커녕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아마도 비판을 안하는 게 아니라 왜 비판해야 하는 지 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내에서 최근 교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실용주의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이라는 관점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허떠하리’만 난무하며 ‘멀건 개혁’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러니 ‘선진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 철폐나 부동산 문제와 같은 국민적 개혁과제를 유야무야시킬 조짐이 여권내에서 언죽번죽 고개를 쳐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층의 적반하장,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를 넘어서

우리는 아이엠에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려 164원이라는 국민혈세를 공적자금이라는 미명으로 기업과 은행에 투여한 바 있다. 그런데 일례로 제2의 위기로 불리며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렵다는 오늘의 경제적 위기와 양극화의 핵심 요인중에 하나인 신용불량자 문제를 위해서 7.5조원(=제일은행 살리는데 든 비용, 일부에서는 1조 6천억이면 된다는 주장도 있음) 정도면 획기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처방의 유효성과 적절성에 대한 검토는 차지하고라도 이에 대한 논쟁조차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고 있다. 왜일까.

다름아닌 재계와 수구언론, 관료, 보수.수구 정치권으로 이어지는 기득권층의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는 으름장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지상주의의 사고방식, 분배를 일종의 ‘시혜’ 또는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는, 밑도 끝도 없는 탐욕과 편향된 시각이 가장 큰 장애요소이기 때문이다.

정작 국가를 부도위기로 내몰았던 주범들이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금반지까지 내놓았던 서민대중을 위해서 조금 진전된 대책이라도 들고 나오면 이를 앞장서 반대하는 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다수의 서민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운다.

적어도 성장이 본격화한 60년대 이후 40년이 넘도록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담론이 바로 '성장지상주의'다. 그 결과 오늘날 국민들도 언론도 재계도 정치인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만큼 경제개발예산과 복지예산의 격차가 지독할 정도로 성장일변도의 예산을 편성해온 나라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거의 없을 정도이다. 늘상 복지정책은 언발에 오줌누기에 그쳐왔다.

IMF는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를 세계가 놀랄만큼 빨리 졸업했다며 여러 차례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이 성공한 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 시장을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약탈적인 수익을 합법적으로 걷어가는 데 대성공한 아이엠에프 자신의 자축이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엠에프는 첨병인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 복합체’라 불리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IMF란 고깔을 쓰고 와서 한바탕 걸판지게 놀아주고 걷어간 성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이엠에프의 구상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재계와 수구언론, 정치꾼들로 대변되는 소수의 기득권층이 국가가 아이엠에프의 충견 노릇을 해준 대가로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고 되레 어부지리로 승리를 독점했을 뿐, 절대다수 서민대중은 우리 사회 양극화 현실의 참혹함이 보여주듯 절망에 가까운 패배자가 되었다.

오늘날 개방화, 세계화는 이윤율 저하로 인해 위기를 맞은 자본의 해외투자와 국제적 자본이동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대응에 따라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처럼 미국경제에서 해외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증대하면서 세계경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일종의 신제국주의와 유사한 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여차하면 해외로 나가버리겠다는 위협’을 통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를 강화해 주었으며, 결국 거대 자본에 대해 최대의 자유를 제공하고 국가개입이나 노동자의 저항과 같은 일체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자본과 노동간의 양극화,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아이엠에프를 안 받아들였으면 우리는 이미 망했을 것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아이엠프 당시 이런 미신에 빠져있던 국내 주류언론의 호들갑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미국과 경제학자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 고정환율제, 자본유출 통제 실시 등 아이엠에프 구조조정 요구를 거부하고 철저히 ‘깽판’을 놓은 말레이시아는 지금쯤 부도가 나서 나라를 아이엠에프에 바쳤어야 옳다.

그러나 당시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비웃었던 한국의 관료, 정치꾼, 거대 언론들에게 미안스럽게도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경제를 부분적으로 안정화시켰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빠른 경제회복을 보였다.

이뿐이 아니다. 해외자본유입에 대응하여 자본유입의 일정부분을 1년 동안 중앙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하는 가변의무예치금제도(VDR: variable deposit requirement) 혹은 URR (unremunerated reserve requirement)이라 불리는 부분적인 통제정책을 실시, 단기자본의 비중을 줄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늘이는 효과를 낳았다고 평가되는 칠레의 경우도 있다.

비록 투자를 촉진하는 해외자본의 역할이나 경쟁 촉진을 통한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 등 세계화의 이득을 감안하더라도 개방화, 세계화만이 선(善)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주장을 펴는 성장위주의 경제관료, 경제학자, 주류 언론, 정치꾼들의 고정관념은 병적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성장우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만능주의로 점철되고 있는 지배적 담론을 바꾸기 위한 언론과 지식인, 정치권, 특히 진보진영의 노력이 얼마나 절실한 지는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며, 노 대통령의 주장처럼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논쟁을 하루속히 우리 사회 거대담론의 중심에 올려놔야 할 것이다. / 편집위원
 
(계속 이어집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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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8 [23: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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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