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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진보진영,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국보법보다 무서운 ‘성장보안법’, 양극화 심화로 ‘신 봉건사회’ 도래 위기
 
김영국
탈선위기 '개혁-진보행 기관차', 여기서 더 망가질 순 없다

지금 먹고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넘쳐나고 있다. 한편에선 이 아우성을 즐기면서 이용하고 있는 부류도 있다. 정작 이를 해결해야 할 정치 영역에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 속에 개혁-진보행, 보수-수구행 두 기관차는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달리는 기관차라 해서 두 힘이 같을 순 없다. 그러는 사이 어느 한쪽은 죽음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때만 해도 든든해 보이던 개혁-진보행 기관차는 2년 사이 제법 알짜배기 승객이 실린 몇 개의 차량이 민노호라는 진보행 기관차로 이탈해 갔으며, 탄핵역풍의 힘으로 개혁을 향해 달리던 열린호는 차량과 객실 승객의 잦은 이탈로 덜컹거림이 심하여 목적지까지 완주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거기에다 운전실력이 변변치 않은 대표기관사는 보수-수구행 기관차에 알게모르게 ‘달래표’ 경유를 주유해주며 승객들의 신뢰마저 잃어가고 있다.

이대로 달려 가면 삼중추돌이 뻔한 상황에서 개혁과 진보의 두 기관차는 기세등등한 보수-수구행 기관차에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험한 질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화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게 무엇인가.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진상규명, 언론개혁관련법, 사립학교법 개정, 신행정수도 이전 등을 둘러싼 정치권과 지지자들의 편가르기 싸움인가.

그런데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사회에 누적된 적폐들을 개선하기 위한 명분을 가지고 시도하고 있는데도 왜 보수.수구세력의 반대는 물론 서민대중들까지도 외면하고 개혁.진보진영의 동력은 갈수록 찢기고 왜소해지고 있는가.

지금 개혁의 상징처럼 이슈화되어 있는 4대 개혁입법이 통과되면 개혁.진보진영은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는 것일까. 이들 법안을 통과시키면 보수.수구세력은 그대로 멸망의 길로 빠져들까. 이들 법안이 통과되면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곧바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노(No)’일 수 밖에 없다.

이미 4대 개혁입법은 개혁.진보진영에서부터 ‘울며 겨자먹기식’ 밀어부치기가 되어 가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현재 보안법의 악폐를 재현시켜줄 지 모를 형법보완 등이 기다리고 있으며, ‘과거사진상규명법’은 집권당 당 대표와 소속의원들이 친일부역세력의 후손이라는 꼬리가 속속 들통나자 후퇴를 거듭하다 국민들로 하여금 정략적 의도를 의심케 만들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종교단체까지 가세한 장외기도회 위세에 눌려 재단측과 타협하면서 그들의 파이를 넓혀 주었고, ‘언론개혁관련법’은 핵심인 소유집중 제한은 쏙 빼버린 채 주요조항을 형해화해 버렸다며 언론개혁 단체들로부터 여당이 겉으론 수구언론과 싸우는 척하면서 속으론 궁합을 맞추고 있다는 분노를 사고 있다.

이렇듯 4대 개혁입법은 사실상 개혁의 핵심적 요소들이 수구언론의 여론호도와 기득권의 반발에 집권여당이 잡탕정당의 속성을 드러내며 타협적 노선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제대로된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국민들로 하여금 큰 기대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그마저도 열린우리당내 일부 지도부와 보수세력은 마치 야당과 수구세력의 결재라도 받으려는 듯 어영부영하면서 연내 통과마저 안개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4대 개혁입법이 통과된다 해도 우리사회는 개혁다운 개혁에 대한 갈증은 여전할 것이며, 오히려 수구언론은 4대 개혁입법 통과에 따른 부작용들을 침소봉대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을 조장하려 들기 시작할 것이다. 뚝심을 가지고 대비하지 않으면 조중동의 장사거리만 잔뜩 늘려주고, 개혁.진보진영은 4대 개혁입법을 누더기로 만든 결과 별 효과 없다며 책임공방 라운드로 옮겨가 또다시 내홍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갈수록 보수, 수구화 되어 가면서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해간 열린우리당이 다음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생색내기 위한 반찬거리로 4대 개혁입법이라는 상징물을 만들어 이슈화 함으로서 ‘개혁이라는 외피’만큼은 진보진영에 빼앗기지 않기 위한 이벤트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을 공산도 커져가고 있다.

물론 이런 비관적 예측이 4대 개혁입법의 취지나 당위성마저 그만큼 가볍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된 과정과 핵심에 충실했다면, 서민대중의 삶이 지금처럼 피폐하지 않았다면 몰상식한 일부 수구세력의 반발을 압도할 만큼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치권의 기대와는 달리 서민대중이 4대 개혁입법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데에는 이런 저런 명분을 거들떠 볼 만큼의 여유도 없는 그들의 ‘먹고살기 힘듬’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들마저 원칙과 소신없이 번번히 기회주의적 작태로 명분마저 퇴색시켜 가면서 기존 지지자들이 추풍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며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다. 당연히 개혁 추진 세력의 말빨이 설 수 없음이다.

참여정부와 친노세력의 ‘일그러진’ 원칙과 상식

오늘날 보수.수구진영의 부활은 개혁.진보진영의 자중지란과 열패감이 결합하여 낳은 자손이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참여정부의 철학과 신념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좌충우돌은 ‘이보다 더 망가질 순 없다’는 영화 한편을 찍는 수준이다. 거기에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노동당 또한 미흡한 시계추 역할로 개혁.진보진영 전체가 갈수록 무기력과 함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대체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무엇이 정부에 이어 의회마저 과반수를 훨씬 넘는 권력을 장악 '트윈타워'를 구축해 놓고도 불과 반년도 안돼 개혁.진보진영을 이렇게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적 타협에 따른 개혁성 후퇴 또는 왜곡을 들어 이를 질타하기 바쁘다. 그러나 이런 질타는 더이상 별 실효성이 없다는 것만을 증명해줄 따름이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대북송금특검 수용과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서 출발하여 총선직후 이어진 각종 조치의 개혁성 후퇴 또는 변질에서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란 것이 자신들의 정치적 존재를 알리기 위한 ‘보수, 수구네 집 건너편에 내건 간판’에 불과하다는 걸 여러번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실제는 보수, 수구네 집 메뉴판에 있던 물건도 버젓이 팔고 있다.

그리고 지난 대선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중도좌파, 점진적 진보는 되어줄 걸로 기대했지만 지금은 행여나 자신들을 그렇게 부를 까바 손사레를 치며 참여정부 핵심들은 너도나도 중도우파 또는 중도보수임을 선전하기 바쁘다. 심지어 집권당 출신 총리까지 나서 좌파도 진보도 아님을 다짐받기 위해 야당을 상대로 ‘혹평 활극’을 벌이다 국회를 공중회전시켜 버릴 정도이다.

그런가하면 중요한 정책 추진과정에 국민들의 의견수렴과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겠다는 취지로 세운 국민참여정부 입간판은 일방통행 방식으로 회귀하면서 ‘국민차며정부’로 바꿔야 할 판이다.

이미 노무현표 ‘원칙과 상식’은 집권 2년이 지나면서 사오정(死五情)표 ‘변칙과 가식’이라는 유사품이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으며, 친노 핵심세력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따라 어제와 오늘의 점괘를 수시로 바꿔가며 자신들만 믿으라고 우겨대는 ‘부채도사들’이 되어갔고, 추종자들은 그들의 노란 부채질에 반쯤 넋이 나간 신도들이 되어갔다.

오늘날 ‘노빠’로 명명되는 친노세력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정체성은 어느덧 ‘정치적 기회주의’가 돼버렸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유불리를 따져 유리한 존재이면 과거 불문하고 참개혁이며, 시대정신이 되고, 역사를 반발 앞서가는 선구자가 된다. 그러나 어제까지 그들의 우상이었다손 치더라도 오늘 말하는 뉘앙스가 노무현에 비판적이면 정색을 하며 수구꼴통, 딴나라당 부역세력, 시대에 뒤떨어진 난닝구, 혹은 양비론으로 짖어대는 찌질이 등 온갖 혹평세례를 퍼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들의 칭찬과 비난이 진정한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대한 철학과 신념에 바탕을 둔 일관된 기준에 따른 것이라면 이들의 표변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노무현이 하면 부시의 악마의 전쟁에 대한 동참도 개혁대통령의 용단이 되며, 친재벌적 경제정책도 민생을 위한 결단으로 둔갑해 버리고,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군부독재자, 나라망친 대통령 구분없이 우리의 성군을 외치며 칭송해 마지 않던 돌(?)박사도 오늘 노 대통령에 바치는 충성편지와 저주스러운 헌재를 쫒는 부적 한 장에 위대한 사상가로 추앙해 마지 않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중성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그들의 개혁성보다 권력지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역주의에 찌든 구태세력이라며 본가를 박차고 나왔던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는 최근 정치환경이 자신들에게 불리해지자 잔민당 난닝구의 소굴이라던 민주당을 향해 합당 추파를 던지며 ‘민주개혁정통세력’이라는 새옷을 갈아입히려 너스레를 떨고 있다.

또한 각종 차별로 신 하류층이 되어 가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800만에 육박하면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는데도 오히려 비정규직 양산을 부추길 우려가 높은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 입법 시도에 대해선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노빠군단. 되레 이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진보세력에게 곱지않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비정규직 남용 규제와 차별 해소’, ‘사회적 대화와 타협 중심의 노동정책’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우고 출범한 참여정부가 보수적 관료와 재계의 반발에 눈치보다 ‘구국의 결단’ 운운하며 비정규직 양산과 노동자에 대한 강압적 조치 일변도로 흡사 김영삼 정부 시절로 회귀하고 있음에도 이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그들에게서 들을 수가 없다.

노무현을 통해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서민대중들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고, 재벌에게는 특혜를 주는 그런 세상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들이 경멸해 마지 않는 이회창 대통령 아래에서 지금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열렬히 합리화 해줄 수 있을지를 되물어본다면 금새 그들의 정치적 기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판명될 것이다.

하물며 노무현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보급하는데 정열을 쏟았던 인물과 사상 연구소 소장마저 자신이 미쳐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노빠’라는 변종 바이러스들의 생존본능적 역공에 붓을 들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면서 마치 ‘레지던트 이블’이라는 영화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요즘 노빠 바이러스의 자양분도 떨어져 가나 보다.

일부 열혈 노무현 지지자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지지 정당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며 자위해오다 이제와서 ‘배신인가 본질인가’ 타령을 하며 단골집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게중에는 딴나라네와 별 차이도 없다며 아우성이다. 그런가하면 열세를 만회하고자 회심의 카드로 들이민 4대 개혁입법마저 정부와 여당이 막판에 누더기를 만들어 놨다며 ‘개혁이 파탄났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던 이들은 촌수가 조금 먼 ‘안개모’라는 단체를 표적삼아 안개낀 이들을 개박살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개혁의 트로이목마들이라며 이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대한 비난을 온 몸으로 막아서며 환영해 마지 않던 때가 불과 1년 전이다.

일부 친열린당 인사가 언론에 대고 마치 그들의 기회주의적 근성을 일찍이 간파하지 못하고 이제와서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위선적 흥분을 쏟아내는 걸 보노라면 속이 불편하기 까지 하다.

오늘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은 비단 개혁.진보진영에만 그치지 않는다. 보수.수구진영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가혹하다. 이들에게 노무현은 더이상 현직 대통령이 아니라 하루속히 물러나야 할 탕아 수준으로 격하된 상태다.

이렇듯 노무현 정권의 개혁과 보수에 골고루 환심사기 위한 양다리 정책은 어느덧 “진보도 아닌데 만날 (양쪽에서) 욕만 먹고 있다”는 대통령의 푸념으로 이어졌다.

개혁과 진보적 발전에 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탄생한 정권이 정도를 가지 않고 어설픈 보수, 수구화에 따른 양다리 전술로 얻는 건 샌드위치요, 늘어나는 건 푸념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수구에 가까운 보수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국 정치 상황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한국의 보수.수구세력은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놀부 심보’가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으며, 아무리 퍼주어도 늘상 토라지는 ‘에이~씨(AC)형’의 소유자들이다. 이런류의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 상생하고자 하는 시도는 처음부터 국민통합 레버리지 효과 ‘0’에 가까운 사업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기에 개혁.진보진영의 기대에 턱없이 못미친 ‘좌충우돌형’, ‘잡탕식’ 개혁에 대한 실망으로 떨어져 나간 지지세력과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지지세력간의 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불협화음과 대결적 관계 형성 등을 감안하면 실제 국민통합 레버리지 효과는 마이너스인 셈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 진보진영의 아쉬움

그런가 하면 진보를 표방한 민주노동당은 높아진 위상만큼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도 버거운 모습이다.

진보정당의 고질병인 NL이니 PD니 하는 관념의 깃발을 놓고 벌어지는 신경통도 여전하다.그들이 주로 대변하고 있는 계층은 강력한 노조가 이미 결성되었거나, 결성이 용이한 대기업,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라는 계급적 협애함으로 말미암아 실제 서민대중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 영세기업, 실직자, 신용불량자는 노동자정당의 주변인에 불과하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투쟁중독자에다 노동귀족이라는 오명까지 얻고 있는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층간의 양극화, 노동운동 현장의 결집력 약화,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전선 부재 등으로 사회적으로 고립, 왜소화되어 가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런 가운데 조직으로 강력하게 결성된 힘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한국사회 풍토에서 대기업 노동자를 주로 대변하는 민주노동당과는 별개로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와 실직자, 신용불량자 등을 대변하는 또다른 제2의 계급.계층 정당이 만들어져야 할 정도로 이들의 피폐함은 누구도 제대로 대변해주지도, 보호해주지도 않은 채 ‘전환의 계곡’을 지나고 있다.

다만 노동계와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이 최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연대적 대응을 시도하고 나선 것은 그나마 희망적인 일이라 하겠다.

이처럼 향후 개혁.진보세력에게 주어진 중대한 과제가 이미 거대한 괴물처럼 눈앞에 버티고 서 있지만 이를 해결해 가야할 개혁.진보진영은 총체적 역량 감소와 협애한 계급적 대표성으로 적지않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국보법보다 무서운 ‘성장보안법’

지금 개혁.진보진영의 열패감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서민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이들의 외면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개혁 추진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데 그 포인트를 맞춰야 한다는 건 이미 상수가 되었다.

헌재의 행정수도이전 기각 판결은 헌법제정권력위에서 판결을 내리는 제왕의 논리적 비약과 꿰맞추기식 우격다짐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민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의 무기력한 패퇴를 증명하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서민대중의 외면은 결국 보수세력과 수구언론의 자신감을 충만하게 하고 이는 곧바로 개혁.진보진영에 대한 유효한 반격이 되어 개혁 추진 동력을 더욱 떨어뜨리는 ‘개혁 피곤증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서민대중들은 노무현 정부가 뒤늦게나마 국가보안법 폐지 등 나름대로 명분있는 개혁작업을 올인하듯 추진하려고 하는 데 이를 외면하는가. 그것은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돈 안되는 일만 가지고 자꾸 도박을 벌이며 판돈이나 대달라고 졸라대니 피곤하다”는 것 아닐까.

오늘날 개혁.진보진영의 위축은 이런 서민경제의 어려움과 비례하는 일차함수 관계에 놓여있다. 개혁과 진보는 ‘나혼자 잘먹고 잘 살자’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최소한 ‘다같이 먹고살기 힘든’것이어서는 곤란하다. 하물며 재벌과 기득권층의 살만 찌우고 서민대중의 경제적 하류층화를 방치한다면 더 이상 개혁.진보 정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그건 개혁.진보진영의 무능을 의미할 뿐이며, 서민대중과의 괴리를 심화시켜 결국 자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속에 팽배한 빈곤감을 수구언론이 교묘하게 활용하여 “참여정부가 돈안되는 정치개혁에만 매달리고 민생은 외면하고 있다”고 나팔 불며 효과만점의 물타기를 하고 있다. 거기에다 “경제도 좌파 논리에 빠져 분배에만 치중, 성장을 외면하면서 망치고 있다”는 거짓 선전선동으로 혹세무민의 꾕과리까지 쳐대며 가세하고 있다.

경제논리와 근본적 원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날로 생존의 위협에 신음하고 있는 서민대중의 눈에 ‘민생을 외면한다’는 딱지는 치명적인 주홍글씨가 아닐 수 없으며, 이는 각종 여론조사때마다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분배하고는 갈수록 멀어져 가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적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수구언론은 자신들의 보수적 위치와 공격 좌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막무가네로 노 정권을 성장을 무시하는 분배주의자라고 딱지 붙여 대고, 재벌들은 이를 핑계삼아 현금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못하겠다고 버티면서 경제적 침체를 자신들의 영향력 극대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혁.진보진영의 이에 대한 대응은 그야말로 무기력 또는 방치에 가깝다.

지금처럼 재벌과 수구언론에 의해 규범화되어 가는 ‘성장만이 살 길이며, 분배는 좌파논리에 근거한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식의 일방적인 성장우선주의 도그마가 얼마나 음험하게 반개혁적인 뗄감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그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재대로 대응하고 있는 개혁.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절망스럽다.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무상교육제나 부유세 신설 주장이 찬찬히 뜯어보면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제도로서 귀기울일 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현불가능한 동화책속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는 기저에는 이런 성장론의 신앙에 빠져 친북세력에 불과한 민노당의 정책은 마치 거지사회나 다름없는 북한 공산주의식 평등주의 정책일 뿐이라는 인식이 독버섯처럼 깔려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사회의 사상적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척박한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실패의 상징적 결과물인 빈부격차의 심화와 신분의 양극화가 건전한 사회기반을 붕괴시킬 위험에 처할 정도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를 보완할 논의 기제로서 자본의 실패를 더욱 가속화는 데 혁혁한 공로가 있는 성장우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대안 이외에 어떤 경제적 대안도 의제는 커녕 경제논리의 한 부류라는 자격으로 조차 테이블에 초대받지 못하는 불청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제에 관한 이런 성장논리의 일방적 여론침투와 확대재상산 구조가 오늘날 개혁.진보진영의 열패를 가중시키고 있을 뿐 더러, 이에 대한 시급한 대응이 없는 한 개혁.진보진영은 어떤 정치이슈에서도 백전백패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성장우선주의는 정부는 물론 언론, 여야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하나의 규범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팀은 수구언론의 분배우선 좌파정권이라는 견제구에 성장만이 살길이라며 성장론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이제는 한술 더떠 대통령까지 “특혜를 줘서라도 기업도시를 만들게 해주겠다”며 재벌에 환심사기 바쁘다. 또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쟁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민생법안 우선처리’ 언표속에는 ‘재벌특혜법안’이 옹골차게 들어 있다.

정부가 발표한 뉴딜정책으로 정작 이득을 보는 것은 재벌이고, 이들 정책의 부유물도 떠먹기 힘든 구조속에 놓인 380만 신용불량자, 500만 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 차상위 ‘빈곤층’ 같은 정작 정책적 구조의 손길이 절실한 서민대중에게는 더욱 소외감만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간과한 채 경제적 지표로 메겨지는 ‘날림 경제성적표 관리’ 정책이 참여정부에서도 과거 군사정권때부터 이어져 온 고질병처럼 재발하고 있는 것이다.

1933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 이후 7년에 걸쳐 추진된 뉴딜 정책은 단순한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 경제관를 포기했던 '사건'으로 정부가 방관자에서 벗어나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미국 자본주의에 수정을 가한 강력한 개혁정책이었다.

따라서 정책의 초점도 대자본가 등 보수층과 헌재의 잇단 뉴딜법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강력한 시장개혁과 서민대중의 침체된 구매력 확대를 겨냥한 적극적인 실업자 구제, 도시 빈민과 농민 구제 등 사회복지제도 확대에 맞춰졌다는 걸 노 정권이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936년 대통령으로 재선된 루즈벨트가 "부자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의 기준"이라는 말로 포효하던 모습을 2008년 한국 차기 정권의 대통령에서도 보게 되기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인가.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의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성장일색이다.

경제정책에 관한한 한나라당이나 우리당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열린우리당내 경제분야를 담당하는 파트는 대부분 관료, 재벌출신 기업인 등 성장위주의 경제론에 익숙한 인사들로만 채워져 있고, 경제의 중요성이 대두될 때마다 이들은 분배적 관점은 커녕 “우린 성장주의자야”를 해명하는 얼굴마담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표관리 차원에서 벌이는 원수지간도 경제에 관한한 이들은 일가친척이다.

문제는 성장만이 지금의 서민대중의 곤궁함을 결코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건 경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며, 분배적 관점 또한 자본주의 실패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는 것쯤은 상식임에도 ‘왜곡과 뒤집어 씌우기’를 단 한장의 필승카드로 신봉해온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과 재벌, 친재벌적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은 분배적 관점을 마치 경제에 실패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나라들이나 취하는 방식으로 둔갑시켜 심하게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800만 비정규직, 380만 신용불량자, 80만 실업자 등 우리사회에 ‘신 하류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엄청난 수의 국민들을 위한 정책은 모두 나라를 거지로 만들 좌파,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인양 연일 입으로, 지면으로 국민들을 향해 경제적 사상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의 성장은 극심한 내수침체가 발목을 잡고 있으며 그 주원인이 바로 이런 서민대중의 피폐함과 동반한 구매력 부재에 있음에도 이들은 재벌 등 대기업의 투자 기피 부문만 과대포장하여 이를 좌파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참여정부 탓으로 돌려세우며 진짜 좌파들을 어처구니 없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서 서민대중의 고용증대를 위해선 이들의 취업가능성이 거의 없는 재벌보다는 중소기업, 영세기업, 벤처기업 등의 활성화와 서비스업 부문 강화, 도시 빈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복지제도 확충, 신용불량자에 대한 실효성있는 대책 등이 우선 수립, 집행되어야 함에도 이런류의 정책방향을 좌파, 빨갱이식이라는 마타도어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보수.수구세력에게 분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총련과 동급인 친북세력일 뿐이다.

가히 성장우선주의는 한국사회의 강력한 경제적 도그마가 되어 기득권 수호의 첨단병기로서 서민대중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다른 관점의 경제적 접근을 압살하는 ‘신 성장보안법’이 되어 가고 있다.

또한 이들 기득권 세력들은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 대안을 구축할 수 없도록 하는 능력’인 헤게모니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안을 만들더라도 시범운영같은 ‘시뮬레이션’조차도 방해하는 수구언론이 주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특별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관습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사고방식, 님비로 불려지는 소지역주의 등이 가세하고 있다.

개혁.진보진영 또한 대안을 마련함에 있어서 실현가능한 적절성과 긍정적 창조성, 정치적 역량과 정책적 진정성의 부족은 사회경제적 개혁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사회경제적 개혁이라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따라서 기득권을 상대로 개혁작업에 들어가는 직접적 역량외에도, 국민을 상대로 전반적인 사고의 유연함을 키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서 유리한 지형을 만들어내는 간접적인 역량이 더 크고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면적-다층적으로 전투를 벌어야 할 개혁.진보진영은 더욱 분발해야 할 때이다.

차고 넘쳐도 흘러내릴 줄 모르는 ‘성장의 장독’

재벌과 은행은 아이엠에프 구조조정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서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서민대중을 옥죄는 가장 큰 주범이 되고 있다.

재벌 등 대기업은 갈수록 돈이 쌓여감에도 경영권 보호에 눈이 멀어 투자를 외면하며 투자활성화가 시급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가고 있는 중소기업의 가장 큰 애로점이 대기업의 남품단가 인하요구, 일방적인 계약조건 변경, 불규칙한 발주 순이라는 어느 조사에서 보듯이 재벌과 중소기업간의 다이나믹한 공존협력관계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역 또한 대기업이다.

금융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은행은 서민대중에 관한한 더이상의 존재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얌체 전당포’가 되어 가고 있다.

툭하면 중소기업 지원책이라며 수조원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정부의 발표들은 대다수 중소기업에게는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게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거기에는 경기침체 등으로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어 금융권 지원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기업들이 대부분 은행으로부터 ‘요주의’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외면당하고 있으며, 은행들은 추가지원이 불요한 정상 기업들을 상대로 하는 대출 마케팅을 마치 중소기업 지원인 것처럼 생색내는 관행이 도사리고 있다.

아침신문에 중소기업 지원에 나섰다는 기사를 보고 오후에 은행을 들르면 돌아오는 건 ‘만기연장 거부’일 뿐이라는 중소기업체 사장들의 푸념은 정부와 은행의 중소기업 지원책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다.

누차례 ‘숫자심사’ 위주의 금융권 신용 평가시스템을 포괄적 심사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금융권의 대출관행은 변한 것이 없다.
그것도 모자라 은행들은 정작 서민들이 어려워져 지원을 호소하면 담보를 내줘도 과거보다 훨씬 엄격해진 담보대출비율을 들이밀며 돈 한푼 지원해주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각종 금융거래 수수료 인상과 확대로 서민들의 곤궁한 주머니만 털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서민대중의 세금인 막대한 공적자금에다 그것도 모자라 금반지까지 꺼내서 IMF물에 빠진 금융권을 살려 놓았더니 지금에 와선 떼거지로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며 달려들고 있는 격이다.

경기가 나빠지면 일수까지 찍어가며 대출자금과 이자 회수에 열을 올리며 누구보다 앞장서 서민대중을 옥죄는 은행, 경기가 좋아지면 필요없는 데도 굳이 돈 갖다 쓰고 이자 바쳐달라는 은행, 그것도 모자라 각종 금융거래 수수료 인상으로 서민들의 얄팍해진 호주머니만 호시탐탐 노리는 은행, 이런 은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대중에게 갖는 존재 의의가 무언인지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한술더떠 수구언론들은 대기업에 부담을 줄만한 소득재분배정책 한번 써 본적 없는 참여정부에 “좌파적 분배우선주의 정책 때문에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어깃장을 놓으며 행여나 분배정책으로 재벌과 기득권층을 괴롭힐까 바 안달이다.

한국사회에서 경제의 ‘성장’이란 차고 넘쳐도 흘러내리지 않는 다는 것을 이들이 몸소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란 근원적으로 성장 수혜자들(기득권층)의 ‘시혜’라는 속성상 한국사회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안고 있다.

한국경제에서 성장의 효과란 재벌과 수구언론 등 일부 기득권층이 배가 터질 정도로 살이 찐 다음에 이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넘쳐흐르는 물에 서민대중이 겨우 목을 축이는 정도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런류의 성장이란 재벌과 기득권층은 극심한 불황에도 넘쳐흐를 것이되, 서민대중은 경기가 좋아도 항상적 빈곤에 시달리는 노예적 주종관계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의 수구언론과 재벌이 외쳐대는 성장이란 지속적으로 그들의 살만 찌우고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 해달라는 아우성이다. 한국사회의 상위 기득권층과 공생관계에 있는 보수.수구세력에게 자양분을 무한대로 공급해달라는 데먼스트레이션인 것이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와 집권당은 경제부문에서 만큼은 철저하게 이들에게 굴복하고 있으며, 어떤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의지도 없다. 어쩌면 의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대안을 말할 정도의 실력이 형편 없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정쟁이 될만한 정치적 이슈에만 올인하고 있다는 평가가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노 대통령의 사회 양극화 해소 의지와 좌파정책도 써보겠다는 방미중 발언이 립서비스 이상의 기대를 갖기 어려운 것은 정부와 여당내 경제 담당 주체들이 철저하게 상장론 위주의 전위부대들로 둘러쌓인 채 거대한 성곽처럼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 분배경제학 또는 대안적 경제관을 가진 인물들의 적절한 발탁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안없는 성장론 신봉자에 불과한 IMF 위기관리용 금융전문가를 경제총수로 그대로 두고서 어떤 대안적 경제정책이 유효하게 집행될 수 있을 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이렇듯 경제적 성장우선주의는 서민대중들에 대한 배려를 가로막고 오로지 재벌등 소수 기득권층의 성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강고하게 고착화 시켜 가고 있음에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고 방치하는 건 개혁.진보진영 전체의 무능력이며, 정권을 담당한 세력이 국민을 향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경제적 보수와 수구의 꿀이 있는 언덕을 찾아 루비콘강을 건너고 있는 노무현 정부가 외면한다고 해서 이렇듯 심각해져 가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개혁.진보진영 전체가 마치 최악의 상황만 오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계속 방치한다면 개혁.진보진영의 침체, 왜소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자본주의 봉건시대 도래

한국사회는 재벌과 수구언론, 정치인, 거대 금융기관과 대기업 종사자, 자산소득자 등으로 대별되는 귀족층과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대중의 경제적 추락으로 인한 하류층화, 천민화로 '신 카스트제(귀족& 하류.천민층)'사회의 도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미 이런 조짐은 경제, 정치분야를 넘어서 교육계와 종교계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음은 최근 사회 각계의 대립에서 보듯 확연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최장집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한국사회 양극화 양태 분석은 적나라하며, 개혁.진보진영에게 새로운 경구로서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아래는 최 교수의 분석에 구체적인 수치와 비정규직 부문, 서민대중의 가계파산 문제 등을 추가한 것이다.

기존의 안정적 대기업군, 자산소득자, 경영 및 지식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구조의 상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산업, 서비스산업 등 주변적 산업부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노동자집단은 분명 보다 절실한 노동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들 주변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이나 파견직 노동자, 중소 영세산업의 저학력 고령노동자,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 범주화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 고용 및 노동조건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56%) 816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한국 경제 전반의 산업구조와 맞물려 있을 뿐만아니라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양산하는 주축이다. 또한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는 신용불량, 내수침체, 경기침체의 주요인이기도 하며, 이들의 대다수가 서민대중이다.

여기에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즉 실업자(80만)와 취약계층, 그리고 신빈곤층으로 분류된 신용불량자들(380만)의 경우는 주변적 노동자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퇴출과 진입이 유연하고, 열려있는 미국이나 서구에서의 노동시장과는 달리,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이맇게 엄청난 수의 서민대중이 빚에 쪼들리고, 갚지 못해 이혼과 자살 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는 가족과 사회 해체의 위기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에 대해선 무려 164조원의 혈세를 동원해서 뒷처리 해준 국가가 수백~1천만명에 달하는 서민대중의 생존의 위기에는 어떤 유효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IMF가 금융부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제2의 한국사회 위기는 수백만명에 달하는 서민대중의 가계파산에서 오게될 것이라는 건 더이상 예측이 아닌 실제상황이 되고 있음에도 국가경제담당 주체는 물론 힘있는 여야 정치권, 언론 어디에서도 이를 국가적 의제로 끌어올려 놓고 사회적 담론화를 시도하는 곳이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우리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대안의 부재를 반영하듯, 오늘의 민주정부는 이렇다할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는 사회양극화의 급속한 심화이다.

우리는 그 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어가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하여서도 대표되고 보호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여정부의 무능과 무기력, 폭동으로 달려가는 사회

이미 한국사회에는 자본주의에 의한 봉건시대의 도래를 막아야 하는 원초적이고 엄중한 과제가 거대한 괴물처럼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다.

개혁, 진보 진영에서 누가 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나갈 것인가.

이미 경제적 보수화의 길로 접어든 노무현 정부와 잡탕정당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며 공룡정당화 되어가는 열린우리당에 기대어 마냥 목빼고 기다릴 수는 없다. 이들은 천박한 기회주의 근성으로 외부의 강력한 압박이 없고서는 그들의 보수화 흐름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건 이미 정치권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런 흐름을 막는 것은 결국 더이상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서민대중의 폭발에 의한 폭동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서민대중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개혁.진보진영이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보수.수구진영에 의한 계층간 차별구조가 심화되는 사회로 이전되어 갈 때 한국사회는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폭동으로 달려가는 사회’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닌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는 이런 경험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도 개혁.진보진영에게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이다.

분배, 대안경제학에 대한 언론의 역할과 ‘나비효과’ 절실

개혁.진보진영은 무엇을 준비하고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성장제일주의만이 지금의 경제를 회생시킬 수 없으며 경제적 소외자들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하류층, 천민층으로 전락하는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인식시켜 주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재벌과 수구언론에 의한 성장을 통한 기득권 살찌우기 전략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성장우선주의를 무기삼아 서민대중을 위한 대안정책을 말하는 사람들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 압살하려는 기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대안적 혹은 진보적 경제학자들과 논객들의 활약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와 있다.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 하는 많은 이들이 서민대중의 삶의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아 대안경제적 흐름을 주도할 세력을 신주류로 성장시켜 가야 할 시대적 소명이 있음을 고민할 때가 왔다.

또한 일관되고 뚝심있게 개혁과 진보적 원칙을 견지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다시 구심점을 형성, 거대한 정치세력화를 시도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지지의 편향성이 심한 그룹을 제외한 범 개혁.진보진영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보수.수구진영의 성장우선의 경제적 폭격에 대응할 큰 틀의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현가능하고 합리적이며 정책적 진정성을 갖춘 ‘대안적 경제정책’을 이슈화하여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설파하면서 개혁.진보진영이 먹고사는 문제에 결코 소홀하지도, 무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송사와 개혁.진보적 언론매체의 대오각성과 발빠른 대응이 뒤따라야 한다.

지금처럼 언론이 정치권에서 생산해내는 정치적 이슈에만 매몰, 연일 정쟁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독자들을 호객하는 것으로 장사하려는 ‘정쟁상업주의’ 근성을 하루바삐 벗어나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뼈속깊이 상업주의로 물든 조중동을 비롯 진보적이라 평가받는 일부 종이언론은 물론 메이저 인터넷신문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정부가 입법예고한 ‘파견법 등 비정규직 관련법’, ‘기업도시 건설 특별법’, ‘각종 FTA협상’ 등이 향후 한국 경제환경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중대한 국가적 의제임에도 주요 언론들의 무관심에 가까운 안일한 보도 태도는 사회 공기로서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날로 심각해져가는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법들과 재벌의존 경제체제를 더욱 심화시킬 기업도시특별법 등이 노동계의 심각한 우려와 반발이 제기 되고 있음에도 주요 방송사와 종이언론들은 심층보도는 고사하고 거의 무신경에 가깝다. 설사 보도가 있다해도 정부의 입장 전달에만 비중을 두고 있을 뿐이다.

정녕 IMF 못지 않은 위기가 다시 초래되어 국민적 관심이 집중될 대형 뉴스거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요 언론사의 무관심은 또다른 죄악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정치적 사안은 국민들을 상대로 조사해놓고, 경제적 이슈는 성장론 위주의 경제학자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성장 우선의 여론이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는가 하면, 자사에 불리한 항목은 기존 관행까지 깨가며 삭제해버리는 등 일부 수구언론의 자사 이기주의와 도덕적 타락상이 극에 달하고 있다.

수구언론과 재벌언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방송사와 진보적 종이신문 및 인터넷 매체들은 성장의 사각지대, 고용없는 성장의 실체를 가감없이 보여줘야 하며, 자본주의 실패에 대한 냉험한 비판이 있어야 할 때이다.

예컨데 서민대중들의 삶의 영역인 부식가게, 레코드가게, 장난감, 화장품, 쌀집, 옷가게, 이불가게, 재래시장, 과일가게, 자동차 용품점 등이 문을 닫고 한숨쉬는 장면만을 보여주고 써주는 것으로 서민대중의 어려운 삶을 조명하고, 언론의 역할을 다한 것인가. 이들의 어려운 삶의 이면에 재벌의 거대한 유통망 독식이 초래한 영향은 어느 정도이며, 이들이 경쟁적 대안을 갖출 수 있는 정책적 지원과 이들의 한계는 또 어디까지 인지를 제대로 조명해주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또한 영세노동자들의 경우 정규직이라 해도 4대 보험 등 각종 복지혜택을 못받는가 하면, 사업주까지도 장시간 중노동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기 일쑤이며 30년전 전태일씨와 지금의 영세기업 노동자는 별 차이가 없다.

영세노동자들의 건강과 재교육, 문화와 복지 수준 등 최소한의 노동여건을 담보하기 위하여 지역단위에서 이를 보장하는 이른바 '사회적 임금' 개념의 도입으로 사업주와 노동자는 물론 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결합한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그 효과 등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언론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경제적인 이슈를 정치사회적 아젠다로 만들어 가기 위한 언론의 지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노력은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성장주의로 무장된 수구언론에 맞서 성장과 분배의 균형 혹은 분배에 중점을 둔 대안경제에 대한 소개와 주장을 과감하게 펼쳐감으로써 서민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본격적인 정치적 의제가 되어 개혁& 진보든, 개혁-진보& 보수-수구든, 좌파& 우파든 간에 4대 개혁입법 보다 더 강렬하게 서로의 논리와 대안을 가지고 싸우게 해야 한다. 그 과정속에서 서민대중의 눈을 사로잡고, 누가 진정으로 서민대중의 편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며 이들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존과 결코 무관하지 않는 정치의 광장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속에서 공화국이라는 공동체에 걸맞는 사회경제적 규범과 제도가 논의되고, 성장위주의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대안적 경제논리로 무장된 신주류가 창출되어 무엇이 한국사회를 함께 잘살게 하는 길인지를 모색해가는 한층 진전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더이상 정치가 정치꾼들만의 권력 헤게모니 쟁투의 장이 아닌 서민대중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중요한 ‘제2의 사회경제적 아고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장우선주의를 복음처럼 퍼뜨리고 있는 수구언론들에 맞서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언론의 탄생과 역할이 매우 아쉬운 시점이다.

지금 당장 분배적 관점의 경제적 대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숨어있는 대안들이 정치사회적으로 비중있게 논의될 수 있는 사회적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게 더 급선무이다. 대안은 그런 장이 마련될 때 보다 가치있고,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싸워오고 피땀흘려 성장시켜 온 개혁이며 진보인가.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사라지려는 지금 새롭게 성장보안법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개혁.진보세력을 덮치려 하고 있다.

서민대중의 피폐한 삶을 보듬고 날아갈 진보적 대안경제의 나비들이 곳곳에서 날개짓을 시작하고 성장보안법의 해일에 맞설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외면하고 적절히 대비하지 못할 때 이는 개혁.진보진영의 패퇴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는 60년대 군사정권의 암울한 사회를 훨씬 뛰어넘어 귀족과 절대다수의 하층.천민 계층만이 존재하는 중세의 암흑기를 21세기에 와서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21세기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며 맞게된 자본주의는 인류사회의 종착점이 아니라 중세사회 구조로 윤회하는 순환구조속의 한 경제사조에 불과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고서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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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9 [19: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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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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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I.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사회경제관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대다수 일반 시민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인간적 피폐화만큼 큰 문제는 없다. 고실업, 고용불안정, 노동시장의 내부분화에 의한 이른바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의한 신용불량자의 양산, 빈곤층의 확대 등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양상들은 IMF개혁패키지를 통해 급격하게 전개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를 특징짓는 중심 내용들이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해체 효과는 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살인 및 강력범죄의 급증, 가족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형태를 포함하는 자살률의 급증, 세계 최고수준의 이혼율과 거꾸로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 등의 지표들은 사회해체의 급격함과 그 심각함의 일단을 드러낸다.

빠른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온존되고 있었던 전통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공동체적 연계들, 사회안정에 기여했던 잘 발달된 중산층이 중심이 된 계층구조, 높은 경제성장의 지속 등은 그 동안 한국사회의 안정화와 공동체성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요소들이었다. IMF위기의 충격효과와 더불어 이러한 구조들이 해체되면서, 급속히 팽창한 사회저변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계층구조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변화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회적 격변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종국적으로 어떤 한국사회로 귀결시킬지, 그것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지, 과연 이런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갖는 지식의 한계는 크다.

오늘의 노동문제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한계 즉 노동운동이 서 있는 기반의 협애함이라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환경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조건에서도 한국경제의 생산체제는 과거 권위주의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중심축이 재벌중심의 대기업생산체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재벌기업과 그 하청업체의 위계구조하에 중소기업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고용문제에 있어서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나 그 중심적 이슈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임금, 높은 고용불안정, 낮은 조직률, 기업복지 및 노동보호입법으로부터의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정규-비정규직 차이는 단순한 차이를 넘는 의미를 갖는다. 공공부문의 노동자도 수혜의 정도에 있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범주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전투성은 그들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대규모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운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서있는 기반의 협애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재벌중심의 경제체제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제어하는 영향력을 조직하는 데 큰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노동문제가 전체 생산체제와 사회적 역할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기업 및 조직에서의 노동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의 한국경제의 급속한 재편은 기존의 사회계층구조를 새로운 형태로 양극분해하고 있고, 국가정책에 의해 지원되었던 ‘지식기반산업화’ 역시 이러한 경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기존의 안정적 대기업군, 자산소득자, 경영 및 지식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구조의 상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산업, 서비스산업 등 주변적 산업부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노동자집단은 분명 보다 절실한 노동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들 주변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이나 파견직 노동자, 중소 영세산업의 저학력 고령노동자,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 범주화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 고용 및 노동조건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즉 실업자와 취약계층, 그리고 신빈곤층으로 분류된 신용불량자들의 경우는 주변적 노동자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퇴출과 진입이 유연하고, 열려있는 미국이나 서구에서의 노동시장과는 달리,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의 생산체제가 어떤 구조와 내용으로 변하든, 예나 지금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중심적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한 나라의 경제성장, 한 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실제로 이 재벌기업의 투자와 업적에 의존하게 될 때, 정부의 성장정책은 곧 이들 기업의 투자인센티브와 투자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전환의 직접적 결과로 재편된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구조에서, 이러한 정책이 갖는 한계는 수출이 호조를 띠고 기업이윤이 증가되고 경제 전체의 성장률이 상승한다하더라도 고용의 증대와 아울러 이들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권익증대, 노동조건의 향상을 결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고용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경제의 호전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고용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아마 저조한 고용증대는 테크놀로지 향상에 따른 노동력의 대체효과일 수도 있고, 국제경쟁력 약화로 인해 미국국내의 고용수요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콜럼비아대학의 글라시엘라 치칠니스키(G. Chichilnisky) 교수가 강조하듯이, 튼튼한 중소기업의 발전이 고용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Financial Times 04/05/14). 중소기업의 고용효과에 관한 한 한국경제도 미국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거시적으로 볼 때 재벌기업보다 더 큰 고용을 포괄한다는 것과, 광범한 주변적 노동자군이 이 허약한 중소기업부문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는 재벌기업의 노사가 민주적 틀 내에서 어떠한 공존협력관계를 설정하느냐, 어떻게 중소기업 발전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만드느냐,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범한 중소기업부문이 재활성화되지 않는 한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2등 노동자화’의 경향은 억제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보편적 기반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II. 대안적 사회경제정책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의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효과들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IMF위기라는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충격에 의한 결과일 뿐 아니라 이에 대응했던 민주정부들에 의한 주체적인 정책적 대응이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참여의 권리를 통해 실현되고, 시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주어진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IMF개혁패키지로 대변되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제개혁이 한국의 민주정부를 매개로 어떻게 관철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면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IMF충격의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가 엄청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민주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는 정치적 사안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정치의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그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적 내용과 이를 실천할 정책적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는 제도적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실제 이슈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바크라크와 바라츠(Bachrach & Baratz)는 다원주의적 권력 개념을 비판하면서 ‘비결정’(non-deci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원주의적 권력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이나 이익들이 표출되고,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모든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은, 만약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정치경쟁의 장에서 이익집단이나 정당을 매개로 표출되고 선거를 통해 대표되고 종국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 경우 실제의 정책은 이러한 이슈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이 경쟁하고 타협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러한 정치과정을 우리는 정치세력과 갈등들의 다원적 경쟁 내지는 다원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의 결정이 곧 사회적 갈등과 힘 관계의 정직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정책결정 수준에서의 정치적 다이나믹스와 정책의 산출은 사회갈등의 축약이며 정치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사회경제적 현실과 정치 간의 매개가 순기능적으로 작동된다면,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용이하게 정치적으로 해소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적 사회발전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정치관에 도전하는 비결정의 개념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관찰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정책과 그 결정은 전체 정치과정과 권력관계의 다만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을 마땅히 이슈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슈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슈화하지 않는 또는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해 정책결정의 사안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 또는 영향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이 관점은 이 비결정의 영역/수준이야말로 보다 더 중요한 정치과정이요, 권력관계라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에 있어 논의되는 이슈/사안의 범위와 성격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회의 중요 문제에 대한 시민개개인들의 계몽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 알다시피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슈의 범위와 계몽적 인식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지나쳐 버린다. 한국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유권자 개개인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참여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우며, 역으로 한 사회의 중대문제는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주정부의 무능력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무관심, 냉소주의, 투표율의 하락현상이 보여주는 정치참여의 저조함은, 사회의 중대이슈를 의제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고 덜 중요하고 나아가서는 하찮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치가 왜소화되고 타락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치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아무리 격렬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높고, 시민들의 시민운동에의 참여가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중대문제가 정치사안으로부터 배제되고,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할 때 민주주의를 통한 집단적 결정의 내용은 민주적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뭐든 참여의 확대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계몽적 이해로 뒷받침된 중대사안이 이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할 때, 새로운 영역으로의 정치참여는 다른 분야에서의 참여를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참여적 다원주의의 역설’이 나타나기 쉽다(Dryzek 1996, 7). 바꾸어 말하면 정당간의 경쟁이든, 시민사회의 운동이든 잘못된 이슈, 중요하지 않은 이슈에 열정을 쏟는다면 정작 중요한 이슈에 대한 참여를 제약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사회의 중대사안을 정치영역에서의 중대사안과 병행시키는 일을 통해 민주정부의 효능을 창출할 수 있었는가? 그럼으로써 체제로서의 민주정부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민주정부들의 경험을 통해, 여야당간의 갈등이 첨예하였던 정치적 이슈영역은 대체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당간의 정치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제도화하는가 하는 정치의 제도개혁을 둘러싼 이슈이다. 집권정당은 어떻게 권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야당은 어떻게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쟁투로 정치는 요란했다.

둘째는 역사, 이념 및 가치, 정서적 문제를 둘러싼 이슈영역이다. “역사 바로세우기”, “지역감정 극복”, “과거사 진상규명”, “용공 전력조사” 등은 모두 민족주의, 반공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가치, 또는 지역정서의 동원이 중심이 되는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상징적 이슈영역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적 열정을 쉽게 동원하게되어 정치를 극한적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새로운 중요이슈가 된 행정수도 이전 및 이른바 “지역혁신체제”의 추진과 같은 지역개발정책 분야이다. 그러나 정책추진자들이 중앙집권화의 폐해와 분권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안, 그것이 과연 주장하는 대로의 바람직한 효과를 낳게 될지, 정말 모든 지역이 자립적 발전모델을 갖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확신은 더욱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는 사회경제적, 정치경제적 이슈영역이다. 이 문제는 그간 정치적 이슈로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분명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중심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슈영역의 우선순위가 있다면, 네 번째 사회경제적 이슈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최소한 서구민주주의에서의 상황은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제일의 우선순위를 갖는 정치사안이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중요 의제로 부각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정치의 제도개혁, 이념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상징적 이슈 또는 삶의 현실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지역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았다.

물론 기존의 지배적 담론을 당연시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문제가 최대 이슈라고(또는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인식에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곧 경제성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 고용확대, 노사관계,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 복지의 증대, 빈곤문제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성장이 창출하는 넘쳐흐르는 효과(trickle-down effect)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정부의 가장 중심적 정책은, 나아가 정치의 핵심적 역할은 모두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시장의 작동과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정책이나, 행위는 부정시된다. 이러한 일면적 경제성장관이나 독트린은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통해 신화가 되었고, IMF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논리 기반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대안적 경제성장관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거버넌스 문제와 같은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온 여러 사회정책적 문제들이 중대이슈로 자리잡을 여지는 별로 없다.

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그간 경제정책에 대한 민주정부들의 개혁레토릭이 어떠했든, 혹은 정부 내 이른바 개혁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언표화되는 주장들이 얼마나 개혁적이든, 반대로 민주정부의 경제관이 급진적 또는 반시장적이라는 주류언론들의 우려가 어떠했든 민주정부에서조차 실제의 경제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가장 변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였던 냉전반공주의의 구조조차 민주화 이후, 특히 “햇볕정책” 이후 크게 변화했고 또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확실히 경제영역에 관한 한 일면적 경제성장의 독트린은 어떠한 대안적 도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경제문제, 또는 경제정책 사안을 둘러싼 이슈들이 국회에서의 정당간 논쟁에서, 신문의 지면에서 언제나 가장 빈번하게 가장 중요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성장의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정’의 수준에서, 거의 의식화(儀式化) 되어버린, 그리하여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익숙한 주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며 정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득이익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반공주의도 아니고, 친일파청산 문제와 같은 역사적 가치의 문제도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의 이론가 시리아니(C. Sirianni)는 여성운동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이 새로운 정의는 그 동안의 전통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전혀 이슈가 될 수 없었던 부부관계를 포함하는 가부장적 가정 내의 관계나 가사노동과 같은 사적관계의 영역으로까지 여성운동을 확대할 수 있는 이론화에 기여했다.

같은 논리로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시장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제나 시장이 성장을 추동하고, 경쟁과 같은 자연스런 본성적 인간행위가 필연적으로 효율성을 창출한다는 신화가 아닌, 성장이든 시장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의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이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포괄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경제를 향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짐으로써 정치안정화에 기여하며, 일의 윤리, 일에 대한 헌신을 높이고, 갈등적 노사관계를 보다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통해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뿐만 아니라, 수요의 증대를 통해 성장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이 드러난다.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의 제도개혁 이슈나 역사적 정서적 이슈를 흡수통합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몰두하면서 전자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후자의 비정치경제적 이슈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결과적으로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장이 되는 동안, 전자의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탈정치화된다. 선거를 통해 사회로부터의 요구를 위임(mandate)받은 것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된 민주파의 경제정책은 권위주의적 성장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그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경제를 주도하고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정책은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간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가능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왔다.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짧은 사이클로 순환하면서 파노라마처럼 명멸하였고, 국회의원 교체율이 세계 최고임을 자랑할 만큼 매 선거마다 대규모 퇴출이 계속되었다. 여러 수준과 여러 정책영역에서 수많은 전문가집단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 인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정책 영역에 관한 한 변한 것은 없다. 어찌보면 여야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면에서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실제 이슈에 있어서는 극히 좁은 갈등의 범위에 한정되어 다퉈야 하는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낼 것인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투표자 다수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사회경제적 이슈는 갈등의 정도와 폭이 가장 큰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데는 부와 권력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갖는 기득이익들의 도전이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많은 정치적, 사회적 힘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은 이 영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정당은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선출된 민주정부로 투입되는 통로이고, 정부의 정책결정이 사회로 전달되는 정치의 조직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좁고 얕은 사회적 기반을 갖고, 협애한 이념적 스케일로 정당간 차별성이 적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집단이 과다대표되고 있으며, 제도화의 수준도 낮고 정체성도 약한 정당들이 정책적 대안을 유능하게 조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문제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의 힘들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 그 정책이슈를 지지하는 많은 사회적 힘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즉 대통령이나 최고 정책결정 수준의 결정자나 정치엘리트들의 의지라든가, 개혁마인드라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정치적 이슈의 전면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책사안이 중대할수록,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의 정도가 클수록 특정의 정책은 그 정책에 대한 사회적 힘의 투입 없이는 실현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을 조직하는 문제에 있어, 헤게모니의 영역 밖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

III. 현실적 대안의 중요성

그렇다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면하고 주요 정치적 사안으로 이슈화함에 있어서 어떤 대안적 처방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제안이기보다도 정치인, 지식인, 대의(大義)추구적 사회운동, 노동 및 민중운동 등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지적 노력이 진지하게 이루어낸 결과물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대안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대안의 성격, 방향 및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대안형성의 방법론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권위주의시대 이래의 경제정책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배제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실에서 기존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는 경제정책 노선에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하고, 그럼으로써 넓은 범위의 콘센서스를 창출할 수 있고, 그리고 집행 가능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실현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대안으로서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결의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이념은 이것이다,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것을 천명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운동의 한 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비결정’이 만들어지는 데는 양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는 개혁의 외적 제약이다. 민주정부의 어떤 개혁적 의지, 비전, 정책은 헤게모니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지 못하고 보다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내적 제약이다. 민주정부를 포함하여 개혁을 만드는 사람, 세력이 실현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이슈화하지 못하고 개혁적 대안이 내부로부터 소멸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문제보다도 두 번째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민주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적 요구들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권위주의시대의 정책이 지속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가 민주적 시민/시민역할에 대해 두 가지 구분되는 개념, 즉 ‘긍정적/적극적’인 것과 ‘부정적/소극적’인 것의 개념 구분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와 맥락을 달리하지만 시사하는 바 크다. 긍정적인 시민권 개념에서는 특정의 집단이나 조직들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발전시키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정부정책에 자신들의 요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한다. 반면 비판과 불평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적 시민행위는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의 공적 사적 도덕성을 통해 정치인들에게도 강력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부정적 시민행위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의 일이고 시민은 관중이나 감시자의 역할에 만족하는 수동적 관점을 견지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이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해 정치계급에 대해 극히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창의적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시민권의 역할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들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부정적 행위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우려할만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운동이 중심적 동력을 제공하는 민주정부는 당연히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그러할 때 그 에너지를 통해 많은 대안정책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민주정부 내의 개혁적 정책결정자들과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과 지식인들에 의한 개혁의 비전과 정책의 입안은 개혁적이되,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한편에는 권위주의적 관치경제에 그 연원을 갖는 국가-재벌연합의 견인차가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된 성장정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반을 갖는 ‘신자유주의 반대’,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라는 방향이 있다. 그러나 두 방향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테제와 안티테제를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 취합하는 설득력을 갖는 대안적 정책비전이며, 그 틀 안에서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수준에서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민주세력들에게 민주정부의 수립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희망과 기획을 실현할 기회가 부여되었을 때, 현실적 대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보다 쉽게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가져온 무책임한 관성적 결과물일 수 있다. 즉,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여전히 ‘부정적’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이론적 수준에서, 가치와 신념의 차원에서 그리고 운동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적 대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싫든 좋든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부문, 수준, 그리고 집단, 계층들에 있어 어떤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혹자는 영미식의 신자유주의형 경제모델에 대비되는 유럽식 복지국가모델 혹은 일본형의 조율된 자본주의형과 같은 어떤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경제(non-liberal capitalism)를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정부는 후자의 비자유주의적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현실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이론적으로 케인지언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포함한 비자유주의적 경제이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추진된다고 가정할 때 현재와 같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무역자유화를 포함하는 세계화라는 국제환경적 압력과 조건, 현재와 같은 재벌중심의 경제적 생산체제의 특성, 그 정책을 위한 정치적 지지의 동원, 신자유주의적 및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적 힘의 관계 등, 여러 측면과 여러 힘들이 연관되어 작동되는 조건하에서 정치적으로 취약한 민주정부가 이러한 대안적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하고, 없다면 이를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만불성장시대라는 성장의 목표와 가치를 천명하였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정부 내 개혁파들은 간헐적으로 사회정의, 사회복지, 분배의 가치실현을 언명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정책적 목표, 내용과는 무관하게 분배와 복지를 요구하는 지지세력에 부응하는 슬로건 내지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 복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2만불의 성장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렵고 또 달성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만약 후자를 진지하게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 Przeworski)가 ‘전환의 계곡’이라고 말하듯, 구조개혁이 진행되는 일정한 기간동안 저성장이라는 계곡을 지나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생산체제가 획기적인 구조전환을 해야 할 것이고, 이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이 존재해야 하며,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 투자자, 기업가집단의 동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의 투자회피, 해외로의 자본도피, 해외투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환의 계곡’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제는 공동화되고 사회는 커다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러한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정부 내 개혁파들의 노동, 복지, 분배정의에 대한 강조는 정책적 진정성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기업의 안정적 투자유인, 고용안정, 노동, 복지의 실현을 위해 영미식의 자유경쟁시장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독일식의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존과 협력의 노사관계도 발전시키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노조의 조직이나 활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이해당사자들이 목소리를 갖고 결정에 참여하는 유럽식의 생산체제로의 비약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독일식 모델은 노사의 극한적 대립이 파시즘과 2차대전을 초래했다는 파멸의 역사적 경험, 전후 반노동자적 자세로부터 친노동자적 자세로 전환한 기독교의 변신, 이 과정에서 노사화합을 가능케 한 기독교 박애정신, 이를 당의 이념으로 한 기민당의 존재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독일식 모델을 진지하게 정책대안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단순한 천명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한국적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정책대안을 만들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문제의 차원은 복합적이다. 먼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기존의 어떤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이를 대체할 대안적 처방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 가운데서도 필수적인 문제들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어떤 모델이 우리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검토한 후에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많다. 그것은 개혁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은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나? 개혁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나? 민주정부는 국가 행정기구들을 통솔하고, 새로운 개혁안을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나?

IV. 우리는 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지 못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일인 일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간의 상호경쟁과 협력 등이다. 그러나 이렇듯 단순하게 보이는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실제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이너믹스는 제도나 절차로서 이해하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정의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다중의 보통사람들의 힘이 체제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군부권위주의라든가, 군주정, 귀족정과 같은 다른 경쟁적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의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의 확대와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제 또는 시장의 영역에서 약자이며 소외된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방법을 통하여 시민권을 획득, 확대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절차적 방법을 통한 실질적 문제의 해결 또는 개선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절차적, 형식적 내용과 실질적 내용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체제이며 따라서 일차원적인 것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와 과정을 갖는 것이다.

평등의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와 항상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양자간의 긴장관계와 갈등은 민주주의 자체를 제약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갈등은 크건 작건, 민주주의는 건설적인 타협을 통하여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갖는 커다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문제해결의 공간을 갖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정부의 능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신뢰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중심적 지지세력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하는 민주주의는 그 취약함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혹은 민주주의와 갈등관계를 갖는 힘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시민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도록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정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오늘의 민주정부들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표-책임의 연계고리로부터 상당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의 정책적 책임성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IMF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켜온 부정적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우리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대안의 부재를 반영하듯, 오늘의 민주정부는 이렇다할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하여 민주정부들이 세계화의 조건하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악화시키는 데 앞장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과는 사회양극화의 급속한 심화이다. 한편에서는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의 승자들, 거대기업들, 정치인들, 사회엘리트와 지식인 그리고 주류신문을 통하여 익숙하게 소개되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시장경쟁의 열패자 내지 탈락자들, 사회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면서 점차 생산과 소비의 중심영역으로부터 주변화, 배제되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우리사회에서 이 두 세계 사이의 격차와 분리는 그간 심화될대로 심화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어가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하여서도 대표되고 보호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Bachrach, Peter and Morton S. Baratz. 1970. Power and Poverty: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Oxford U. P.
Chichilnisky, Graciela. 2004. “Think Small If You Want to Create More Jobs.” Financial Times(May 14).
Crouch, Colin. 2004. Post-Democracy. Cambridge: Polity Press.
Dryzek, J. S. 1996. Democracy in Capitalist Times. New York, Oxford: Oxford U. P.
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 P.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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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