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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특별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7살 소년'의 눈에 비친 '생존권 사수'

김영국
6월 뙤약볕에 나를 얼어붙게 만든 '한 장의 사진'

▲故 박종태 열사의 막내 아들 정하(7) 군이 영결식장에서 생전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유인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이마에 둘러진 '생존권 사수'가 어린 소년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우연히 발견한 이 한 장의 사진. 순간 나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소책자 표지에 어느 노동자의 익숙한 모습. 그가 아이의 아빠란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가난하지만 의로운 노동자로 살다 비천하게 생을 마감한 아빠를 읽고 있었다. 고작 '30원 인상'을 요구하며 대기업과 정권의 잔인함, 사회의 무관심과 싸우다 끝내 '자살'을 택한 비정규직 아버지의 이야기다. 바로 故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의 아들 '정하' 군이었다.

숭고미(崇高美)마저 느껴지는 '7살 소년'의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에서 '비겁한 어른'은 무너지고 말았다.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이 아이는 알아들었을까. 아빠의 이마에 둘러진 '생존권 사수'의 뜻을 알 리야 없겠지만, 그 표정만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먼 훗날 이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당신이 살았던 그 시기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사진을 보여주고 싶을 것 같다. 2009년을 대표하는 사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미래를 압축해서 담아낸 한 장의 사진. 그걸로 이 아이를 고르고 싶다.

박종태 씨는 지난 4월 30일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호소를 담은 유서를 남긴 채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숲 속 나무에 목을 맸다. 택배 기사라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호소하기 위해 스스로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는 유서에서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빈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미완의 마침표'

박 씨의 죽음이 촉매제가 돼 지난 6월 15일 화물연대-대한통운 간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노사는 △해고된 택배 기사 38명 3월 15일 이전의 근무조건으로 복직 △복귀자들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 금지 △노사 양측의 민·형사상 고소, 고발, 가처분 소송 취하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회사측이 올 1월 약속했던 '운송료 30원 인상' 문제는 이번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 다른 핵심 쟁점이었던 '합의문의 서명 주체'와 관련해서도 화물연대가 아닌 '대한통운 광주지사 택배분회'라는 이름으로 합의문에 명기했다. 이는 대한통운 사측과 국토해양부가 화물연대의 실체를 즉 노동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박 씨의 죽음은 자기들이 한 약속조차 어기고 집단 해고로 보복한 재벌대기업의 횡포가 첫째 원인이지만, 근본적 원인은 택배 기사, 화물차주,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더욱 탄압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씨의 운구행렬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우리 사회는 '말이 사장이지 비정규직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허덕이는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너무 많다 보니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우린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박종태 씨의 죽음은 법적·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도록 여론을 환기시켰다. 동시에 생계형 파업이 아닌 제도 개선 투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숙제를 노동단체들에게 안겨줬다. 박 씨의 죽음으로 78명의 택배 기사는 일터로 돌아갔지만, 그의 유지는 살아남은 자의 과제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미완의 마침표'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하수진 씨는 동료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죄인은 여러분들이 아니라 헛소리하고 뻔뻔한 저 담 뒤에 숨어 있는 자들입니다."며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고인의 유언대로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되레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박종태 씨의 장례는 유족과 동료 노동자들의 결연한 의지로 그의 죽음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치르지 못했다. 사망한 지 52일 만인 6월 20일에서야 대전에서 영결식을 갖고 '5월의 거리' 금남로 노제를 거쳐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5월의 거리' 광주 금남로에서 '눈물 비'를 맞으며 박종태 열사의 노제를 치렀다.   © 안병현 기자/광주in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노동자, 시민 등 2000여 명이 함께 했다. 수십만 명이 추모 물결을 이루고 전국에 생중계됐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한 규모였다.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서 밤을 세워가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울부짖던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들은 박 씨의 장례식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참석한 정치권 인사로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 권영길 의원, 홍희덕 의원,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심상정 전 대표 등 모두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이 상주로서 지켜야 할 박종태 씨가 있음에도 노 전 대통령 장례 기간에 지도부가 집단으로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했다.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저항하다 자살하고 감옥 간 노동자들이 얼마인데, 민주노총의 조문이냐."는 진보진영 일각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답례 차원에서라도 민주당이나 친노세력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 한두 명쯤은 박종태 씨 장례식에 가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 노무현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과 박종태 씨의 그것이 그들에겐 다르다고 생각한 걸까. 아님 가난한 노동자의 영결식장에 가봐야 주울 지갑이 없어서일까. 박 씨가 몸담았던 화물연대 측에 이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내가 좀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고 쏘아붙였다.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는 곳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노동자의 그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노무현 추모 열풍에 가려져 있다 '살짝' 들켜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지혜롭고 유능해져야 이긴다

노무현을 사랑했다가 정책적 이유로 돌아선 사람, 시종일관 증오만 했던 사람.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노사모와 친노 정치인들은 자유로울까. 천만의 말씀이다.    

노무현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 그를 아프게 했던 것만큼, 노무현에 대한 일방적이고 때론 과도한 사랑이 그를 노사모 울타리 안에 고립시켰다는 것도 성찰해볼 일이다.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노짱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노무현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거나 질리도록 만든 점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종태 씨의 죽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서민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 있었다. 이 사회적인 죽음들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이제 와서 모두의 잘잘못을 일일이 따져보자는 게 아니다. 거대한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또다시 반복될까 염려할 뿐이다.

분명한 건, 박종태 씨의 비극적 자살과 절절한 유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찬란한 추모 뒤에 가려진 '불편한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추모 인파의 대부분은 노무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바보 노무현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한, 그들 역시 '바보 박종태'보다 특별히 나아질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을 제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바보'가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유능해져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진보시킬 수 없다. 세상과 정치인을 바라보는 안목을 스스로 키우지 않고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과 이미지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은 '죽어서 신이 된' 노무현과 '살아서 뻔뻔한' 이명박을 계속 지도자로 모시고 살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이든 모두의 불행이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의 죽음을 폄하할 순 없지만, 노무현이든 박종태든 그 누구든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것에 반대한다. 앞으로 탄생하는 우리의 지도자는 '살아서 행복한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故 박종태 열사의 꽃상여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이젠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할 때

용산 참사, 박종태 씨의 죽음, 2600여 명의 노동자가 외국자본의 먹튀에 희생당해 백주에 직장에서 내몰린 쌍용차 사태,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집단 사퇴 요구, 금방이라도 뚜껑이 열릴 듯한 장자연 리스트, 미디어법 개악 저지에 나선 언론인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 정권의 오만·독선·소통부재를 비판하며 124일간의 고행길을 이어간 오체투지 순례단….

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이지만,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거대 권력의 억눌림으로부터 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진보진영은 박종태 씨와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야말로 우리 사회 구조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사건이자 우리 자신들의 일이라며 뜨거운 관심을 호소하지만, 추모하는 마음까지 명분으로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보란 그래서 어렵고 때론 슬프기도 하다. 특별한 죽음은 신화(神話)로까지 만들어 추억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죽음은 내 알 바 아니다는 사람과도 부대끼며 세상을 바꾸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광장의 촛불에 경탄하는 사람도 많지만, 스쳐가는 바람에도 꺼져버리는 '허약한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거센 비바람을 막아 촛불을 지켜내고 횃불로 타오르게 할 '대안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계승해야 할 죽음은 누구입니까?

언젠가는 알 게 될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들을 용기 있게 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자가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저 순간순간 반사이득으로 한몫 보려는 자들이 가짜란 것을.

노무현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하지 말라고 했던 정치를 다시 붙잡고 고통스러운 짐을 나눠져야 한다. 성공에 대한 예감보다는 여전히 실패에 대한 불안이 더 강하다.

그리고 그동안 슬퍼하지 못한 죽음에 슬퍼해야 하며, 분노하지 않았던 죽음에 분노해야 한다.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 노력해야 한다.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내 안에 숨지 않고 나에게 물어본다.

"당신이 오롯이 계승해야 할 죽음은 누구입니까?"


☞ 고 박종태 열사 유서와 부인의 편지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Posted by 엥란트



실제 비정규직, "더 많고 더 열악하다"
[분석]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발표, 비정규직 임금·복지 열악
 
김영국
비정규직 계속 증가, 정규직과 격차 '심각'

- 임금근로자 36%가 비정규직, 계속 증가 추세
- 비정규직 주로 男.40대.고졸이 많아, 대졸도 증가 추세
- 비정규직 임금, 정규직의 64%
- 퇴직금, 상여금, 사회보험 등 각종 복지 혜택, 비정규직 특히 열악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임금근로자의 36.7%(2007년 3월 기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체 임금근로자 10명 중 3~4명이 비정규직이었다. 또 한시적근로자가 비정규직의 대부분(63.1%)을 차지하고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소폭 감소했던 비정규직 근로자가 다시 늘어난 것은 대졸 이상의 고학력 비정규직 근로자가 21만 명이나 증가한 탓이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 근로자의 64% 정도에 불과했고, 특히 퇴직금, 상여금, 시간외 수당, 유급휴가나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같은 '복지 후생 혜택'이 정규직의 절반도 안돼 매우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성별, 연령별, 학력별로는 남성과 40대, 고졸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대졸 출신 비정규직도 증가 추세에 있다.

통계청이 오늘(23일)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의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2007년 3월 실시)>에 따르면 전체 임금근로자는 1573만 1000명이었고, 이 중 정규직 근로자는 995만 8000명(63.3%)이었으며 비정규직 근로자는 577만 3000명으로 36.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숫자가 지난해 8월 조사(545만 7000명)보다 32만 명이 늘었다. 비정규직 비중도 8월(35.5%)보다 1.2%포인트 증가했다.

이 가운데 대졸 이상의 고학력 비정규직은 177만 4000명으로 지난번 조사 156만 5000명보다 20만 9000명이 증가했다. 비정규직 가운데 고학력자의 비중도 28.6%에서 30.7%로 높아졌다. 이에 비해 고졸 비정규직은 소폭 감소했고 중졸 이하의 저학력 비정규직은 7만 명 증가했다.

연령별로는 전체 비정규직 중 40대가 25.2%로 가장 많았고, 한시적근로자는 30대가 26.3%로 많았으며, 10대 비정규직도 1.8%, 60세 이상도 11.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임금근로자는 월 평균 172만 4000원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규직 평균 임금이 198만 5000원인데 비해,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127만 3000만원으로 정규직의 64%에 불과했다.

123만 '시간제 근로자', 복지 혜택 "전무(全無)"

특히 '복지 혜택' 측면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크게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복지 혜택 수혜 정도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이가 큰 것이다.

정규직은 전체 정규직 근로자의 68.9%가 퇴직금 혜택을 받고 있고, 상여금은 69.5%가, 시간외 수당은 54.3%가, 유급휴가는 60%가 혜택을 받고 있었지만, 비정규직은 퇴직금의 경우는 33.7%, 상여금은 31.4%, 시간외 수당은 24.3%, 유급휴가는 27.3%만이 혜택을 받고 있어 모두 정규직의 절반도 채 안됐다.

▲5월 23일 열린 여성비정규노동자 대정부 규탄대회, 뉴코아 조합원들이 대거 참석, 사측의 부당 노동행위를 규탄하고 있다.     ©대자보

또한 비정규직의 건강보험 가입 비율은 41.8%, 국민연금은 39.3%, 고용보험은 38.8%로 전체 임금근로자(건강보험 63.9%, 국민연금 62.6%, 고용보험 55.6%)보다 사회보험 가입 비율도 훨씬 낮았다.

사회보험 가입 비율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매우 컷다.

국민연금은 정규직의 76%가 가입된 반면 비정규직 가입 비율은 39.3%로 큰 차이를 보였다. 건강보험은 정규직의 76.6%가 가입된 반면 비정규직은 41.8%만 가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고용보험은 정규직이 65.4%인 반면 비정규직은 38.8%만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시간제근로자 123만 2000명은 퇴직금, 상여금, 시간외 수당, 유급휴가 수혜 비율과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가입 비율이 모두 1~3%에 불과해 복지 혜택이 거의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전형근로자 224만 4000명도 복지 혜택 수혜 비율이 10~20% 대에 불과했다.

임금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4년 6개월로, 정규직 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5년 11개월인 반면, 비정규직은 2년 2개월에 불과했고 비정규직 중에는 1년 미만이 절반이 넘는 56.9%로 나타났다.

또 임금근로자의 37.1%가 '주5일(40시간) 근로제'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5일 근로제를 실시하는 경우는 정규직이 41.3%로 나타났으며, 비정규직은 30%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근로자 가운데 교육.훈련 경험 유무에서 『경험 있음』으로 응답한 경우는 22.4%로 나타났으며, 교육비의 부담 주체는 '회사', '국가기관' 순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취업 준비를 위한 교육.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비정규직 근로자 규모가 큰 산업분야는 사업, 개인, 공공서비스업(227만 5000명)과 도소매, 음식숙박업(108만 7000명)으로 나타났고, 직업별로는 기능, 기계조작, 조립, 단순노무종사자 등이 276만 5000명으로 비정규직 규모가 가장 큰 직업군으로 조사됐다.

노동계 집계, 실제 비정규직은 850만(57%)

오늘 통계청이 발표한 근로자 실태 조사 결과는 어디까지나 정부 통계 자료이기 때문에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부분도 많아 실제 비정규직의 수는 훨씬 많고, 임금 수준이나 복지 혜택 등도 더 열악할 것으로 보인다.

임금 수준이나 복지 혜택 등이 비정규직보다 훨씬 못하지만, 정부의 통계 분류상 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직종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명칭은 정규직이지만 신분은 비정규직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다.

정부 분류상으론 정규직이지만 정부가 규정한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임시.일용직의 '취약근로자'가 무려 350여만 명에 이른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서 노동계(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정부의 기준이 각각 다르다. 그 결과 실제 비정규직 숫자도 동일한 조사결과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에 발표 기관마다 다르게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수가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었다는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실제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2005년도 집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는 855만 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57.1%에 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정부 공식 통계 자료에서 비정규직 수가 증가했다는 건 실제는 더 많이 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근로 형태별 용어 설명-통계청 분류 기준>

◦ 정규직근로자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無期근로계약)하고 사업장 내에서 정해진 소정노동시간에 따라 전일제(全日制・Full-Time)로 근무하는 근로자. 따라서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해고할 수 없고, 고용이 정년까지 보장되어 있음.

◦ 비정규근로자
1차적으로 고용형태에 의해 정의되는 것으로 ①한시적근로자 ②시간제근로자 ③비전형근로자 등으로 분류된다.

◦ 한시적근로자
근로계약기간을 정한 근로자 또는 정하지 않았으나 비자발적 사유로 계속근무를 기대할 수 없는 근로자.

◦ 기간제근로자
근로계약기간을 설정한 근로가 해당됨.

◦ 전일제근로자
직장(일)에서 정한 소정의 근로시간대에 정상적으로 출근하여 정상근로시간 동안 근로하는 자로, 평소 1주에 36시간 이상 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해당됨.

◦ 시간제근로자
직장(일)에서 근무하도록 정해진 소정의 근로시간이 동일 사업장에서 동일한 종류의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의 소정 근로시간보다 1시간이라도 짧은 근로자로, 평소 1주에 36시간 미만 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해당됨.

◦ 비전형근로자
파견근로자, 용역근로자, 특수고용근로자, 가정내근로자(재택, 가내), 일일근로자 형태의 비정규직을 말함.

◦ 파견근로자
임금을 지급하고 고용관계가 유지되는 고용주와 업무지시를 하는 사용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로 파견 사업주가 근로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 파견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 사업주의 사업장에서 지휘, 명령을 받아 사용 사업주를 위하여 근무하는 형태.

◦ 용역근로자
용역업체에 고용되어 이 업체의 지휘하에 이 업체와 용역계약을 맺은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는 형태(예 : 청소용역, 경비용역업체 등에 근무하는 자).

◦ 특수고용근로자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화물지입차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처럼 독자적인 사무실, 점포 또는 작업장을 보유하지 않고 비독립적인 형태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다만 근로제공의 방법, 근로시간 등은 독자적으로 결정하면서 개인적으로 모집.판매.배달.운송 등의 업무를 통해 고객을 찾거나 맞이하여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일을 한만큼 소득을 얻는 근무 형태.
기업전략에 의해 개인사업자처럼 취급돼 노동법 등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한 형태이다.

◦ 가정내근로자
재택근무, 가내하청 등과 같이 사업체에서 마련해 준 공동 작업장이 아닌 가정내에서 근무(작업)가 이루어지는 근무 형태.

◦일일(단기)근로자
근로계약을 정하지 않고, 일거리가 생겼을 경우 몇 일 또는 몇 주씩 일하는 형태의 근로자.


☞ 통계청 발표-'경제활동인구의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 상세 내용 보기(통계청, 2007.5.23)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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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5/23 [21:48]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5.23)

:
Posted by 엥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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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 명목 비정규직 늘리려는 기업, '살길 아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모델'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5개국을 탐방 중인 임종인 전 의원이 어제(18일)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 교육, 의료 분야에 이어 세번째로 '노사정 관계'를 소개했다.

임 전 의원은 "북유럽은 '사람 값을 비싸게 치는 사회'였다."면서 "특히 비정규직이 10%밖에 안되고, 오히려 비정규직에게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준다."고 전했다. 그 이유는 비정규직은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

또한 "북유럽 국가들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줘야 된다'는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비정규직은 계속적으로 근무하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따름이지 직종 간 차이나 임금의 차이는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향에 대해 "매우 염려된다."고 토로했다.

임 전 의원은 이들 복지국가들에 있어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했다며 "정부가 교육비와 의료비를 거의 무료로 해주고, 연금과 주거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될 비용을 줄여주었고, 실업보험을 80% 정도로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가 되어도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죽을 각오로 해고에 반대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직업 교육을 시켜서 재취업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같은 정부 비용은 30~50%에 이르는 높은 세금으로 해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국민들의 조세 저항 등 반발이 거세지 않는 것은 세금을 낸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보는 '보편적 복지' 시스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 전 의원은 북유럽 국가들에게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점으로 ▲이웃 국가들과 통합적 관계 강화 ▲정책적 독자성 유지 ▲농업과 제조업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아니며 자신감을 갖고 서로 위하고 살 것 등을 꼽았다.

임종인 오늘 귀국, 대안 제시할 터

한편 임 전 의원은 오늘(19일) 한달간의 북유럽 탐방을 마치고 귀국했다. 임 전 의원은 그동안의 북유럽 복지국가 조사·연구 결과를 토대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과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쓸 계획이다.

다음은 어제 임종인 전 의원의 <북유럽 리포트> 인터뷰 전문이다.

김미화 : 지금까지 임종인의 북유럽 리포트, 두 차례에 걸쳐서 북유럽의 선진 제도를 탐방하고 있는 임종인 전 의원을 연결해보고 있죠. 오늘은 북유럽의 교육, 의료 분야에 이어서 북유럽의 노사 관계는 어떤지 들어보는 시간 마련해 보았습니다. 임 전 의원 님 안녕하세요.

임종인 : 네 안녕하십니까. 임종인입니다.

김미화 : 네.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임종인 : 네. 다 나았습니다. 내일(19일)이면 서울에 도착합니다.

김미화 : 아유 그러시군요. 북유럽이 경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노사 간에 원활한 대화하고 합의 이게 아주 주요 요인인 것 같던데 직접 보시기에 어떻든가요?

임종인 : 네. 그렇습니다. 여기는 '사람 값을 비싸게 치는 사회'드라고요. 여기도 1930년대까지는 매우 어려워서 미국으로 이민도 많이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노사 간의 서로 타협과 협의를 통해서 좋은 산업을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스웨덴을 보면은 자동차의 경우 볼보, 통신의 에릭슨, 가전의 일렉트로스, 가구의 이케아 이런 것들을 발전시켰죠.

김미화 : 네. 북유럽에서도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있을 거잖아요.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 뭐 사회적 문제 이런 것은 없나요.

임종인 : 여기도 조금은 있습니다만, 우리 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는 우선 비정규직이 10%밖에 안됩니다. 우리나라는 60%에 육박해 있죠. 그리고 오히려 비정규직을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줍니다. 왜냐하면 고용이 불안정하니까요. 그 다음에 1년 있으면 자동으로 정규직으로 되고 있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줘야 된다'는 정신에 바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화 : 정규직,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일할 때 어떤 차이 같은 게 있나요?

임종인 :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비정규직은 계속적으로 근무하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따름이지 직종 간의 차이랄지, 임금 차이랄지 이런 건 없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임금은 오히려 더 주는...

김미화 : (비정규직에) 왜 더 주죠?

임종인 : 고용이 불안하니까 그렇습니다. 그 대신 돈을 조금 더 주는 거죠.

김미화 : 근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분위기인데, 북유럽은 어떻게 비정규직 근로자가 10%대인가요.

임종인 : 저는 우리나라의 경향이 매우 염려되고 있는데요. 여기서는 기업에 있어서 가중 중요한 재산은 근로자다. 근로자는 대우를 잘해줘야 된다 이런 게 하나가 있고, 그 다음에 노조 조직률이 높습니다. 노조의 힘이 세죠. 노조가 한 80% 조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1%밖에 안되고 있어서 힘을 못 쓰고 있죠.

김미화 : 근데,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실제 생산력 증대로 이어지는지 그거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요?

임종인 : 그렇죠.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면 그게 생산력이 높아지는지 그런 문제가 여기도 60년대, 70년대에 있었더라구요, 생산력이 떨어지는 게...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대책을 세워서 기업에 대해서는 해고의 권한을 좀 준달지, 실업보험을 90%에서 80%로 낮춰준달지 이렇게 해서 도덕적 해이를 막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김미화 : 그러니까 기업의 어떤 권한을 가지고 도덕적인 해이를 막는다?

임종인 : 예, 기업도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경영이 어려우면 그런 이유를 노조에 제시해서 해고를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주었드라고요.

김미화 : 그렇군요. 한 나라의 경제가 잘 움직이려면 기업, 노조, 정부가 서로 협력을 잘  해나가야 하는데, 그럼 북유럽에서 정부의 역할은 어떤가요?

임종인 : 정부가 중요하죠. 우선 정부는 교육비와 의료비를 거의 무료로 해주고, 연금과 주거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기업이 그걸 부담해야 될 비용을 줄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실업보험을 80% 정도로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가 되어도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죽을 각오로 해고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아도 되죠. 그 다음에 직업 교육을 시켜줍니다. 재교육을 시켜줘서 재취업을 할 수 있게 이렇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김미화 : 그럼 그런 교육, 의료, 연금, 주거 등 정부에서 대주는 이런 비용은 어떻게 처리를 하나요?

임종인 : 그건 국민의 세금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세금이 적게 버는 사람은 약 30%, 많이 버는 사람은 50% 정도 세금을 내서 세금으로 기본적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김미화 : (그 부분에 대해서) 저번에 말씀을 하셨는데, 세금에 대한 반발이 그렇게 거세지 않다. 그러셨잖아요.

임종인 : 예. 그것은 미국하고 다른데요. 미국하고 달리 (북유럽이) 세금에 대한 조세 저항이 낮은 것은 세금을 낸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보는 '보편적 복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은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내면서 선별적 복지라고 해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미화 : 네. 격차 없이 보편적으로 복지 혜택이 간다...

임종인 : 예. 모든 사람한테 교육, 의료 다 거의 무료로 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미화 : 임 전 의원 님. 지금까지 북유럽 국가를 쭉 둘러보셨는데, 그러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서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좀 정리해 주신다면요.

임종인 : 일단 유럽은 통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유럽연합이 27개국인데 평화와 경제협력으로 가고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남북 대결이니 이렇게 분열로 가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미국과 영국 등 유럽 국가들 그리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고요.
그리고 두번째로 이 작은 나라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이런 나라들이 500만 내지 900만 인구밖에 안되는데 독자적인 화폐를 유지하고 있드라고요. 핀란드는 유로를 쓰고 있었지만은...그래서 여러가지 정책에 독자성을 주장하는 게 재미있었고요.
그 다음에 1차 농업, 2차 제조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도시국가가 아니니까 절대 그래서는(농업, 제조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아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경제 규모가 11~13위이고, 올핌픽 메달도 7위로 땄고, 한국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 수도 18위였습니다.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서로 위하고 살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화 : 아유 그랬군요. 우리 국민이 또 똘똘 뭉치면 잘하는 국민이거든요. 마지막에 이렇게 힘을 주시네요.

임종인 :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가 순위가, 국가의 경쟁력 순위가 저는 200개 국가 중에 최소 20등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도로나 공중화장실이랄지,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렇고요. 우리나라가 많은 힘이 있습니다. 힘을 내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미화 : 그럼요. 3주에 걸쳐서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 드리구요. 내일 잘 돌아오시구요. 고맙습니다.

임종인 : 예,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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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인 "남보다 빨리 아닌 함께 달리는 게 국가경쟁력"

2008/09/19 [21:36]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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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보다 더 많은 나라 
  [덴마크 통신]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세 배 되기도"(2008.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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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722115621&Section=
:
Posted by 엥란트

타락해 가는 동반성장과 ‘만원의 행복’
[신년 제안] 이기준에서 김진표, '언저리 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2)
 
김영국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김진표 교육, 타락해가는 ‘동반성장’의 속살

교육부총리 인선을 두고 이기준, 김효석, 그리고 김진표로 이어지는 잇따른 ‘장고끝 악수(惡手)’는 올해 벽두부터 꺼내든 노 정권의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이란 화두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퇴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다.

후임자로 지목된 이들이 각각 ‘부도덕 종합세트’, ‘치졸한 연정’, ‘투기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듯 노 정권의 동반성장의 논리가 얼마나 ‘친재벌, 퇴폐적 성장론’에 마취된 채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지를 보여주는 시그널이 아닐 수 없다.

재임기간 동안 100조원이 넘는 부동산값 폭등, 분양가 원가 공개 반대, 이라크 파병 적극 찬성, 강북 특목고와 판교 학원단지 설치 주장, 무소불위의 상징인 재경원 부활론, 삼성그룹 예찬론 등 교육수장으로서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절감’ 의지는 커녕 교육마저 사교육 투기장으로 전환해 ‘재계가 요구하는 자판기’로 만들겠다는 속셈이 아니라면 이런 인물을 편집증적으로 고집하는 인사권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런 사람을 경제부총리로 다시 경제를 맡기려 했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은 그의 동반성장론 속에 감추어진 ‘타살된’ 분배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교육계는 물론 시민사회가 총력으로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퇴진은 물론, 설사 불발되더라도 향후 철저히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오죽하면 한나라당이 겉으론 반대하면서 노 정권의 실패를 보장해줄 원군으로 여기고 차라리 그냥 놔두고 보겠다 했겠는가.
정권이 타락 조짐을 보이면 이를 견제해야 할 열린우리당의 잇따른 감싸기와 총력방어 추태는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부적격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나서면서 이참에 타락의 맨홀에 함께 빠져들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최근 노 대통령의 잇따른 인사가 인재풀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려 들지만 터무니 없는 변명이다.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로 이어지는 참여정부 핵심의 인사 패착은 인재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작심하고 부패한 ‘경륜’장에서만 사람을 고르는 ‘인식풀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폼나게 드리블 하다 비정규직, 신자유주의 골대앞에 연속 ‘똥볼’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선진경제 진입을 위한 성장-분배의 동반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올해 주요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 진단과 처방책 일부를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위기 해소를 위한 교본’ 첫 장에 나와있는 목차는 잘 외우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각론은 제대로 읽지 않은 듯 보였다. 어떤 부분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거나, 아예 읽지도 않은 모양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 위기극복의 핵심이 양극화 해소에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으나 그 처방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있거나 실행하고 있는 ‘수박 겉핥기식’ 정책의 나열에 그치고 말았으며,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처방의 유효 적절성은 차치하고라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양극화를 사실상 조장해온 정부정책의 과오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기업 노조의 양보는 얘기하면서도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노동자 서민을 위해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 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은 재벌 환심사기 퍼레이드였다.

특히 비정규직의 무차별적인 확대를 가져올 수 있어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비정규관련법의 조속한 국회처리를 언급하고 밀어붙이려는 안이한 태도, 사회적 대타협을 이야기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노동계를 매도하거나 공격하는 데 열을 올려온 이중성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 맹종적 도입의지만 강조함으로써 양극화의 심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나라가 고루 따뜻해지기 위해선 신자유주의란 ‘보일러’를 먼저 점검하는 게 순서라는 일각의 당연한 지적은 외면한듯 보였다.

분배개선과 관련 조세, 재정, 노동, 복지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분배-재분배 방안의 제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분배가 자칫 조금 나은 서민과 정규직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분배’를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그래서 나왔다.

결국 노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축구선수처럼 ‘선진경제’를 가슴에 달고 폼나게 드리블하다 비정규직과 신자유주의 골대 앞에서 연속 ‘똥볼’을 차버린 셈이다. 한국 축구의 고질병인 문전처리 미숙이 여전함을 확인하면서 씁쓸함을 곱씹어야 했다.

노 대통령이 틈만 나면 외치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장미빛 전망도 좋고 나쁨을 떠나서 1인당 국민소득이란 것 자체가 국내총생산을 총인구로 나눈 것이기에 그안에는 기실 분배의 개념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연간소득이 1백만 달러인 사람이 1백만명(경제활동인구의 5% 미만)이고 나머지 경제활동인구는 소득이 전무하더라도 2만달러는 달성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직하지 못하는 밑바닥의 유권자들에게 2만달러라는 ‘약속’은 정부의 진정성 여부에 따라 언제든 고통 전가의 캠페인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2만달러 시대론은 애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파이를 빨리 키워한다며 강조한 지론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련화한 것이고,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 핵심들이 경제에 관한 재계의 고귀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 배려보다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깃든 것이다.

투명성 강화와 재벌총수의 전횡 방지를 위해 재벌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을 향해 ‘외세를 등에 업고 삼성의 지배구조에 흠집내려는 작자들’이라는 논리가 국민소득 2만달러 구호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소득 2만달러’의 구호는 서민가계 회복과는 사실상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용카드 남발, 건설경기 부양, 재벌 등 대기업의 경상이익에 의존해온 성장은 서민대중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유지하기 위해 ‘효자 노릇’을 하는 대기업를 더 키워주는 동시에 건설경기를 최대한 부양시킬 수도 있다. 실제 참여정부를 비롯 역대 정부의 정책기조가 대체로 그래왔다.

국민소득 2만달러는 ‘환상’은 아니다. 최근 십여년간의 GDP 추이를 보면 2010년 2만달러 달성은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환율이 하향 안정화가 지속된다면 국민소득의 증가가 예상에 못미쳐도 목표는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 지가 먼저다. 약자를 딛고 서는 방법으로는 설사 2만달러가 돼도 약자인 서민대중은 여전히 빈곤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외침은 재계와 여.야 보수정당, 수구언론의 환호속에 노동.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되레 ‘양극화’를 불러왔다.

심지어 한나라당 마저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선진한국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환영하고 나설 정도였다. 노 정권과 재벌, 수구언론, 한나라당의 ‘新 4자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위용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경제가 어렵다’며 아우성치는 수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의 목소리에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서민 후보’로 인식하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겼다며 호들갑 떠는 일각의 성급한 해석은 이처럼 초장부터 어긋나고 있다.

분배정책에 관심조차 없는, 권력의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들

앞서 지적한 대로 노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 나타난 현실인식에 대한 안이함과 공허함 그리고 대안의 구체성과 종합성, 균형감, 이를 가능케 할 사회적 합의 방식의 제시 없이 내용과 의제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지적은 전문가, 언론,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진보진영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충분히 나왔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 아래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대통령의 구상을 행정과 입법으로 실행에 옮기게 될 정부관료와 여당의 대응은 답답하다 못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노 대통령 구상의 실질적 주무부서인 경제총수와 노동부 장관은 과연 이들이 그나마 대통령의 의지조차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헌재 부총리는 오늘날 신용카드 대란의 주범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일까. 저소득층에 대한 일부 원금탕감을 시사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헌재 같은 사람에겐 씨도 안먹히는 모양이다. 그는 참여정부 내에서 시간벌기와 물타기로 분배적 관점의 정책들을 뒤엎는 데 ‘귀재’ 노릇을 해왔다. 실패자란 평가가 지배적인 이헌재 부총리가 돌아온 또다른 실패자 김진표의 교육부총리 입성을 지원사격하고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정도다. 노동계를 향해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적대감을 보여오다 자신의 제자들로부터도 부끄러운 장관이 돼버린 인사가 노사정 대타협을 위한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며 손을 내밀수 있을 지, 그 손을 노동계가 흔쾌히 잡아 줄 지는 예측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참여정부의 대통령과 군사정권시절 마인드에 가까운 관료들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연주하기에는 환상에 가까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99년 수준에도 못미치는 최저생계비 책정을 하면서 1인가구 40만원으로 한달동안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뻔뻔스러움은 수백만명의 서민들에게 일년내내 ‘만원의 행복’을 체험해 보라고 놀리는 듯하다. 정말 ‘장난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정부가 경제 양극화에 주목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나, 해법을 찾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양극화를 독립적인 고민거리로 삼기보다는 성장을 통해 파이(몫)를 키우면 양극화는 자연스레 시장 기능에 따라 해결되는 종속변수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권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친재벌적인 한나라당은 물론, 중도라는 열린우리당도 그런 인식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계의 성장 일변도 논리에 바탕을 둔 이런 논리가 허구적이었음은 무엇보다 지금의 경제 현실에서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청와대 인사마저 “혜택받은 몇몇 경제 주체를 제외한 상당수 ‘일하는 국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다.

청와대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직속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를 중심으로 별도의 연구팀(TFT)을 꾸린 것은 ‘정부 정책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자인한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어떤가. 150석에 가까운 거대정당임에도 분배정책에 대한 어떤 대안도 독창적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럴만한 역량과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경제정책이란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정책들을 다시 읊어대는 데 급급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벤트에만 열중하고 있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열린우리당내 경제정책을 주관하는 부서의 인물들을 보라. 하나같이 과거 성장위주의 관료, 재벌출신의 인사들로 가득하다. 개장사(개혁장사꾼)만 아니라면 한나라당에 있어도 무방한 인사들이 여당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으니 경제에 관한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궁합이 잘 맞을 수 밖에 없고, 실제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킨 법안들은 친재벌, 반노동, 성장우선이 주조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올 한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쟁없는 해’로 만들자며 민생외면에 대한 그간의 국민적 비난을 의식한듯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 거대정당이 민생과 경제살리기라는 아젠다에 있어서 만큼은 정쟁을 하고 싶어도 할 꺼리가 없을 것이다.

‘성장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친재계, 반노동’이라는 경제정책의 기본 뼈대가 같은데 싸움판을 벌여봐야 둘다 반서민적이라는 실체만 들통날 굿판을 굳이 펼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생우선이라는 대국민적 이미지만 채워넣기 위해 적당히 화합한 척 해주면 될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국보법 폐지를 야합으로 무산시켜 가며 이를 지렛대 삼아 기금관리법, 민간투자법, 조세특례법 등 재벌과 정치권에 특혜를 안겨줄 민생악법은 열-한 공조로 사이좋게 통과시키고, 오는 2월에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확산시킬 비정규직 관련법 통과를 예정해 놓으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경제정책의 동질성을 몸소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권력게임과 연관된 일에는 잡탕정당이란 닉네임이 말해주듯 다양해 보이지만 경제사회적 정책에 대한 열리우리당 구성원들의 인식은 일사천리, 천편일률에 가깝다.

당선되자 마자 재벌을 위해 무얼 도와줄 것인가를 찾다가 결국 통과된지 한달도 안된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를 이야기하는 열린우리당의 신임 원내대표를 보라. 불과 한달전 연말 국회에서 “삼성의 로비에 굴복할 수 없다”고 몸싸움 직전까지 가며 출총제 유지를 관철시킨 당의 원내대표가 보여준 ‘기만적인 기회주의’가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란 변명기제를 지렛대 삼아 국민을 하염없이 우롱하고 있다. 얼마나 한심했던지 대통령까지 나서 원내대표에게 신중론을 주문할 정도다.

노동운동 출신이라는 열린우리당 노동담당자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인식은 훼절한 노동운동가들의 인식이 어떻게 현실에 영합할 수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386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삼성그룹 연구소를 찾아가 경제를 배우며 재벌의 문하생을 자처하고 나선 자기모순적인 추태는 그들의 비전이 어디에 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중도’를 내세운 거대정당에 눈에 띄는 분배적 관점의 정책브레인이 한 명도 없는 정당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정이 어러함에도 당내에서 입만 열면 개혁을 주창하던 사람들에게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커녕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아마도 비판을 안하는 게 아니라 왜 비판해야 하는 지 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 대통령을 비롯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내에서 최근 교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실용주의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이라는 관점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허떠하리’만 난무하며 ‘멀건 개혁’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러니 ‘선진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 철폐나 부동산 문제와 같은 국민적 개혁과제를 유야무야시킬 조짐이 여권내에서 언죽번죽 고개를 쳐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층의 적반하장,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를 넘어서

우리는 아이엠에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려 164원이라는 국민혈세를 공적자금이라는 미명으로 기업과 은행에 투여한 바 있다. 그런데 일례로 제2의 위기로 불리며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렵다는 오늘의 경제적 위기와 양극화의 핵심 요인중에 하나인 신용불량자 문제를 위해서 7.5조원(=제일은행 살리는데 든 비용, 일부에서는 1조 6천억이면 된다는 주장도 있음) 정도면 획기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처방의 유효성과 적절성에 대한 검토는 차지하고라도 이에 대한 논쟁조차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고 있다. 왜일까.

다름아닌 재계와 수구언론, 관료, 보수.수구 정치권으로 이어지는 기득권층의 ‘세금 함부로 쓰지 말라’는 으름장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지상주의의 사고방식, 분배를 일종의 ‘시혜’ 또는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는, 밑도 끝도 없는 탐욕과 편향된 시각이 가장 큰 장애요소이기 때문이다.

정작 국가를 부도위기로 내몰았던 주범들이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금반지까지 내놓았던 서민대중을 위해서 조금 진전된 대책이라도 들고 나오면 이를 앞장서 반대하는 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다수의 서민들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운다.

적어도 성장이 본격화한 60년대 이후 40년이 넘도록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담론이 바로 '성장지상주의'다. 그 결과 오늘날 국민들도 언론도 재계도 정치인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만큼 경제개발예산과 복지예산의 격차가 지독할 정도로 성장일변도의 예산을 편성해온 나라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거의 없을 정도이다. 늘상 복지정책은 언발에 오줌누기에 그쳐왔다.

IMF는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를 세계가 놀랄만큼 빨리 졸업했다며 여러 차례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이 성공한 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 시장을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약탈적인 수익을 합법적으로 걷어가는 데 대성공한 아이엠에프 자신의 자축이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엠에프는 첨병인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IMF 복합체’라 불리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IMF란 고깔을 쓰고 와서 한바탕 걸판지게 놀아주고 걷어간 성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이엠에프의 구상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재계와 수구언론, 정치꾼들로 대변되는 소수의 기득권층이 국가가 아이엠에프의 충견 노릇을 해준 대가로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고 되레 어부지리로 승리를 독점했을 뿐, 절대다수 서민대중은 우리 사회 양극화 현실의 참혹함이 보여주듯 절망에 가까운 패배자가 되었다.

오늘날 개방화, 세계화는 이윤율 저하로 인해 위기를 맞은 자본의 해외투자와 국제적 자본이동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대응에 따라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처럼 미국경제에서 해외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증대하면서 세계경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일종의 신제국주의와 유사한 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여차하면 해외로 나가버리겠다는 위협’을 통해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를 강화해 주었으며, 결국 거대 자본에 대해 최대의 자유를 제공하고 국가개입이나 노동자의 저항과 같은 일체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자본과 노동간의 양극화,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아이엠에프를 안 받아들였으면 우리는 이미 망했을 것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아이엠프 당시 이런 미신에 빠져있던 국내 주류언론의 호들갑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미국과 경제학자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 고정환율제, 자본유출 통제 실시 등 아이엠에프 구조조정 요구를 거부하고 철저히 ‘깽판’을 놓은 말레이시아는 지금쯤 부도가 나서 나라를 아이엠에프에 바쳤어야 옳다.

그러나 당시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비웃었던 한국의 관료, 정치꾼, 거대 언론들에게 미안스럽게도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경제를 부분적으로 안정화시켰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빠른 경제회복을 보였다.

이뿐이 아니다. 해외자본유입에 대응하여 자본유입의 일정부분을 1년 동안 중앙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하는 가변의무예치금제도(VDR: variable deposit requirement) 혹은 URR (unremunerated reserve requirement)이라 불리는 부분적인 통제정책을 실시, 단기자본의 비중을 줄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늘이는 효과를 낳았다고 평가되는 칠레의 경우도 있다.

비록 투자를 촉진하는 해외자본의 역할이나 경쟁 촉진을 통한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 등 세계화의 이득을 감안하더라도 개방화, 세계화만이 선(善)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주장을 펴는 성장위주의 경제관료, 경제학자, 주류 언론, 정치꾼들의 고정관념은 병적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성장우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개방화, 세계화 만능주의로 점철되고 있는 지배적 담론을 바꾸기 위한 언론과 지식인, 정치권, 특히 진보진영의 노력이 얼마나 절실한 지는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며, 노 대통령의 주장처럼 성장과 분배의 동반성장,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논쟁을 하루속히 우리 사회 거대담론의 중심에 올려놔야 할 것이다. / 편집위원
 
(계속 이어집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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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8 [23: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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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언저리국민’과 공짜점심의 수수께끼(1)
[신년 제안] 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김영국

대자보 창간 6주년을 맞았습니다. 대자보의 오늘을 있게 한 독자제현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우리사회 ‘양극화’와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언저리 국민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란 타이틀로 (1)참혹한 ‘양극화 분단’의 현실과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2)참여정부의 경제관과 ‘만원의 행복’, (3)노동.진보진영의 대응,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3회에 걸쳐 기고합니다. 독자제현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필자 주.


두 개의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시대

대한민국 분단의 역사는 참 모질고도 길다.

동족상잔의 남북 분단, 남한내 지역갈등의 동서 분단, 그리고 2004년부터 선명하게 모습을드러낸 상류층과 서민대중사이의 극심한 빈부격차가 낳은 ‘양극화 분단(economic polarization)’

‘삼팔선’이 아직도 남북을 가르고 있는 채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는 어느덧 ‘오오선’, ‘이팔선’이 칼자국처럼 아로새겨지고 있다.

나라를 부도위기로 내몰고도 164조원이라는 엄청난 국민혈세를 머금고 부활한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과 은행 그리고 이들 주식을 헐값에 사모은 외국인투자가들은 오늘날 주체할 수 없는 수익과 현금, 상여금 등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 언저리에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신용불량자, 실직자, 신빈곤층이 날아드는 영수증과 고지서를 앞에 놓고 텅빈 지값을 매만지며 눈물과 함숨을 짓고 있다.

분단은 그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중대한 정치적 변혁을 수반해왔다. 2004년부터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 분단’은 또 어떤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앞선 두 번의 분단은 한국 정치를 기득권층과 수구언론의 잘 짜여진 프로파겐다로 ‘반공’과 ‘지역정서’라는 우산속에 온갖 부패와 정치적 퇴행을 양산했다.

쌍방향 소통구조가 한층 강화된 지금, 경제적 양극화 분단이 서민대중에게 굴절없이 전달되고, 각성을 가져온다면 그 처방과 극복과정에서 한국 정치는 분명 또다른 질적 변화를 초래게 될 것이다.

참혹한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현실

우리사회는 상위 20%의 국민이 부(富)의 80%를 누리고 있다. 이른바 ‘2대 8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이 같은 소득불평등의 갈등구조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중산층이 소멸해가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의 상위층과 하위층, 강남과 강북,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기업과 가계),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반목과 대립도 기본적으론 2대 8 법칙이 낳은 병폐다.

‘아랫목과 윗목’, ‘보일러 교체와 담요 몇 장’ 그리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오’ 등으로 언명되는 2005년 대한민국 양극화 분단의 현실은 실로 참혹하다.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와 소득의 원천이 되는 ‘땅’은 상위 5%의 사람들이 절반 가량을 갖고 있고, 상위 20%까지 확대하면 이들이 우리나라 땅의 70%를 소유하고 있다. 땅에 비하면 주택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주택소유 총세대수는 832만 세대로 이중 2채 이상의 집을 가진 세대가 276만 세대에 이른다.

땅값은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95조원씩 불어났고, 땅값이 10%만 올라도 토지 소유 상위 5%의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105조원을 벌게 되면서 땅값, 집값이 들썩거릴 때마다 한국은 소수 지주들과 부자들에게 축복의 나라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희망없는 미래이다.     © 대자보


이처럼 땅과 집의 극심한 소유 편중은 가격 상승과 함께 빈부격차를 더욱 크게 벌려놓는 핵심 요인이며, 건축 인•허가, 불법적인 토지의 형질변경 관련 떡고물로 공무원 부패의 온상일 뿐 아니라 난개발의 요인이기도 했다.

‘불황땐 누구나 어렵다’는 상식도 한국에선 이제 사실이 아니다. 외환위기 때보다 힘들다던 지난해, 상장 대기업과 은행들은 유래없는 호시절을 누렸다.

12월 결산 상장기업(금융업 제외)의 당기 순이익은 지난해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런 수익의 대부분은 상위 5개 기업이 전체의 43%를 차지했고, 상위 10개 기업으로 보면 전체의 57%나 될 정도로 소수 대기업이 폭식함으로서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재계의 주장은 뭔가를 더 얻어내기 위한 엄살에 불과했다.

저금리 기조 속에 공격적으로 대출 규모를 늘린 은행들도 예대마진과 일반 수수료 수익을 통해 사상 최대의 순익을 냈다.

이들 상장 대기업과 은행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늘날 극심한 양극화 분단을 초래한 아이엠에프 사태의 주범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국민혈세를 수혈받아 부활한 최대의 수혜자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의 외국인 지분율이 높다는 점이다. 은행 주식의 65%, 상장사 전체 주식의 43%를 외국인들에게 내주었다.

나라 경제는 침체에 허덕이고 있지만, 몇몇 대기업과 은행의 주주들 그리고 외국인 투자가는 나홀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민대중의 어려움에 매우 인색하거나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주식시장의 전광판이 900포인트를 넘나들며 연일 ‘빨간 불쇼’를 펼쳐도 개미들의 환호는 온데간데 없고, 외국인투자가와 일부 발빠른 기관투자가들의 미소속에 먼나라의 축제가 돼버린 지 오래다. 주식시장을 통해 조달한 자금이 설비투자 재원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줄어들면서 더 이상 ‘자본주의의 꽃’이 아닌 소수 재력가와 외국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해 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에 대한 배당과 지급이자로 유출된 돈은 총 64조원 가량으로 '삼성전자' 하나를 날렸다. 이 돈은 또 ‘국민기업’ 포스코 네 개, 국민은행 다섯 개를 살 수 있는 액수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들이 올린 시세차익도 13조원에 이른다. KT 같은 우량 기업 하나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간 셈이다.

외국계 투자기관이 매입해 소유한 서울의 주요 업무용 빌딩만 총 4조2,294억 원에 이른다.

물론 이런 국부유출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불파기한 ‘외환위기 비용’이란 성격도 있지만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에 휘둘려 워낙 싼값에 매각함으로써 그 몇 배를 지불했음에도 외국인이 납세나 인건비 지출, 선진기술 도입을 통해 국민경제에 기여한 몫은 작다는 점이다.

정부가 5조원의 국민 세금을 날리면서 매각한 제일은행의 인수자 뉴브리지캐피탈과 한미은행의 칼라일펀드, 강남 스타타워의 론스타는 각각 1조 2천억, 6천억, 2천 6백억의 수익을 걷어갔지만 이들은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 컴퍼니 설립 등의 방법으로 돈은 우리나라에서 벌고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일본의 신세이 조항이나 영국과 미국의 횡재세 부과 등 외국에도 있는 투기자본의 조세회피방지 조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외국자본만능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대기업과 은행 그리고 외국인의 즐거운 비명 뒤엔 대다수 중소기업과 서민대중의 힘겨운 신음과 화병(火病)이 이어지며 깊어진 소득격차만큼 갈등은 커지고 희망은 엇갈리고 있다.

대기업들이 각종 원가부담을 약자인 중소 협력업체들에 떠넘기는 불공정거래가 횡횡하면서 중소기업들은 이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노동자의 임금 삭감으로 전가하기 때문에 기업 규모에 따른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 수준은 해가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의 65%가 대기업과 하도급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마피아보다 무섭다는 원청기업의 보복이 두려워 중소기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매년 ‘시아르(납품단가 인하)’를 감내하고 납품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재하청 업체를 쥐어짜고,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이는 또다시 중소기업의 투자 여력을 갉아먹고, 기술력을 쌓을 틈이 없어져 ‘협력 파트너’로서의 지위는 갈수록 열악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돼 온 것이다.

그런가하면 중소기업과 서민대중은 얌체 전당포가 돼버린 은행들로부터 각각 ‘요주의’, ‘담보대출비율’이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사채와 카드깡으로 내몰리면서 살인적인 ‘이자의 덫’에 걸려 헉헉대며, 그것도 모자라 각종 금융거래 수수료 인상과 확대로 곤궁한 주머니만 털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3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0위나 된다. 소득증가율, 경제성장율, 수출증가율도 각각 7위. 6위, 3위를 기록하며 상위에 속했다. 2004년 우리나라 수출은 2500억달러 규모로 연간 30%선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쾌속 질주를 이어갔다.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해 왔음이 다시한번 확인된다. 1인당 국민소득(명목 GNI) 1만2646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하위권이라고는 해도 일단 양적인 면에서 선진국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수치에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경제규모의 급성장에 걸맞게 국민 대대수의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인가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노동시장의 먹이사슬 맨 밑바닥에 약탈적 저임금에 시달리며 ‘제3 신분’으로 굳어진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56%) 800만명이나 깔려 있으며, 넘쳐나는 실업자(80만)와 신용불량자들(380만), 국민기초생활보장 비수급 대상인 차상위 빈곤층(300만)이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면서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728만원 對 53만원'로 표현되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월평균 소득격차, 민망할 정도로 추락해버린 노동소득 분배율(59%), 전국 10가구중 3가구꼴로 적자, 가구당 빛 3,000만원꼴 사상최대, 발표될때마다 ‘사상 최고치’라는 꼬리표가 붙어 나오는 부정적인 경제지표들,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는 세상이다”며 푸념하는 근로자들, 위기를 넘어 절망을 체감하고 있다는 국민이 압도적이라는 여론조사 수치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서민대중의 적나라한 ‘고통지수’이다.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엄청난 수의 서민대중이 빚에 쪼들리고, 갚지 못해 이혼과 자살 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는 가족과 사회 해체의 위기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연대가 깨지고 사회 구성원들 상당수가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한국 사회는 10가구 중 1가구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으며, 절대빈곤층 중 노인.장애인.여성비율이 높아지고,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비율도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소득보다 높은 지출을 할 수밖에 없으며, 부채는 늘어나고 신용불량자로 내몰리기 쉬운 취약계층이 된다.

이들의 초과지출을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요인들이 주로 민간시장에 맡겨 운영되고 있는 주거, 교육, 의료다. 이미 평균소득층도 교육비와 주거비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식구 중 암 환자 한 명 생기면 가족전체가 길거리에 나앉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어 버렸다. 기초적인 생활 유지와 자녀 교육에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소득층과의 현격한 격차가 고착화 되면서 빈곤은 세습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게을러서 혹은 눈이 높아서 빈곤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운이 좋아서 가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빈민에게 찍었던 ‘주홍글씨’는 빈곤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에 찍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21세기’라는 첨단 자본주의로 문명화된 사회속에서, 기이하게도 ‘빈곤’의 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세계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양극화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현실의 실상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빈곤의 한계선으로 하양이동을 하고 있는 ‘초극화’가 사태의 진실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점에서 앞서 말한 2대 8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도 이제는 고전이 되어가고 있고, 오늘의 현실은 차라리 ‘1대 9’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우리사회를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정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 ‘양극화 분단’은 이제 사회 갈등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 나아가 민주주의 기반을 위협하는 절박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건 내수다. 그중에 특히 소비의 침체는 2003년 OECD국가중 가장 낮은 민간소비 증가율이 보여주듯이 정도뿐 아니라 기간도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심각한 상태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처럼 소비가 안되는 이유도 2001년과 2003년 신용카드 남발과 부동산 군불 같은 ‘모르핀 주사’에 취해 일시적으로 반짝 호황을 누렸던 신용카드 거품과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엄청나게 불어난 가계부채가 소비여력을 잠식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여기에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정규직조차 미래가 불확실해져 장래를 걱정하게 되면서 더욱 소비를 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의 미비는 서민대중 스스로 식당과 택시기사 등으로 ‘개인 안정망’ 삼아 전업하면서 자영업자의 폭증을 방치했다. 선진국에 비해 세 배나 높은 자영업자 비중은 오늘날 공급과잉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구조적인 문제화 되어 사태해결을 더욱 어럽게 만들고 있다.

얼빠진 일부 언론에서는 소비 진작을 위해 지값을 열라고 다그치지만 서민들은 지값을 열어도 그 안에 돈이 없다. 정작 지값을 열어야 할 재계와 상류층은 사상 최대의 현금을 쌓아두고도 뒷짐지고 투자가 급한 정부를 압박하며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활용하려 들거나, 일부는 국내 소비보다 해외 소비를 늘리면서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고용불안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비정규직과 소외계층은 경제가 좋지 않으면 지갑을 빨리 닫고, 경기 회복기에도 지갑을 늦게 여는 경향성 때문에 이들 계층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소비 회복이 늦어지는 현상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

대안은 차고 넘쳐, 정치주체들과 국민의 관심과 의지가 문제

이쯤되면 체질적으로 혹은 조건반사적으로 “그럼 대안은 뭔데”라고 되묻거나, “그래밨자 당신도 찌질이(?)과 아니냐”며 힐끔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조금 솔직해 지자. 대안이 뭔데라고 묻기 전에 관심 좀 가져보자고…경제적 양극화의 부작용과 해법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진보적 정책 대안은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흘러 넘칠 만큼 나와 있었다. 다만 언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고, 국민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정치꾼과 관료들은 생각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진보적 대안은 늘상 시뮬레이션은 커녕 테이블에 조차 초대받지 못했고, 딱 그만큼 오늘의 서민대중들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거 아닌가.”

실제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불평등이 심한 나라의 성장률이 낮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쪽으로 잠정적 결론이 내려져 있다.

상식적으로도 혁신을 이루는 위쪽(대기업 등)을 아래쪽(중소기업 등)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위쪽도 차츰 힘을 잃게 마련이다. 또한 사회 안전망을 갖춰야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약해지고, 리스크(위험)를 안는 경제 행위를 하게 되기 때문에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도 보완 관계를 이룬다.

부유층의 저축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과잉자본으로 부동 자금화하는 경우라면 ‘부유층의 높은 저축과 고투자가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경제학 고전파의 설명은 정책적 유효성을 잃고 만다. 더욱이 부유층의 소비가 수입품으로 향한다면 부유층의 소득이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실태가 이를 증명해주 고 있다.

케인스주의에서는 ‘소비 성향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야 소비 증가 → 생산 증가 → 투자 증가 →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정반대 경로를 제시한 바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푸는 데서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해법의 부재보다는 덮어놓고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으로 여기는 ‘성장-분배 논란’의 저급성이다. 양극화를 풀려면 다양한 분배, 재분배 정책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는 곧바로 성장 잠재력을 해친다는 논란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좌파 정책이라는 ‘색깔 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이런 인식은 특정 정치 세력에 머물지 않고 양극화의 피해자인 중간선 아래층의 뇌리에도 광범위하게 각인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경제에 있어서 사람의 창조적 아이디어보다 설비투자나 노동 시간을 많이 투입하는 양적 성장일변도의 모습을 보이는 사회에서 분배 정책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소비’로 여겨져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이란 단순 논리만 득세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여유 시간 동안 학습을 하게 되고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따뜻하면서도 당연한 추론은 발을 붙이기 어렵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소득 및 부의 불평등도와 경제 성장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성장과 분배가 상충한다는 고정관념은 깨지기 시작했다.

또한 현대 경제학자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심한 경제일수록 성장률도 낮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데 폭넓은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복지 정책을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은 물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미국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1993년부터 미국에서는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재분배 정책 지표들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으며, 미국의 전체 계층에 대해 학자금 이용 가능성을 완전 평등하게 할 경우 장기 균형 국내총생산(GDP) 수준이 3.2% 증가한다고 분석됐다. 또한 GDP 6%를 재분배에 사용할 경우(상위 30% 소득 계층이 하위 70% 계층을 지원하는 방식) 하위 계층의 인적 자본 투자 증가로 미국의 장기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오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거대 언론에 뻔질나게 이름을 들이미는 성장위주의 경제학자나 관료, 정치인들의 주장중에 진보적인 대안적 경제정책에 대해 흔히 하는 ‘비아냥’이 있다.

그것은 분배중심 혹은 분배와 성장의 조화에 초점을 둔 진보적 정책으로 ‘한국경제를 실험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대한민국 50년간 우리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으며 이렇다할 분배정잭 한번 써본 적이 없다.

심지어 수구세력에 의해 좌파적이라는 터무니 없는 공격을 받았던 참여정부조차 대통령과 경제수장까지 나서 “참여정부는 분배정책은 커녕, 존 케리 미국 민주당 후보진영보다도 보수적이다”고 실토할 정도다.

그 결과는 어떠 했는가. 한국은 사상초유의 국가부도사태 직전으로 내몰렸으며, 오늘날 절대다수의 서민대중이 80%의 부를 움켜쥔 소수 기득권층의 담벼락 언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야만적인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실험이 지난 50년도 부족해서 얼마나 더 대한민국을 실험해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사회는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앞이 안보이는 빈곤’이 우리사회를 향후 어떻게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한 사회가 절망상태의 빈곤의 확산으로 히스테릭한 변화심리가 대중들의 허한 가슴을 채워갈 때 만나는 사회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는 교훈을 역사는 우리에게 수없이 가르쳐 주었다.

최근 결식아동의 부실 도시락 파문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결식아동들이 전국에 몇 십만명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이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후일 훌륭한 대한민국의 인재로 자라서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라면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이 성공했을 때 또 다른 소외계층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도움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구성원들이 나눔의 미학을 실천한만큼 더불어 성장할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재능이 있어도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일 경우 국가나 사회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때 공공의식을 갖춘 인적자본의 확충이라는 측면에서 그 효과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미국 피터 린더트 교수를 비롯한 현대 경제사학자들이 소득 재분배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며 제시한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free lunch puzzle)를 우리도 한번쯤 제대로 풀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복지확충과 분배개선은 더 강조돼야 한다.

양극화 해법, ‘힘있고, 가진 자’들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우선

양극화의 교과서적 해법은 빤하다. 양극화의 원인을 고스란히 뒤집어 산업 연관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혁신을 유도하며, 인적 자본을 육성함과 아울러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결국은 중산층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제조업은 물론이고 복지, 문화관광 등 서비스업, 특히 교육과 같이 인적자본이 필요한 분야 등 유망산업을 많이 발굴해 내야만 한다.

소득의 ‘재분배’ 정책과 함께 부동산, 금융자산, 교육인적 자본 투자방식의 개선을 통해 자산의 원천적 ‘분배’ 개선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영미형으로만 갔을 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있겠는가. 외환위기 이후 영미형이 최고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효율성과 일자리 창출에서 강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큰 단점이 있다. 따라서 영미형이나 유럽형이 아니라 제3의 한국형일 수 있는 그런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모든 문제를 시장으로만 해결하려는 시장 만능주의가 팽배해있다. 영.미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의료와 교육, 교통, 심지어 물까지도 사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런 지나친 불균형을 바로잡는 게 국가와 시민사회다. 아직까지 민주주의와 참여가 부족한 데 따른 일방통행이 잦고, 그 폐단을 뒤늦게 시정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첫 단계부터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당사자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치열한 세계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원은 우수한 인력이다. 때문에 기든스가 말하는 ‘사회투자형 국가’를 지향할 필요도 있다.

양극화 분단을 딛고 따뜻하고, 고루 잘사는 사회로 가는 길에는 무엇보다도 정치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힘있고, 가진 자’들의 서민대중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수혜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길이란 ‘진짜 실용주의’다운 자세를 갖는 것이다.

‘힘없고, 덜가진 자’들의 역지사지는 늘상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결의 열쇠 ‘비정규직’, 일한만큼 받는 보상시스템 세워야

비정규직의 증가와 이에 대한 처방은 우리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는 첫걸음이자 열쇠이다.

엄청나게 불어난 비정규직의 숫자도 문제거니와 여기엔 고령자, 노동시장에 신규진입하는 청년 세대, 70%가 비정규직인 여성의 열악한 노동조건 등 우리 사회 소외계층의 제반 문제가 비정규직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천4백만 노동자중 비정규직이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자녀 둘 중 하나는, 어쩌면 둘 모두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심각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하는 일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극심한 차별이다. 비정규직은 최소한 10%포인트 가량 불합리한 임금차별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하는 일의 성격이 거의 같고 생산성에도 큰 차이가 없어서 차별의 정도는 훨씬 크다.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비정규직은 똑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고용불안에 대한 보상을 얹어 오히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란 주장도 있다.

지금의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차별만 따로 해소하는 묘수는 없다.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비정규직 고용을 금지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정부, 기술•숙련도 향샹체계 구축을

중소기업을 소홀히 해선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고용 창출 능력 때문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5년 동안 300명 이상 대기업 제조업체의 고용 인원은 20만7천명이나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에서는 20만3천명이 늘어났다.

또한 우리나라 노동자중 300명 이상 대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 126만여명(10%)를 빼면 나머지 90%는 중소기업에 근무한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조직률이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필요성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소기업은 이렇게 고용 인력이 증가한 반면 기술력 향상은 뒤처진 탓에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갈수록 둔화하고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기술투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숙련도 향상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직접 대규모 연구소를 만들어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새 기업을 만들어내며 지분 참여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생력 있는 혁신형 중소기업 시장을 공공서비스 영역 등에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핵심분야인 연구개발쪽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지원하고, 대학과의 결합, 지역과의 결합(클러스트) 등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 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새로운 ‘수평적 협력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수입의존도가 높은 핵심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를 위해 정부가 중소기업을 대폭 지원해서 대기업 납품은 물론 중국 등에 수출이 가능한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케인지언 복지국가(Keynesian Welfare State)와 더불어 슘페터리안 근로국가(Schumpeterian Workfare State)로서의 역할도 함께 고민할 때다.

문제는 혁신형 중소기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개발해서 제공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들의 육성과 함께 나머지 200만~300만 중소기업들도 먹고살 방안을 마련해가면서 서서히 구조조정하는 이원적 대책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대기업들도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기회를 준다면, 중소기업들도 경영의 예측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술 투자 등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중소기업 쪽도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토지 보유세 강화, ‘양조(良租)가 악조(惡租)를 구축(驅逐)하게 해야’

실제 부동산값의 지속적인 상승은 부동산이 별 세금부담 없이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준다는 인식하에 국민의 상당수가 ‘투자’ 대열에 가담하기 때문에 ‘부동산 불패신화’를 만든 것이다.
과세부담이 없는 만큼의 미래 기대수익이 현재가치로 할인돼 가격에 반영되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10분의 1에도 못미치는 ‘부동산 보유세’를 현실화 하는 것은 부동산값 안정뿐아니라 소득의 재분배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가격 급등기에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임시방편으로 투기심리를 위축시키는 데 그쳐왔고, 보유세는 오히려 줄어왔다.

또한 집값 문제는 정부가 경기부양 수단으로 건설 경기를 끌어올리려 늘 ‘오바’하면서 나타난다. 단순히 주택건설을 활성화하는 차원을 넘어 투기를 유도하는 쪽으로 나아가버린다.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집값 상승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1년부터 2004년 5월까지 전국 평균 집값은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12%)의 5배나 되는 60%가 올랐다. 정부가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를 풀어, 집을 사서 팔아 돈을 남길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의 공급이 늘어나는데도 반대로 집값은 폭등한다는 데 있다. ‘거품’은 점점 커지고, 서민들은 올라가는 임대료에 등이 휜다. 작은 집을 가진 사람도 큰 집으로 옮겨갈 때 부담을 키운다. 가계가 대출을 통해 뛰는 집값을 감당하는 사이 그만큼 소비 여력은 줄었고 경기흐름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정부는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진정으로 보유세 실효세율을 의미있게 올리도록 해야 한다.
종합부동산세도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투기나 과다 보유를 억제하고자 한 입법취지를 충분히 살려야 할 것이다.

한편 토지 보유세를 강화하되 대신 건물분 재산세, 부동산 거래세(취득세, 등록세 등)와 같이 건축 활동, 부동산 거래 등을 위축시키는 ‘나쁜 조세’를 감면하는 ‘조세 대체’를 통해 투기억제와 경제 활성화는 물론 조세 저항 문제도 함께 해소하는 정책도 시도해볼만 하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기득권세력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보유세 강화 의지와 종합부동산세 도입 취지가 크게 퇴색하면서 초기의 약속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인가 신자살(殺)주의인가, ‘외양간 무너지는 데 소값 흥정에만 정신 팔려’

주로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추진으로 상징되는 개방화, 세계화는 우리 사회에 세 가지 상반된 불안요소를 안겨주고 있다.

하나는 FTA가 WTO와 달리 ‘당사자주의 및 지역주의적인 특혜무역체제’라는 특성상 블록화를 통해 역외국 차별이 심해지고 있는 만큼 적극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무분별한 대외개방과 세계화로 외국 자본 및 상품과의 가격경쟁과 이윤경쟁을 심화시켜 자본과 기술에서 경쟁력을 지닌 기업들에게는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반면에, 중소기업들에게는 가격경쟁력 약화에 따른 생산 포기를,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노동강도 강화,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농민들에게는 값싼 농산물의 수입에 따른 소득 감소를 가져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방을 밀어붙일 경우, 반발과 사회분열만 증폭시킬 것이란 것도 문제다.

한국정부도 각종 FTA 협상 추진으로 개방화 세계화를 내걸고 있으나 국민의 권익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평가도 많다. 그럼에도 참여정부는 ‘개방형 통상국가 전략’에 따라 2007년 안에 20여개 국가와 FTA 체결을 목표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과 캐나다를 비롯 일본, 중국 등과도 FTA를 체결하고 이어 아세안까지 아우르는 경제공동체를 구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통상교섭본부는 최근 FTA국을 새로 출범시키는 등 사실상 ‘올인’체제로 들어갔다.

물론 개방화, 세계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주요한 발전전략으로 삼아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서 FTA는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일 수 있다.

올해부터 전 세계 교역량의 50% 이상이 FTA 체결국 간에 이뤄질 전망인 가운데 한국도 무역 규모 세계 11위로 수출 비중이 높고, 대외의존도가 70%에 이르는 나라인 만큼 교역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서, 또한 FTA 확산이라는 흐름 속에서 배제될 때 가격경쟁력 저하와 시장상실 및 생산기지 이전의 가속화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해외시장 유지를 위해서는 FTA를 보완적인 통상정책으로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더욱이 한국 경제상황이 생산 소비 투자 등 모든 지표가 저조하고 수출마저 주춤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FTA를 통한 수출 증대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한-싱가폴 FTA의 경우처럼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한국산(내부거래)으로 인정키로 합의하면 북한 진출기업의 걱정을 덜고, 남북 경협의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의 영미식 시장만능주의, 개방 완충장치 빨리 마련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시장개방을 전제로 한다. 시장이 개방되면 얻는 것이 있지만 잃는 것도 없을 수 없다.

특히 일본과 FTA가 맺어지면 자동차, 전자 등 한국의 주력산업이 대부분 일본과 경쟁관계인데다 부품소재•기계산업 등 기술경쟁력에서 뒤지는 국내 핵심산업도 구조조정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고,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력 악화로 잘못하면 나라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도하개발아젠더(DDA) 협상의 경우처럼 미국 주도의 초국적 자본의 무한 이윤창출을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대다수 서민대중에게는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개방화로 타격을 받게 될 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국내 산업의 고도화와 경쟁력의 확보를 통해 실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수립으로 ‘개방화 수용기반’을 미리 다지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준비된 전략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체결했을 경우 자칫 외국에 우리 시장만 내주고 기술력이 뒤지고 경쟁력이 취약한 기업의 줄도산을 자초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에 따른 국민적 반발을 사게 될 우려도 매우 크다. 올해 개방이 본격화되면 경쟁력이 낮은 중소기업 등이 반발, 사회적 마찰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방으로 피해를 입을 이해집단의 반발을 무마하고 이들의 생존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다. 그런점에서 지금 정부는 그간의 협상결과도 불만이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고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다자간 무역자유화와 달리 FTA는 정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인 만큼 시장에 모든 걸 맡길 게 아니라 국가가 개입해서 폐해를 줄이고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경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일부 품목의 양허제외 및 이행기간 설정,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고 우리 산업에 피해가 적은 곳부터 시작하는 등 개방대상과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어떤 모델이건 지금보다는 사회적 연대와 형평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미 개방경제로 가면서 농업•재래중소기업•재래유통시장은 경쟁력을 잃었다. 이들을 연착륙시킬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건설을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협상을 추진하는 정부관료들의 적극적인 FTA 추진만이 살 길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조급성’때문에 개방화의 부작용을 소홀히 하거나 , 협상의 투명성과 국민적 의견수렴 절차에 무성의한 그들만의 ‘밀실주의’는 가장 먼저 시정해야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통상협상은 국민의 생존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협상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통상정책 체결절차에 관한 법 및 정보공개법, 잘못된 협상에 대한 국가보상법 제정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추진된 개방화 정책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재점검하고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시장에서 사회적 연대원리를 확보하고, 개방에 따른 완충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우리사회가 이를 어떻게 수용할 지를 공론의 장에서 해결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국가의 조정 능력을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개발독재의 잔재 속에서 영미식 시장주의가 매우 조악한 형태로 들어왔다. 요즘 말하는 시장은 사실은 자본의 이해관계를 시장의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측면도 있다.

지난날의 과오와 외국사례 등을 돌이켜보고 우리의 경제성장 단계에 맞는 통상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 편집위원
 
(계속 이어집니다)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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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5 [20: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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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