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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대신'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2.24 벼락대신 홍준표 의원의 좌파 ‘시뮬라시옹’(2005.7.21)



벼락대신 홍준표 의원의 좌파 ‘시뮬라시옹’
[논단] 슬기 주머니 가득한 개혁.진보 대갈마치들의 귀잠은 누가 깨우나
 
김영국
홍준표의 보수-진보 ‘경계 허물기’

홍준표 의원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과 거탈들이 연일 화제를 집중시키며 정치권과 네티즌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홍준표는 ‘보수=좌파적 서민당’이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이는 언론과 미디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런 홍준표 효과의 종착점은 한국정치에서 보수, 진보의 ‘경계 허물기’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기득권 정당의 자리를 맞바꾸게 되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좌파의 진품 여부를 가려야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천형처럼 따라다니던 특권층 대변당, 수구꼴통 세력이란 이미지를 떼어내거나 최소한 희석시킬 수 있게 되길 기대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나라당에게 쏠쏠한 재미를 안겨다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한나라당 전체가 좌향좌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 영남 주류들은 여전히 친재벌적 시장지상주의와 성장중심주의의 맹신자들이다.

이들은 재벌을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 과감한 감세정책, 각종 규제 완화를 경제 살리기의 ‘전가의 보도’인 양 되뇌고 있다.

박근혜가 홍준표 효과를 낮잡아 보고 지금처럼 원조 보수, 영남주의 노선에 안주한다면 그도 ‘어정잡이’ 이회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돋보이는 벼락대신

어쨌든 홍준표는 좀 달랐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그는 정치권 최대의 스타가 돼버렸다. 이러다 2005년 정치인 코드는 홍준표란 말까지 나올 판이다.

급기야 개혁적 시민단체의 대표격인 참여연대까지 홍준표를 ‘과거의 폭로, 정쟁형 의정활동을 넘어 법안, 정책으로 승부하려는 돋보이는 의원’이라고 평가했다. 홍 의원의 부정적이기만 했던 전력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자칭 개혁정당 열린우리당의 대표는 거듭되는 부패정치인 사면 제안으로 잊지 말아야할 의원 명단에 올라 큰 대조를 보였다.

또한 ‘연정’ 논의가 활활 타오르기를 열망하면서 편지까지 써가며 집착했던 대통령의 제안은 야당과 국민들로부터 야멸치게 외면당하고 있는 반면, 홍준표의 불쑥불쑥 내던지는 좌파적 언표는 똑같이 뜬금없는(?) 제안임에도 가히 폭발적이다.

홍준표에 이어 김양수, 정형근으로 이어지는 한나라당내 일부 의원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화려한 변신’에 열린우리당은 현기증을 느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제는 민주노동당마저 홍준표를 상대로 가열한 ‘원조 논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홍준표의 좌우를 넘나드는 활극에 보수, 진보진영은 물론 국민들까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혼란에 빠져들 조짐이다.

수구세력의 금기(禁忌)에 도전한 후광(?)

과연 홍준표의 도발은 수구적 이미지 탈피를 위한 ‘페인트 모션’일 뿐인가. 아니면 ‘좌파식 포퓰리즘’을 역이용한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딥 임팩트의 혜성 출동 실험’처럼 수구정당이 만든 좌파 인공물체를 정치권에 던져 한번 충격을 줘본 것인가.

그 의도가 어떠하든 홍준표 효과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홍준표 효과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보수세력이 좌파적 의제의 도발적 제기라는 코페르니쿠스식 발상의 전환과 성역화된 금기에 도전했다는 충격파일 것이다.

수구에 가까운 보수정당의 의원이 “투기 잡는데 좌파면 어떠냐.”, “박정희도 경제정책은 좌파였다.”, “한나라당 이미지와 안 맞으면 좀 어떠냐.”고 당돌하게 말하는 것. 분명 생소한 광경이며, 금기임에 틀림없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와 발전된 네트워크망으로 한층 빨라진 대중 커뮤니케이션.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주기가 훨씬 짧아진 진부한 것, 식상한 것에 대한 천시와 금기를 깨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현상이 보편화되고 또 일상화됐다.

여기에 언론이 그러한 사회 현상에 상업적으로 영합, 증폭시키면서 홍준표의 발언은 강력한 대중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홍준표가 수구정당에서 쏘아올리는 좌파적 의제 제기는 어떤 면에선 어중간한 열린우리당을 증발시켜 버리고, 민주노동당의 영역까지 넘보는 한층 첨단화된 정치공세일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은 원내 1당의 거대정당임에도 당의 정체성이 흐리멍덩한 맹물화되면서 홍준표 한 명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그간 친재벌, 반서민.반노동자적 신자유주의 노선이 홍준표의 좌파적 공세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무기들을 스스로 폐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개혁세력이 보수세력을 상대하면서 사용해온 ‘전가의 보도’-반한나라, 안티조선 같은 정서적 칼과 대북정책, 자주통일 같은 민족주의적 혹은 NL적 가치-들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게 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서민대중이 빠져있는, 지금의 웅덩이가 깊고 크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제아무리 정치가 잘 돼야 경제가 산다고 외쳐본들 서민대중은 정치와 경제를 철저히 분리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개혁이 서민대중의 먹고 사는 문제를 결코 해결해주지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체득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혁 정권이라면 당연시 여겨왔던 ‘서민의 정권’이 아닌, ‘삼성의 정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노 정권이 몸소 실천해 보이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열린우리당이 ‘좌파적 포퓰리즘’ 혹은 ‘시장논리 위반’이란 기조로 홍준표를 공격하면 할수록 그들은 조중동과 동질화되면서 극도의 정체성 위기라는 블랙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스스로 보수.우경화됨으로써 지지층의 외연을 넓혀가리란 전략이었지만, 홍준표는 그것을 노 정권의 무덤으로 활용한 셈이다.

노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보수화 이미지가 정착돼가는 시점에 이르러 홍준표는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좌파의 저수지로 돌진하면서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발시키고, ‘날 샌 올빼미 신세’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홍준표의 좌파적 의제 제기가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조중동 사설과 열린우리당 논평은 더욱 닮아가고, 민주노동당은 좌파 진품이라는 입증책임과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 받게 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노 정권의 아킬레스건 ‘삼성과 신자유주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지금까지 노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보수.우경화에 당내 실용파들 혹은 재벌, 관료 출신 등 보수적 인물들에게만 그 책임을 추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온 소위 ‘386 친노(親盧)직계 그룹’의 친삼성, 신자유주의 행보는 일반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노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실용 노선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던 작년 하반기.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윤호중(이상 청와대 출신), 이화영, 조정식, 한병도, 김재윤, 김종률, 김태년, 이기우, 이상민 의원(매일경제 보도 04-08-19일자) 등이 주축이 된 ‘의정연구센터’ 맴버들은 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 삼성경제연구소와 경제 살리기 심포지엄, 전경련 회장단과 간담회 등을 갖고, 당내 보수파와 적극 연대하는 등 개혁파와 확연히 대조되는 ‘우향우’ 동선을 그려왔다.

이들은 재벌의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완화를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서는가 하면 연기금의 주식투자 허용, 비리 경제인 사면 주장 등 재벌개혁 후퇴를 적극 지원해왔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삼성이라는 기업의 브랜드를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가, 세계 경제 속에서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이 굳이 많아야 할 이유가 있나.”,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규제는 제거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삼성에서 배우고 익힌 대로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와 성장중심주의를 견인해왔다.

실제 삼성이 제공한 아이디어를 가져다 노 정권의 핵심 정책으로 만드는데 이들의 기여가 컷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는 386 측근들의 이같은 사고들이 노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 강화에 큰 역할을 해왔음은 불문가지다. 결과는 삼성공화국의 탄생과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였다.

여기에 이해찬 총리는 한술더 떠 총리실 간부들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위탁 교육을 받게 할 정도였다.

이를 두고 민주노동당의 한 의원은 “참여정부에 정치적 개혁파는 있을지 몰라도 경제.민생 분야의 개혁파는 없다.”며 원내에서의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노 정권과 열린우리당에서 쏟아내는 경제.민생 정책들이 번번히 격화소양(隔靴搔痒-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에 그치고 만 것은 이런 사정과 결코 무관치 않다.

군사정권보다 수구적인(?) 민주.개혁정권

‘토지공개념’ 같은 조금이라도 진보적 대안들이 제시되면 나오기가 무섭게 난색을 표하고 덮는데만 전전긍긍하는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의 ‘코푸렁이’ 같은 모습은 이젠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 돼버렸다.

택지소유상한법, 개발이익환수법, 토지초과이득세법.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이 법안들은 북한 공산당의 법이 아니다. 바로 노태우 군사정권이 만들어 시행한 법이다.

그런데 자칭 민주.개혁정권이라는 노 정권의 재경부 차관은 ‘토지공개념’이란 말조차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며 엄살을 떤다.

하긴 개발이익환수법은 위헌 논란 없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지만 노 정권은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작년부터 개발부담금 부과조차 중단해버렸다. 1년도 안된 지금 다시 부활 운운하면서 무슨 엄청난 거라도 기획하고 있는 양 엉너리를 치고 있다.

자칭 민주.개혁정권이 군사정권도 시행한 토지공개념을 시장논리에 반하고, 좌파적이서 위험하다? 조중동에 맡겨도 될 사설까지 대신 읊어대는 이런 류의 해명.

이건 개그가 아니다. 노 정권의 치부이자 현실이다.

노 정권이 정치적 연정에 쏟아붓고 있는 정열의 1/10만큼이라도 경제적 진보에 할애한다면 이처럼 공론화도 되기전에 불부터 끄려하진 않을 것이다.

김영삼의 무능과 노태우의 맹물을 추가한 ‘곱빼기 무능 정권’이 될 가능성과 퇴임후 책임 추궁이 두려워 내각제 개헌에 미련을 갖고, 한나라당과 연정에 집착한다는 일각의 비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홍준표의 도발과 딥 임팩트의 혜성 충돌

작금에 홍준표식 문제 제기가 대중들로부터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좌파적 문제의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그걸 요구하고 있었다. 다만 정치권만 몰랐거나 알면서도 자기 전공이 아니라 외면했을 뿐이다. 한편으론 권력 놀음에 정신이 팔려 거들떠 볼 여지가 없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93%가 한국 사회 빈부 격차의 심각성에 절규하고 있었으며, 온갖 사회적 차별에 신음하고 있는 800만 비정규직과 380만 신용불량자, 300만 신빈곤층, 87만 실업자들은 정치권의 무책임과 무능력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이다.

또한 삼성공화국, 병역기피용 국적 포기, 가정 해체, 자살 급증 등으로 대변되는 극단적 모순과 경제적 양극화가 고착화되는 ‘21세기 자본주의 봉건시대’의 도래를 목도하면서 ‘좌파적 대안 사회’에 대한 갈증을 키워 온 것이다.

한국 사회 절대 다수인 서민대중의 ‘경제적 시민권(또는 평등)’에 대한 열망과 이와 정반대 되는 정치권의 신자유주의적 보수화 노선의 강화는 정치적 환멸과 냉소를 부추기며 서민대중을 ‘절망의 저수지’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거대한 ‘미지의 웅덩이’가 생겨난 것이다.

새롭게 형성된 저수지를 관리하고 이들을 깊은 웅덩이로부터 구해낼 정치세력에 대한 갈망도 그만큼 강렬해지고 있다.

홍준표는 지금 이 웅덩이에 ‘좌파 충돌체’(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실험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 형성 원인과 과정 그리고 홍준표 효과를 살펴볼 때 이 웅덩이를 관리할 주인은 ‘좌파적 서민정당’이 적격이라는 단서를 홍준표의 충돌 실험은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원조 좌파’라는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은 당내 정파적 갈등과 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운동권식 사고와 문화로 인해 서민대중의 삶에 천착하는 ‘PD적 문제의식’이 당내에 정교하게 성장하지 못하면서 되레 굼뜨고, 무능한 좌파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사상 최대의 호기를 맞고 있음에도 보수정당의 좌파 시뮬라시옹에 편입되어 소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스멀거리고 있다.

홍준표 시뮬라시옹의 소모품이 될 것인지, 좌파적 문제의식을 공론화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발판으로 삼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진보.좌파의 몫이다.

개혁.진보진영의 시뮬라시옹(?)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에도 불구하고 삼성공화국으로 명명되는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오늘날 개혁.진보의 얼굴에는 ‘서민의 편’란 글씨는 바래가고, ‘무능, 자기모순, 혼란’이라는 주홍글씨들이 새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정당, 기존 방식에 대한 전면 폐기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진단들은 이제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보수세력의 좌파 시물라시옹에 수동적으로 편입되는 재료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지난 반세기동안 누적된 자본주의의 적폐로 생성된 거대한 양극화의 웅덩이를 메우는 세력으로 거듭날 것인지. 기로에 서있는 진보 진영의 발상 또한 정교하면서도 충격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 정권과 열린우리당류 ‘신자유주의 보수세력’ 그리고 운동권식 사고와 방식에 여전히 안주해있는 노동.진보진영 내 일부 ‘수구 좌파들’과 과감한 절연이 필요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주체의 등장을 더 이상 금기시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지인의 말처럼 비록 선산 다 팔아먹고 당장은 꼴뚜기 좌판밖에 벌일 게 없다 할지라도.

~사모, ~빠 같은 데림추 집단이나 오만한 흔들비쭉이들은 가고, 슬기 주머니 가득한 대갈마치들이 모여드는 그 날이 오기를… / 편집위원
 
* 필자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2005/07/21 [11:0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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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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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