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20. 08:13
[한미FTA 역사쓰기14]거짓·생쇼 ‘한미FTA 의약품 협상’, "담배보다 백해무익" 한미FTA 역사쓰기2009. 1. 20. 08:13
미국의 의약품 협상은 대화아닌 ‘협박‘ | ||||
[한미FTA 역사쓰기14] 미국측 2-3개 수용해도 ‘포지티브 리스트’는 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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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의약품 협상은 대화아닌 ‘협박‘ | ||||
[한미FTA 역사쓰기14] 미국측 2-3개 수용해도 ‘포지티브 리스트’는 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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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추진 '주동' 5인방을 해부하다 | ||||||||
[한미FTA 역사쓰기10] FTA 탈레반'들의 ‘폭언, 거짓말, 친미행각’시리즈 | ||||||||
![]() 한미FTA 추진을 주도한 ‘5인방’- 김현종·한덕수·정문수·이경태·권태신 '경제저격수' 김현종(통상교섭본부장), 'FTA 탈레반 최고지도자' 한덕수(전 경제부총리), '매파' 정문수(청와대 경제보좌관), '장미빛 제조기' 이경태(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오사마 빈 FTA' 권태신(전 재경부 제2차관)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해 한미FTA을 앞장서 이끄는 주역으로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김 본부장은 노 대통령이 한미FTA 추진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미국 쪽과 벌일 협상의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한미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노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거의 전권을 휘두르다시피 하고 있다. 그에게는 'FTA 전도사'라는 평가와 함께 개도국의 정부 관리 등으로 위장해 해당 국가의 산업을 붕괴시켜 미국에 종속시키는 사람을 일컫는 '경제 저격수'란 의혹어린 시선도 따라다닌다. 이처럼 한미FTA 추진에 불을 붙인 핵심 인물이 김 본부장이라면, 이를 행정부 차원에서 뒷받침하고 총괄하는 역할은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가 했다. 그는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곧바로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미FTA 체결 성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문수 대통령 경제보좌관,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도 한미FTA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임명 당시부터 'FTA 추진 보좌용'으로 발탁된, 정문수 경제보좌관은 2005년 10월 한미 FTA 추진에 대한 만장일치 합의를 본 대통령 보고 자리에 김현종 본부장, 한덕수 부총리와 동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경태 원장이 들어선 이후 국책연구기관인 KIEP는 한미FTA의 경제 효과에 대한 장미빛 전망들을 쏟아냈다. 한미FTA 경제적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달 사이에 GDP 증가율을 크게 부풀려 다시 발표하는가 하면, 한미FTA 연구 결과 중 불리하게 나온 '무역수지 감소분'에 대한 은폐.조작 의혹에도 휩싸여 있다. 한편 권태신 전 재경부 제2차관은 마치 '개방하지 못해 환장한' 사람처럼 한미FTA 반대파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테러' 수준의 폭언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공무원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국민을 상대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독설을 자주 퍼부어대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화술과 스타일이 비슷한 권태신 차관을 총애하면서 OECD 대사로까지 영전시켰다. 청와대는 권 차관을 OECD 대사로 발탁한 사유 중 하나로 '탁월한 언어능력'을 꼽았다. 국민참여정부라는 盧 정권에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미FTA 추진을 주도하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의 구실이 조금씩 다르고, 경력도 다양하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공통점은 실무적·학문적 배경에 ‘미국의 흔적’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한미FTA를 추진하는 주체들의 면면으로 보아서는 마치 ‘미국 대표와 미국 대표가 협상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건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한미FTA 탈레반들, ‘매파 5인방’ 한덕수(전 경제부총리), 정문수(청와대 경제보좌관), 권태신(OECD 대사), 박병원(재경부 제1차관), 변양균(청와대 정책실장) 김현종 본부장을 'FTA 전도사'라 한다면,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는 'FTA 교주'에 가깝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개방'을 교리처럼 신봉하며 개방 반대 또는 신중론자들에 대한 독설도 거침없이 내뱉는 'FTA 탈레반'의 창설자이자 최고지도자 격이다. 그러나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 보다 한술 더 떠 한미FTA 반대 또는 신중론자들에 독설을 서슴지 않는 FTA 탈레반들이 노무현 정권의 핵심 요직에 대거 포진해 있다. FTA 탈레반 중에서도 '매파(hawks)'라 할 수 있는 이들은 한덕수(전 경제부총리), 정문수(청와대 경제보좌관), 권태신(OECD 대사), 박병원(재경부 제1차관), 변양균(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꼽을 수 있다. ![]() 김현종 미스터리, 'Mr.FTA'인가 '경제 저격수(매국노)'인가 ![]()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2004.7.28 임명) 현재 한미FTA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 추진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노무현 정부가 임기말 핵심 국정 아젠다로 한미FTA에 올인하면서 김 본부장은 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하에 한미FTA에 관한한 전권을 휘두르다시피 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그에게 늘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나 개방론자들 사이에서 불리는 ‘FTA 전도사’ 또는 ‘Mr.FTA’ 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의혹을 눈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경제저격수’ 또는 ‘매국노(제2의 이완용)’란 칭호다. 첨예한 찬반 논란 속에 한미FTA를 최일선에서 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김현종 본부장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계 경제전쟁의 한국군 야전사령관격인 통상교섭본부장에 오르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2004년 3월 28일 비외교관 출신으론 이례적으로 외교통상부의 핵심 요직(G7) 중 하나인 통상교섭조정관(1급)으로 발탁된 뒤, 1년 반도 안돼 2004년 7월 28일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따라서 공무원 경력은 겨우 2년을 조금 넘긴 정도다. 김 본부장은 초등학교 3, 4학년만 서울에서 다녔을 뿐 중.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마치고 직장생활도 미국에서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생각도 영어로 하고 꿈도 영어로' 꾼다고 한다. 김 본부장은 14세부터 혼자 미국에서 생활했다. 김 본부장의 아버지인 김병연(76)씨는 우루과이, 노르웨이 대사를 지냈으며 1965년 한-일 협정 체결 당시 주일대사관 서기관이었다. 아버지는 한-일 협정의 실무자였으며, 아들은 한-미 협정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력은 하나하나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조기 유학, 미국 컬럼비아대 국제정치학부에 진학 학사·석사 취득, 198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진학 국제상거래와 통상법 전공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 취득, 1985년부터 기업 인수합병(M&A) 업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로펌' 근무, 1989년 귀국후 김·신&유 법률사무소에서 국제 상사 중재와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관련 법률상담, 지적 재산권 업무 주로 담당, 1993년부터 홍익대 무역학과 조교수 역임, 1995년 외교통상부 ‘WTO 분쟁해결 대책반’ 고문변호사로 위촉, 1999년 국제기구인 WTO 법률국 수석법률자문관(Senior Legal Advisor)으로 발탁 4년간 활동, 2003.3.28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1급)에 발탁, 2004.7.28 통상교섭본부장(장관급)으로 초고속 승진. 그러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사정(경제와 사회일반 등)에 대한 이해와 지식체계를 쌓은 것은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익힌 게 전부라고 한다. 특히 김 본부장의 경력은 겉으로는 다국적 컨설팅업체 직원, 혹은 정부 관리 등으로 위장해 개도국 산업을 붕괴시켜 개도국의 천연자원과 군사시설 등을 미국에 종속시키는 사람을 일컫는 이른바 '경제 저격수'(존 퍼킨스, ‘경제저격수의 고백’ 저자)와도 매우 흡사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김 본부장의 한미FTA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집착을 보면서 혹시 그가 경제저격수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통상교섭본부 조정관으로 盧 정권에 영입된 이래 줄곧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개방'을 주창해왔다. 칠레와의 FTA 발효 이후 일본, 싱가포르, 아세안 10국, EFTA(EU에 가입하지 않은 유럽국가), 미국 등과 잇달아 FTA 논의가 불붙은 것도 그의 개방론이 촉발시킨 것이다. 김 본부장의 이런 사고와 화술은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와도 일치한 것으로, 청와대는 그가 통상교섭조정관 시절부터 통상교섭본부의 인사권을 행사할 정로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한 뒤 한미FTA를 주도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노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거의 전권을 휘두르다시피 하고 있다. 김현종 본부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통상교섭본부 비상근 자문관으로 한·일 FTA 협상에 참가했던 인하대 정인교 교수는 “김 본부장은 명확한 논리, 두둑한 배짱, 해박한 법률지식, 치밀한 분석자료를 바탕으로 협상에서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그러나 김 본부장과 통상교섭본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시장개방은 해나가되 국내 업계의 성숙에 따라 개방의 폭과 속도를 조절하고, 그 과정에 산업간, 부처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본부장의 ‘본업’인데, 김 본부장은 국내법과 국내 산업, 통상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적임자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김 본부장은 소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내 생각에 반대하면 문제가 있다’는 식의 독선적인 면모를 종종 드러낸다”며 “기업인이나 다른 부처 공무원들과 ‘계급장’을 떼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원만한 리더십이 아쉽다”고도 했다. 또한 쌀 재협상 문제로 김 본부장을 접촉해온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초기에는 소신과 확신에 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말도 바뀌고 농민 등 이해당사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일부 언론에서 석사장교로 복무했다고 하는데 그의 약력 어디에도 병역기간이 없다. 김 본부장의 미국에서 생활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컬럼비아대에 다닐 때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했던 별의별 행동을 보면 과연 그를 애국자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혹평했다 한다. 경제 문외한에 독선적이기까지 한 성격, 기업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 국제기구 활동 경력 등 김 본부장이 걸어온 길과 스타일이 그를 '경제 저격수' 쪽에 더 혐의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김현종 본부장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일이 국민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언론과의 접촉을 회피하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있는 관리의 태도로 볼 수 없다'는 불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 '불량 신사' 김종훈 협상 수석대표 ![]() ▲김종훈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2006.2.2 임명) ![]() ![]() ▲이혜민 한미FTA 기획단장(2006.4.4 임명) ![]()
'장미빛 제조기' 이경태 KIEP 원장 ![]()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2005.1.28 임명)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FTA 추진에 대한 통계적·이론적 연구와 지원을 맡고 있다. 그런데 적극적 개방론자인 이경태 원장이 들어선 이후 국책연구기관인 KIEP는 한미FTA의 경제 효과에 대한 장미빛 전망들을 쏟아냈다. 한미FTA 경제적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달 사이에 GDP 증가율을 크게 부풀려 다시 발표하는가 하면, 한미FTA 연구 결과 중 불리하게 나온 '무역수지 감소분'에 대한 은폐.조작 의혹에도 휩싸여 있다. ![]() 'FTA 탈레반 창설자(최고지도자)' 한덕수 ![]() ▲한덕수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 [2006.7.24 임명, 전 경제부총리(2005.3.14~2006.7.3, 이헌재 후임)] 한덕수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전 경제부총리)는 1998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임하면서부터 한.미투자협정(BIT) 추진을 주도하며 미국의 요구대로 스크린쿼터 철폐를 주장하는 등 한미FTA를 위해 몸 바쳐온 FTA '대부'다. 김현종 본부장을 FTA 전도사라 한다면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는 '교주'에 가깝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개방'을 교리처럼 신봉하며 개방 반대 또는 신중론자들에 대한 독설도 거침없이 내뱉는 'FTA 탈레반'의 창설자이자 최고지도자 격이다. 한덕수 전 부총리는 2000년 7월 중국과의 '마늘 협상' 때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2002년 7월 한중 마늘협상 당시 '이면합의'를 해놓고 고의로 숨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을 일으키자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덕수씨는 마늘협상 파문으로 물러난 지 4개월만에 김&장 법무법인 고문으로 스카웃됐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3월 개각 때 경제부총리로 발탁됐다. 한미FTA 추진에 불을 붙인 핵심 인물이 김 본부장이라면, 이를 행정부 차원에서 뒷받침하고 총괄하는 역할은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했다. 2006년 7월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곧바로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미FTA 체결 성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한덕수 닮은 꼴' 권오규 ![]() ▲권오규 경제부총리(2006.7.3 임명, 한덕수 후임) 신임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2006년 5월 30일 김병준 후임으로 청와대 정책실장에 오른 뒤, 불과 한 달 여만인 7월 3일 한덕수 후임으로 경제부총리까지 초고속 승진했다. 이는 전임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의 관료 경력과도 매우 흡사하다. 둘 다 OECD 대사, 청와대 정책수석, 경제수석을 거쳐 경제부총리까지 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권오규 부총리는 개방에 대한 소신이 한덕수 전 부총리에 못지 않다는 평가다. 그는 옛 경제기획원에서 대외경제조정실 과장을 맡던 1990년대초 금융개방 문제가 OECD 가입의 걸림돌이 되자 부총리를 직접 설득하기도 했다. 국가경쟁력을 키우려면 개방과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한미 FTA 추진의 강도가 약화되기는 커녕 보다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치기 위한 인사였다. 그만큼 노무현에게는 한미FTA를 겨낭한 적극적 개방론자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권오규 부총리는 2006년 8월 10일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한미FTA을 추진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안된다”고 말하는 등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뒤엎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한미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미FTA는 해야 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노 대통령의 입버릇처럼 '하늘이 두 쪽 나도 한미FTA는 해야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인 셈이다. ![]() '한덕수와 막상막하' 박병원 재경부 제1차관 ![]() ▲박병원 재정경제부 제1차관(2005.6.1 임명) ![]()
![]() ▲진동수 재정경제부 제2차관(2006.5.16 임명, 권태신 전 제2차관 후임) ![]() '오사마 빈 FTA'-한미FTA 행동대장 권태신 ![]() ▲권태신 OECD 대사[2006.5.17 임명, 전 재정경제부 제2차관(2005.7.27~2006.5.16)] "대한민국을 개방하지 못해 환장한 사람 같다", "한미FTA 반대하는 사람들에 원한이 사무친 사람 같다". 권태신 전 재정경제부 제2차관을 두고 한 말이다. "스크린쿼터제 유지는 집단이기주의이다" "스크린쿼터제는 FTA와 관계없이 없애버려야한다. 상업성이 높은 영화를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개방으로 피해보는 소수가 시끄럽다" "한미FTA는 국민중 소수만이 반대한다" "교육.의료 분야는 (미국이 요구 안해도) 개방해야" "외국자본에 불이익.차별 절대 없다. 외국 기관투자가들은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 법제도나 부당한 차별대우 등 걸림돌이 있다면 언제라도 한국 정부에 알려달라" "외환자유화 일정을 적극 앞당기겠다" 이 모두가 한 사람, 권태신 전 재경부 차관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권태신 전 재경부 제2차관은 한미FTA 반대파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특히 개방과 관련 '테러' 수준의 폭언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스크린쿼터제가 선진국에서는 유례가 없다는 둥 한미FTA를 국민 중 소수만이 반대한다는 둥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공무원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배려는 고사하고 국민을 상대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독설을 자주 퍼부어대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를 '한미FTA 행동대장', '오사마 빈 FTA'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화술과 스타일이 비슷한 권태신 차관을 총애하면서 OECD 대사로까지 영전시켰다. 청와대는 권 차관을 OECD 대사로 발탁한 사유 중 하나로 '탁월한 언어능력'을 꼽았다. 국민참여정부라는 盧 정권에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한미FTA '시다바리' 주미대사 ![]()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2005.1.16 임명, 윤영관 장관 후임) ![]()
![]() ▲홍석현 전 주미대사(2004.12.17~2005.9.29, 한승주 주미대사 후임으로 주미대사에 임명) ![]() ![]() ▲이태식 주미대사(2005.9.29 임명) ![]()
'FTA 매파'가 장악한 청와대 ![]()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2006.7.3 임명) ![]() '한미FTA 매파' 정문수 ![]() ▲정문수 청와대 경제보좌관(2005.1.24 임명,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장 겸임) 노 대통령은 2004년 8월 청와대 경제보좌관에게 FTA 업무를 총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경제보좌관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장을 겸임한다. 국민경제자문회의 산하에는 FTA를 총괄하는 '대외경제위원회'가 2004년 8월에 설치돼 운영되고 있다. 2005년 1월 24일 FTA 추진 보좌용으로 임명된, 정문수 경제보좌관은 2005년 10월 한미 FTA 추진에 대한 만장일치 합의를 본 대통령 보고 자리에 김현종 본부장, 한덕수 부총리와 동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 시절(2003년)은 바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은행을 매각한 때여서 구설에 휘말려 있기도 하다. ![]() ![]() ▲노대래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2006.2.6 임명,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 겸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정태인 전 비서관이 수행하던 직책이다.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을 겸임하며, 따라서 산하 FTA를 총괄하는 '대외경제위원회' 업무까지 관여하는 실무책임자이다. ![]()
![]() ▲윤대희 청와대 경제수석(2006.5.30 임명, 권오규 후임) ![]()
![]() ▲김대기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2006.6.19 임명) ![]()
한미FTA '후방 지원부대장' 강봉균 ![]()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2006.1.26 임명) 열린우리당의 정책 수장인 강봉균 정책위의장의 경우 대표적인 '한미FTA 적극 찬성론자'이다. 또한 당·청간 실용주의 핵심축이자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친노측근 그룹 이광재 라인 <의정연구센터> 의 고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집권 여당이자 국회 다수파인 열린우리당의 주류가 한미FTA 찬성파들 중심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은 당 체질상 한미FTA 찬성파가 대부분인 제1야당 한나라당과 더불어 한미FTA 체결후 국회 비준 절차가 '통과의례'로 그칠 공산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회가 국민의 대변자로서 한미FTA를 적절하게 견제하거나 제동을 걸만한 의지나 역량이 사실상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한미FTA에 대한 견제는 그만큼 시민사회단체나 국민들의 각성과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 한미FTA '얼굴마담' 한명숙 ![]() ▲한명숙 국무총리(2006.4.20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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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 빠진 김현종·김종훈을 구출하라 | ||||
[한미FTA 역사쓰기7] 4대 선결조건 탄생과 진행과정, 盧수용 의미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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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는 김현종과 노무현의 '비밀작품' | |||
[한미FTA 역사쓰기 4] 김현종의 '감언이설'에 노무현대통령 '감전'되다 | |||
![]() 2004.11월 칠레 산티아고, '한미FTA 실무적 검토 시작' 합의 한·미 양국이 FTA 추진 가능성에 대해 처음 정식으로 의견을 교환한 것은 2004년 11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한·미통상장관회담에서다. 이때 양측은 FTA 추진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실무적 검토를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김현종 무역대표는 특히 미 무역대표부(USTR)의 당시 대표였던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같은 미국의 핵심적인 정책입안자들에게 한미FTA 관련 발표(프리젠테이션)을 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마디로 미국 고위관료들의 귀가 솔깃하도록 '사바사바'를 잘했다는 이야기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004년 한.일 FTA 협상이 농업 분야 시장 개방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지자 거대 경제권인 미국과 FTA를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이후 대통령과 수차례 독대한 끝에 '결심'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미 FTA를 통해 낡은 일본형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개조하는 게 우리의 살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논리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 강행 이유를 성명할 때도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대로, 훗날 한미FTA가 나라를 일제에 넘긴 '제2의 을사늑약'처럼 평가된다면, '제2의 이완용'은 단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몫이 될 것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밝힌 '한미FTA 추진 과정'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FTA 협상 공식 개시선언이 있고난 후 2006년 2월 8일자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미FTA 추진 과정에 대한 의미있는 증언들을 쏟아냈다. 물론 스크린쿼터 문제 등 일부는 나중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지만,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김현종의 은밀한 활약과 노무현-김현종 둘 사이에 있었던 내막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증언도 많았다. 그가 밝힌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4년 11월 칠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로버트 졸릭 당시 USTR 대표가 한.미 FTA에 대한 예비협의를 하자는 제의를 먼저 해왔다. 지난해(2005년) 2월부터 세 차례에 걸친 예비협의가 열렸고, 11월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사실 한.미 FTA에 대한 미국 여론을 좋게 만들기 위해 지난해(2005년) 7월과 9월 두 차례나 미 의회를 방문해 15명의 의원을 잇따라 만났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베트남부터 이라크까지 같이 간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경제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의원들을 따로 찾아가 협조를 구하기도 했고, 산업계 대표들을 만나 한.미 FTA가 양국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구체적인 통계숫자를 가지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측의 반응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 경제권인 미국과의 FTA는 대외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우리에겐 수출과 성장을 위한 '보이지 않는 초고속 인프라(invisible high-speed infra)'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택했던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로는 한계에 달했다. 이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 때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게 개혁과 개방이다. 지난해 가을(2005년 9월)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수행하면서 '선진형 통상국가로 나가기 위해선 한.미 FTA가 필요하다. 협상 과정에서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보고하자 대통령은 이를 경청한 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추진하자'고 말했다. 대통령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가기 위해선 한.미 FTA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가 리더십 차원에서 이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협상도 잘될 것으로 본다. 부처 간 협의에서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스크린 쿼터는 이미 한.미 통상현안으로 드러나 있었던 문제다. 이번에 FTA와 연계해 해결한 것은 아니다. 협상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미국 국내법인 무역촉진법에 따라 FTA 체결권한이 있는 의회가 행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내년 7월 이전에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인수위 시절 노 당선자에게 통상현안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다. 며칠 후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다.}} '제2의 개항'이라 불리며 국가적 명운이 걸린 한미FTA. 그러나 한미FTA는 이처럼 정부의 공식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김현종이라는 비경제인 출신 외교관리와 그 한 명의 감언이설에 귀가 솔깃한 노무현 대통령, 이 둘만의 결심으로 은밀하게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양국 정부의 한미FTA 접근은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실무 논의를 전후로 여러 소문이 나돌았을 때도 말을 아꼈다. 쇠고기 수입 협상, 스크린쿼터 문제 등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관측만 있었을 뿐 협상의 진전 정도는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 그만큼 민감한 현안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한미FTA, 김현종-노무현 둘만의 '은밀한 결심'으로 시작 어쨌든 2004년 말까지도 정부 공식 입장은 한미FTA에 관한한 '여전히 중장기 과제'였다. MBC PD수첩이 입수한 정부 자료 즉 『FTA 추진현황 및 전망』이라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명의의 2004년 12월 16일자 정부 문건(제3차 대외경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말까지만 해도 한미FTA는 분명 우선 순위가 아니었고 중장기 과제 중 하나였다. 실제 문건에 수록된 FTA 우선 순위에서 한미FTA는 중국보다도 후순위인 10위로 '맨 나중'이었다. (1.한.싱가포르 FTA, 2.한.일본 FTA, 3.한.EFTA FTA, 4.한.멕시코 FTA, 5.한.캐나다 FTA,...8.한.중 FTA, 9.한.중.일 FTA, 10.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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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양국은 2005년 2월~4월까지 3차례에 걸쳐 '한미 FTA 사전 실무점검 협의'를 갖고 FTA의 세부계획, 이점, 위험성 등은 물론 한미 양국이 다른 나라들과 체결한 FTA의 목적과 세부조항 등에 대해 검토했다. 한·미 양국은 2005년 2월 3일 서울에서 제1차 한·미 FTA 사전 실무점검협의를 개최했다. 이후 3월 28~29일과 4월 28~29일 워싱턴에서 각각 2, 3차 사전 실무점검협의를 잇달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건태 외교통상부 지역통상국장을 수석대표로 외교통상부·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농림부·정보통신부 관계자들이 번갈아 참여했다. 미국 측에서는 앤드루 퀸 무역대표부(USTR) 한국통상담당 자문관(1차), 애미 잭슨 USTR 한국 담당 부대표보(2차, 3차)를 수석대표로 USTR·국무부·상무부,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1차 회의에서는 FTA 추진 절차 및 효과에 대해 논의했는데, FTA 추진시 발생할 문제점과 이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2차, 3차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뤘다. 양국이 제3국과 과거에 체결한 FTA 협정문을 놓고 협상의 주요 내용인 서비스·투자·금융·통신·전자상거래·경쟁·노동·환경·투명성 등에 관한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또 실무협의를 추가로 수차례 개최한 후 통상장관회담에서 한·미 FTA 협상 출범 문제 등을 재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사전점검회의에서는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양국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청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원론적 수준에 불과했다. 한·미 FTA 협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부터다. 한편 2005년 한 해동안 모두 여섯 차례의 한ㆍ미 통상장관회담을 열어 FTA 협상 출범 가능성을 협의했다. ![]()
(한미FTA 역사 쓰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회원입니다. 한미FTA 관련자료를 더 보실 분들은 참정연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