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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올바른 패배'의 기회도 놓쳤다"

[정치와 사람들② 이대근] 2007 대선, 신보수주의의 '입구'

[프레시안] 2007-11-14 오후 1:57:25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가 노무현 대통령이나 범여권을 비판한 글을 보고 있자면 그 거침없음에 적이 당황하게 된다. 그는 에두르는 법 없이 비판의 과녁을 향해 직진한다.

가령 "대통합이 기여할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이 한 바구니에 담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무덤이다"(2007년 9월 12일자 칼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는 구절, 또는 "정동영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그게 정동영이다…노무현을 기준으로 하면 정동영의 앞날에 어떤 무궁무진한 변화가 펼쳐질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우회전·좌회전, 신정치·구정치, 친노무현·반노무현, 시장주의·반시장주의를 넘나드는 그의 현란한 곡예를 목격하고 있다"(2007년 10월 24일자 칼럼 <정동영, 노무현보다 나은가>)는 대목 같은 게 그렇다.

물론 그의 비판은 지난 5년간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이 쏟아낸 험한 말들과는 입각점이 전혀 다르다. 이는 지난해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돼 진보개혁 진영 안팎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진보개혁의 위기>를 그가 총괄했던 데서도 짐작된다. 혹은 지난 5월 작고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추모하며 쓴 칼럼의 다음 한 토막은 어떤가.

▲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프레시안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2007년 5월 23일 칼럼 <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

이 에디터의 글은 '진보개혁' 진영이 현 정권에 대해 갖는 배반감의 실체와 절망의 깊이를 겉치레 없이 드러낸다. 그는 "한 때 한국사회의 희망이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몰락하게 됐나"를 묻는다. 무능, 원칙의 실종, 정체성의 상실 따위가 열쇠말로 떠오른다. 이 가운데 '무능'은 어쩔 수 없는 능력의 한계로 보아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칙'과 '정체성'은 다르다.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층의 이반과 함께 시작된 '범여권 잔혹사'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 에디터가 '원칙'과 '정체성'을 유독 강조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 범여권은 '산수'에 몰두했다. 1년 넘게 덧셈과 뺄셈을 지루하게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최근 거둔 성적이 61.9%대 23%다. 이 에디터의 표현을 빌면 '바보 산수'다. 범여권은 '바보 산수'의 가속 페달을 밟을 태세다. 통합신당과 민주당은 24일 합당하기로 했다. 범여권의 정치기술자들은 거기서 기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그들의 기대는 실현될까. 가능성은 흐릿하다. 범여권 사람들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인다. 확신도 없는 일은 하는 건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공학적 정치관에 입각해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7개월 동안 범여권의 영악한 공학적 사고는 정치적 실리를 줄기차게 배반했다. 그들의 '산수'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성적만 놓고 보면 엉터리임이 드러났다. 차라리 "범여권은 이미 패배했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패배했다. 그걸 인정하고 이번 선거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우직한 원칙주의자의 처방이 보다 실리적인 충고로 들린다. 그것이 이대근 에디터를 만난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집권해도 신보수주의의 개막"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지난 7월 칼럼에서 "이명박이 되든 통합신당의 빅3가 되든 우리는 민주화 20년 만에 한 시대의 종언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번 대선의 정치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대근 : 민주세력 집권 기간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끝났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정통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시한은 지났다. 이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새로운 개혁의 동력을 갖고 있느냐, 개혁을 실천할 정교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는 시대로 넘어갔다.

구여권 세력은 민주화 20년의 시대 열망을 체현해서 개혁을 실천하는 세력이 더 이상 아니다. 기득권 구조 안에 들어가 있는 기득권의 일부다. 만약 재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보수정당간 경쟁에 의해 권력을 잡는 것일 뿐 다른 운동적 의미는 없다.

그 결과 신보수주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의 차이가 없어졌다. 이명박 캠프의 다수가 운동권 출신이다. 민주화에 일정한 공을 가진 세력이 뉴라이트를 결성했고 그들이 한나라당과 결합했다. 한나라당은 6월항쟁의 토대 위에 선 새로운 보수 세력으로 변해왔다. 신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정당 간 차이라는 게 매우 작아졌고, 그 차이를 작게 한 전반적 흐름은 신보수주의다.

프레시안 : 민주화세력 집권 10년을 사회가 운동세력에게 가졌던 부채의식을 털어버린 시간으로 평가한 게 흥미롭다. 부연해 달라.

이대근 : 과거 정치개혁의 주요 관심사는 '새 피 수혈론'이었다. '새 피'는 대부분 운동권이었다. 운동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킨 데 대한 기대와 보상의 의미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집권까지 하게 됐다. 총리, 장관, 위원회 등 운동권에서 웬만큼 역할 했던 사람들은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열정과 변화의 열망이 국가 운영에 투영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관료체계 속에 들어가서 똑같이 포로가 됐고, 거기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렸다. 과거에 헌신했다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잘 운영할 거라는 기대를 갖기 힘들어졌다.

프레시안 : 민주화세력 집권 10년 동안 그들이 추구해온 민주적 가치가 국정에 반영되는 정도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이대근 : 국가를 장악한다는 것, 국가를 책임지고 맡아서 한다는 것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국가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국가를 장악하는 게 곧 민주화고 개혁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들어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오랫동안 축적된 관료체제를 바꾸기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국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개혁의 종착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 없이 들어가다 보니 국가에 의해 포섭됐고, 기존에 있던 거대한 관료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톱니바퀴의 일부가 됐다. 스스로 도구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 국가를 운영한다는 게 주관적인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로 들린다. 요컨대, 나중에 진보정당이 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국정운영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동일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대근 : 그럴 가능성이 많다. 가령 예산처에 내년 예산안이 만들어져 있다. 진보세력이나 개혁세력이 지금 당장 들어가서 예산 10%라도 바꿔놓을 능력이 있는가. 정부 나름의 우선순위가 100가지 있다고 하면 그 중 50가지라도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는가. 그거 쉽게 바꿀 수 없을 거다. 정부가 수 십 년 해왔던 연속적 사업이 있고 배분의 순서가 있다. 30번 순위인 걸 1순위로 올리고, 1순위에 있는 걸 30번 순서로 맞춰서 예산안을 짤 수 있는가. 우선 그것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본다면 얼마나 개혁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반부패, 잘 먹히지 않을 것"

프레시안 : 경제, 부패, 평화, 이념 가운데 이번 대선의 주된 이슈는 무엇이 될 것이라고 보나. 또 선거 구도는 어떻게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나.

이대근 : 이슈는 경제, 부패, 평화, 이념의 순서가 될 것이다. 삶의 문제를 누가 개선할거냐, 이게 경제 이슈다. 성장주의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제와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경제의 구도다.

그 다음이 부패와 반부패다. 범여권에선 부패세력과 반부패세력의 대결로 이슈를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이 이슈는 경제 이슈만큼 크지 않다. 이명박 후보의 약점이 부패라고 할 때, 보수 세력이 그 대안으로 이회창을 생각한다는 건 이회창을 부패와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부패로 묶는 게 잘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을 전쟁 세력, 범여권을 평화세력으로 대립시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나라당의 정강정책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포용정책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포용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다. 임기 말 정상회담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그 결과에 대한 지지가 낮으면 60%, 많게는 80%까지 나왔다. 이를 반대하는 엄청난 세력이 있다고 고발하는 게 사람들한테 진실로 와 닿지 않는다.

프레시안 :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대근 : 이회창 후보의 등장으로 범여권에 유리하게 됐는가는 불분명하다. 이명박과 정동영의 대결이 아니라, 이명박과 이회창의 대결, 어떤 보수냐의 대결로 갈 수 있다. 두 후보의 지지율이 60%를 넘었다. 노무현과 노무현을 계승하는 세력은 사람들 관심 밖이라는 얘기다. 범여권은 부패 대 반부패, 미래세력 대 과거 세력과 같은 몇 가지 대선 구도를 만들려고 하지만 정권교체 대 정권계승, 과거세력 대 미래세력, 노무현 세력 대 반대세력, 말 잘하는 세력 대 일 잘하는 세력, 국정파탄세력 대 국정안정세력, 무능한 세력 대 유능한 세력, 이렇게 이명박 후보가 내세우는 이슈와 대립구도가 훨씬 더 잘 먹힌다.

"범여권 단일화, 시너지 효과 어렵다"

프레시안 : 범여권 후보들의 단일화 논의가 급류를 타고 있다. 단일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하다고 보는지, 단일화가 이뤄지는 경우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는지 궁금하다.

이대근 : 범여권 문제를 단일화 중심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지금 범여권 지지율이 낮은 게 단일화가 안 되어 있어서라면 단일화의 필요성이 높아지겠지만 그게 아니다. 지금 단일화는 지난 2002년 후보 단일화와 다르다. 군소후보 연합이다. 외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저건 뭐 조무래기들 모아놓은 거네'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정상적으로 단일화를 하려면 노선과 정책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지났다. 이제 시간도 없고 관심 가질 사람도 없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단일화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전환의 계기가 될지는 불확실하다. 자리와 지분을 나누는 밀실야합을 한다든지, 사기도박 하듯이 여론조사 식으로 하면 지푸라기를 잡는 게 아니라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

프레시안 : 세 후보의 지지율을 단순 합산하는 것 외에 단일화에 따른 기대효과가 불분명해 보인다.

이대근 : 장점을 갖고 있는 걸 모아서 시너지를 내자는 게 후보단일화의 의도인데 지금은 단점이 큰 후보 셋을 모으는 거다. 정동영 후보는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상황에 따라 입장이 수시로 바뀐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불복으로 한국정치를 후퇴시킨 장본인이다. 문국현 후보는 정당배경이 없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검증되지 않은 개인이다. 이 불확실하고 단점 있는 셋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프레시안 : 이번에도 비판적 지지론이 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은 '민주노동당 표는 사표'라는 주장을 하며 결국 범여권 후보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유권자 개개인의 권리다. 만약 투표권의 행사라는 게 반드시 당선돼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비판적 지지론은) 맞는 얘기다. 그러나 표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당선만을 위한 게 아니다. 당선자를 견제하라는 의미도 있는 거다. 견제도 왼쪽에서 하느냐, 오른쪽에서 하느냐가 다르다. 이런 것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구성 요인이 되는 거다. 당선되는 것 하나만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가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건 선거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거다.

"盧, 관료체계의 포로 됐다"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에디터는 칼럼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통합신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먼저 현 정권의 공과가 뭔지 짚어 달라.

이대근 : 공이 많지는 않다. 비주류가 집권했다는 것이 제일 크다. 또 권력집중을 완화시켰다. 그리고 돈 없는 선거 등 정치개혁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부 업무처리 혁신은 공이었다고 생각한다.

잘못은 크게 네 가지다. 먼저 개혁진영의 지지기반을 붕괴시키고 해체시켰다. 노 대통령의 구체적인 정책은 진보나 개혁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진보나 개혁이라는 수사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현 정권의 실정이 마치 진보개혁이라는 가치를 추구한 데 따른 것으로 오인됐다. 진보나 개혁이 낡은 가치인 것으로 비춰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전면 도입했다. 한국사회에 완고하게 있는 게 시장주의인데 이걸 확산시켰다. 또 분열과 대립, 갈등을 조장했다. 개혁세력이라도 결집시켜서 새로운 변화의 동력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내부조차 분열시켰다.

끝으로 전혀 준비 없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거대한 관료체계의 포로가 됐다. 정책 관료주권의 시대로 역전시켰다. 관료가 결정하면, 정부가 정부정책으로 만들고, 대통령이 자기노선으로 확정해서 국회로 넘기고, 국회에서 뚝딱 처리해서 시민에게 던져주는 식이었다. 관료들은 기술자이지 정책결정자가 아닌데, 현 정권에서는 관료가 정책결정자가 돼버렸다. 시민이나 국회는 정책의 집행 대상으로 전락했다.

프레시안 : 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을 들라면.

이대근 : 한미 FTA다.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지 않았다. 대통령이 처음부터 준비해온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분열과 파장, 우리사회에 미칠 영향, 이런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검토와 준비 없이 단기간에 대통령의 권력 하나로 밀어붙였다.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편의적으로 '원칙'과 '소신'을 뒤집는 정치인으로 묘사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대근 : 노 대통령이 원칙과 소신의 사나이라고 했던 건 대통령 되기 이전이다. 국가의 운영을 맡기 전까지는 원칙과 소신을 일관되게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운영을 맡는 위치로 들어오면 달라진다. 원칙을 어떻게 실행해야 될지에 대한 면밀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다.

노 대통령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원칙은 말로만 있었을 뿐, 그것을 국가운영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관료들에게 휩쓸리고 그 때 그 때 보이는 문제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까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한 것이다. 원칙과 원칙에 따른 노선, 그리고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모든 행보 하나하나가 착착 준비되고 그것들 간에 보조가 맞춰져 있었을 텐데, 그게 없다 보니까 어젠다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거다. 하나의 어젠다에 매달렸다가 그게 사라지면 새로운 걸 찾아서 매달리고 하는 게 반복돼 왔다.

대통령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좌파건 신자유주의건 모두에게 좋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건데, 그 어젠더들 간에 서로 충돌하는 요인이 있다는 건 보지 못한다. 여기에 노 대통령 특유의 독선이나 오만, 여전한 비주류의식이 더해졌다. 대통령에게 설득과 대화의 수단이 얼마나 많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주류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설득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노 대통령이 관료들에게 휘둘렸다고 했는데, 노 대통령이 국민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은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이대근 : 노 대통령을 토론의 달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토론이라는 건 설득의 기술이다. 노 대통령에겐 그게 전혀 없었다. 말을 위한 말이었다. 자아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서 자기의 고집과 아집을 표현하는 데는 능하지만 자기의 정책을 설득해서 필요성을 인정하게 하고 집행하는 능력은 없었던 거다.

"정동영, 盧 대통령과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열린우리당 해체부터 통합신당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숫자놀음만 하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 같은데, 이른바 범여권의 정체성이 뭐가 돼야 한다고 보나.

이대근 : 그건 내가 답할 바가 아니다. 범여권 스스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얘기를 안 하니까 '너는 누구냐'고 묻게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정의를 해야 하는데 안 했다. 얼마 전부터 선거가 본격화되니까 이런 저런 주장을 하고 있는데, 선거를 앞두고 주장하는 건 사람들이 안 믿는다. 정체성은 진짜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이 믿는 거다. 일시적인 선거전술은 진정성도 없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공과를 계승하겠다고 한다. 그럼 뭐가 공이고 과인지, 노 대통령하고 뭐가 같고 다른지 분명하게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어제(11월 7일) 관훈토론에서 정동영 후보가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설명한 게 있다. '철학과 뿌리는 같다, 그러나 실행방법과 정치방식은 다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철학과 뿌리가 같으면 같은 것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본다. 노 대통령이 하던 것처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정 후보는 실행과 정치방식은 달리 하겠다고 했지만 뭐가 달라질 것인지 막연하다.

프레시안 : 이 에디터가 범여권을 보는 시각은 대단히 신랄하고, 때론 글에서 '분노' 같은 게 느껴진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또 직설적인 화법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비판을 받는 당사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대근 : 자신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범여권으로선 행복한 거다. 지금 범여권은 사람들에게 분노할 대상도 못된다. 잊혀져가고 있고 관심도 없다. 내가 범여권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고 하지만, 일반 시민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바로 끄집어낸다면, 내 비판은 그것의 천만분의 일도 반영하지 못하는 거라고 본다. 그렇게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게 비판을 받아도 정신이 들까 말까한 지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반응? 간접적으로 듣는다. '한숨 쉬더라'는 얘기도 들리고.

프레시안 : 우리 정치에서는 왜 '정체성', '일관성', '원칙' 같은 가치들이 지켜지지 않을까. 어떤 구조적인 요인이 있는 건 아닌가.

이대근 : 정당의 구조가 문제다. 민주당에 있건, 신당에 있건, 문국현 당에 있건, 다 비슷비슷하다. 예를 들어 김한길 같은 사람은 당을 만들고 없애고 해서 여러 군데 다녔는데, 그 당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회의 균열이 정당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정당들이 사회의 다양한 이익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보수정당이 전부를 다 대표하다 보니까 그 안에서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긴들 별 차이가 없다. 이 쪽 저 쪽의 경계선 자체가 없으니까 정체성을 굳이 따질 필요도 없고, 일관성을 따질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레토릭이 된 '진보'
▲ ⓒ프레시안

프레시안 : <경향신문>이 지난해 '진보개혁의 위기'를 기획해서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이 에디터께서 그 기획을 총괄했는데, 기획의 배경이 뭐였나.

이대근 : 직접적 배경은 지난해 5.31 지방선거다. '반(反) 노무현 광풍'이랄까, "노무현이 아니면 누구라도 찍어준다"는 '묻지마 투표'가 나타났다. 당시 한나라당 사정이 어땠나. 공천비리 등 한국 정치의 온갖 나쁜 행태가 다 드러났다. 한나라당에 지방자치를 맡기면 나라가 절단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나라당에 표를 다 몰아줬다.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게 우선이다, 심판의 결과로 부작용과 문제점이 노출되더라도 우선 노 정부를 심판해야 된다"는 '눈 먼 심판론'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어쩌다 이렇게 몰락했나, 단순히 노무현 정부의 몰락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전체가 동반 몰락하는 일이 왜 일어났나, 한 때 한국사회의 희망이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몰락했나를 알아보자는 게 취지였다.

프레시안 : '진보'는 인기 없는 정치상품이 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외려 낡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뭐가 잘못된 건가.

이대근 : 노 대통령이 솔직하게 "나는 보수주의자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하고 있다", "내가 추구했던 진보적 가치는 국가 운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등 이런 것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으면 됐는데, 거듭되는 실정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진보와 개혁의 슬로건을 끌어들였다. 왜? 그 때만 해도 진보는 아직 참신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실정을 "좋은 것을 하려고 한다"는 의도로 덮으려고 '진보' 수사를 동원했다.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 정부가 진보와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오인됐고, 그 결과 '진보=실정'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범여권, 기둥뿌리가 썩었다"

프레시안 : 범여권에 '미래가 있는 패배', '올바른 패배'를 주문했다. 어떤 의미인가.

이대근 : 이번 대선에서 이기려고 단기의 수를 쓰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외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회창 후보의 등장 이후 범한나라당의 지지율이 60% 넘게 나타나고 있다. 이건 한 마디로 "노무현은 절대 안 된다"는 의미다. 5.31 지방선거의 재판이다. 노무현 정부와 함께 했거나, 노무현 정부와 관계가 있거나, 암튼 '노'자 들어가는 건 절대 안 찍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되어 있다.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범여권은) 이미 패배했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패배했다. 그걸 인정하고 이번 선거를 바라봐야 한다. 단기간에 기교를 부리고, 슬로건을 바꾸고, 이미지 개선해서 이겨보려고 한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설혹 이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범여권이 이길 수 있는 환경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올바로 져야 한다. 그러나 올바로 지기 위한 시간도 없고 기회도 놓쳤다. 신당 만드는 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경선 과정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정동영 후보 선출되고 나서도 문제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제대로 하려면 먼저 노무현 정부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실패의 원인이 뭔지 반성하고, 무엇을 고쳐야 되고 무엇을 새로 준비해야 되는지를 제시하고, 그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정당을 만들고, 그 노선과 원칙에 맞는 후보를 선출하고, 그 후보가 노선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올바른 패배의 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무조건 뭉치자'고 몸집불리기를 했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 바뀐 게 없는, 기득권 세력의 이름만 바뀐 정당이 됐다.

이런 상태에서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기둥부터 무너지게 된다. 패배해도 붙잡고 일어날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기둥뿌리가 썩어있기 때문에 붙잡고 일어날 여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대선 끝나고 나면 인책론이 나올 텐데, 총선 앞두고 "위기다, 똘똘 뭉치자"고 하면서 대충 선거 치르려고 하면 또 다른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 (범여권은) '다음을 준비하는 패배'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프레시안 : '진보개혁' 세력에겐 암울한 정세가 예고되고 있다. 총선 이후 정치구도를 어떻게 전망하나.

이대근 : 대선이 끝나고 바로 총선이 이어진다. 총선은 대선 결과의 영향이 남아있을 때 치러진다. 새로 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고, 신당은 대패할 가능성이 많다. 대통령과 의회를 한 당이 장악하게 되면 국정운영의 장악력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는 반면 견제할 세력이 없는 데 따른 다른 문제가 나올 수 있다. 신당이 패배하는 방식은, 그것이 한국 정치에 미칠 파장을 생각하면, 신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좋은 면에서건 나쁜 면에서건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의 덕목'에 대해 전례 없이 풍부한 성찰의 경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정권의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대근 : 이미 합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국정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분열과 대립, 갈등형에서 설득과 대화형으로 전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세대와 이념,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다. 대립과 갈등을 치유해야 하는데, 노 대통령은 외려 대립 상황을 이용했다. 대립과 분열을 조장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실정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비주류이고 힘이 없는 탓이라고, 사회적인 구조 탓이라고 변명했다. 미국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더 하다. 대통령이 올바로만 한다면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수단은 많다. 대통령에겐 특히 '말'이라는 중요한 수단이 있다. 대통령의 '말'은 시민적 동의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촉발시키고 분쟁을 확산시킨 진원지로 잘못 활용됐다.

민노당은 왜 엘리트들만의 정당이 됐나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에디터께서는 영화 '괴물'을 다룬 한 칼럼에서 "삶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사회적 모순에 맞선 일상적인 투쟁만이 자기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패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그 결과는 '일상적인 투쟁'보다는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처지'와 '의식'의 분리가 왜곡된 정치적 선택을 불러온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한 건 뭔가.

이대근 : 일상적인 투쟁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쉽게 말하면 작은 실천이다. 우리는 항상 거창한 것을 말한다. 거대담론에 쉽게 빠진다. 그게 편하다. "정치판 다 갈아엎어야 돼", "대통령 갈아야 돼", "전부 다 고쳐야 돼"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잘못은 안 본다. 작은 실천을 할 필요가 있다. 풀뿌리 운동, 지방자치 공동체 운동 같은 것을 통해 작은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에 대한 성공과 만족이 또 다른 변화의 동력이 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처지'와 '의식'의 분리를 말한다. 강남 사람은 계급적으로 생각하는데, 강북 사람은 자기 계급을 배반한다고 한다. 거창한 얘기에 빠지면 결국 다 똑같은 얘기를 하게 된다. 강남 사람이나 강북 사람이나 똑같이 하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강남 사람이 해야 할 일과 강북 사람이 할 일은 다르지 않나. 이런 차이는 자기 주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가장 서민적이라고 자부하는 민주노동당이 고전하고 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대근 :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세대에 맞는 진보적 가치를 전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가 뭔지 알고는 있나, 이런 생각도 든다. 특히 민족자주파니 하는 세력이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이념과 노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자기가 대표해야 할 노동자, 서민이 무엇을 갖고 고민하며 고통 받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선언적으로 과거 세대의 낡은 가치를 강요하고 주입하려고 한다.

민주노동당이 왜 엘리트의 지지정당이 됐나. 왜 노동자의 지지정당이 안 됐는가. 단순하다. 노동자의 관심사와 이익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영길 후보가 경선에서 지명되고 맨 처음 내세운 구호가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지 않겠나. 당장 내가 잘릴지 모르고, 저임금에 우유 값, 사교육비로 고통 받고 있는데,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만들어주겠다니 이게 무슨 서민들을 위한 건가. 기층과 괴리된 운동권 일부의 '쑥덕공론'의 결과가 아닌가. 이번 선거에서 민노당이 고전하는 건, 물론 진보정당이 처한 열악한 조건 탓도 있겠지만, 서민들이 가장 아파하고 관심 갖는 것을 내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하다. //정제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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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엥란트


조봉암 진보당 학살은 헌정사상 대사건
<조봉암의 진보당>은 오늘의 양극화 사회를 막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
 
김영국
조선일보·경향·민노당 한목소리, '조봉암 명예회복 서둘러라'

"조봉암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정부는 재심 청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등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조선일보 2007.9.29일자 사설 '조봉암(曺奉岩)'의 결론)

"우리는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진보적 정치인에게 씌어진 불명예가 비록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겨진 데 대해 진심으로 환영한다. 아울러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대로 국가는 손해배상 등을 통해 죽산의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경향신문 2007.9.29일자 사설)

"1959년 조봉암 선생의 사형이 집행된 지 4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정부가 그 권고사항을 즉각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따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많은 괴로움이 있었겠지만 아버님의 길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던 유가족께도 민주노동당의 기쁨을 함께 전해 드린다."(민주노동당 2007.9.28일자 대변인 논평)

한 '진보 정치인'의 명예회복을 놓고 반공·보수의 아성인 조선일보와 진보·개혁신문의 대표 주자인 경향신문, 그리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좌우합작'하여 한목소리로 고무·찬양하는 경사스런(?) 일이 오늘(29일) 벌어졌다.

"조선일보가 왠 일로...", "도대체 우리 역사 속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무엇이길래..." 모처럼 벌어진 스스러운 광경에 뜨악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죽산(竹山) 조봉암과 진보당은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통일 방안으로는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여 무려 216만여 표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반공보수·독재자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한 명실상부한 '진보적 정치세력'이었다.

특히 조봉암의 216만여 표는 당시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조봉암의 좌파 성향을 문제 삼아 야권 연합 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는 등 비열한 정치행보를 보임으로써 무려 185만여 표에 이르는 무효표가 발생한 가운데 거둔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컷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은 대선 결과에 위기 의식을 느낀 독재자 이승만으로부터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무고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쓴 채 처형되고 진보당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에 대해 지난 9월 27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과와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총체적인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조봉암 진보당>의 타살 그 후 '비정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고려 후기 묘청의 서경 천도 좌절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자주파와 김부식의 사대파와의 싸움에서 김부식 파의 승리와 묘청의 좌절을 두고 '한국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고 했다. 즉, 단재는 사대파의 승리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단재의 이 비판은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판정에 앉아 있는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맨 앞이 이승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     © 민주화운동기념자료
조봉암의 진보당에 대한 사법살인 이후 한국 사회는 친미사대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에 주류를 차지했고, 야당 또한 개량적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돼왔다. 그 결과 오늘날 약육강식의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민중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진보당 타살 이후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사 또한 일제-친일파, 미제국주의-친미파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탄압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찾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2007년 오늘도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 보수 독점 체제라는 또 다른 거센 도전을 만나 진보좌파의 가치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고, 진보 운동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가히 조봉암 진보당의 학살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일대 사건이요, 현대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헌정사상 최초이자 가장 유력했던 '진보정당'이 그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반공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대사건이었다.

<조봉암 진보당>의 가치와 대안들, '2007년에 살아 숨쉬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마저 '은사죽음'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에 내세웠던 '진보좌파'적 기치(旗幟)와 대안들이 마치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심각한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오늘의 서민대중들을 구하기 위한 '선각자의 예언'과도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조봉암 진보당의 좌절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5년 12월 22일 발표한 창당 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을 살펴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확연해진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하고, <강령>으로 1.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 등을 내세웠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진보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조봉암의 진보당 노선이 중증 상태인 2007년의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볼수록 오늘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대안을 미리 마련코자 한 '선각자의 예지(銳智)'마저 느껴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6년 당시처럼 야당의 주도세력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정글 법칙'만이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비정한 사회'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기나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죽산 조봉암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신문인 <대자보>도 거듭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진보·개혁 정당이 이 땅에 견실(堅實)하게 자라나 서민대중들이 극심한 양극화의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아래는 지난 2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정문 전문'이다. / 편집위원

◆ ‘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실규명 결정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국가변란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결정요지

Ⅰ. 사건의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1952. 8. 5.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80여만 표,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16여만 표라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 후 진보당이 1956. 11. 10. 창당되어 조봉암이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시경은 남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진보당의 정강정책, 특히 평화통일론 노선의 이적성에 대한 내사를 벌인 다음 1958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 13.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공보부장관은 2. 25.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육군 특무대는 그해 2. 8.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 8. 및 2. 17. 2차례에 걸쳐 기소1)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 간첩 혐의로 4. 3. 및 4. 8. 2차례에 걸쳐 기소2)를 하였다.

※ 1) 국가보안법 제1조 정부를 참칭하거나 변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 또는 그 결사 또는 집단에 있어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간부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하여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4.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전항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항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살인, 방화 또는 건조물, 운수, 통신기관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형법 제98조 (간첩) ①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심인 서울형사지방법원(이하 서울지법이라 한다)은 양 사건을 병합, 심리한 다음 1958. 7. 2.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 각각 징역 5년을 선고3)하였다.

※ 3)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이나 전2조의 목적을 지원할 목적으로서 그 목적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이라 한다)은 1958. 10. 25. 양 사건에 대하여 모두 유죄를 인정, 조봉암, 양이섭에게 각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징역 2년 내지 3년을 선고하였다.

3심인 대법원은 1959. 2. 27.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각 사형을 확정하였다. 다만,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은 1959. 7. 30.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재심결정을 하기 전날 양이섭에 대한 사형을,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각 집행하였다.

신청인 조호정(조봉암의 장녀)은 2006. 7. 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라 한다)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Ⅱ. 조사결과

1. 사건의 배경


1950년대 분단 및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 반공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 정치의 폭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전쟁 직전에 실시된 5·30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큰 중도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정당정치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세력은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 움직임의 구체적 양태는 대체로 세 갈래의 정당조직 활동으로 나타난바4), 그 한 갈래에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있었다.

※ 4) 하나는 국회 내에서 다수파인 공화민정회 소속 의원 중심으로 신당조직 작업이 추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신당조직 성명 발표로 원외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 당시 비서였던 이영근을 ‘신당준비사무국’의 책임자로 하여 여러 세력을 포섭해 갔다.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었고 조직이나 표방논리에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창당 작업은 불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신당 조직의 기반이었던 농민회의가 무력화되고, 1951. 12. 초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이 체포된 데 이어 관계자 50여 명이 육군특무대에 연행되고 9명이 기소되는 ‘대남간첩단 사건’ 5)때문이었다.

※ 5) 당시 이영근 등 3명은 사형, 3명은 무기,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5~10년의 중형이 구형되었으나, 부산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은 이듬해 8·5정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2. 8. 4.자 일간신문 광고에 실린 조봉암 후보의 제1 정강은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개표 결과 유효득표 7,020,684표 가운데 797,504표를 얻어 이승만(5,238,769표)에 이어 2위가 되었다.

조봉암은 이 선거를 통해 확인, 규합된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신당 구상도 실패로 끝났다. 그의 대통령선거 사무차장이었던 김성주가 1953. 6. 25. 헌병총사령부에 연행되어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던 중인 1954. 4. 16. 처형되었다.

조봉암은 1954. 5. 20. 민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자신의 정치활동 기본노선을 밝히는 「우리의 당면과업」을 집필함으로써 정치설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5·20선거에서 출마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였다. 인천에서는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도중에 서류를 탈취당하고, 부산에서도 등록 실패하고, 등록 마감일에 겨우 서울 서대문구에 제출하였으나 추천인 서류 미비를 이유로 반려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조봉암은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10월 이후 다시 제3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1. 27.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이 이승만이 주도한 ‘사사오입’ 주장으로 번복 통과되자, 야당 의원 61명이 나서 호헌동지회를 구성, 야당 연합전선적 성격을 가진 거대 신당 결집에 나선 것이다.

범야신당 추진은 1955. 1. 중순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조봉암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보수파로 갈린 탓이었다.6) 그러다가 2. 22. 조봉암이 “공산당의 독재는 물론 관권을 바탕으로 한 독점자본주의적 부패분자의 독재도 어디까지나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자, 이때부터 조봉암은 물론 그의 신당가입을 찬동하는 자는 모두 “사회주의자” “제3세력” “’공산당”이라는 선전공세가 강화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 6) 시일이 지나면서 전자는 민주대동파 또는 대동단결파로, 후자는 자유민주파 또는 자유민주주의론파로 불린다.

1955. 3. 11. 범야신당을 추진하던 야당18인위원회도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가 분열되었고, 4월 이후 신당은 ‘순수한’ 반공세력의 집결을 강조하는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추진되어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신당’이 조직될 수 있는 조건도 만들어졌다.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당결성 추진의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1955. 12. 22. 진보당 발기취지문 및 강령초안7) 발표가 있었고, 한 달 후 무렵인 1956. 1. 17.부터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무태세를 갖추어 갔다. 8)

※ 7) <발기취지문>에서 “민주책임정치,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표방, <강령>으로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의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를 수립이 내세웠다.

8) 그러나 진보당의 발당은 정치자금 부족, 테러에 대한 두려움, 지방당부 조직 미비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였다.

1956. 3.부터는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3. 5. 자유당은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3. 28.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하였으며, 이날 선거일자는 5. 15.로, 후보등록 마감은 4. 7.로 확정되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는 시기상 명실상부한 정당을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 31. 전국추진위원회 대표 113명과 추진위원 200명이 모여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어 당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고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서상일을 천거(서상일의 고사로 박기출로 바뀜)하였다.

5․15 정부통령선거는 민의대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3. 5. 이승만이 자유당 대통령후보 지명 후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회, 대한노총, 부인회, 어민회, 在京 비구승과 불도 등 각종 단체 구성원들은 물론, 심지어 우마(牛馬) 차부들과 남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군중이 동원되어 매일같이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시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재출마 수락을 요구하는 연판운동이 바뀌었고, 결국 이승만은 3. 23. 재출마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 29.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부 야당 의원들은 야권 연합전선 형성방안을 논의하였던바, 조봉암은 “충분히 고려할 점이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민주당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4. 6∼7.경부터 야권 연합전선운동이 구체화되었고, 4. 20.부터는 헌정동우회를 중심으로 신익희, 조봉암 등의 ‘정상회담’ 논의가 있는 등 5월 초까지 야권 연합전선 형성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5. 새벽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차 타고 가던 호남선 열차에서 돌연 사망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은 야권 연합운동을 접고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를 유도하였다.

자유, 민주, 진보 3당의 경쟁이 팽팽하였던 이 선거에서는 각 당의 선거구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바,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에 맞서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를 내놓았고, 진보당은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길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거 기간 동안에도 어김없이 테러, 유인물 강탈, 연행 및 경고, 고문 등 노골적인 선거방해가 잇달았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5. 11.경부터 잠적하였다가, 선거 결과가 확정될 무렵인 5. 17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정책대결의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29%인 2,163,808표를 얻었다. 위와 같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었다.9) 당시 무효표가 1,856,818표에 이르는바, 이는 대체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로 보고 있다.

※ 9) 당시 이승만은 5,046,437표를 얻어 유효득표수의 6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일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지각색의 선거방해와 엄청난 개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은 반공국가로서 체면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1960년 3・15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썼다.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진보세력의 두드러진 약진에 힘입어 조봉암은 다시금 신당 창당에 전력하였고, 1956. 11. 10.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의 심한 테러와 탄압이 보여주듯이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격심해졌고, 급기야 1958. 5. 2.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1. 13.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2. 25.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결국 진보당은 5. 2. 총선에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다.10)

※ 10) 민의원 선거결과는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이었다.


2.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과정

가. 서울시경찰국의 수사

북한 공작원 등을 대상으로 진보당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울시경은 1958. 1. 10. 민주정부를 변란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 평화통일 공작에 호응, 친소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게 된다.

서울시경은 1958. 1. 11.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 12.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 13.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11)

조봉암 체포 직후 1958. 1. 14. 열린 제4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2)
※ 11) 1958. 1. 14. 서울지구파견특무대의 진보당원 검거조사 상황보고
12) 제4회 국무회의(1958. 1. 14.) 비망록

“7.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한 건”
- 내무: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 중인 바,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남북협상의 평화통일을 지향할 금춘(今春)선거에 전기 노선을 지지하는 자를 다수당선 시키기 위하여 5열과 접선 잠동하고 있는 것이며 전기 정당이 불법단체냐 여부에 대하여는 조사결과에 의하여 판정될 것이라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4. 열린 제11회 국무회의에서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3)
※ 13) 제11회 국무회의(1958. 2. 4.) 비망록

- 재무: 금반 진보당 사건을 보니 국내 기업가 중에 그들에게 자금 융통 하여준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융자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업을 못하게 만들어 주라고 하니 세도가 당당한 자들인지라 그에 대한 부작용이 많을 듯하나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각오를 보고
- 대통령: 비율빈의 막사이사이는 미국 돈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선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공산당을 돕는 것은 물론 문제도 안 된다.

미국 국무부의 1958. 1. 13. 자 및 2. 3.자 문서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가 예상되어 왔던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은 표면상으로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1월 11일 이후로 실종되었다. ..... 이 체포는 행정부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5월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1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이 지도자들의 체포는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 당들이 올해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좌절하게 만들려는 정부활동의 첫 단계이다”(1958. 1. 13.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no.520)

“기밀정보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본 검거는 1949년, 1952년 정부가 야당에 대해 행했던 방법으로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로는 간첩과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 공산주의자들의 진보당 연락 시도, ‘평화통일’ 지지 등이다. 주한미대사관은 ‘추정되는 증거들은 기껏 해봐야 빈약한 것들’이었다며 그 혐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한국민들의 여론을 직접 수집 보고하였다. ....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211. Parson(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가 Johnes(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에게 보낸 문서, 1958. 2. 3. 워싱턴〕.

나. 육군 특무부대의 수사

이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시경이 진보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특무부대는 1957. 12. “양이섭이 대남간첩 김00과 함께 입북하여 대남공작 지령을 받고 계속 13차에 걸쳐서 적지에 왕래하고 군사정치, 경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작금조로 물품과 마약 등을 수령하여 다수인과 접촉하고 있으며 조봉암과 접선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육군 HID공작원의 미행내사정보 문건을 이첩받아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무부대는 1958. 1. 초순경부터 양이섭의 집 주변에 잠복하여 장성팔14)이 양이섭의 집에 찾아오자 연행하여 조사한 후, 장성팔로 하여금 양이섭을 출두하도록 하여 2. 8. 양이섭을 연행,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한 조사를 벌이게 된다.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서 조사를 진행한 후 2. 25. 국방경비법15) 제33조 위반으로 서울지검을 통해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3. 8.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였다.16)

※ 14) 1심 공판에서 장성팔은 양이섭과 같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해방 전 고향 강계에서 철물기계 사업을 하는 양이섭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
15) 1948, 7. 5. 군정법률 0호, 국방경비법 내지 해안경비법은 폐지되면서 실체법으로는 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군형법이, 절차법으로는 동일자 법률 제1004호로 군법회의법이 제정, 공포되어 대체되었음
16) 특무대 1957년 제6호 사건표지

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기소

1) 진보당 관련

1958. 1. 24. 서울지검은 서울시경으로부터 진보당 관련 사건을 송치 받았다. 서울지검은 송치전인 1. 21. 서울시경에서 조봉암, 이동화, 윤길중 등 진보당 간부 10명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25. 정태영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1. 28 김병휘, 2. 3. 김기철 등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2. 8. 조봉암 등 10명을 기소하고, 2. 17. 검찰은 다시 구체적으로 범죄사실을 기재한 공소장을 제출하였다.

조봉암 사건에 대하여 3. 11.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17)
※ 17) 제23회 국무회의(1958. 3. 11.) 비망록

“2. 검찰의 선거대책에 관한 건”
- 법무: 선거를 앞두고 신선거법 운용에 관한 것을 연구협의 하기 위하여 근일 검찰관회의를 열을 예정이며 각 청에는 선거관계를 전담할 검사를 정하여 놓도록 하라고 한다는 보고
- 대통령: 현재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
- 법무: 현재 공판 중에 있으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
- 대통령: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이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한 것 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각부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발표하는 예가 있다. 발표한 것이 외부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 할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라.
- 공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더니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으며 민혁당 등록 신청이 제출되었으나 지금 등록을 하여주면 진보당원 일부가 합류할 것이 예상됨으로 선거 전에는 등록을 받지 않을 방침이라...고 근황을 보고

3. 18. 열린 제25회 국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봉암 사건”이라는 안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
※18) 제25회 국무회의(1958. 3. 18.) 비망록

“7. 조봉암 사건”
- 법무: 목하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 대통령: 이 사건의 일반 여론은 어떠한가?
- 법무: 국민도 이 사건 처리엔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고 보고

2) 간첩행위 관련

그 후 3. 17. 서울지검은 육군 특무부대로부터 양이섭, 조봉암의 간첩 사건을 송치받아 양이섭에 대하여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3. 19. 제2회, 3. 21. 제3회, 3. 25. 제4회, 3. 28.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를 각각 작성하고, 조봉암에 대하여 간첩 혐의로 4. 2.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4. 3. 서울지법에 양이섭을 간첩죄로 기소하고, 4. 8. 조봉암을 같은 내용의 간첩죄로 추가 기소하였다.

서울지법은 위 진보당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다가 5. 15. 제9회 공판에서 위 간첩죄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게 된다. 그 후 6. 13. 서울지검은 4. 8. 기소된 바 있는 불법무기소지와 관련하여 추가공소장을 제출하였으며,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에서 이를 심리하였다.

3. 재판 과정

가. 1심 재판

1심 재판은 서울지법에서 재판장인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 배기호)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1심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 양이섭 각 징역 5년
- 김정학, 이동현 각 징역 1년, 전세룡 징역 10월, 이정자 징역 6월(단 재판 확정일로부터 김정학에 대하여는 3년간, 전세룡에 대하여는 2년간, 이정자에 대하여는 1년간 집행유예)

- 본 건 공소사실 중 조봉암에 대한 제1의 (1)의 ① 및 ② 기재의 각 간첩의 점, 동 제1의 (3) 기재의 간첩방조의 점, 동 제1의 (1)의 ③ 내지 ⑤, 동 제1의 (2) 및 (4) 기재의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무죄

-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조규택 조규희 신창균 김기철 김병휘 이동화 이명하 최희규 안경득 박준길 권대복 정태영 이상두 임신환 각 무죄
- 전세룡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및 제17의 (18) 기재의 증거인멸의 점, 김정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무죄
- 이동현에 대한 증거인멸 및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1심 판결 선고 직후인 7. 4. 열린 제59회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라는 안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였다. 19)
※ 19) 제59회 국무회의(1958. 7. 4.) 비망록

“2. 조봉암 사건에 관하여”
- 법무: “법원은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원의 판결에 있어서 평화통일론은 문제로 하지 않고 따라서 진보당이 불법단체라는 것도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진보당이 행정소송을 하면은 가처분이 있을지 모르니 진보당을 불법으로 처분한 공보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건 판결에 대하여 검사는 즉시 공소하였으나 제1심에 비하여 고법·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보고와 견해
- 공보: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하야 할 것이니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은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수있나 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하겠다”고 그간 내무, 법무가 말하는 것만 믿고 지금껏 해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1심 판결 직후 법원판결에 불만을 품은 200여 명의 반공청년이 법원 건물에서 시위를 하였다.20)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조봉암의 변호인 김춘봉은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반공청년단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으며, 이들은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다”, 여명회 조직부장 김용기(金用基)는 “1심 판결 선고 후 재판정에 침입한 반공청년단은 자유당의 직속 조직이었다”고 각 진술하였다.
※ 20) 한국일보 1958. 7. 6일자

나. 2심 재판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재판장 김용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최보현, 조규대)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2심 판결결과는 다음과 같다.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진보당 결성 기소에 대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또는 징역 3년 선고
- 조봉암이 박정호와 회합 등 국가변란이라는 실행사항을 협의하였다는 공소사실 3개항에 대하여는 무죄

2심 판결은 피고인 조봉암 등의 각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증거를 열거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기재 등을 완결하여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유죄판결을 하면서 그 이유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2심 판결 선고 직후인 10. 28.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21)
※ 21) 제98회 국무회의(1958. 10. 28.) 비망록

「1.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 법무: (진보당 사건 공판에 관하여 보고)
- 대통령: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하는 하문에
- 법무: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이 없어서 안 되고 법관징계위원회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 만료자를 그 때에 정리하는 도리 밖에 없는바, 금일 임기 만료된 법관 중에 대법원이 제청하지 않은 자가 있는 외에 몇 명은 부적당한 자가 있어서 연임을 명하기 전에 조사를 하고 있으며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이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다”...고 보고
- 대통령: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갖고도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

2심 판결에 대한 11. 12.자 미국 국무부 문서에 의하면, "서울 항소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지방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이전에 무죄판결을 받은 진보당 인사들의 석방을 뒤집었다. 비록 양이섭이 원심에서 조봉암을 북한정권과 연결했던 자신의 증언을 철회했지만, 항소법원은 자신이 청취한 증언보다는 양이섭의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을 수용하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두 법원이 기소한 사실은 동일했다“, ”지방법원은 전달된 정보(진보당 당원 명부)가 하여간 공공연한 지식이고 중요성이 없다면서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무죄로 판결했지만, 상고 법원은 그 판결을 기각했다“, ”재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지방법원에서 청취된 증언보다 피고에게 훨씬 더 유리한 증언이 제출되었어도 재심판결이 처음에 내려진 판결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장관이 10. 28. 정규적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진보당사건 재심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 대항해 두 번 출마했던 사람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에 만족했지만, 지방법원과 항소법원 판사 간의 (판결의) 큰 불일치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는 등으로 2심 판결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22)
※ 22) 1958. 11. 12. 서울(Weil)발 국무부 수신전문

다. 대법원

1959. 2. 27. 3심인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김세완, 대법관 김갑수 허진 백한성 변옥주)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
-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파기자판으로 사형선고
-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혐의에 대하여 무죄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 대법관 김갑수 배정현 고재호 변옥주)은 7. 30.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재심결정 전날인 7. 29.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이 있은 다음날인 7. 31.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며칠 후인 8. 5. 열린 제76회 국무회의에서 법무부장관의 보고와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3)
※ 23) 제76회 국무회의(1959. 8. 5.) 비망록

“2. 조봉암 사형 집행에 관하여”
- 법무 : “법절차를 다 밝고 집행할 것이므로 사회에 하등 물의가 없다”... 고 보고
- 대통령: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곤란한 것이며 법보다도 중대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 되었다니 더 말할 것 없다”

『1958년-1969년 미국 대외관계』(제18권 일본, 한국.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1994. 461~462 쪽)는 ‘226. Editorial Note’ 항에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 지도자들의 재판이 1958년 봄에 시작되었다. 6. 13. 검찰은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다른 22명의 피고인에게는 징역형을 구형하였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1958).

6. 20. 서울로 발송한 전문799에서 국무부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를 제공하고 “중립적 국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전 세계의 다른 자유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성숙을 이루는데 기여했던 여하한 성공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대사관은 “즉각 미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그 원인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관료들로 하여금 조봉암이 사형당하거나 추방당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19. 서울발신 항공우편공문 G-97, 국무부 Central Files, 795B.00/6-22058)

6. 23. 당시 미대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국회 대변인 이기붕을 찾아갔고, 이기붕은 사형을 막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6. 23. 서울발신 전문915).

7. 2. 조봉암과 다른 4명의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되었다(7. 2. 서울발신 전문 7; ibid., 795B.00/7-258). 조봉암은 5년형이 선고되었으나, 제2심에서 10. 25. 판결을 바꾸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다른 19명의 진보당원들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하였다(10. 27. 서울발신 전문189; ibid, 795B.00/10-2758).

다시 국무부는 미대사에게 서울의 적절한 정부요인에게 접근하여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경고를 하도록 지시했다(10. 29. 서울수신 신문 170; ibid). 미대사는 이기붕 대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동의했으며 대법원이 제2심의 판결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했다(11. 4. 서울발신 전문206; ibid., 795B.00/11-458).

그러나 대법원은 1959. 2. 27. 사형을 선고했고, 7. 31.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무부의 지시를 받아 미대사는 8. 3. 외무부장관을 만났고, 미 국무부에서 표현한대로 조봉암을 처형한 것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는 미국의 유감을 전달했다(7. 31. 서울수신 전문82 및 8. 4. 서울발신 전문88; ibid., 각 795B.00/7-3159 및 795b.00/8-459)

4. 수사과정의 위법성

가. 불법감금 여부

특무대는 1958. 2. 8. 양이섭을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채 조사를 진행하다가 2. 25.에야 서울지법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다가 3. 8.에야 피의사건으로 제10헌병중대에 구속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은 기간도 불법감금에 해당하므로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여관에서 조사를 한 기간은 불법감금에 해당하며 형법 제124조가 정한 불법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24)
※ 24)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 불법감금) ①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 또는 감금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불법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조사결과 위법성이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기망, 가혹행위 여부

특무대 수사관이 조사 중에 수사관이 조봉암이 역적이어서 사형시켜야 하므로 악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수사검사가 조봉암이 나쁘다며 특무대에서의 자백을 유지하면 곧 석방시켜 줄 듯 암시를 하여 검찰 및 1심 공판에서 자백을 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이섭이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고문 때문이라며 자살을 기도한 사실, 육군 특무대가 양이섭을 여관 등에 1개월여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한 사실, 양이섭이 1심 공판에서 강박에 의한 것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소극적 태도로 대답을 한 사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2심 공판에 이르러서 그 자백을 번복하며 구체적으로 진술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은 인정된다.

다. 특무부대의 수사권 여부

헌병과국군정보기관의수사한계에관한법률25) 제1조는 “헌병은 군인, 군속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관련 있는 일반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수사할 수 있으되 긴급구속은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헌병에게 군사 또는 군속의 범죄에 대하여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할 수는 있었다. 또한 동법 제2조는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을 수사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있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헌병과 동일한 권한이 있다”, 육군특무부대령26) 제1조는 “육군의 방첩에 관한 사항과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그 소관에 속하는 범죄수사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육군 특무부대를 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 25) 1949. 12. 19. 자 법률 제80호
26) 1957. 11. 21. 대통령령 제1316호로 제정

육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하여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는바, 위 조항은 형법 제98조의 간첩죄와 달리 조선경비대 내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진영 등지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행동한 군인, 군속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동법 제1조 피적용자 범위를 보면, 조선경비대 소속 장교 내지 병사, 사관후보생도, 조선경비대에 복무 또는 훈련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해안경비대원,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조선경비대 군속, 군법회의판결에 의하여 복무중인 자 등이었고, 재판관할도 군법회의에 있었다. 국방경비법은 해안경비법과 함께 군인, 군속에 관한 범죄를 규정하여 처벌하는 재판절차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사건 특무대 수사 당시 조봉암은 진보당 위원장이었고, 양이섭은 HID 공작활동을 하였으나 군인이나 군속의 신분은 아니었다. 특무부대 및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1심 및 2심 공판조서는 양이섭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봉암과 양이섭에 대한 간첩 혐의는 군사에 관한 범죄가 아니며, 군 주둔지 등에서 간첩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방경비법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였다. 국방경비법 위반은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군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여야 하며, 군법회의에 기소하여 재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는 조봉암과 양이섭을 국방경비법 제33조 위반으로 형사입건하였으나 구속영장은 서울지검 검사에게 청구하였고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송치하였다.

따라서 육군 특무대 소속 수사관이 수사권도 없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행한 것은 당시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27)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으나, 그 불법행위가 확인된 만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 27)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5. 공소사실 검토 결과

가. 진보당 창당 관련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하에 피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결국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여 운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하였다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한 위법이 있는 것이다.


나. 간첩행위 관련

이 사건 간첩죄 관련 양이섭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양이섭의 자백에 의존하고 있다. 조봉암은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양이섭은 특무대 및 검찰에 이어 1심 공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나, 2심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였다.

먼저, 양이섭의 특무대에서의 자백은 불법감금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임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검찰 및 1심 공판에서의 자백도 장기간의 불법감금 상태에서의 기망과 회유에 의한 강박상태가 이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양이섭은 2심 공판에서 수사기관 및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였다. 따라서 번복된 자백만으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을 벗어날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상 양이섭의 1심 자백만으로 이 사건 조봉암의 간첩행위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양이섭의 번복된 자백에 의존하여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한 위법이 있다.

6.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 탄압 여부

서울시경이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진술을 받아 근거 없이 조봉암 등을 체포하여 진보당에 대해 수사에 나선 사실, 그 체포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매도하고 선거에서의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반영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금지하고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는 미국 국무부의 정보보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관의 증언, 수사권이 없는 사안에 대해 육군 특무부대까지 수사에 나선 사실,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기소한 후 재차 기소한 사실, 확정판결 전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여 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그 해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당은 후보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된 사실,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체포에 대해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시한 사실, 2심 사형선고 직후에는 1심 판결에 대해 ”말도 안 되며 그 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사실, 양이섭이 자백을 한 상태에서 1심이 징역 5년을 선고하였으나 그 자백을 번복한 2심이 극형인 사형을 선고한 사실,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2심으로 환송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스스로 재판하여 신속하게 사형을 확정시킨 사실, 재심기각결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미 대사가 외무부장관을 만나 조봉암에 대한 처형이 갑작스럽고 대단히 의문스러운 결정이라고 유감을 전달한 사실 등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Ⅲ. 결론

○ 이 사건은 조봉암이 1956. 5. 15.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득표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1956. 11. 10. 진보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 1958. 5. 민의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시경과 육군 특무대가 수사에 나서 대법원에서 조봉암을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창당 및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육군 특무대는 양이섭을 1958. 2. 8.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 8.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무대 수사관이 조봉암, 양이섭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 각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행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특무대 수사과정에서 양이섭에게 조봉암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압과 회유가 있었으며, 협조할 경우 집행유예로 석방될 것이라는 기망과 회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인정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를 하였고, 양이섭의 임의성 없는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한 것은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서울고법 및 대법원이 조봉암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서울고법 공판에서 번복한 양이섭의 자백만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국가변란 및 간첩죄로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

○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국가는 육군 특무대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감금 등 인권침해에 대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한 기소 및 유죄판결로 국민의 생명권을 박탈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사형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끝)



☞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 전문'(진실화해위원회, 2007.9.27) 바로가기

☞ [조봉암 생전의 모습과 장녀 조호정 씨 인터뷰 동영상] "국가가 사과하라"…죽산 조봉암 선생은 누구(SBS, 2007.9.27)

☞ [조선일보 사설] 조봉암(曺奉岩)(조선일보, 2007.9.29일자)

☞ [경향신문 사설] ‘조봉암 신원(伸寃)’과 사법부(경향신문, 2007.9.29일자)

☞ [민주노동당 논평]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민주노동당.뉴스와이어.파란, 2007.9.28)

☞ 유족들, 반세기전 기각된 ‘조봉암 사건’ 재심 청구키로 - 당시 판·검사중 2명 생존, "판결 잘못됐다", "노코멘트"(한겨레신문, 2007.9.28)

* 글쓴이는 '참정연' 회원입니다.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2007/09/29 [22:48] ⓒ 대자보

☞ 해당기사 전문 보기


☞ 참정연 게시판 해당 글 보기(2007.9.29)
:
Posted by 엥란트


■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 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list.html?code=990339

ㅁ 그 칼럼에는 선술집 술맛이 감돈다 
정치칼럼도 '전국노래자랑'이 될 수 있다
[이대근 칼럼의 발견]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2008.10.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799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7999

ㅁ '냉정'과 '열정' 사이
[최재천 서평]이대근 칼럼집 '와이키키브라더스를 위하여'(2009.2.2)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90202134056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231642415&code=900308

ㅁ 경향·동아 21년 만에 뒤바뀐 운명 
경향 시민 격려·지지 봇물 ... 동아, 6월항쟁 ‘그 정신 어디갔나’(2008.6.9)==>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17701


[세명대 저널리즘 특강]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정부실패와 언론실패, 그 끈질긴 악순환의 고리
정당 행세하는 한국 언론
노무현 정부의 실패와 언론의 실패
이명박 정부, 성공할 것인가
결국 문제는 '신뢰 회복'
정치부 기자는 '의심'할 수 있어야(2008.10.16)==>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016170747&Section=

ㅁ "범여권, '올바른 패배'의 기회도 놓쳤다"
[정치와 사람들② 이대근] 2007 대선, 신보수주의의 '입구'(2007.11.1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71114103048&Section=

[이대근 주요 칼럼]

[이대근 칼럼] 와이키키 브라더스(2006.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8301823191&code=990339

[이대근 칼럼] ‘호모루덴스’ 한나라당-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보다 실패한 정권의 재집권이 더 나을 이유는 별로 없다(2006.9.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271813021&code=990339

[이대근 칼럼] 김지하, 황석영, 손학규 (2007.3.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3281824141&code=990339

[이대근 칼럼]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2007.5.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5231823251&code=990339

[이대근칼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대통합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키스가 될 것(2007.9.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121813341&code=990339

[이대근칼럼] 민노당은 진보적인가(2007.11.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211919281&code=990339

[이대근칼럼] 지금 버리고 조직하고 발언하라(2008.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21809141&code=990339

[이대근칼럼] 제3의 길, 자주파, 그리고 가짜들 (2008.1.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61853531&code=990339

[이대근칼럼] 총선 투표 안한 54%가 말하는 것(2008.4.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161809095&code=990339

[이대근칼럼] 이명박의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2008.8.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251807575&code=990339

[이대근 칼럼] 질주하는 18%(2008.8.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062227145&code=990339

[이대근 칼럼] 전국 노래자랑(2008.8.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01825075&code=990339

[이대근 칼럼] 불안한 세상, 평온한 민주당(2008.9.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9031807285&code=990339

[이대근칼럼] 한나라, 열린우리당의 길을 가고 있다(2009.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54505&code=990339
 
[이대근 칼럼] 용산 테러리스트-국가와 시민간 사회계약은 깨져(2009.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41829005&code=990339

[이대근칼럼] 해머도 타협도 민주당을 살릴 수 없다-민주당 깨져야 현 정치질서 깨져(2009.3.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824325&code=990339



■ 한겨레신문 여현호 칼럼 보기 ==>
http://www.hani.co.kr/arti/SERIES/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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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무덤 ... 대통합신당은 대실패연합"
[진단과 대응] <한겨레>와 <경향> 지면으로 통합신당 성토, 해체 촉구
 
취재부
이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내년 4월 총선에선 양당 체제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거대 한나라당에 몇 십 석의 고만고만한 당 한두 개, 그리고 나머지 군소 정당들의 구도가 될 수 있다. 이제는 그런 상황에도 대비해야 할 것 같다."(한겨레 여현호 '최악의 시나리오')

"대통합민주신당은 무덤이다. 문국현이든 누구든 더 이상 이 죽음의 집으로 초대해서는 안된다. 명백한 것은 대통합신당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키스'가 될 것이란 점뿐이다."(경향 이대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


종이신문 중 비교적 개혁·진보 매체로 평가받는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의 최근 기명 칼럼 내용이다.

인터넷 매체와 달리 종이신문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해 비판의 수위나 강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두 칼럼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그만큼 현재 범여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심각하고, 전망 또한 암울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1일자 한겨레신문의 여현호 논설위원은 <최악의 시나리오>란 제목의 칼럼에서 "대통합신당이 경선이라는 형식, 통합이라는 모양새, 쟁점을 바꿀 수도 있는 변수 등 정치공학적 요소들은 다 갖췄지만, 정작 국민이 보고 싶은 '내용'이 없다."면서 "왜 집권해야 하는지, 집권하면 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왜 다시 표를 찍으러 투표소에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잠재적 지지층이 듣지 못한 탓에 지지층이 모이지 않는다."고 범여권의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러면서 여 위원은 "정작 걱정되는 것은 그 다음, 다음이다."며 "대통합신당이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해 결국 대선에서 진다면, 당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내년 4월 총선에선 양당 체제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거대 한나라당에 몇 십 석의 고만고만한 당 한두 개, 그리고 나머지 군소 정당들의 구도가 될 수 있다."며 "이제는 그런 상황에도 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범여권으로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여 위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정치권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이같은 우려가 팽배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통합신당의 죽음 위에 새 정치세력 탄생을 기다릴 수 밖에"

오늘(13)자 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의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이 에디터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최근 보여준 당명 약칭 사용 불허 판결, 경선 과정에서 유령 선거인단 모집 등 각종 난맥상에 대해 "아무리 못난 놈이라 해도 어느 한 군데 예쁜 구석은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곱게 봐줄 구석이 하나도 없다. 들여다 볼수록 밉상이요, 시간이 갈수록 가관이다. 정말 이러기도 쉽지 않다."며 힐난했다.

이 에디터는 또 "이 당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정체성 상실이다."며 "이 당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뭉쳤는지도 모른다."고 꼬집었다. "이 '99%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정부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계승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공이고 과인지조차 구별할 줄 모른다."고 조롱했다.

아울러 현재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예비후보들에 대해서도 "손학규와 정동영, 그리고 노무현의 아들 딸들인 이해찬·유시민·한명숙은 여당과 야당에서 실패한 이들이다. 이 실패 세력이 똘똘 뭉쳐 질서있게 구축한 것이 대통합민주신당, 아니 '대실패 연합'이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이 실패 세력이 뭉치는 순간 대선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었는데, 그것은 '이명박이 과연 집권할 것인가'라는 반신반의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며, 정권교체가 된다면 그것은 대통합민주신당의 공이 될 것이다."고 힐난했다.

이 에디터는 대통합민주신당과 단절된, 새로운 정치세력 탄생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에디터는 "열린우리당이 흔적 없이 사라져 그들의 과거와 뒤엉킬 계기가 없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제 그런 기회는 없을 것 같다."며 "대통합신당의 죽음 위에 새로운 개혁 정치 탄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런 전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낡고 실패한 가짜 개혁·기득권 운동세력을 완전 해체시켜야 한다."며 "대통합신당의 기회주의자들이 나중에 또 반성합네 하고 새 숙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에디터는 "그런 점에서 대통합신당이 기여할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며 "다행히 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이 한 바구니에 담기게 되었다."고 말해, 대통합민주신당을 실패한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버리기 좋게 모아놓은 '쓰레기통(?)'에 비유했다.

이 에디터는 "대통합민주신당은 무덤이다."고 규정한 뒤, "문국현이든 누구든 더 이상 이 죽음의 집으로 초대해서는 안된다."며 "명백한 것은 대통합신당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키스'가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이 에디터는 마지막으로 이 죽음의 잔치에서 살아 날 수 있는 길은 "자기 원칙과 노선, 정책을 견지하며 외롭더라도 꼿꼿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며 "그런 비장함이 죽은 열정을 살려 태풍을 몰고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래가 있는 패배'는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한마디로 질 때 지더라도 '올바른 패배'를 해야 다음 기회라도 살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죽음의 키스' 신청한 문국현과 '절교' 선언한 임종인·김성호

이 두 칼럼에서 공통된 인식은 "현재의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으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 누가, 어떻게 이 위기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이다. 두 칼럼에서 그런 해법 제시는 구체적으로 없었다.

다만 이대근 에디터는 "대통합민주신당의 기회주의자들을 비롯해 낡고 실패한 가짜 개혁·기득권 운동세력을 완전 해체시키고, 그 바탕위에서 새로운 개혁 정치 탄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새 정치세력이) 자기 원칙과 노선, 정책을 견지하며 '외롭더라도 꼿꼿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누구든 대통합민주신당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키스가 될 것이다."고 경고 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에디터의 주장대로라면, 지난 5일 "자신과 범여권 후보가 단일화 가능성이 99%이며, 연정도 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힌 문국현 후보는 이미 대통합민주신당과 '뜨거운 키스'를 신청해 놓은 상태가 된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가 언제든지 달려와서 입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에디터의 경고대로 '죽음의 키스'가 될 것인가.

반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서민과 중산층을 제대로 대변할, 책임 있는 새 민주개혁 정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한, 임종인 의원(무소속)과 김성호 전 의원은 "범여권은 물론, 그런 문국현 후보와도 연대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임·김 두 의원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결성한 <새정치 개혁연합>은 "정체도 불분명하고, 오늘의 대실패에 책임져야 할 세력들만 모인 대통합민주신당은 하루빨리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임·김 두 의원은 이대근 에디터의 주장들과 상당 부분 일치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문국현 후보 측이나 임종인·김성호의 <새정치 개혁연합>이나 궁극적으로는 붕괴된 개혁·진보 세력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문국현 측과 임종인·김성호 측은 극명하게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이 앞으로 대중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느냐, 누가 더 믿음이 가느냐, 누가 더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실천해가느냐에 따라 새로운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부각될 수도,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범여권에 관심 끊은 사람이라면, 민주노동당과 함께 이들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만하지 않을까. 마땅히 따로 놀 데도 없다면...

☞ 최악의 시나리오/여현호(한겨레신문) 전문 보기

☞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이대근(경향신문)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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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5: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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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엥란트